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11,147자)

분노가 대신 선택한 순간

쇼펜하우어의 삶 · 네오

1821년 8월 12일 저녁 여섯 시, 베를린 니더라크 거리 4번지. 서른세 살의 쇼펜하우어는 이 집에서 가구 딸린 방을 빌려 살고 있었다.[주 21-01] 그는 방 앞의 작은 대기실까지 함께 빌렸다. 그런데 그 대기실에는 그의 손님이 아닌 사람들이 자주 앉아 있었다. 집주인 여자와 아는 사이인 마흔일곱 살의 재봉사 카롤리네 마르케가 그곳에서 지인들을 맞아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주 21-02]

마르케는 혼자 사는 여자였다. 그녀는 바느질과 뜨개질과 다림질로 한 달에 적어도 8탈러 남짓을 벌었고, 그 전까지 가끔 머리가 아픈 것 말고는 건강하게 일했다.[주 21-03] 그녀에게 그 대기실은 일하는 손을 잠시 쉬며 아는 사람과 말을 나누는 자리였다. 그에게 그 대기실은 돈을 내고 빌린 자기 공간의 일부였다. 그는 문 하나 너머의 말소리 때문에 생각에 집중하기 어려웠고, 그런 날이 거듭될수록 그의 짜증은 쌓여 갔다.[주 21-01]

그날 저녁 그는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무렵 가까워진 여자가 그의 방에 오기로 되어 있었다. 대기실에는 마르케를 포함한 여자 셋이 앉아 있었다.[주 21-04]

“여기서 나가 주십시오. 이 방은 내가 세를 낸 방입니다.”

“주인 아주머니가 앉아 있어도 된다고 했어요. 우리는 늘 여기 앉았어요.”

“주인이 무슨 말을 했든 이 방의 세는 내가 냅니다. 당장 나가십시오.”

“우리는 당신 방에 들어간 게 아니에요. 문 밖에 앉아 있을 뿐이에요.”

두 사람의 말에는 각자의 근거가 있었다. 그는 자기가 값을 치른 공간을 자기 뜻대로 쓸 권리를 내세웠다. 그녀는 그 집에서 오래 이어진 습관과 집주인의 허락을 내세웠다. 이런 다툼은 말로 끝날 수도 있었고, 집주인을 불러 가릴 수도 있었고, 다른 법정에서 세를 따지는 일로 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날 다툼은 말에서 멈추지 않았다.

*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두 갈래로 전한다. 쇼펜하우어 자신이 첫 재판에서 인정한 것은 이랬다. 그는 처음에 그녀의 몸통을 붙잡아 밖으로 끌어냈고, 그녀는 온 힘을 다해 버텼다. 그녀가 다시 들어오자 그는 그녀를 또 밖으로 내던졌고, 그녀는 거세게 저항하며 있는 힘을 다해 소리를 질렀으며, 복도에 쓰러졌다.[주 21-05]

그 자리를 본 증인 엘케의 진술은 더 무거웠다. 그는 처음 끌어낼 때 두 손으로 그녀의 목을 잡았다. 그녀의 다리가 바닥에 끌리는 채로 문까지 끌고 가서, 복도 벽 모서리에 거칠게 밀어붙이고 잠시 붙들고 있었다. 두 번째로 현관 밖에 내보냈을 때는 그녀를 세게 밀쳤고, 그녀는 오른쪽으로 바닥에 쓰러져 목 한 곳에서 피를 흘렸다.[주 21-05] 엘케는 그녀의 고운 모자에 구멍이 났고 모자 끈에 피가 묻어 있었다고 했다.[주 21-06] 의사 클루게는 그날 바로 그녀의 상처를 진찰하고 소견서를 썼다.[주 21-05]

그 일은 몇 분 안에 끝났다. 그러나 그 몇 분이 그녀에게서 가져간 것은 몇 분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날 저녁부터 앓기 시작했고 그 병은 그치지 않았다.[주 21-03] 쇼펜하우어 자신도 그녀가 이듬해 1월 중순까지 자리에 누워 있었다는 것만은 인정했다.[주 21-07] 그녀는 피를 세 번 뽑았고, 약을 먹고 약초 목욕을 했고, 혼자 몸을 돌볼 수 없어 시중드는 사람을 써야 했다. 뒷날 왕실 의사 호른은 그녀가 바느질과 빨래와 다림질을 할 수 없게 되었다고 판단했다. 오른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일이었다. 증인들은 그녀가 뜨개질은 할 수 있지만 오래 이어서 하지는 못한다고 했다.[주 21-03]

*

그녀는 그를 모욕죄로 고소했다. 그는 2심에서 가벼운 폭행으로 유죄를 받아 벌금 20탈러, 내지 않으면 감옥 열나흘을 선고받았다.[주 21-08] 1822년 9월 6일 그녀는 다시 손해 배상 소송을 냈다. 그는 그 무렵 이탈리아에 가 있었고, 11월 7일 법원은 베를린의 은행에 맡겨 둔 그의 재산을 묶었다.[주 21-08]

그는 배상할 책임이 없다고 맞섰다. 자기는 가벼운 폭행으로 벌을 받았을 뿐이고, 첫 판결도 그 일이 눈에 띄는 상처 없이 지나갔다고 적었다고 했다. 그는 그녀의 병이 그날의 일 때문이라는 것을 부정했고, 그녀가 일을 못 하게 된 것도 자기 탓이 아니라고 했다.[주 21-07] 법을 놓고 보면 그것은 피고가 내세울 수 있는 정당한 주장이었다. 그러나 그 주장 어디에도 그녀가 겪은 일은 없었다. 그가 다툰 것은 그녀의 아픔이 아니라 그 아픔과 자기 손 사이의 인과였다.

1824년 10월 4일, 베를린 대법원의 심리부가 판결을 내렸다. 그녀가 그날 정말로 목을 잡혀 끌려 나갔고 그때 사마귀 하나가 뜯겨 나갔으며 옆으로 넘어졌다고 양심을 걸고 맹세할 수 있다면, 그는 약값과 외과의 치료비와 목욕비와 사혈비와 포도주와 시중드는 사람의 품삯과 고운 모자와 그 끈 값까지 41탈러 남짓을 갚아야 했다. 그리고 1821년 8월 12일부터 그녀가 스스로 생계를 꾸릴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될 때까지 다달이 5탈러를, 석 달 치씩 미리 내야 했다.[주 21-09] 법원의 논리는 단순했다. 금지된 행위를 하던 사람은 그 기회에 생긴 손해가 자기 탓이라는 추정을 진다. 그는 폭행으로 이미 벌을 받았다. 그녀의 병이 다른 데서 왔다는 것을 증명해야 할 쪽은 그였고, 그는 증명하지 못했다.[주 21-09]

그는 항소했다. 상급 법원과 최고 법원을 거쳐 1826년 봄 판결은 확정되었다.[주 21-10] 그해 5월 베를린 대학 철학부는 그가 강의를 다시 하겠다고 알렸을 때, 그가 1822년부터 「명예롭지 못한 일」 때문에 베를린을 비웠다고 회의록에 적었다.[주 21-11] 그는 그녀가 죽을 때까지 스무 해 넘게 돈을 보냈다.[주 21-12]

*

순간적으로 한 행동에도 나는 책임져야 하는가? 책임져야 한다. 분노는 바깥에서 들어와 내 손을 빌려 간 남이 아니라, 그 순간 드러난 나 자신이다.

그는 이 물음에 뒷날 정면으로 답했다. 1839년 1월, 쉰 살의 그는 노르웨이 트론헤임의 왕립 학술원이 내건 현상 과제에 응모한 논문 『의지의 자유에 관하여』로 상을 받았다.[주 21-13] 그 논문에서 그는 먼저 사람의 행동에 자유가 없다는 결론을 끝까지 밀고 간다. 한 사람의 행동은 그의 타고난 성격과 그 순간 그에게 주어진 동기가 만나서 반드시 그렇게 나온다. 같은 성격에 같은 동기가 오면 같은 행동이 나온다. 그 행동이 분노에서 나왔든 계산에서 나왔든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1821년 8월 12일 저녁의 행동은 그의 성격과 대기실의 말소리라는 동기가 만나 필연적으로 나온 것이 된다. 그는 그 저녁 달리 할 수 없었던가? 그는 논문의 마지막 부분에서 바로 그 결론에 기대려는 사람을 막아선다.

“우리 의식에는 아직 한 가지 사실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한 완전히 뚜렷하고 확실한 책임감이다. 그것은 우리 스스로가 우리 행동을 한 사람이라는 흔들림 없는 확신에 기대고 있다. 이 의식이 있기에, 우리 행동이 필연적으로 일어난다는 것을 완전히 확신하는 사람조차, 잘못을 저질러 놓고 그 필연성을 핑계로 삼거나 동기가 주어졌으니 행동은 피할 수 없었다며 탓을 동기에게 떠넘길 생각은 결코 하지 않는다.”[주 21-14]

왜 그런가? 그는 이어서 그 필연성에는 조건이 하나 붙어 있다고 말한다.

“그 필연성은 주관적인 조건을 가진다. 객관적으로는, 곧 그 자리의 사정 아래에서, 그를 움직인 동기들이 작용하는 가운데서도, 전혀 다른 행동, 아니 그가 한 것과 정반대의 행동이 충분히 가능했고 일어날 수 있었다. 다만 그가 다른 사람이었다면 말이다. 오직 거기에 달려 있었다. … 그러므로 그가 의식하는 책임은 겉으로는 우선 그 행동을 향하지만, 밑바닥에서는 그의 성격을 향한다. 그는 그 성격에 대해 자기가 책임이 있다고 느낀다.”[주 21-14]

그의 논증을 차례대로 풀면 이렇다. 첫째, 같은 상황에서 다른 사람이었다면 다르게 행동했을 것이다. 대기실의 말소리를 듣고도 문을 닫고 책을 읽는 사람, 집주인을 부르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다. 둘째, 그러니 그 행동을 낳은 것은 상황이 아니라 그 상황을 만난 그 사람이다. 셋째, 따라서 동기를 탓하는 것은 핑계가 될 수 없고, 책임은 행동을 지나 그 행동을 한 사람에게 간다. 그는 남들의 판단도 그렇게 움직인다고 덧붙인다. 남들은 행동을 보자마자 곧바로 행동한 사람으로 넘어가 그가 나쁜 사람이라고, 비열한 영혼이라고 말한다.[주 21-14] 행동은 성격의 증거로 읽힌다.

이 논증 안에서 순간의 분노는 면죄부가 되지 못한다. 그 순간이 짧았다는 것은 그 순간에 드러난 것이 그의 깊은 바탕이라는 사실을 바꾸지 못한다. 오히려 생각할 틈도 없이 나온 행동일수록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더 정직하게 보여 준다. 원인을 설명하는 일과 책임을 벗기는 일은 다르다. 그는 행동이 왜 그렇게 나왔는지를 설명하는 데 평생을 썼지만, 그 설명이 행동한 사람을 풀어 준다고는 한 번도 쓰지 않았다.

*

그런데 그 논문을 쓴 사람이 바로 1821년의 그 사람이었다. 상을 받던 1839년에도 그는 판결대로 석 달마다 마르케에게 돈을 보내고 있었다.[주 21-12] 그는 법정에서 그녀의 병과 자기 손 사이의 인과를 끝까지 다투었다. 철학자로서 그는 동기를 탓하는 사람을 막아섰지만, 피고로서 그는 그녀의 몸이 원래 약했을 가능성에 기댔다. 법정에서의 다툼은 그의 권리였다. 그러나 그 다툼 어디에서도 그가 그녀에게 자기 잘못을 말한 기록은 없다.

마르케는 1852년에 죽었다.[주 21-12] 그의 유언 집행자이자 전기 작가 그비너에 따르면, 그는 그녀의 사망 증명서에 라틴어로 이렇게 적었다. “늙은 여자가 갔다. 짐이 갔다.”[주 21-12] 그비너는 그녀가 오른팔로 넘어져 일을 못 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고 썼고, 그녀의 몸이 질겨서 콜레라도 그녀를 이기지 못했다고 썼다.[주 21-02] 그러나 법원은 증인과 의사의 말을 들어 그녀가 다쳤고, 그 뒤로 그녀가 예전처럼 벌 수 없게 되었다고 판단했다. 전기 작가의 문장 속에서 그녀는 철학자의 불운이 되었지만, 판결문 속에서 그녀는 그날 저녁 목을 잡히고 넘어진 사람이었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그는 남의 고통을 내 고통처럼 느끼는 연민을 윤리의 바탕에 두었다. 그 철학자는 자기 손이 한 여자에게 남긴 고통을 스무 해 넘게 돈으로 갚았고, 그 끝에 짐을 내려놓았다는 말을 남겼다. 그가 쓴 책임의 논리는 그 말까지 감싸 주지 않는다. 행동이 성격을 보여 준다면, 그 라틴어 한 줄도 성격을 보여 준다.

분노가 대신 고른 그 몇 분에 대해, 사람은 언제까지 책임을 져야 하는가? 그리고 책임을 진다는 것은 값을 치르는 일로 끝나는가, 그 값을 받은 사람을 끝까지 사람으로 보는 일까지 가야 하는가?

후주

[주 21-01] 1821년 그가 니더라크 거리 4번지에 살았다는 것은 아르투어 휘브셔, 「쇼펜하우어의 베를린 연인 — 알려지지 않은 편지들」, 『쇼펜하우어 연감』 1974년호(권 번호 재확인), 42쪽. 그가 1840년까지 가구 딸린 셋방에서만 살았다는 것은 빌헬름 그비너,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 개인적 교류로 본 그의 삶』(1922), 79쪽. 그녀가 대기실에서 늘 나누던 이야기가 그의 집중을 방해하고 그의 반감을 쌓았다는 것은 스탠퍼드 철학 백과(plato.stanford.edu/entries/schopenhauer) 1절의 서술이다. 사건 시각 「저녁 여섯 시」는 1824년 판결 이유 첫 문장(Am 12. August 1821 Abends 6 Uhr). 나이는 1788년 2월 22일 출생에서 셈했다.

[주 21-02] 그비너 1922, 79쪽. 그녀가 집주인 여자와 아는 사이였고, 마흔일곱 살의 미혼 재봉사였으며, 그가 함께 빌린 대기실에서 커피 손님을 맞곤 했다는 것, 그녀가 오른팔로 넘어져 일을 못 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arbeitsunfähig geworden sein wollte)는 표현, 콜레라도 그녀를 이기지 못했다는 표현. 스탠퍼드 철학 백과도 그녀를 마흔일곱 살 재봉사로, 그 다툼을 「몸싸움」으로 적는다. 이름은 판결문의 Caroline Marquet를 따랐다(스탠퍼드 철학 백과는 Caroline Luise Marguet).

[주 21-03] 1824년 10월 4일 판결 이유 [9]·[17]. 사건 전까지 건강하고 일할 수 있었다는 것(증인 베커 과부, 외과의 오펜하우저, 레무스, 슐체, 투름 부인), 그날 저녁부터 병이 시작되어 이어졌다는 것, 바느질·뜨개질·다림질로 달마다 적어도 8⅓탈러를 벌었다는 것, 호른의 소견(바느질·빨래·다림질은 못 하나 오른팔의 힘이 필요 없는 가벼운 일은 할 수 있다), 뜨개질을 오래 이어서는 못 한다는 증언. 위키문헌 전사(de.wikisource.org/wiki/Kammergericht_(Instruktionssenat)_-_Schadensersatzprozess_gegen_Schopenhauer). 사혈 세 번, 약, 약초 목욕, 시중드는 사람은 판결 주문과 이유 [15]. 「호른」을 왕실 의사라 한 것은 판결의 Geheime Rath Dr. Horn(궁정 고문관 칭호의 의사)을 풀어 쓴 것이다.

[주 21-04] 그날 저녁 그가 카롤리네 리히터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었고, 그의 문 앞에 여자 셋이 앉아 있었다는 것은 휘브셔 1974, 42쪽. 휘브셔는 그 여자들을 「반갑지 않은 수다쟁이들」(unerwünschte Klatschbasen)이라고 부르지만, 그것은 쇼펜하우어 쪽에서 본 말이어서 이 소설은 따르지 않았다. 대기실에서 오간 대사는 소설의 창작이다. 그의 말은 그비너가 전한 「그가 함께 빌린 대기실」에, 그녀의 말은 그녀가 집주인과 아는 사이로 그곳에서 손님을 맞아 왔다는 기록에 근거했다. 그녀가 실제로 무엇이라고 말했는지는 자료에 없다.

[주 21-05] 판결 이유 [4]·[5]·[6]. 첫 재판에서 그가 인정한 것(daß er die Kl. das erstemal um den ganzen Leib gefaßt und hinausgeschleppt habe, obgleich sie sich aus Leibeskräften gewehrt und daß er sie nachher abermals, obgleich sie sich auf das heftigste gewehrt und aus allen Kräften gekreischt, hinausgeworfen habe und sie auf dem Flur hingefallen sei)과 증인 엘케의 진술(mit beiden Händen um den Hals faßte … in die Ecke der Flurwand drückte … auf die rechte Seite zu Boden fiel und an einer Stelle des Halses blutete)을 취지로 옮겼다. 판결은 엘케를 「달리 의심할 데 없는」(unverdächtigen) 증인이라 했고, 그 진술이 의사 클루게가 사건 직후 쓴 소견서(visum repertum), 외과의 베어와 사건 직후 그녀를 만난 로렌츠 부인의 말로 뒷받침된다고 보았다.

[주 21-06] 판결 이유 [15]. 엘케가 고운 모자에 구멍이 났고 끈에 피가 묻었다고 증언한 것. 첫 재판에서 엘케는 그가 그녀를 내던질 때 모자를 잡아 뜯었다고 진술했다.

[주 21-07] 판결 이유 [3]·[4]. 그가 배상 책임을 다툰 근거(가벼운 폭행으로만 벌받았고 첫 판결이 「눈에 띄는 상처 없이」 지나갔다고 적었다), 인과 관계와 노동 능력 상실을 부정한 것, 다달이 2탈러를 그것도 그녀가 스스로 인정한 대로 자리에 누워 있던 1822년 1월 15일까지만 인정한 것. 취지를 옮긴 것이다.

[주 21-08] 판결 이유 [1]·[2]. 모욕죄 고소, 2심의 「가벼운 폭행」(geringe Realinjurien) 유죄와 벌금 20탈러 또는 감옥 14일, 1822년 9월 6일 손해 배상 소송, 이탈리아에 있던 그의 재산(은행가 멘델스존과 마르쿠손 쪽에 있던 것)에 대한 1822년 11월 7일 가압류. 「베를린의 은행」은 서술자의 요약이다.

[주 21-09] 판결 주문과 이유 [10]~[12]·[18]. 보충 맹세의 내용, 41탈러 23그로셴 6페니히의 비용 항목, 다달이 5탈러를 석 달 치씩 미리 낼 것, 프로이센 일반 국법 제1부 제6장 25조의 추정(금지된 행위를 하던 사람은 그 기회에 생긴 손해가 자기 탓이라는 추정을 진다), 그가 다른 원인을 증명하지 못했다는 판단. 판결이 내려진 법원은 베를린 대법원(Kammergericht)의 심리부다. 손해액 표는 웹 전사에 오류가 있을 수 있어 본문에는 「41탈러 남짓」으로만 적었다.

[주 21-10] 위키문헌 전사 쪽의 절차 기록과 주석. 상급 법원 항소심(1825년 6월 16일), 최고 법원(1826년 2월 2일), 그녀가 보충 맹세를 한 뒤 1826년 3월 2일 결정으로 판결이 확정되었다는 것.

[주 21-11] 1826년 5월 9일 철학부 회의록(Da derselbe seit 1822, und zwar aus nicht rühmlichem Anlaß von Berlin abwesend war). 아르투어 휘브셔, 「대학 교사로서의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 연감』 1958년호, 175쪽이 호프마이스터의 인용을 다시 옮긴 것. 그 「명예롭지 못한 일」이 마르케 사건이라는 것은 휘브셔의 주석이다.

[주 21-12] 그가 그녀를 평생 부양해야 했고 스무 해 넘게 그 짐을 졌으며, 그녀의 사망 증명서에 「Obit anus, abit onus」라고 적었다는 것은 그비너 1922, 79쪽(1862년 초판에도 같은 대목이 있다). 라틴어는 「늙은 여자가 죽고, 짐이 사라진다」에 가까우며, 그비너는 「귀찮은 늙은이가 죽었고, 내게서 오랜 짐이 죽는다」로 옮겼다. 그비너 1922는 소송이 거의 여섯 해를 끌었다고 적는다. 그녀가 1852년에 죽었다는 것은 스탠퍼드 철학 백과. 1839년에도 석 달마다 돈을 보냈다는 것은 판결이 정한 지급 방식과 그비너의 「평생」에서 끌어낸 서술이며, 개별 지급 기록은 보지 못했다.

[주 21-13] 1839년 1월 26일 노르웨이 왕립 학술원(트론헤임)이 이 논문에 상을 주었다는 것은 1891년판 『자연철학과 윤리학』 권에 실린 『윤리학의 두 근본 문제』 표제(gekrönt von der Königlich Norwegischen Societät der Wissenschaften, zu Drontheim, am 26. Januar 1839). 두 논문은 1841년에 한 권으로 나왔다(생애 연표 B3). 행동이 성격과 동기에서 필연적으로 나온다는 논문 앞부분의 논증은 같은 논문 제3부와 제5부 앞머리의 취지를 서술자가 요약한 것이다.

[주 21-14] 쇼펜하우어, 『의지의 자유에 관하여』 제5부 「결론과 더 높은 견해」. 1891년 브로크하우스판(『자연철학과 윤리학』 권), 인쇄 93쪽, PDF 319쪽. 스캔으로 대조했다. 첫 인용은 한국어 의역이며 원문은 Es giebt nämlich noch eine Thatsache des Bewußtseyns … Diese ist das völlig deutliche und sichere Gefühl der Verantwortlichkeit für Das was wir thun, der Zurechnungsfähigkeit für unsere Handlungen, beruhend auf der unerschütterlichen Gewißheit, daß wir selbst die Thäter unserer Thaten sind. Vermöge dieses Bewußtseyns kommt es Keinem, auch dem nicht, der von der im Bisherigen dargelegten Nothwendigkeit, mit welcher unsere Handlungen eintreten, völlig überzeugt ist, jemals in den Sinn, sich für ein Vergehen durch diese Nothwendigkeit zu entschuldigen und die Schuld von sich auf die Motive zu wälzen, da ja bei deren Eintritt die That unausbleiblich war. 둘째 인용은 한국어 의역이며 원문은 … daß diese Nothwendigkeit eine subjektive Bedingung hat, und daß hier objective, d. h. unter den vorhandenen Umständen, also unter der Einwirkung der Motive, die ihn bestimmt haben, doch eine ganz andere Handlung, ja, die der seinigen gerade entgegengesetzte, sehr wohl möglich war und hätte geschehen können, wenn nur Er ein Anderer gewesen wäre: hieran allein hat es gelegen. … Die Verantwortlichkeit, deren er sich bewußt ist, trifft daher bloß zunächst und ostensibel die That, im Grunde aber seinen Charakter: für diesen fühlt er sich verantwortlich. 남들의 판단(er ist ein schlechter Mensch, ein Bösewicht … eine kleine, falsche, niederträchtige Seele)은 같은 쪽의 취지를 옮겼다.

연민을 윤리의 바탕에 둔 것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제1권 제4부 뒷부분과 1841년의 『도덕의 기초에 관하여』의 논지를 서술자가 요약한 것이다(직접 인용하지 않음).

사료에 근거한 것은 사건의 날짜와 시각과 장소, 마르케의 나이와 직업과 벌이, 대기실을 둘러싼 사정, 그날 그가 손님을 기다렸다는 것, 그가 인정한 행위와 증인 엘케의 진술, 의사들의 소견, 그녀의 병과 치료와 노동 능력, 모욕죄 판결과 벌금, 배상 소송과 가압류, 그의 항변, 1824년 판결의 주문과 이유, 1826년의 확정, 철학부 회의록, 평생의 지급과 사망 증명서의 라틴어 문구, 1839년 논문의 수상이다. 대기실에서 오간 대사는 소설의 창작이며 두 사람의 기록된 처지에 근거했다. 그가 그녀에게 사과한 기록이 없다는 것은 확보한 자료와 위 출처에서 찾지 못했다는 뜻이다. 1839년의 『의지의 자유에 관하여』와 주저의 연민 윤리는 1821년의 쇼펜하우어가 한 생각이 아니라 뒷날의 저작으로 비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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