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10,513자)
사랑받고 싶은 마음의 정체
쇼펜하우어의 삶 · 네오
1822년 5월, 서른네 살의 쇼펜하우어는 두 번째 이탈리아 여행을 떠났다. 베를린에는 한 여자가 남았다. 왕립 극장 합창단에서 노래하던 스무 살의 카롤리네 리히터였다. 서류에는 그 이름으로 올랐지만 그는 그녀를 집안에서 어려서부터 불리던 이름대로 이다라고 불렀다. 두 사람은 그가 베를린에 온 이듬해쯤부터 남몰래 만나고 있었다.[주 22-01]
여행은 길어졌다. 그는 피렌체와 로마를 거쳐 뮌헨에서 거의 한 해를 앓았고, 온천에서 몸을 추스른 뒤 드레스덴에 머물렀다.[주 22-02] 그 세 해 동안 두 사람 사이에 편지가 오간 흔적은 남아 있지 않다. 그래도 그는 그녀가 기다리리라 믿었다. 쇼펜하우어 연구자 휘브셔는 두 사람 사이에 정절의 약속 같은 것이 있었던 것으로 본다.[주 22-03]
그동안 이다의 삶은 그녀대로 흘러갔다. 1823년 3월 27일 그녀는 아들을 낳았고, 아이는 카를 루트비히 구스타프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가 떠난 지 열 달 뒤였고, 아버지는 기록에 없다. 그해 9월 그녀는 심한 가슴 통증으로 두 달 쉬게 해 달라고 극장에 청했지만, 극장은 쉬게 해 주지 않고 몸을 아끼라는 말만 했다. 1825년 1월부터는 연습과 공연에 빠진다는 불평이 거듭 나왔고, 그녀는 여러 차례 무거운 벌금을 물었다.[주 22-04]
*
1825년 봄, 서른일곱 살의 그는 베를린으로 돌아왔다.[주 22-05] 그가 돌아와 본 것은 두 살 난 아이와, 그가 떠난 뒤에 생긴 그 아이를 기르는 여자였다. 그는 뒷날 그녀에게 쓴 편지에서 그 귀국을 떠올리며, 돌아와 보니 그녀가 다른 사람의 품에 있었다고 적었다.[주 22-06]
“세 해였어. 나는 당신이 기다릴 거라고 믿었어.”
“세 해 동안 나는 극장에 나가야 했어요. 아파도 쉬지 못했고, 빠지면 벌금을 물었어요. 그 사이에 아이가 생겼어요. 그 일을 없던 일로 해 달라고는 하지 않을게요.”
“나는 그 일을 잊을 수 없어.”
“잊어 달라는 게 아니에요. 지금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봐 달라는 거예요.”
그의 말에는 근거가 있었다. 그는 약속을 믿고 떠났고, 돌아와서 그 약속이 깨진 것을 보았다. 믿음이 깨진 자리에 의심이 들어서는 것은 그의 성격 탓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말에도 근거가 있었다. 그가 남쪽에서 그림과 하늘을 보며 앓고 쉬는 동안, 그녀는 편지 한 장의 기록도 없는 시간을 혼자 아이를 낳고 벌금을 물며 견뎠다. 그가 바란 것은 자기가 떠날 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기다리는 여자였고, 그녀가 산 것은 그 기다림으로는 버틸 수 없는 생활이었다.
그는 그 일을 용서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그해 관계를 다시 이었다. 그 뒤로 두 사람 사이에는 의심이 늘 함께 있었다.[주 22-06]
그 가을에도 그녀의 처지는 나아지지 않았다. 9월에 합창 지휘자가 그녀의 고집을 탓했고, 극장 총감독은 해고하겠다고 경고했다. 9월 26일과 10월 6일 그녀는 벌금을 면해 주거나 나누어 내게 해 달라고 두 번 편지를 썼고, 두 번 다 거절당했다. 이듬해 1월 의사는 그녀가 늑막염을 앓는다고 진단했다. 1826년 9월 22일 그녀는 스스로 합창단을 그만두겠다고 청했고, 극장은 그날로 받아들였다.[주 22-07]
그 무렵 그는 결혼을 생각했다. 그의 유언 집행자이자 전기 작가 그비너는 그가 강사 자격을 얻은 직후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 아주 가까이 왔고, 베를린에 돌아온 뒤에도 다시 결혼을 생각했다고 전한다. 그비너는 그가 끝내 혼자 남은 까닭을 무엇보다 자기 재산으로 한 가족을 걱정 없이 먹여 살릴 수 없으리라는 두려움에서 찾았다. 그리고 그가 마음을 깊이 나눌 사람이 그리울 때면 함께 살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아프게 느낀다고 말하곤 했다고 적었다.[주 22-08] 쇼펜하우어 협회의 연표는 이 시기를 한 줄로 적는다. 결혼 계획을 생각했다가 버렸다.[주 22-09]
*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하는가, 그 사람이 채워 줄 내 결핍을 사랑하는가? 그는 뒤의 것이라고 답했다. 다만 그가 말한 결핍은 외로움이나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아니라, 훨씬 더 깊은 곳에 있는 것이었다.
1844년, 쉰여섯 살의 그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제2권을 펴냈다. 이 책은 쉰 개의 장으로 나뉘는데, 그 마흔네 번째 장 「성애의 형이상학」에서 그는 사랑을 이렇게 해부한다.
그는 먼저 사랑이 왜 그토록 무겁게 느껴지는지를 묻는다. 시인들은 수천 년 동안 사랑을 노래하고도 지치지 않았고, 사랑이 빠진 연극은 관객의 마음을 붙잡기 어렵다.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의 작은 몸짓 하나, 만남의 사소한 사정 하나에도 목숨을 건 것처럼 매달린다. 한 사람의 행복과 불행만 걸린 일이라면 이렇게까지 진지할 까닭이 없다고 그는 본다. 그래서 그는 그 진지함의 크기에 맞는 목적을 찾는다. 지금 이 세대가 나누는 사랑을 모두 합치면, 그것은 다음 세대를 어떻게 짜 맞출지를 두고 인류 전체가 벌이는 진지한 궁리라는 것이 그의 답이다. 거기에는 개인의 행복이 아니라 앞으로 올 인류의 모습이 걸려 있고, 그래서 사랑에서 개인의 의지는 한층 높은 힘을 가진 종의 의지로 나타난다.[주 22-10]
그 위에서 그는 한 사람을 향한 끌림을 따진다. 특정한 상대를 향하지 않은 성적 충동은 그 자체로 삶에의 의지일 뿐이다. 그런데 의식 속에 특정한 한 사람을 향한 충동으로 나타나는 것은, 그 자체로는 정확히 정해진 한 개체로 살고자 하는 의지, 곧 그 두 사람에게서만 태어날 수 있는 다음 아이의 의지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쓴다.
“이 경우 성적 충동은 그 자체로는 주관적인 욕구인데도, 아주 솜씨 좋게 객관적인 감탄의 가면을 쓰고 의식을 속일 줄 안다. 자연은 제 목적을 이루려고 이 계략을 쓸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감탄이 아무리 객관적이고 숭고한 빛을 띠고 나타나더라도, 사랑에 빠진 모든 경우에 노리는 것은 오직 일정한 성질을 지닌 한 개체를 낳는 일뿐이다. 그것은 무엇보다 사랑을 되돌려 받는 일이 아니라 소유가 본질이라는 데서 확인된다.”[주 22-10]
내가 그 사람의 눈과 목소리와 됨됨이에 감탄한다고 느낄 때, 그 감탄은 그의 말대로라면 가면이다. 가면 뒤에서 일하는 것은 나도 모르는 종의 계산이다. 그는 같은 장에서 그 계산의 규칙까지 적는다. 사람은 저마다 한쪽으로 치우쳐 있고, 그래서 자기와 반대로 치우친 사람에게 끌린다. 두 사람은 산과 염기가 만나 중성의 소금이 되듯 서로를 중화해야 한다. 누구나 상대에게서 자기 결함을 바로잡아 줄 것을 찾는다.[주 22-11] 그러니 사랑은 처음부터 결핍을 향한다. 다만 그 결핍은 내 것이 아니라, 나와 상대 사이에서 태어날 아이가 온전하려면 채워져야 할 것이다.
그 결론은 차갑다. 목적이 이루어지면 속임수는 사라져야 한다.
“그 정열은 종에게만 값어치 있는 것을 개인에게 값어치 있는 것처럼 비추어 보인 망상에 기대고 있었다. 그러니 종의 목적이 이루어지고 나면 그 속임수는 사라질 수밖에 없다. 개인을 사로잡았던 종의 정신은 개인을 다시 놓아준다. 그 정신에게 버림받은 개인은 본래의 좁고 가난한 처지로 돌아가, 그토록 높고 영웅적이고 끝없는 애씀 끝에 자기 즐거움으로는 어떤 성적 만족이든 주는 것 말고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것을 놀라며 본다. 그는 기대와 달리 전보다 조금도 행복하지 않다. 자기가 종의 의지에게 속은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주 22-12]
그래서 그는 사랑으로 맺어진 결혼이 개인이 아니라 종의 이익을 위해 맺어진다고 쓴다. 당사자들은 자기 행복을 키운다고 믿지만, 그들의 진짜 목적은 그들 자신에게 낯선 것, 곧 그들을 통해서만 태어날 수 있는 한 개체다. 그 망상이 사라지고 나면 두 사람이 나머지 모든 점에서 전혀 맞지 않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이 드러나곤 한다.[주 22-12]
*
이 해부는 많은 것을 설명한다. 왜 사랑이 그토록 절박하게 느껴지는지, 왜 사랑하는 사람이 상대의 작은 몸짓에까지 그렇게 큰 의미를 두는지, 왜 정열이 채워진 뒤에 허무가 오는지. 그러나 그 해부가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
그는 이 해부가 사랑에 빠진 사람들에게 불쾌하게 들리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면서도 이성적인 생각이 이 정열을 누를 수 있다면, 자기가 드러낸 근본 진리가 그 일에 무엇보다 쓸모 있으리라고 썼다. 그리고 곧바로, 스스로 아무 분별도 절도도 갖지 않는 일을 분별로 다스릴 수는 없다는 옛 희극 작가의 말이 그대로 맞을 것이라고 덧붙였다.[주 22-12] 사랑의 정체를 밝혀낸 사람조차 그 정체를 안다고 해서 사랑에서 풀려나지는 못한다는 고백이었다.
첫째, 그의 해부에는 상대의 삶이 없다. 「성애의 형이상학」에 나오는 사람들은 종의 정신에 사로잡힌 두 개의 몸이다. 그 안에는 아파도 쉬지 못하고 벌금을 물고, 혼자 아이를 기르며 극장의 해고 경고를 받는 여자가 들어갈 자리가 없다. 1825년의 그가 이다에게서 본 것이 종의 계략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가 이다의 세 해를 보지 못한 것은 계략 탓이 아니었다. 그는 자기 기대만 보고 있었다.
둘째, 그의 해부는 그 자신의 그리움도 다 담지 못한다. 그비너가 전한 그는 마음을 깊이 나눌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아파하던 사람이었다. 그 그리움은 아이를 향한 종의 의지라기보다, 자기를 알아줄 한 사람을 향한 마음에 가까웠다. 사랑받고 싶은 마음 가운데 어떤 것은 종의 계산으로 다 풀리지 않는다.
셋째, 그의 해부는 그 자신의 1825년과 어긋난다. 그는 사랑에서 본질적인 것은 사랑을 되돌려 받는 일이 아니라 소유라고 썼다. 그런데 세 해 만에 돌아온 그를 가장 깊이 찌른 것은 소유를 잃은 일만이 아니었다. 그녀가 그를 기다리지 않았다는 것, 곧 그가 그녀에게 단 하나의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이었다. 그가 용서하지 못한 것은 몸의 문제라기보다 선택받지 못했다는 사실에 가까웠다. 사랑받고 싶은 마음의 정체가 그것이라면, 그 마음은 아이를 낳으려는 종의 의지보다, 누군가에게 대신할 수 없는 사람이 되고 싶은 개인의 의지에 더 가깝다. 그의 형이상학에서 개인은 종에게 속는 자리에 서 있을 뿐이지만, 그 자신은 한 사람에게 버려졌다고 느끼는 개인으로 서 있었다.
1856년 11월, 예순여덟 살의 그는 두 번째 결혼을 한 지인에게 축하 편지를 썼다.
“두 번째 결혼에서도 첫 번째처럼 편안하고 행복하게 지내신다니 기쁩니다. 세상에는 꼭 결혼해야 하는 사람들이 있고, 또 나처럼 결혼에 전혀 맞지 않는 사람들도 있지요. 하기야 사는 방식은 여러 가지입니다.”[주 22-13]
그는 자기가 결혼에 맞지 않는 사람이라고 결론을 냈다. 그 결론은 정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결론이 한 사람을 끝까지 알려고 하지 않은 서른일곱 살의 선택까지 설명해 주지는 않는다.
사랑을 설명할 수 있게 되면, 사랑하는 그 사람을 이해하는 일은 끝나는가? 아니면 거기서부터 비로소 시작되는가?
후주
[주 22-01] 카롤리네 빌헬미네 리히터(1802년 1월 3일 출생), 1819년부터 베를린 왕립 극장의 합창 단원이었다는 것, 집안에서 어려서부터 이다라고 불렸고 쇼펜하우어도 그렇게 불렀다는 것, 관계가 1820년 5월 이후 1821년 8월 사이에 시작되었으리라는 추정, 1822년 5월 27일 두 번째 이탈리아 여행을 떠났다는 것은 아르투어 휘브셔, 「쇼펜하우어의 베를린 연인 — 알려지지 않은 편지들」, 『쇼펜하우어 연감』 1974년호(권 번호 재확인), 41~42쪽. 극장 서류의 이름(메다우, 메동)은 같은 글. 쇼펜하우어 협회 연표 1820년 항목은 「카롤리네 리히터, 일명 메동과의 연애가 시작된 것으로 짐작되는 해」로 적는다.
[주 22-02] 여행 경로(알프스, 밀라노, 베네치아, 피렌체, 로마), 뮌헨에서 거의 한 해 동안 앓은 것, 가슈타인 요양, 드레스덴 체류는 빌헬름 그비너,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 개인적 교류로 본 그의 삶』(1922), 77쪽과 쇼펜하우어 협회 연표 1822~1824년 항목. 「온천」은 가슈타인을 풀어 쓴 것이다.
[주 22-03] 휘브셔 1974, 42~43쪽. 이탈리아 체류 동안 두 사람 사이의 편지가 하나도 확인되지 않는다는 것(keinerlei briefliche Verbindung … nachzuweisen), 「정절의 약속 같은 것」(etwas wie ein Treueversprechen)이 있었으리라는 휘브셔의 추정.
[주 22-04] 휘브셔 1974, 41·43쪽이 옮긴 극장 문서와 세례 기록. 1823년 3월 27일 브뤼더 거리 39번지에서 낳은 아들, 4월 6일 세례, 아버지 미상, 그가 떠난 지 열 달(304일) 뒤라는 계산, 1823년 9월 25일 휴가 청원과 거절, 1825년 1월부터의 결근 불평과 벌금.
[주 22-05] 돌아온 때는 자료마다 다르다. 휘브셔 1974, 43쪽은 1825년 3월, 쇼펜하우어 협회 연표는 1825년 4월, 그비너 1922, 77쪽은 1825년 5월로 적는다. 이 소설은 「봄」으로 두었다.
[주 22-06] 그가 그녀의 불실을 용서하지 않았고 그 뒤 관계에 의심이 늘 있었으나 1825년에 관계를 다시 이었다는 것, 그가 베를린을 아주 떠난 뒤 쓴 편지에 「돌아왔을 때 당신이 …의 품에 있는 것을 보았다」(Als ich zurückkehrte, fand ich Dich in den Armen von …)고 적었고 이름 부분이 찢겨 나갔다는 것은 휘브셔 1974, 43쪽(편지는 메동의 손주들이 몰래 보았다고 전한 것). 원문을 직접 보지 못했으므로 따옴표로 인용하지 않고 취지만 옮겼다. 귀국한 그와 이다가 나눈 대화와 대사는 소설의 창작이다. 그의 말은 그가 그 일을 용서하지 못했다는 기록에, 그녀의 말은 극장 문서에 남은 그녀의 처지에 근거했다. 그녀가 그 일을 어떻게 느꼈는지는 자료에 없어 대사에서 단정하지 않았다. 대화의 날짜와 장소는 자료에 없다.
[주 22-07] 휘브셔 1974, 43쪽이 옮긴 극장 문서. 1825년 9월 23일 합창 지휘자 라이델의 불평과 총감독 브륄 백작의 해고 경고, 1825년 9월 26일과 10월 6일의 청원 편지와 거절, 1826년 1월 21일 늑막염 진단서, 1826년 2월 25일의 두 번째 해고 경고, 1826년 9월 22일 사직 청원과 당일 수리.
[주 22-08] 그비너 1922, 156~157쪽. 강사 자격을 얻은 직후 결혼의 유혹이 아주 가까이 왔다는 것, 그가 혼자 남은 것을 그비너가 무엇보다 가족을 걱정 없이 부양하기에 재산이 모자랄까 하는 두려움 탓으로 본 것, 마음을 깊이 나눌 필요가 생길 때 함께 살 사람이 없음을 아프게 느낀다고 그가 말하곤 했다는 것(wenn das Bedürfnis innigerer Mitteilung ihm den Mangel einer Lebensgefährtin schmerzlich fühlbar machte). 귀국 뒤 다시 결혼을 생각했다는 그비너의 말은 휘브셔 1974, 42~43쪽의 요약을 따랐다. 그비너가 이 결혼 생각을 이다와 이어 말한 것은 아니며, 휘브셔도 그렇게 이어 읽을 수 있다고만 했다. 그비너 1922는 OCR로 읽었다(재확인).
[주 22-09] 쇼펜하우어 협회 연표 1825~1831년 항목(Heiratspläne erwogen und verworfen). schopenhauer.de/zeittafel, 2026-10-09 열람.
[주 22-10]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제2권 제44장 「성애의 형이상학」. 1891년 브로크하우스판(프라우엔슈테트 편), 인쇄 612쪽, PDF 622쪽. 스캔으로 대조했다. 사랑의 진지함과 「다음 세대를 짜 맞추는 궁리」(meditatio compositionis generationis futurae), 종의 의지로 나타나는 개인의 의지는 같은 쪽 위와 앞쪽(인쇄 611~612쪽)의 취지를 OCR과 영역본으로 읽고 옮겼다(앞쪽은 스캔 미대조). 앞의 해설(Was im individuellen Bewußtseyn sich kund giebt als Geschlechtstrieb überhaupt …)은 취지를 옮겼고, 인용은 한국어 의역이다. 원문은 In diesem Falle nun weiß der Geschlechtstrieb, obwohl an sich ein subjektives Bedürfniß, sehr geschickt die Maske einer objektiven Bewunderung anzunehmen und so das Bewußtseyn zu täuschen: denn die Natur bedarf dieses Stratagems zu ihren Zwecken. Daß es aber, so objektiv und von erhabenem Anstrich jene Bewunderung auch erscheinen mag, bei jedem Verliebtseyn doch allein abgesehn ist auf die Erzeugung eines Individuums von bestimmter Beschaffenheit, wird zunächst dadurch bestätigt, daß nicht etwan die Gegenliebe, sondern der Besitz, d. h. der physische Genuß, das Wesentliche ist. 원문은 이어서 「소유」의 예로 강제 결혼과 그보다 무거운 경우를 드는데, 이 소설은 그 대목을 옮기지 않았다. 제2권은 1844년에 나왔다(생애 연표 B3).
[주 22-11] 같은 장, 「beide Personen müssen einander neutralisiren, wie Säure und Alkali zu einem Mittelsalz」가 들어 있는 대목과, 저마다 상대에게서 자기 결함과 치우침을 바로잡을 것을 찾는다는 대목. 인쇄 624~625쪽 부근으로, OCR과 영역본(프로젝트 구텐베르크 40868번)으로 읽고 취지를 옮겼다. 스캔 대조는 하지 않았다(재확인).
[주 22-12] 같은 장, 인쇄 639쪽, PDF 649쪽. 스캔으로 대조했다. 첫 인용은 한국어 의역이며 원문은 Weil nämlich die Leidenschaft auf einem Wahn beruhte, der Das, was nur für die Gattung Werth hat, vorspiegelte als für das Individuum werthvoll, muß, nach erlangtem Zwecke der Gattung, die Täuschung verschwinden. Der Geist der Gattung, welcher das Individuum in Besitz genommen hatte, läßt es wieder frei. Von ihm verlassen fällt es zurück in seine ursprüngliche Beschränkung und Armuth, und sieht mit Verwunderung, daß nach so hohem, heroischen und unendlichen Streben, für seinen Genuß nichts abgefallen ist, als was jede Geschlechtsbefriedigung leistet: es findet sich, wider Erwarten, nicht glücklicher als zuvor. Es merkt, daß es der Betrogene des Willens der Gattung gewesen ist. 옛 희극 작가의 말(Quae res in se neque consilium, neque modum habet ullum, eam consilio regere non potes)이 들어 있는 대목과 사랑으로 맺은 결혼(Ehen aus Liebe werden im Interesse der Gattung, nicht der Individuen geschlossen …)은 같은 쪽 아래의 취지를 OCR로 읽고 옮겼다.
[주 22-13] 1856년 11월 29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메르제부르크의 추밀 고문관 크뤼거에게 보낸 편지. 루트비히 셰만 편, 『쇼펜하우어 서간집』(1893), 364~365쪽. 스캔으로 대조했다(PDF 424~425쪽). 한국어 의역. 원문은 Es freut mich, daß Sie in der zweiten Ehe sich so wohl befinden und behaglich wie in der Ersten: es giebt so Leute, die durchaus verheirathet seyn müßen, u wieder Andere, die, wie ich, gar nicht dazu geeignet sind. Je nun, praxis est multiplex. 편지의 날짜는 OCR로 읽었다.
사료에 근거한 것은 1822년의 출발, 카롤리네 리히터의 이름과 직업, 관계가 시작된 무렵, 이탈리아 체류 동안 편지의 흔적이 없다는 것, 1823년의 출산과 극장 문서에 남은 그녀의 휴가 청원·벌금·해고 경고·청원 편지·병·사직, 1825년의 귀국과 관계의 재개, 용서하지 못함과 의심, 결혼을 생각했다가 접은 것, 1856년의 편지다. 귀국 뒤 두 사람의 대화와 대사는 소설의 창작이다. 그가 이다의 세 해를 보지 못했다는 판단, 그가 용서하지 못한 것이 선택받지 못했다는 사실에 가까웠다는 판단은 서술자의 해석이다. 1844년의 「성애의 형이상학」은 1825년의 쇼펜하우어가 한 생각이 아니라 쉰여섯 살의 저작으로 비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