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8,979자)
아름다운 여행, 고통스러운 세계
쇼펜하우어의 삶 · 네오
1803년 5월 초, 쇼펜하우어 가족은 함부르크를 떠났다. 다섯 살 여동생 아델레는 친척 집에 맡겼다. 아버지와 어머니와 열다섯 살 아르투어 셋이 네덜란드로, 영국으로, 프랑스로, 스위스로, 오스트리아로 가는 길이었다. 여행은 이듬해 8월 말까지 이어졌다.[주 2-01] 아르투어는 길에서 본 것을 날마다 일기에 적었다. 그것은 부모가 시킨 공부이기도 했다. 그는 부모 곁에서, 부모가 읽을 수 있는 공책에 썼다.[주 2-02]
여행은 아름다웠다. 파리의 루브르에서 그는 옛 그리스 조각들 앞에 섰다. 그리스 신화의 신들이 산다는 산의 이름을 따서 그는 이렇게 적었다. “올림포스의 신들이 모두 여기 아직 살아 있다. 수천 년 전에 서 있던 그대로 서서, 고요한 눈길로 자기들 둘레에서 시대가 바뀌는 것을 바라본다.”[주 2-03] 알프스에서는 몽블랑 아래 샤모니 골짜기에 들어가, 그 여행에서 가장 뜨거운 문장을 썼다. 눈 덮인 봉우리와 빙하 앞에서 열여섯 살 소년은 자기가 작아지는 것을 기쁘게 받아들였다.[주 2-04]
그 공책에는 다른 것도 적혀 있었다.
*
그 일기의 첫 장면은 엘베강을 건넌 뒤에 나온다. 가족은 길에서 눈먼 여자를 만났다. 갓난아기 때 세례를 받으러 가는 길에 추위로 눈이 얼어 멀었다는 여자였다. 아르투어는 이렇게 적었다.
“나는 그 가엾은 여자가 안쓰러웠지만, 자기 고통을 무덤덤하게 견디는 그 평온에는 감탄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즐거움을 그녀는 참 비싸게 치렀다!”[주 2-05]
안쓰러움과 감탄과 비웃음이 한 줄에 섞여 있었다. 열다섯 살의 그는 고통을 보았고, 그 고통을 견디는 사람을 보았고, 그 고통을 만든 교회를 비꼬았다. 그러고 나서 마차는 다음 역참으로 갔다.
런던에서 그는 공개 교수형을 보았다. 죽을 사람들이 마지막 순간까지 겁에 질려 기도하려 애쓰는 것을 그는 지켜보았다. 숨이 끊어진 뒤에도 몸이 몇 번 같은 기도의 몸짓을 했다. 그는 그 장면을 ‘뉘우침이 담긴 광경이 아니라 비참한 광경’이라고 적었다. 사형수를 위한 종소리도 수의도 없는 것이 그에게는 오히려 덜 괴로웠다.[주 2-06] 파리에서는 혁명 때 허물린 바스티유 감옥 터를 찾아가 그곳을 ‘영원한 비참과 아무도 듣지 못한 울부짖음과 희망 없는 고통의 무대’라고 불렀다.[주 2-07] 리옹에서는 혁명기의 공포 정치가 그 도시에서 저지른 학살의 흔적을 보았다.[주 2-08]
그리고 1804년 봄, 지중해의 군항 툴롱에서 가족은 바뇨를 찾았다. 바뇨는 갤리선, 곧 노예와 죄수가 노를 저어 움직이던 큰 배에 묶여 일하던 죄수들을 가두는 감옥이었다.
*
죄수들은 쇠사슬에 묶여 있었다. 형기의 길이에 따라 세 부류로 나뉘었고, 무리마다 사슬의 무게가 달랐다. 그들은 짐을 나르는 짐승처럼 부려졌다. 아르투어가 본 것은 그들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 아니라 똑같다는 것이었다. 모두가 지옥 안에 있었고, 서로에게 지옥이었다.[주 2-09]
감옥을 나와서 어머니가 말했다.
“저 사람들은 죄를 지었어. 그래서 저기 있는 거야. 저기서 풀려나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사람들이고.”
“죄를 지었으니 벌을 받는 건 맞습니다. 그런데 저건 벌이 아닙니다. 죽이는 것도 아니고 살리는 것도 아닙니다. 살아 있는 동안 내내 저 상태를 계속하게 하는 겁니다.”
“그래도 형기가 끝나는 사람도 있잖니. 언젠가 나갈 날을 기다리면서 버티는 거야.”
“나갈 날을 기다리는 동안의 하루하루는 누가 삽니까? 그 하루하루가 전부 저 안에 있습니다.”
어머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요한나 쇼펜하우어는 훗날 이 여행을 책으로 펴냈다. 그녀가 쓴 툴롱의 바뇨는 아들의 일기보다 훨씬 길고 생생했다. 하지만 그녀는 죄수들을 두려운 존재로 그렸고, 감옥을 빠져나온 죄수들이 질서 있는 시민 사회를 덮치는 상상으로 그 대목을 마쳤다. 다른 비참을 그릴 때처럼 거기서도 그녀는 끝에 희망을 남겼다. 아들의 일기는 달랐다. 그는 희망이 없다는 것만 적었다. 영국의 교수형보다 이것이 더 나쁘다고 그는 보았다. 교수형은 죽음으로 벌했지만, 바뇨는 삶을 계속하게 하는 것으로 벌했다. 그런 곳에서는 죽음이 오히려 풀려남이었다.[주 2-09]
어머니와 아들은 같은 날 같은 감옥에 들어갔다가 나왔다. 어머니의 논리는 틀리지 않았다. 죄수들은 죄를 지은 사람들이었고, 사회는 그들을 막아야 했고, 희망 없이는 아무도 살 수 없었다. 아들의 논리도 틀리지 않았다. 그들이 무엇을 했든, 그들이 겪는 고통은 고통이었다. 두 사람이 다르게 본 것은 죄수들이 아니라 고통이 누구의 몫이냐였다. 어머니에게 그것은 그들이 지은 죄의 값이었고, 아들에게 그것은 세상이 생긴 모양이었다.
*
스물여덟 해 뒤인 1832년, 콜레라를 피해 베를린을 떠난 마흔네 살의 쇼펜하우어는 피난길의 수첩에 그 여행을 돌아보며 이렇게 적었다.[주 2-10] 인도의 왕자로 태어나 성 밖에서 병든 사람과 늙은 사람과 죽은 사람을 보고 집을 떠났다는 붓다의 이야기를 빌린 글이다.
“열일곱 살 무렵, 학교 공부라고는 받은 것이 없던 나는 삶의 비참에 사로잡혔다. 젊은 붓다가 병과 늙음과 아픔과 죽음을 보았을 때처럼. 세상이 크고 분명하게 말하는 진실이, 내게도 어려서부터 박혀 있던 선한 창조주의 가르침을 곧 이겨 냈다. 이 세상은 한없이 선한 존재가 지은 것일 수 없고, 오히려 피조물을 세상에 불러내 놓고 그 괴로움을 보며 즐기는 악마가 지은 것일 수 있다. 내가 본 것들이 그쪽을 가리켰고, 그렇다는 믿음이 이겼다.”[주 2-10]
이 회고를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 마흔네 살의 철학자가 자기 사상이 태어난 순간을 열여섯 살 때로 돌려 세운 글이다. 실제 일기는 그보다 덜 극적이다. 그는 감화원과 정신병원 앞을 아무 말 없이 지나가기도 했다. 일기에는 오히려 연극이 잘됐는지 못됐는지, 여관이 묵을 만했는지, 사람들 옷차림이 유행에 맞는지를 따진 글이 더 많았다. 고통을 본 날 다음 장에는 지루함과 구경거리가 있었다.[주 2-11] 소년의 눈이 철학을 완성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 공책에는 뒷날의 철학이 붙잡을 장면들이 이미 적혀 있었다.
*
나는 편안한데, 남의 고통까지 생각해야 하는가? 아르투어는 그 여행 내내 편안했다. 아버지의 재산으로 마차를 타고, 좋은 여관에 묵고, 루브르와 몽블랑을 보았다. 바뇨의 죄수들은 그가 다녀간 다음 날에도 사슬을 끌었다. 그가 본 고통은 그의 고통이 아니었다. 그는 보고 지나갈 수 있었고, 실제로 지나갔다.
열네 해 뒤, 서른 살의 쇼펜하우어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제1권을 펴냈다. 이 책은 네 권으로 나뉘고, 각 권은 다시 번호를 붙인 짧은 절로 나뉜다. 마지막 제4권의 59번째 절에서 그는 이렇게 쓴다.
“누구에게든 그의 삶이 늘 드러나 있는 끔찍한 아픔과 괴로움을 눈앞에 보여 줄 수 있다면, 그는 몸서리를 칠 것이다. 가장 완고한 낙관주의자를 데리고 병원과 야전병원과 외과 수술실을 지나고, 감옥과 고문실과 노예 우리를 지나고, 싸움터와 처형장을 지나게 하라. 비참이 차가운 호기심의 눈길을 피해 숨어든 어두운 거처를 하나하나 열어 보이고, 마지막으로 우골리노가 굶어 죽은 탑 안을 들여다보게 하라. 그러면 그도 마침내 깨달을 것이다. 이 세상이 있을 수 있는 세상 가운데 가장 좋은 세상이라고 할 때, 그 ‘가장 좋은 세상’이 어떤 것인지를.”[주 2-12]
우골리노는 이탈리아 시인 단테의 『신곡』 지옥편에서 아들들과 함께 탑에 갇혀 굶어 죽은 피사의 백작이다. 그는 이어서 묻는다. 단테가 자기 지옥의 재료를 이 현실 세계 말고 어디서 가져왔겠느냐고. 그런데도 그것은 제대로 된 지옥이 되었다. 반대로 천국과 그 기쁨을 그려야 했을 때 단테는 넘을 수 없는 어려움에 부딪혔다. 우리 세계에는 그런 것을 그릴 재료가 하나도 없었다.[주 2-12]
그가 꼽은 곳들은 소년의 여행길과 놀랄 만큼 닮았다. 감옥과 처형장과 노예처럼 부려지는 사람들. 그는 실제로 그 길을 걸었다. 그러나 그는 여행기를 쓰고 있지 않았다. 그는 같은 절의 앞부분에서, 삶이 본래 고통이라는 것을 자기는 예를 늘어놓아 보이지 않고 삶의 기본 구조에서 끌어냈다고 밝힌다. 예를 모아 보여 주면 한쪽으로 치우친 탄식으로 들릴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그 결론을 뒤에서 확인하는 일은 어디서나 쉽다고 그는 덧붙인다. 눈을 뜨고 자기와 남의 경험을 살핀 사람이라면 누구나 확인할 수 있다.[주 2-12] 고통은 운이 나쁜 몇 사람의 사고가 아니었다. 그것은 바깥 사정이 달라도 사람마다 되풀이되는 결핍이었다.
같은 절에서 그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으로 내려온다. 모든 삶의 이야기는 고통의 이야기이고, 누구의 삶이든 크고 작은 불행이 잇달아 이어진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불행을 될 수 있는 대로 숨긴다. 남들이 거기서 함께 아파하거나 연민을 느끼는 일은 드물고, 오히려 자기는 지금 그 괴로움을 면했다는 생각에서 만족을 느낀다는 것을 다들 알고 있다.[주 2-12] 편안한 사람이 남의 고통 앞에서 느끼는 것이 대개 그것이라고 그는 보았다. 안도였다. 그래서 고통은 숨고, 숨은 고통은 편안한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한 걸음 더 나간다. 그보다 세 절 앞인 56번째 절에서 그는 고통이 앎의 정도를 따라 커진다고 쓴다.
“고통은 인간에게서 가장 높은 정도에 이르고, 인간 안에서도 더 분명히 알고 더 지성이 높은 사람일수록 더 커진다. 천재가 깃든 사람이 가장 많이 괴로워한다.”[주 2-13]
그러니 질문은 「생각해야 하는가?」에서 끝나지 않는다. 본 사람은 이미 생각하고 있다. 보지 않았을 때는 남의 고통이 그의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한번 분명히 본 고통은 지워지지 않는다. 바뇨의 사슬을 본 소년은 다시는 루브르의 신들을 같은 눈으로 보지 못했다. 편안한 사람이 남의 고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그것을 보지 않았을 때뿐이다.
*
그런데 59번째 절에는 그 자신을 찌르는 말이 하나 숨어 있다. 비참은 ‘차가운 호기심의 눈길’을 피해 숨는다고 그는 썼다. 1804년 툴롱의 바뇨에 들어간 것은 바로 그런 눈길이었다. 부유한 상인 가족이 여행 도중에 들른 감옥이었다. 그는 죄수들을 보았지만 죄수들은 그를 구경꾼으로 보았을 것이다. 그가 본 것을 그는 일기에 적었고, 그 일기를 들고 다음 도시로 갔다.
그는 59번째 절에서 아직 무엇을 하라고 하지 않는다. 낙관론을 무너뜨리는 데까지만 간다. 고통을 본 사람이 그 고통에 무엇으로 답해야 하는지, 남의 고통이 어떻게 내 행동의 까닭이 되는지는 그가 훨씬 뒤에 연민을 다루며 따로 묻는다. 열여섯 살의 여행자에게 남은 것은 답이 아니라 질문이었다.
1832년의 회고에서 그는 붓다처럼 사로잡혔다고 썼다. 그러나 붓다는 성 밖에서 고통을 보고 성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아르투어는 함부르크로 돌아갔다. 1804년 8월 말 여행이 끝났고, 그는 떠나기 전 아버지와 맺은 약속대로 상인 수업에 들어갔다.[주 2-01] 바뇨의 사슬은 그의 공책 안에 있었다. 이제 그것은 보고 지나친 풍경이 아니라, 언젠가 그가 대답해야 할 물음이었다.
후주
[주 2-01] 여행 기간(1803년 5월 초~1804년 8월 말)과 다섯 나라, 아델레를 친척에게 맡긴 것은 루트비히 뤼트케하우스, 「붓다의 출가인가? 쇼펜하우어의 여행일기」, 『쇼펜하우어 연감』 1988년호, 615~616쪽(권 번호 재확인). 여행지는 [주 1-04]의 두 연표도 같다. 귀국 뒤 상인 수업은 [주 1-06].
[주 2-02] 일기가 부모 곁에서, 부모의 눈 아래 쓰인 일종의 숙제였다는 것은 뤼트케하우스의 해석이다(같은 글 618쪽). 쇼펜하우어 협회 연표 1803~1804년 항목은 그가 여행 내내 일기를 썼고 거기에 「고양되는 인상과 짓누르는 인상」이 함께 담겼다고 적는다.
[주 2-03]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1803~1804년 여행일기』, 샤를로테 폰 그비너 편, 라이프치히: 브로크하우스, 1923, 87쪽. 뤼트케하우스의 글 623쪽에서 재인용. 한국어 의역. 원문은 alle Götter des Olymps leben hier noch, stehn wie sie vor Jahrtausenden standen, u. sehn mit ruhigem Blick den Wechsel der Zeiten um sich herum.
[주 2-04] 샤모니와 알프스에서의 열광은 같은 일기 190쪽 이하. 뤼트케하우스 620~621쪽의 정리를 따랐다. 일기 원문을 직접 인용하지 않았다.
[주 2-05] 같은 일기 211쪽. 뤼트케하우스 622쪽에서 재인용. 한국어 의역. 원문은 Ich bedauerte die arme Frau, bewunderte aber die flegmatische Ruhe womit sie ihr Leid erträgt; sie hatte das Vergnügen ein Christ zu seyn theuer erkaufen müssen! 이 장면이 일기의 첫 기록이라는 것, 그 여자의 눈이 세례 받으러 가는 길에 얼었다는 것은 뤼트케하우스의 정리다.
[주 2-06] 런던 교수형은 같은 일기 43쪽 이하. 뤼트케하우스 623쪽의 정리와 부분 인용(jämmerlicher, keineswegs ein bußträchtiger Anblick, Arm-Sünder-Glocken, Sterbekleider)을 따랐다. 「뉘우침이 담긴 광경이 아니라 비참한 광경」은 그 부분 인용의 의역이다. 쇼펜하우어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제2권(400쪽, 뤼트케하우스가 쓴 판본 기준)에서 이 장면을 「깊은 몸서리」와 「가슴이 찢어지는 연민」으로 다시 떠올린다. 이 소설은 그 대목을 직접 인용하지 않았다.
[주 2-07] 같은 일기 92쪽. 뤼트케하우스 620쪽에서 재인용. Schauplatz des ewigen Elends, der ungehörten Klagen, u. des hoffnungslosen Jammers의 한국어 의역. 혁명 때 허물렸다는 설명은 서술자의 말이다.
[주 2-08] 같은 일기 164쪽. 뤼트케하우스 619쪽과 624쪽의 정리. 일기 원문은 「전대미문의 참상」(unerhörten Gräuel)이라는 말을 쓴다.
[주 2-09] 툴롱 바뇨 방문은 같은 일기 154쪽 이하. 죄수들이 세 부류로 나뉘고 형기와 사슬의 무게로만 구별되며 짐승처럼 부려졌다는 것, 모두가 지옥 안에 있고 서로에게 지옥이라는 것, 영국의 교수형 장면보다 나쁘며 삶을 계속하게 하는 것으로 벌한다는 것, 거기서 죽음이 풀려남이 된다는 것은 뤼트케하우스 625쪽이 정리한 아르투어 일기의 내용이다. 어머니의 여행기가 더 길고 생생하며, 죄수들을 악마처럼 그리고, 탈출한 죄수들이 시민 사회를 덮치는 상상으로 끝나며, 늘 희망으로 마무리한다는 비교도 같은 쪽이다. 요한나의 책은 『파리에서 남프랑스를 거쳐 샤모니까지의 여행』(라이프치히, 3판 1824)으로 뤼트케하우스 626쪽 주석에 나온다. 1804년 「봄」은 일기 쪽수의 차례에 따른 짐작이다. 바뇨 앞에서 어머니와 아들이 나눈 대화는 소설의 창작이며, 두 사람의 기록이 보여 주는 관점의 차이를 대사로 옮겼다.
[주 2-10] 쇼펜하우어, 『콜레라 책』(1832), 아르투어 휘브셔 편 『유고』 제4권 1부, 96쪽. 뤼트케하우스 615쪽에서 재인용. 한국어 의역. 원문의 jüdischen Dogmen(「유대교의 교리」)은 구약에서 온 선한 창조주의 가르침을 가리키는 그의 말이어서 「선한 창조주의 가르침」으로 풀었다(뤼트케하우스 615쪽의 풀이를 따름). 원문의 「열일곱째 해」(17ten Jahre)는 만 열여섯 살 무렵이다. 1831년 콜레라를 피해 베를린을 떠난 것은 생애 연표. 붓다의 네 번의 외출에 빗댄 것은 쇼펜하우어 자신의 말이다.
[주 2-11] 일기가 감화원과 정신병원 앞을 말없이 지나가고, 극장·여관·옷차림 평가와 권태가 자주 나온다는 것은 뤼트케하우스 618~619쪽의 정리. 1832년 회고를 그대로 믿을 수 없다는 판단도 그의 글(615~616쪽)이 제기한 물음을 따랐다.
[주 2-12]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제1권 제4권 §59. 1891년 브로크하우스판(프라우엔슈테트 편), 인쇄 383쪽, PDF 427쪽. 스캔으로 원문을 대조했다. 첫 인용(Wenn man nun endlich noch Jedem … welcher Art dieser meilleur des mondes possibles ist)은 한국어 의역. 단테 대목(Woher denn anders hat Dante …)은 취지를 옮긴 것. 「모든 삶의 이야기는 고통의 이야기」 대목(Was aber das Leben des Einzelnen betrifft, so ist jede Lebensgeschichte eine Leidensgeschichte …)은 인쇄 382쪽, PDF 426쪽으로 스캔 대조했고, 취지를 옮긴 것이다. 예를 늘어놓지 않고 삶의 기본 구조에서 끌어냈다는 대목은 같은 절 첫머리, 인쇄 381~382쪽(PDF 425~426쪽)의 취지를 옮긴 것이다. 이 부분은 OCR로 읽었고 스캔 대조는 하지 않았다(재확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초판은 1818년 말에 나왔고 표제 연도는 1819년이다.
[주 2-13] 같은 책 §56 끝. 인쇄 366쪽, PDF 410쪽. 스캔으로 대조했다. 원문은 … ihren höchsten Grad im Menschen erreicht, und dort wieder um so mehr, je deutlicher erkennend, je intelligenter der Mensch ist: der, in welchem der Genius lebt, leidet am meisten. 한국어 의역. 문장 첫머리는 365쪽에서 시작한다(재확인).
사료에 근거한 것은 여행의 기간과 경로, 루브르·샤모니·엘베강의 눈먼 여자·런던 교수형·바스티유·리옹·툴롱 바뇨에 관한 아르투어의 일기 내용, 요한나의 여행기와의 차이, 1832년의 회고다. 일기 내용은 모두 뤼트케하우스의 글을 거쳐 확인했으며, 일기 원본(그비너판·뤼트케하우스판)은 확보한 자료에 없어 직접 대조하지 못했다. 바뇨 앞의 대화와 대사는 소설의 창작이다. 1819년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와 1832년의 회고는 열다섯·열여섯 살 아르투어의 생각이 아니라 뒷날의 글로 비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