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10,929자)
나보다 인정받는 사람을 보면 왜 내 일까지 초라해지는가?
쇼펜하우어의 삶 · 네오
1820년 3월 13일, 서른두 살의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는 드레스덴을 떠나 베를린으로 갔다.[주 18-01] 그는 이 도시에 살려고 온 것이 아니라 일자리를 얻으러 왔다. 한 해 전부터 그의 앞날의 생계가 불확실해졌고, 그는 대학에서 강의할 자리를 구하기로 마음먹었다.[주 18-02]
베를린 대학 철학부는 3월 23일 그의 시험 강의를 듣고 토론을 벌였다. 교수들은 그가 공개 시험 강의를 한 번 더 하면 강사로 인정하기로 정했다.[주 18-03] 그 자리에는 이 대학의 철학 교수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이 있었다.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슐라이어마허와 함께, 헤겔은 그 무렵 베를린에서 학문에 뜻을 둔 사람들의 관심을 이미 거의 다 차지하고 있었다.[주 18-04] 새로 온 강사가 들어설 자리는 처음부터 좁았다.
공개 시험 강의의 주제는 철학의 값어치와 뜻이었다. 그는 먼저 칸트의 큰 공적을 짚었다. 그리고 칸트가 철학에 대한 진지한 열의를 깨운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소피스트들이 나타났다고 말했다. 철학이 유행이 되자 그들이 큰 소란과 다툼 속에서 어둡고 거친 말로 시대의 사고력을 먼저 지치게 했고, 다음에는 사람들을 철학 공부에서 쫓아냈으며, 끝내 철학의 신용을 떨어뜨렸다는 말이었다. 그래도 걱정할 것은 없다고 그는 덧붙였다. 더 나은 힘을 갖춘 복수자가 다시 나타나 철학의 명예를 되찾아 줄 것이었다.[주 18-04] 이름을 대지는 않았다. 그러나 칸트 뒤에 와서 이 대학의 강단을 차지한 철학이 누구의 것인지는 듣는 사람 모두가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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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여름 학기 강의 목록에 그의 강의가 실렸다. 「온 철학, 곧 세계의 본질과 인간 정신에 관한 학설. 쇼펜하우어 박사가 일주일에 여섯 번, 네 시부터 다섯 시까지 강의한다.」[주 18-05] 같은 시간에 헤겔은 자기의 가장 중요한 강의인 논리학과 형이상학을 하고 있었다.[주 18-05]
그는 이 시간을 일부러 골랐다. 쇼펜하우어 협회의 연표는 그가 강의를 헤겔의 주 강의 시간에 ‘보란 듯이’ 놓았다고 적는다.[주 18-06] 그의 계산은 단순했다. 철학이 둘이라면 학생에게 둘을 한꺼번에 내밀고 고르게 하면 된다. 진리는 머릿수로 정해지지 않으니, 처음에 몇 사람이 오든 바른 쪽이 결국 남는다. 시간을 피해 한산한 시간에 강의를 놓는 것은 처음부터 지고 들어가는 일이었다. 그는 피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학생들의 계산은 달랐다. 그의 유언 집행자이자 전기 작가인 빌헬름 그비너는 그 사정을 이렇게 정리했다. 학생 대부분은 졸업해서 밥벌이할 공부에 매여 있었다. 그런 학생에게 일주일에 몇 시간씩 이어지는 사변 철학 강의는 시간도 돈도 너무 많이 드는 희생이었고, 그 강의가 헤겔의 강의와 같은 시간이라면 더욱 그랬다.[주 18-07] 학생들은 진리의 편을 고른 것이 아니라, 시험에 나오고 이름이 알려진 교수 쪽을 골랐다. 그것은 비겁이 아니라 생활이었다. 그의 논리도 틀리지 않았고 학생들의 논리도 틀리지 않았다. 다만 두 논리가 같은 시간표 위에서 부딪치자 이기는 쪽은 정해져 있었다.
첫 학기 강의는 그래도 열렸다. 몇 사람이 들었는지는 기록에 없다.[주 18-05] 8월 9일 그는 예나에 사는 친구 프리드리히 오잔에게 편지를 썼다. “강의를 아직도 끝맺지 못하고 있지만, 다음 주에는 결국 ‘미사가 끝났다’고 말해야 할 것 같다.”[주 18-05] 미사의 끝을 알리는 라틴어 문구를 빌린 농담이었다. 그러나 그 학기가 그가 베를린에서 끝까지 해낸 처음이자 마지막 강의가 되었다.[주 18-07]
겨울 학기에 그는 같은 강의를 일주일에 다섯 시간으로 줄여 다시 냈다. 시간은 다섯 시부터 여섯 시, 헤겔이 예술 철학인 미학을 강의하는 시간이었다. 강의를 열 만큼 학생이 모이지 않았다. 이듬해 여름 학기에도 그는 헤겔의 논리학 시간에 강의를 걸었고, 그 강의도 열리지 않았다.[주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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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2년 봄 그는 다시 이탈리아로 떠났고, 1825년에 베를린으로 돌아왔다. 1826년 겨울 학기부터 그의 이름이 다시 강의 목록에 올랐다. 이번에도 시간은 열두 시부터 한 시까지, 헤겔이 자기 철학 전체를 개관하는 강의를 하는 시간이었다. 대학의 학기 보고서는 그 결과를 짧게 적었다. 수강자가 하나도 없어 강의하지 않음. 한 사람만 신청해 열리지 않음. 세 사람만 신청해 강의하지 않음. 두 사람뿐이어서 강의하지 않음.[주 18-05] 같은 시간에 헤겔의 강의실은 비지 않았다.
빈 강의실 하나만으로는 사람이 그렇게까지 작아지지 않는다. 그를 작게 만든 것은 복도 건너편의 꽉 찬 강의실이었다. 그는 자기 책이 틀렸다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도 학기마다 같은 시간표가 나올 때면, 자기가 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까지 덜 중요한 책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있었다. 그 책의 내용은 한 글자도 바뀌지 않았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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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다 인정받는 사람을 보면 왜 내 일까지 초라해지는가? 초라해지는 것은 일이 아니라, 그 일의 값을 매기는 자리다. 일은 내 손에 그대로 있다. 그런데 그 값을 남의 머릿속에서 매기기 시작하면, 남이 다른 사람을 더 높이 칠 때마다 내 일의 값도 함께 내려간다.
그는 이 이치를 서른 해 뒤에 글로 적었다. 1851년, 예순세 살의 쇼펜하우어는 『소품과 부록』을 펴냈고, 그 첫째 권에 실린 「인생의 지혜를 위한 아포리즘」의 넷째 장을 ‘남에게 어떻게 보이는가?’라는 물음에 바쳤다. 그는 거기서 먼저 사람이 사는 자리를 둘로 나눈다. 그 사람이 자기 안에서, 자기에게 무엇인가는 그 자신의 의식 안에 있다. 그 사람이 남에게 무엇인가는 남의 의식 안에 있다. 남의 의식 안에 있는 내 모습은 나에게 곧바로 닿지 않는다. 그것은 남들이 그 모습에 따라 나를 대할 때에만, 그것도 그 대우가 내 삶을 실제로 바꿀 때에만 나와 상관이 있다.[주 18-08]
그렇다고 그가 남의 평가를 아예 쓸모없다고 하지는 않는다. 같은 장에서 그는 사람들이 나를 믿어 주어야 함께 일하고 거래할 수 있으니, 남의 좋은 평판은 사회 속에 사는 동안 높은 값어치를 가진다고 인정한다. 다만 그 값어치는 언제나 간접적이다. 평판이 무언가를 가져다주기 때문에 귀할 뿐, 평판 자체가 목적이 될 수는 없다. 수단이 목적보다 더 귀할 수는 없다고 그는 못 박는다.[주 18-09] 생활에 필요한 평판과 삶을 통째로 거는 인정은 여기서 갈린다.
이름이 알려지는 일, 곧 명성에 대해서 그는 한 걸음 더 들어간다.
“명성은 본래 한 사람이 나머지 사람들과 견주어 무엇인가에 달려 있다. 그러니 명성은 본질적으로 상대적인 것이고, 상대적인 값어치밖에 가질 수 없다. 나머지 사람들이 모두 이름난 그 사람과 같아진다면 명성은 통째로 사라질 것이다. 어떤 형편에서도 값어치를 잃지 않는 것만이 절대적인 값어치를 가질 수 있는데, 여기서 그것은 한 사람이 그 자신에게 곧바로 무엇인가다.”[주 18-10]
명성이 견줌에서 나온다면, 견줌은 한쪽만 올리지 않는다. 그는 같은 장에서 그 반대쪽을 이렇게 적는다.
“누군가 명성을 얻으면, 같은 부류의 모든 사람 위로 한 사람이 또 올라선다. 그만큼 나머지는 내려앉는다. 그래서 뛰어난 공적은 어느 것이나 공적이 없는 사람들의 몫을 깎아서 명성을 얻는다.”[주 18-11]
그리고 그는 괴테의 시 두 줄을 붙인다. 남에게 영예를 주면 우리는 그만큼 우리 자신을 낮추어야 한다.[주 18-11] 남을 높이는 박수는 공짜가 아니다. 박수를 치는 사람은 손뼉을 치는 동안 자기 자리를 한 칸 내준다. 그래서 사람들은 박수를 아끼고, 새로 떠오르는 사람을 처음에는 못 본 척한다. 그는 이미 이름을 얻은 사람조차 새 이름이 떠오르는 것을 반기지 않는다고 덧붙인다. 새 이름이 빛나는 만큼 자기 이름의 빛은 흐려진다.[주 18-11]
그는 철학이 가장 불리한 자리에 있다고 본다. 즐거움을 약속하는 작품보다 가르침을 약속하는 작품이 명성을 얻기 어렵고, 그 가운데서도 철학 저작이 가장 어렵다. 철학이 약속하는 가르침은 확실하지도 않고 당장 쓸모도 없으니, 철학 책은 맨 처음에 거의 모두가 경쟁자인 독자들 앞에 서게 된다.[주 18-12] 1820년 베를린의 강의 시간표가 바로 그 경쟁자들의 무대였다.
이 논증을 따라가면 그의 답은 두 겹이다. 첫째, 남이 인정받을 때 내 일이 초라해 보이는 것은 착각이 아니다. 명성은 실제로 상대적이어서, 저울 한쪽이 올라가면 다른 쪽이 내려간다. 둘째, 그 저울에 올라가 있는 것은 내 일이 아니라 남의 머릿속에 비친 내 일의 그림자다. 그림자가 줄어든다고 몸이 줄지는 않는다. 그는 명성을 얻을 만한 일을 해 놓고도 명성을 얻지 못한 사람이 이미 중요한 것을 가졌다고 쓴다. 남들이 그를 큰 사람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그가 실제로 큰 사람이라는 것이 그를 부러워할 만하게 만든다.[주 18-13]
그는 같은 자리에서 박수 소리의 값을 따지는 비유 하나를 든다. 한 연주자가 객석의 우레 같은 박수를 받는다. 그런데 그 청중이 한두 사람을 빼고 모두 귀가 들리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해 보자. 그들은 서로 자기 약점을 감추려고, 앞줄의 한 사람이 손을 움직이는 것을 보자마자 열심히 손뼉을 친다. 그 앞줄의 박수꾼마저 돈을 받고 가장 형편없는 연주자에게 가장 큰 박수를 몰아준 적이 있다는 것까지 알게 된다면, 연주자는 그 박수에 우쭐할 수 있겠는가? 그는 동시대의 박수가 대개 그런 구조라고 본다. 어려운 일을 스스로 가늠할 눈이 없는 사람들은 남의 권위를 따라 손뼉을 치고, 그래서 높은 명성은 백 사람 가운데 아흔아홉에게 그저 믿음으로 전해질 뿐이다.[주 18-13] 이 비유를 1820년의 시간표에 대 보면, 복도 건너편의 꽉 찬 강의실도 그 자체로는 헤겔 철학이 옳다는 증명이 되지 못한다. 빈 강의실이 그의 철학이 틀렸다는 증명이 되지 못하는 것과 똑같다. 박수의 크기와 일의 크기는 서로 다른 저울에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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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같은 장에는 그가 쉽게 빠져나가지 못하는 문장이 있다. 그는 명성을 얻을 만한 사람들이 대개 자기가 뛰어나다는 불확실한 의식을 오래 품고 살아야 한다고 쓴다. 그것을 시험하고 인정받을 기회가 올 때까지 그들은 남모르는 억울함을 당하는 기분으로 지낸다.[주 18-14] 그는 그 기분을 바깥에서 관찰한 사람처럼 적었다. 그러나 1820년부터 열한 해 동안 헤겔의 시간에 강의를 걸었다가 거둔 사람은 바로 그 자신이었다.
더 날카로운 대목도 있다. 진짜 명성은 잃어버릴 수 없다고 말하던 그는, 사라지는 명성은 처음부터 가짜였다고 덧붙인다. 그리고 그런 가짜 명성의 보기로 이름 하나를 댄다. 헤겔이 누린 것 같은 명성, 친한 후보생 무리가 나팔을 불고 빈 머리들이 메아리로 되받은 명성이었다.[주 18-15] 남의 인정에 매달리는 마음을 그렇게 차분히 해부한 사람이, 한 사람의 이름 앞에서는 해부를 멈추고 판결을 내렸다. 그 판결이 철학적 평가였는지, 서른두 살에 시간표 위에서 진 사람의 상처였는지는 그 문장만으로 가를 수 없다. 둘은 한 문장 안에 엉겨 있었다.
그는 남이 인정받을 때 사람이 작아지는 까닭을 정확히 보았다. 그리고 그 까닭이 자기에게도 똑같이 작동한다는 것을 끝내 완전히 인정하지는 않았다. 시기는 남들이 그의 책 앞에서 입을 다무는 까닭이었고, 그 자신이 헤겔의 이름 앞에서 날을 세우는 까닭이기도 했다.
1831년 8월, 그는 콜레라를 피해 베를린을 떠났다. 헤겔은 얼마 뒤 그 콜레라로 세상을 떠났다.[주 18-16] 그해 겨울 학기 강의 목록에는 그의 강의가 한 번 더 실려 있었다. 시간은 여전히 열두 시부터 한 시까지, 헤겔의 강의와 같은 시간이었다.[주 18-05] 두 사람 모두 없는 강의 목록에서 그의 이름은 마지막까지 경쟁자의 시간에 묶여 있었다. 견줄 사람이 사라진 뒤에도 견주던 자리는 남는가?
후주
[주 18-01] 1820년 3월 13일 드레스덴에서 베를린으로 떠난 것은 아르투어 휘브셔, 「쇼펜하우어의 베를린 연인 — 알려지지 않은 편지들」, 『쇼펜하우어 연감』 1974년호(권 번호 재확인), 42쪽. 나이는 1788년 2월 22일 출생에서 셈했다.
[주 18-02] 앞날의 생계가 불확실해져(Die ungeklärte Zukunftsexistenz) 베를린 대학의 강사 자리를 구하게 된 것은 쇼펜하우어 협회 연표 1818~1819년 항목(schopenhauer.de/zeittafel).
[주 18-03] 1820년 3월 23일 철학부 앞의 시험 강의와 토론, 「공개 시험 강의를 하면 강사로 인정한다」는 철학부의 결정은 아르투어 휘브셔, 「대학 교사로서의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 연감』 1958년호, 172쪽이 옮긴 철학부 회의록(Die Facultät beschloß, daß er als habilitirt betrachtet werden solle, sobald er seine öffentliche Probevorlesung würde gehalten haben).
[주 18-04] 헤겔과 슐라이어마허가 이미 당대 학문의 관심을 모두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 공개 시험 강의가 철학의 값어치와 뜻을 다루었다는 것, 칸트 뒤의 소피스트와 복수자에 관한 그의 말은 빌헬름 그비너,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 개인적 교류로 본 그의 삶』(샤를로테 폰 그비너 교열판, 1922), 75~76쪽. 그비너가 간접 화법으로 전한 것을 취지로 옮겼다. 「invita Minerva」를 그비너는 「철학이 유행이 된 뒤」로 풀었다. 공개 시험 강의의 날짜는 자료에 없어 3월 23일 뒤의 봄에 두었다. 「듣는 사람 모두가 알았다」는 서술자의 판단이다.
[주 18-05] 강의 목록 문구(Die gesamte Philosophie, d. i. die Lehre vom Wesen der Welt und dem menschlichen Geiste, trägt privatim vor wöchentlich sechsmal von 4–5 Herr Dr. Schopenhauer), 헤겔의 같은 시간 강의(논리학과 형이상학, 미학, 「엔치클로페디」), 1820/21년 겨울과 1821년 여름 강의가 열리지 않은 것, 1826/27년 겨울부터 1831/32년 겨울까지 열두 시~한 시에 강의를 건 것, 대학 보고서의 문구(gar keine Zuhörer, nur ein Zuhörer, nur drei Zuhörer, nur zwei Zuhörer), 첫 학기 수강자 수가 알려져 있지 않다는 것, 1820년 8월 9일 오잔에게 쓴 편지(Ich kann mit meinen Vorträgen noch immer das Ende nicht finden: aber nächste Woche werde ich denn doch sagen müssen ecclesia missa est)는 모두 휘브셔 1958, 174~175쪽. 편지는 휘브셔의 재인용을 한국어로 의역한 것이며 편지 원본은 대조하지 않았다. 휘브셔는 1828/29년 겨울 학기 신청서에 다섯 사람이 이름을 적었다는 그비너의 기록도 함께 전한다. 「헤겔의 강의실은 비지 않았다」는 서술자의 말로, 헤겔 강의의 수강자 수는 확인하지 않았다.
[주 18-06] 쇼펜하우어 협회 연표 1820년 항목(Da Schopenhauer seine Vorlesungen demonstrativ zu den Stunden von Hegels Hauptkolleg ansetzt, bleiben ihm die Hörer aus). 스탠퍼드 철학 백과(plato.stanford.edu/entries/schopenhauer) 1절도 그가 자신만만하게 헤겔의 인기 강의와 같은 시간을 골랐다고 적는다. 시간을 고른 그의 계산을 풀어 쓴 대목은 소설의 재구성이다.
[주 18-07] 그비너 1922, 76쪽. 학생들이 밥벌이 공부에 매여 있어 헤겔과 겨루는 여러 시간짜리 사변 철학 강의가 너무 큰 희생이었다는 것, 첫 강의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열린 강의였다는 것은 그비너의 서술을 취지로 옮겼다. 1826년 이후 대학 보고서의 기록과 견주면 「열린 강의는 그것뿐」이라는 그비너의 말은 사실과 맞는다.
[주 18-08] 쇼펜하우어, 『소품과 부록』 제1권 「인생의 지혜를 위한 아포리즘」 제4장 「남에게 어떻게 보이는가」 둘째 문단(Demnach wird eine richtige Abschätzung des Wertes dessen, was man in und für sich selbst ist …). 1913년 올레판 전자 전사, 프로젝트 구텐베르크 47406번. 취지를 옮긴 것이다. 『소품과 부록』은 1851년에 나왔다.
[주 18-09] 같은 장, 「Der Wert der Ehre ist nur ein mittelbarer」로 시작하는 문단. 취지를 옮긴 것이다. 「수단이 목적보다 더 귀할 수는 없다」는 Da nun das Mittel nicht mehr wert sein kann als der Zweck 의 의역이다.
[주 18-10] 같은 장, 명성을 다루는 부분의 「Der Ruhm beruht eigentlich auf dem, was einer im Vergleich mit den Übrigen ist」로 시작하는 문단 첫머리. 한국어 의역. 원문은 Der Ruhm beruht eigentlich auf dem, was einer im Vergleich mit den Übrigen ist. Demnach ist er wesentlich ein Relatives, kann daher auch nur relativen Wert haben. Er fiele ganz weg, wenn die Übrigen würden was der Gerühmte ist. Absoluten Wert kann nur das haben, was ihn unter allen Umständen behält, also hier, was einer unmittelbar und für sich selbst ist.
[주 18-11] 같은 장, 「Zu dieser intellektuellen Unfähigkeit der Menschen」으로 시작하는 문단. 앞의 인용은 한국어 의역이며 원문은 Durch den Ruhm nämlich, den einer erwirbt, wird abermals einer mehr über alle seiner Art erhoben: diese werden also um ebenso viel herabgesetzt, so daß jedes ausgezeichnete Verdienst seinen Ruhm auf Kosten derer erlangt, die keines haben. 괴테의 시는 『서동시집』에서 그가 인용한 Wenn wir andern Ehre geben, / Müssen wir uns selbst entadeln 의 의역이다. 이미 이름을 얻은 사람도 새 명성을 반기지 않는다는 대목(Aber sogar auch die, welche selbst Verdienste besitzen …)은 취지를 옮긴 것이다.
[주 18-12] 같은 문단 뒷부분(Am größten ist sie bei philosophischen Werken … vor einem Publiko auftreten, das aus lauter Mitbewerbern besteht). 취지를 옮긴 것이다.
[주 18-13] 같은 장, 「Hieraus endlich erklärt es sich auch」로 시작하는 문단. 명성을 얻을 만한 사람이 이미 중요한 것을 가졌다는 대목(Wer demnach nur den Ruhm verdient, auch ohne ihn zu erhalten, besitzt bei weitem die Hauptsache … sondern daß er es sei, macht ihn beneidenswert)과 연주자와 귀먹은 청중의 비유(Würde wohl ein Virtuose sich geschmeichelt fühlen …), 높은 명성이 백 사람 가운데 아흔아홉에게 믿음으로만 전해진다는 대목(bei 99 unter 100 Rühmern, bloß auf Treu und Glauben)을 취지로 옮겼다.
[주 18-14] 같은 장의 각주 [J]가 붙은 문장(… meistens das unsichere Bewußtsein ihres überwiegenden Wertes lange in sich herumtragen müssen, ehe die Gelegenheit kommt, solchen zu erproben und dann die Anerkennung desselben zu erfahren: bis dahin war ihnen zu Mute, als erlitten sie ein heimliches Unrecht). 취지를 옮긴 것이다.
[주 18-15] 같은 장, 「So schwer es demnach ist, den Ruhm zu erlangen」으로 시작하는 문단 끝(so ein Ruhm wie Hegel ihn hatte und Lichtenberg ihn beschreibt, »ausposaunt von einer freundschaftlichen Kandidatenjunta und vom Echo leerer Köpfe widergehallt«). 리히텐베르크의 말을 빌린 대목을 취지로 옮겼다.
[주 18-16] 1831년 8월 콜레라를 피해 베를린을 떠난 것, 헤겔이 얼마 뒤 그 콜레라로 죽은 것은 쇼펜하우어 협회 연표 1825~1831년 항목. 1831/32년 겨울 학기 강의 목록에 그의 강의가 다시 실린 것은 휘브셔 1958, 175쪽.
사료에 근거한 것은 1820년 베를린행과 그 까닭, 3월 23일 철학부의 결정, 공개 시험 강의의 내용, 강의 목록의 문구와 시간, 헤겔 강의와 시간이 겹친 것, 학기마다 강의가 열리지 않은 기록, 오잔에게 쓴 편지, 1831년의 출발과 헤겔의 죽음이다. 시간을 고른 그의 계산과 학생들의 계산은 그비너와 협회 연표의 기록을 바탕으로 소설이 풀어 쓴 것이며, 대사로 지어 넣지 않았다. 빈 강의실 앞에서 자기 책이 덜 중요해 보였다는 그의 느낌, 헤겔 강의실의 모습은 소설의 창작이다. 1851년의 「인생의 지혜를 위한 아포리즘」은 1820년의 쇼펜하우어가 한 생각이 아니라 예순세 살의 저작으로 비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