23화(10,045자)

가까워질수록 아픈 사람들

쇼펜하우어의 삶 · 네오

1831년 8월, 프로이센의 수도 베를린에 콜레라가 다가오고 있었다. 동쪽에서 번져 온 이 전염병은 하루 만에 사람을 쓰러뜨렸고, 여름 내내 신문은 국경 너머의 사망자 수를 실었다. 마흔세 살의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는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열한 해 가까이 이 도시에서 대학 강사로 이름을 올려 두었지만 강의실에는 학생이 거의 오지 않았고, 이 도시에 그를 붙잡는 것은 이제 한 사람뿐이었다.[주 23-01]

그 사람은 극장 이름 메동으로 무대에 서던 합창단원 카롤리네 리히터, 그가 이다라고 부르던 여자였다. 그녀에게는 그가 이탈리아에 있던 1823년에 태어난 아들이 있었고, 그는 1825년에 돌아와 그 일을 용서하지 못한 채 관계를 다시 이었다.[주 23-02]

이다는 오래전부터 약속해 왔다. 그가 베를린을 떠날 때가 오면 따라가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때가 갑자기 왔다.[주 23-03]

*

떠나기 며칠 전, 그는 슈스터가세 17번지 그녀의 집에서 조건을 말했다.

“같이 가자. 네 생활은 내가 맡겠다.”

“구스타프는요?”

“그 아이는 여기 둔다. 오페라 무용 학교에 넣어 두지 않았느냐? 거기서 배우고 거기서 자라면 된다.”

이다는 의자 등받이에 걸어 둔 수놓던 천을 내려놓았다. 그녀는 극장 일이 줄어든 뒤로 구슬 자수와 바느질로 돈을 보탰고, 방에는 풀 먹인 천 냄새가 늘 배어 있었다.

“그 애는 이제 여덟 살이에요. 내가 늙으면 기댈 데가 그 애밖에 없어요. 그 애를 무용 학교에 넣은 것도 그래서예요. 나중에 우리 둘을 먹여 살리라고.”

“나는 너를 데려가겠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아이까지 맡겠다는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의 아이라는 말을 당신은 그 애를 볼 때마다 하죠. 그 애 얼굴에서 당신이 없던 세 해를 보니까.”

“그 세 해를 만든 것은 내가 아니다.”

“알아요. 그러니 나를 미워해도 돼요. 그런데 그 애는 그 세 해에 아무것도 한 게 없어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논리는 틀리지 않았다. 그는 이다를 원했고, 이다의 생활을 책임지겠다고 했다. 믿을 수 없는 시간이 남긴 아이까지 품으라는 것은 그에게 그 시간을 없던 일로 하라는 요구였다. 이다의 논리도 틀리지 않았다. 그녀에게 아들은 지난 잘못의 흔적이 아니라 앞으로 살아갈 밑천이었다. 아들을 두고 떠나면 그녀는 한 남자의 호의 하나에 남은 삶을 모두 걸어야 했다. 그 남자는 자기를 끝까지 다 믿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원한 것은 가까이 있는 이다였다. 그러나 그 가까움에는 그가 견딜 수 없는 것이 함께 따라왔다.

그는 이 셈을 오래전부터 해 왔다. 이탈리아로 떠나던 1822년 9월, 서른네 살의 그는 수첩에 이렇게 적었다. 결혼하는 것이 나은가 하지 않는 것이 나은가 하는 물음은 많은 경우, 사랑 때문에 하는 걱정이 나은가 먹고살 걱정이 나은가 하는 물음으로 돌아간다고 했다.[주 23-02] 그에게 가까움은 언제나 무언가를 떠안는 일이었다. 한 사람을 곁에 두면 그 사람의 병과 빚과 식구까지 함께 들어왔다. 그는 그 무게를 미리 재고, 들 수 있는 만큼만 들겠다고 했다. 그것은 차가운 계산이었지만 정직한 계산이기도 했다. 그는 지킬 수 없는 약속을 하지 않았다. 이다는 반대로 약속부터 했고, 그 약속을 지킬 수 있을지는 그다음에 따졌다.

*

8월 25일, 그는 혼자 베를린을 떠났다.[주 23-04]

엿새 뒤인 8월 31일, 이다는 자기 집 창밖에서 콜레라가 처음 터지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하루를 앓고 땀을 흘려 일어났지만 뒤이어 네 주 동안 열병에 시달렸다. 열여덟 살 사촌이 죽었고, 같은 거리에서 많은 사람이 죽었다. 그사이 그가 마인강 가의 상업 도시 프랑크푸르트에서 부친 편지 두 통은 그녀의 손에 닿지 않았다.[주 23-05]

그가 떠나며 이다를 부탁한 사람은 베를린의 친구 하인리히 폰 로우초였다. 9월 27일, 로우초는 그녀가 따라가지 않을 것 같다고 써 보냈다.

“그녀가 이제 와서 뒤따라간다면 처음부터 함께 떠난 것보다 열 배는 더 큰일을 하는 셈입니다. 게다가 당신의 조건 붙은 너그러움은, 그런 것을 너그러움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녀에게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지 못합니다. 당신이 그 지나친 의심만 내려놓을 수 있었다면 당신의 이다는 지금도 당신 곁에 앉아 있을 겁니다.”[주 23-06]

이다는 이듬해 2월에 다시 결심했다가 다시 망설였다. 2월 21일, 그녀는 이렇게 썼다. 당신은 나더러 구스타프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하는데, 그러면 이미 아버지 없이 서 있는 내 아이를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가장 좋은 것은 당신이 베를린으로 오는 것이라고 덧붙였다.[주 23-07] 그는 오지 않았고, 이다는 가지 않았다. 그해 7월 그는 라인강 가의 도시 만하임으로 옮겼다. 가을에 로우초는 다시 썼다. 아이를 돌보지 않아도 되도록 정리했다고 당신은 말하지만, 누구도 의무와 마음 사이에 세워 두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주 23-08]

*

외롭지만 가까워지는 것도 두렵다면 어느 거리가 적당한가? 적당한 거리는 한 사람이 혼자 정하지 못한다. 두 사람이 서로 찔려 가며 찾아낸다.

스무 해 뒤인 1851년, 예순세 살의 쇼펜하우어는 두 권짜리 글 모음 『소품과 부록』을 냈다. 그 제2권은 번호를 붙인 짧은 절들로 이어지고, 맨 마지막 장인 「비유와 우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추운 겨울날, 고슴도치 한 무리가 얼어 죽지 않으려고 서로 바짝 붙어 섰다. 서로의 몸에서 나는 온기를 빌리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곧 서로의 가시에 찔렸고, 그래서 다시 떨어졌다. 몸을 데우고 싶은 마음이 그들을 다시 가까이 모으면 찔리는 아픔이 또 되풀이되었다. 그렇게 두 괴로움 사이를 이리저리 오가다가, 그들은 마침내 서로 가장 잘 견딜 수 있는 알맞은 거리를 찾아냈다.”[주 23-09]

그는 이 우화를 사람에게 옮긴다. 사람들을 서로에게 모는 것은 어울리고 싶은 욕구다. 이 욕구는 자기 안이 비어 있고 하루하루가 단조로운 데서 생긴다. 그러나 저마다 가진 거슬리는 버릇과 견딜 수 없는 흠이 그들을 다시 밀어낸다. 그래서 사람들이 끝내 찾아내는 중간의 거리는 예의와 점잖은 몸가짐이다. 그 거리를 지키지 않는 사람에게 영국 사람들은 ‘거리를 지키라’고 외친다. 이 거리에서는 서로 데워 주고 싶은 욕구가 반쯤밖에 채워지지 않는다. 대신 가시에 찔리지는 않는다.[주 23-09]

우화가 말하는 것은 차례로 셋이다. 첫째, 가까이 가려는 것과 떨어지려는 것은 둘 다 진짜 필요다. 추위도 아픔이고 가시도 아픔이다. 둘째, 그 두 필요는 한 번에 맞춰지지 않는다. 고슴도치들은 몇 번이고 다가갔다가 물러난 뒤에야 거리를 찾았다. 셋째, 찾아낸 거리는 완전한 해결이 아니다. 온기는 모자라고, 아픔은 덜하다. 그는 알맞은 거리를 행복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견딜 만한 상태라고 불렀다.

같은 해 같은 책 제1권의 「인생의 지혜를 위한 아포리즘」에서 그는 같은 생각을 다른 그림으로 적는다. 사람들이 어울리는 것은 큰 추위 속에서 몸을 맞대어 데우는 것처럼 마음을 서로 데우는 일이라고 하고, 그 이야기를 고슴도치 우화에 따로 적어 두었다고 밝힌다.[주 23-10] 그리고 다섯째 장의 고독에 관한 긴 대목을 이렇게 맺는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일은 불에 견줄 수 있다. 슬기로운 사람은 알맞게 떨어진 자리에서 그 불을 쬔다. 어리석은 사람은 손을 불 속에 넣고, 데고 나서는 고독의 추위 속으로 달아나 불이 뜨겁다고 한탄한다.”[주 23-11]

두 그림은 비슷해 보이지만 다르다. 고슴도치의 거리는 서로 주고받는 거리다. 내가 찔리는 만큼 상대도 찔리고, 둘이 함께 물러나야 거리가 생긴다. 불의 거리는 한쪽만 재는 거리다. 불은 데지 않고, 다가갈지 물러날지는 불을 쬐는 사람이 혼자 정한다. 그가 1831년에 쓴 것은 불의 거리였다. 그는 자기가 어디까지 다가갈지를 정했고, 이다는 그 자리에 오든지 오지 않든지 고를 수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우화의 전제는 날카롭다. 그는 사람들이 서로 찾는 까닭을 자기 안의 빈자리와 단조로움에서 찾았다. 그렇다면 이다를 원한 그의 마음도 빈자리에서 나온 것인가?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로우초는 1831년 10월에 이렇게 썼다. 그녀가 당신에게 얼마나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인지 나는 안다고 했다.[주 23-05] 그를 가장 가까이에서 본 친구는 그가 혼자서 넉넉한 사람이라고 보지 않았다.

불은 데우기도 하고 태우기도 한다. 그는 불을 끄라고 하지 않았다. 불에 손을 넣지 말라고 했다. 가까워질수록 아픈 까닭은 상대가 나빠서가 아니다. 온기를 주는 것과 아픔을 주는 것은 같은 몸에서 나온다. 이다의 집에는 이다의 온기와 함께 그가 견딜 수 없는 세 해가 있었다. 그는 온기만 떼어 가지려 했다.

*

그러나 우화에는 빠진 것이 있다. 고슴도치들은 서로 똑같은 가시를 가졌고, 거리를 찾는 데 드는 값도 똑같이 치른다. 1831년의 베를린은 그렇지 않았다. 거리를 정하는 조건을 내건 쪽은 생활비를 맡겠다고 한 그였고, 그 조건을 받으면 아들을 내놓아야 하는 쪽은 이다였다. 알맞은 거리는 두 사람이 찔려 가며 찾는 것이었지만, 실제로 그 값을 더 크게 치른 쪽은 가진 것이 적은 사람이었다. 로우초가 ‘조건 붙은 너그러움’이라고 부른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우화의 맺음말도 그를 비켜 가지 않는다. 그는 안에 따뜻함을 많이 가진 사람은 남에게 괴로움을 주지도 받지도 않으려고 차라리 사람들 사이에서 빠진다고 썼다.[주 23-09] 이 문장은 홀로 남은 사람을 높여 주는 말로 읽힌다. 그러나 1831년에 그가 빠져나온 것은 차가운 사교 모임이 아니었다. 그를 따라가겠다고 약속했던 한 사람이었다.

다섯 해 뒤 그는 어릴 적 프랑스 항구 르아브르에서 함께 지낸 친구에게 편지를 쓰며 이다를 두고 이렇게 적었다. 그녀가 약속을 어겨 몹시 괴로웠지만 시간이 조금씩 제 일을 했다고, 그래도 그녀는 자기에게 진심으로 마음을 준 단 한 사람이었다고 했다.[주 23-12]

그리고 1859년 2월, 일흔 살의 그는 유언장에 덧붙임 조항을 넣었다. 베를린의 카롤리네 리히터, 일명 메동에게 프로이센 탈러로 오천 탈러를 남긴다고 적었다. 그는 그 돈이 그녀 한 사람에게만 가고, 그녀가 먼저 죽으면 사라지며, 그녀의 아들이나 다른 상속인에게는 넘어가지 않는다고 못 박았다. 그 아들은 이제 베를린 극장의 무용수였고, 그달에 결혼할 참이었다.[주 23-13]

스물여덟 해가 지나도 그가 찾아낸 거리는 같았다. 그녀에게는 다가가고, 그녀의 아들 앞에서는 멈추었다. 알맞은 거리를 찾았다는 것과 그 거리가 옳았다는 것은 같은 말인가? 고슴도치들은 서로의 가시를 견딜 만한 자리에서 멈추었다. 그는 상대가 끝내 내려놓을 수 없는 것 앞에서 멈추었다.

후주

[주 23-01] 1831년 콜레라 때문에 베를린을 떠난 것은 쇼펜하우어 협회 연표 1825~1831년 항목과 프랑크푸르트 대학 도서관 연표 1831년 항목. 1820년부터 베를린 대학에서 강의를 시도했으나 듣는 사람이 적었다는 것은 두 연표의 1820년·1825년 항목. 신문이 국경 너머의 사망자 수를 실었다는 것은 서술자의 배경 묘사로, 자료로 확인하지 않았다.

[주 23-02] 카롤리네 리히터(1802~1882), 극장 이름 메동(메다우), 어려서부터 쓴 이름 이다, 왕립 극장 합창단원이었다는 것, 1821년 무렵 관계가 시작되었다는 것, 1822년 5월 두 번째 이탈리아 여행을 떠난 지 열 달 뒤인 1823년 3월 27일 아들 카를 루트비히 구스타프가 태어났다는 것, 1825년 3월 돌아온 그가 그 일을 용서하지 않으면서도 관계를 다시 이었다는 것은 아르투어 휘브셔, 「쇼펜하우어의 베를린 연인 — 알려지지 않은 편지들」, 『쇼펜하우어 연감』 1974년호(권 번호 재확인), 39~43쪽. 「돌아왔을 때 당신이 …의 품에 있는 것을 보았다」는 그의 뒷날 편지 구절도 같은 글 43쪽이 전한다(본문에는 인용하지 않았다). 1822년 9월의 수첩 기록(Die Frage, ob es besser sei zu heiraten oder nicht, läßt sich in sehr vielen Fällen darauf zurückführen, ob Liebessorgen besser sind als Nahrungssorgen)은 같은 글 43쪽이 휘브셔판 『유고』 제3권 149쪽에서 인용한 것을 취지로 옮겼다.

[주 23-03] 그녀가 여러 해 전부터 그가 베를린을 떠날 때 따라가겠다고 약속했고, 때가 갑자기 왔을 때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은 그가 1836년 12월 10일 안팀 그레구아르 드 블레지메르에게 쓴 프랑스어 편지의 내용이다. 휘브셔 같은 글 39쪽에서 재인용.

[주 23-04] 1831년 8월 25일 떠난 것, 그가 그녀를 돌보는 일은 맡겠지만 1830년부터 오페라 무용 학교에 다니던 아들은 맡지 않으려 했다는 것, 그 아들이 그녀의 노후 대책이었다는 것은 휘브셔 같은 글 44쪽. 이다가 1831년 주소록에 「슈스터가세 17번지」로 올라 있고 구슬 자수와 바느질로 수입을 보탰다는 것은 같은 쪽. 떠나기 며칠 전 그녀의 집에서 나눈 대화와 대사, 풀 먹인 천 냄새는 소설의 창작이다. 두 사람이 내세운 까닭은 휘브셔가 소개한 편지들(로우초의 1831~1832년 편지, 이다의 1832년 편지)에 기록된 각자의 관점을 대사로 옮겼다. 대화의 날짜와 장소는 자료에 없어 떠나기 며칠 전 그녀의 집에 두었다.

[주 23-05] 1831년 8월 31일 창밖에서 첫 발병을 보고 하루를 앓았다는 것, 네 주 동안의 열병, 열여덟 살 사촌의 죽음, 그의 편지 두 통이 늦게 닿았다는 것은 로우초의 1831년 10월 29일 편지와 이다의 1831년 10월 29일 편지. 휘브셔 같은 글 45~46쪽. 그 무렵 그의 프랑크푸르트 주소가 슐레징어가세 32번지였다는 것은 이다의 편지 겉봉(같은 글 46쪽). 그녀가 그에게 얼마나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인지 안다는 로우초의 말은 1831년 10월 13일 편지(ich weiß wie unentbehrlich sie Ihnen ist)의 취지를 옮긴 것이다. 같은 글 45쪽.

[주 23-06] 하인리히 폰 로우초가 1831년 9월 27일 쇼펜하우어에게 쓴 편지. 휘브셔 같은 글 45쪽. 한국어 의역. 원문은 Sie thäte dadurch 10 mal mehr als wenn sie gleich mitgegangen wäre … und dann ist Ihre bedingte Großmuth (wenn so etwas Großmuth heißen kann) auch nicht geeignet ihr Lust zu machen. … Wenn Sie doch das zu große Mißtrauen ablegen könnten: ich glaube Ihre Ida säße auch jetzt bei Ihnen. 로우초가 그녀에게 돈을 건넬 일을 맡았다는 것도 같은 쪽.

[주 23-07] 이다가 1832년 2월 21일 쓴 편지. 휘브셔 같은 글 48쪽. 취지를 옮긴 것이다. 원문의 해당 구절은 Du Schreibst mir nie für Gustav etwas zu thun … mein Kind … was schon Vaterlos dasteht … daß liebste wer mir Du kämst nach Berlin. 2월 2일 편지에서 2월 중순에 떠나겠다고 한 것도 같은 글 47~48쪽.

[주 23-08] 1832년 7월부터 이듬해 6월까지 만하임에 산 것은 쇼펜하우어 협회 연표 1832~1833년 항목. 로우초의 1832년 10월 11일 편지(Sie schreiben wol, daß es abgemacht wäre, für das Kind nicht sorgen zu müssen … daß man Niemand zwischen Pflicht und Neigung stellen soll)의 취지를 옮겼다. 휘브셔 같은 글 50쪽. 로우초가 같은 해 8월 5일 길에서 그녀를 만났을 때, 아들과 완전히 갈라서라고 하지만 않았어도 따라갔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는 것도 같은 쪽이다.

[주 23-09] 쇼펜하우어, 『소품과 부록』 제2권 제31장 「비유, 우화, 이야기」. 1891년 브로크하우스판(프라우엔슈테트 편)에서는 §413이며, 초판과 휘브셔판의 번호로는 §396이다. 인쇄 689쪽, PDF 699쪽. 스캔으로 원문을 대조했다. 첫 인용(Eine Gesellschaft Stachelschweine drängte sich, an einem kalten Wintertage … in der sie es am besten aushalten konnten)은 한국어 의역. 이어지는 사람에 대한 적용(So treibt das Bedürfniß der Gesellschaft … keep your distance! … der Stich der Stacheln nicht empfunden)과 맺음말(Wer jedoch viel eigene, innere Wärme hat bleibt lieber aus der Gesellschaft weg, um keine Beschwerde zu geben, noch zu empfangen)은 취지를 옮긴 것이다. 장 제목 「비유와 우화」는 본문에서 줄여 불렀다.

[주 23-10] 쇼펜하우어, 「인생의 지혜를 위한 아포리즘」 제5장 준칙 9번 가운데 Übrigens kann man die Geselligkeit auch betrachten als ein geistiges Erwärmen der Menschen an einander … 로 시작하는 문단. 1913년 올레판 전자 전사, 프로젝트 구텐베르크 47406번. 취지를 옮긴 것이다. 그가 「이 책 제2권 마지막 장」에 우화를 실었다고 밝힌 것은 원문의 im 2. Bande dieses Werkes … im letzten Kapitel.

[주 23-11] 같은 준칙 9번의 끝 문장. 프로젝트 구텐베르크 47406번. 한국어 의역. 원문은 In diesem Sinne kann man auch die Gesellschaft einem Feuer vergleichen, an welchem der Kluge sich in gehöriger Entfernung wärmt, nicht aber hineingreift, wie der Tor, der dann, nachdem er sich verbrannt hat, in die Kälte der Einsamkeit flieht und jammert, daß das Feuer brennt.

[주 23-12] 1836년 12월 10일 그레구아르에게 쓴 편지. 휘브셔 같은 글 39쪽에서 재인용. 한국어 의역. 원문은 Cela m'a fait beaucoup de peine: mais le tems peu à peu a fait son effet: pourtant elle êtoit le seul être, qui m'étoit vraiment attaché: les circonstances l'ont vaincue. 그레구아르가 르아브르 시절 머문 집안의 아들이라는 것은 [주 1-01]과 휘브셔 같은 쪽(Jugendfreund).

[주 23-13] 1859년 2월 4일의 유언 덧붙임 조항 제4항. 휘브셔 같은 글 40쪽이 전문을 싣는다. 5000탈러, 「카롤리네 리히터, 일명 메동」, 그 돈이 그녀 한 사람에게만 가고 아들이나 다른 상속인에게 넘어가지 않는다는 것은 조항의 취지를 옮긴 것이다. 아들이 발레 무용수이자 극장의 첫째 무용 교사였고 1859년 3월 17일 결혼했다는 것은 같은 글 40쪽과 51쪽. 쇼펜하우어 협회 연표 1852년 항목도 1859년 2월 4일의 덧붙임 조항을 적는다. 1893년 셰만이 펴낸 서신집의 유언장 전문에는 이 조항이 빠져 있다(휘브셔 같은 쪽).

사료에 근거한 것은 1831년 콜레라와 베를린 출발 날짜, 카롤리네 리히터의 이름과 처지, 아들의 출생과 무용 학교, 따라가겠다는 약속과 그것이 지켜지지 않은 일, 그가 그녀만 돌보고 아들은 맡지 않으려 했다는 조건, 그녀의 콜레라와 늦게 닿은 편지, 로우초와 이다의 편지 내용, 만하임 이주, 1836년 편지, 1859년 유언 덧붙임 조항이다. 떠나기 전 그녀의 집에서 나눈 대화와 대사, 방 안의 묘사는 소설의 창작이다. 1851년의 고슴도치 우화와 「아포리즘」은 1831년의 그가 한 생각이 아니라 스무 해 뒤의 저작으로 비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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