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10,603자)
욕망을 버리라고 쓰면서 성공을 원하다
쇼펜하우어의 삶 · 네오
1818년 8월, 드레스덴. 서른 살의 쇼펜하우어는 마지막으로 남은 글 한 편을 쓰고 있었다. 책 맨 앞에 놓일 머리말이었다. 본문은 이미 라이프치히 남쪽의 작은 도시 알텐부르크에서 인쇄되고 있었다. 인쇄는 더디게 나아갔고, 그 일로 그가 출판인 브로크하우스와 주고받는 편지는 갈수록 날카로워지고 있었다. 그 한가운데서 그는 자기 책을 처음 펼칠 독자에게 건넬 첫 말을 골랐다.
머리말은 독자에게 거는 조건으로 시작했다. 그는 먼저 이 책이 단 하나의 생각을 전하려 한다고 밝히고, 그 생각을 알아들으려면 책을 두 번 읽으라고 했다. 처음 읽을 때는 참을성을 가지고, 두 번째 읽을 때 비로소 앞부분이 뒷부분에 비추어 제대로 보일 것이라고 했다. 그다음 조건은 그가 다섯 해 전에 낸 박사 논문을 먼저 읽으라는 것, 그리고 철학자 칸트의 주요 저작들을 알고 오라는 것이었다. 독자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의 학교에 머문 적이 있다면 더 좋고, 고대 인도의 경전 우파니샤드까지 받아들인 사람이라면 가장 잘 준비된 독자라고 그는 썼다.[주 16-01]
그리고 그는 그 조건을 들은 독자가 화를 내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그 화난 독자의 목소리를 머리말 안에 직접 불러들였다.
*
“대부분의 독자는 이미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 그동안 겨우 눌러 온 꾸지람을 터뜨렸을 것이다. 어떻게 감히 이런 조건을 내걸고 책을 내놓을 수 있느냐, 그중 둘은 주제넘고 염치없는 요구가 아니냐. 독창적인 생각이 이렇게 흘러넘쳐 독일에서만 해마다 알차고 새롭고 없어서는 안 될 책이 삼천 권씩 찍혀 나오고, 수많은 잡지와 날마다 나오는 신문까지 있는 이때에 말이다. 독일 땅에만 깊고 독창적인 철학자가 다른 시대 몇 백 년치보다 더 많이 한꺼번에 살고 있는 이때에 말이다. 책 한 권을 이렇게 번거롭게 대해야 한다면 대체 언제 끝을 보겠느냐고, 화난 독자는 묻는다.”[주 16-02]
그는 그 꾸지람에 맞설 말이 하나도 없다고 했다. 다만 그런 독자들이 한 시간도 허비하지 않도록 미리 일러 준 것에 대해 고맙다는 말 정도는 듣기를 바란다고 했다. 이 책은 조건을 채우지 않고 읽으면 열매를 맺지 못하니 아예 읽지 않는 편이 낫다. 그리고 이 책은 언제나 소수의 사람만을 위한 책일 것이므로, 그 드문 생각의 방식을 즐길 줄 아는 몇 사람을 차분하고 겸손하게 기다려야 한다고 썼다.[주 16-02]
그러고는 한 걸음 더 나갔다. 머리말까지 와서 거절당한 독자는 이미 제 돈을 내고 책을 산 사람이다. 그 사람에게 무엇으로 보상할 것인가? 그는 이렇게 답했다.
“이제 내게 남은 마지막 길은 그에게 일깨우는 것이다. 책이란 꼭 읽지 않아도 여러 가지로 쓸 수 있다. 다른 많은 책처럼 서가의 빈자리를 메울 수 있고, 깔끔하게 제본해 꽂아 두면 분명 보기에 좋을 것이다. 아니면 학식 있는 여자 친구의 화장대나 찻상 위에 올려 둘 수도 있다. 아니면 마지막으로, 이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고 내가 특히 권하는 바인데, 그 책의 서평을 쓸 수도 있다.”[주 16-03]
농담이었다. 그러나 그 농담은 그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정확히 드러냈다. 책이 읽히지 않고 장식품이 되는 것, 그리고 읽지도 않은 사람들이 서평을 써서 그 책을 심판하는 것이었다. 그는 농담을 마치고 머리말의 마지막 문장을 썼다.
“이렇게, 처음부터 끝까지 모호한 이 삶에서 어떤 종이도 너무 진지해서 농담 한 자리를 내줄 수 없을 만큼 진지할 수는 없기에 나는 농담을 하나 했다. 그러고 나서 나는 깊은 진심으로 이 책을 내놓는다. 이 책이 이르든 늦든 오직 이 책이 향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닿으리라고 믿는다. 그리고 담담히 받아들인다. 어떤 앎에서나, 그러니 가장 중요한 앎에서는 더욱더, 진리에게 늘 주어진 그 운명이 이 책에도 고스란히 닥치리라는 것을. 진리에게는 짧은 승리의 축제가 허락될 뿐이다. 그 앞에는 역설이라고 저주받는 긴 시간이, 그 뒤에는 뻔한 소리라고 업신여김받는 긴 시간이 있다. 앞의 운명은 그 진리를 처음 말한 사람에게도 함께 닥치곤 한다. 그러나 삶은 짧고, 진리는 멀리까지 미치며 오래 산다. 진리를 말하자.”[주 16-04]
머리말 끝에는 「1818년 8월 드레스덴에서 씀」이라고 적혔다.[주 16-04] 같은 달 그가 출판인에게 보낸 편지들에는 그런 담담함이 한 줄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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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2일, 이탈리아로 떠나기 며칠 전 그는 브로크하우스에게 짧은 편지를 썼다. 브로크하우스는 두꺼운 원고를 두 권으로 나누어 낼 생각을 내비친 모양이었다. 그는 이렇게 썼다.
“내 뜻대로라면 이 책은 한 권으로만 나와야 합니다. 그래도 당신이 두 권으로 만들겠다면, 두 권은 반드시 함께 나와야 합니다. 계약서에 분명히 한 권이라고 적혀 있으니 나는 그렇게 요구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라 그것이 당신의 이익이기도 합니다. 앞의 부분들만 읽고 마지막 부분 없이 이 책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 자세한 까닭은 머리말에 있습니다. 그러니 두 권을 따로 내는 것은 책이 팔리는 길을 크게 좁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될 것입니다.”[주 16-05]
그는 알텐부르크에서 하는 세 번째 교정에 오자가 많다며 교정자를 바꿔 달라고 했다. 자기 몫의 좋은 종이 인쇄본은 드레스덴의 크반트가 맡을 것이며, 남은 인쇄 전지를 로마로 보내 주는 일도 그가 맡았다고 알렸다. 그리고 서명 아래 한 줄을 덧붙였다. 나는 10월 말까지 다 찍겠다는 인쇄소의 말을 믿고 떠나니, 그 일을 어떻게든 앞당기고 오자를 줄이는 것은 당신의 의무이자 당신의 이익이다.[주 16-05]
브로크하우스가 왜 두 권을 생각했는지는 남아 있지 않다. 다만 그의 처지는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이 책 말고도 많은 책을 내는 출판인이었고, 아무도 모르는 저자의 두꺼운 철학책을 한 덩어리로 내놓는 것은 팔기 어려운 물건을 더 팔기 어렵게 만드는 일로 보였을 것이다. 쇼펜하우어의 처지도 분명했다. 그에게 이 책은 하나의 생각이었고, 반으로 자른 생각은 생각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는 그 이유를 대면서 「팔리는 길」을 들었다. 머리말에서 소수의 독자를 차분히 기다리겠다고 쓴 사람이, 출판인에게는 판매가 줄어들 것을 걱정하는 말로 자기 뜻을 밀어붙였다.
이틀 뒤 브로크하우스는 더는 그의 편지를 받지 않겠다고 답했고, 쇼펜하우어는 책이 나오는 것을 보지 못한 채 9월 말 드레스덴을 떠났다.[주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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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믿는 원칙대로 살지 못하면 그 원칙도 거짓인가? 원칙대로 살지 못한다고 그 원칙이 거짓이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원칙을 이미 살아 낸 사람처럼 말한다면 그 말은 거짓이 된다.
1818년 9월 알텐부르크의 인쇄기에 걸려 있던 원고의 마지막 부분이 바로 원함을 놓는 일을 다루었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제1권은 번호를 붙인 짧은 절로 나뉘는데, 삶과 행동을 다루는 넷째 부분의 68번째 절에서 그는 ‘삶에의 의지의 부정’을 말한다. 그것은 무언가를 참아 내는 일이 아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자신과 세상의 본질을 끝까지 꿰뚫어 알게 되면, 그 앎이 모든 원함을 가라앉히는 진정제가 된다. 그때 그 사람에게서 제 뜻을 꺾고 몸을 다스리는 금욕이 저절로 나타난다.[주 16-07] 다짐해서 욕심을 누르는 것이 아니라, 앎이 깊어져 원할 까닭이 사라지는 일이다.
그러니 그가 말한 부정은 일상의 절제와 다르다. 덜 먹고 덜 사고 덜 바라는 것은 생활의 지혜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원함의 크기를 줄일 뿐 원함 자체를 놓은 것이 아니다. 머리말의 ‘담담히 받아들인다’도 그렇다. 그는 당대의 외면을 받아들이겠다고 했지만, 그 대신 ‘이르든 늦든’ 올 독자를 믿었다. 그것은 성공을 버린 마음이 아니라, 성공을 뒤로 미룬 마음이었다. 원함은 사라지지 않고 더 먼 곳으로 옮겨 갔을 뿐이다.
여기서 세 가지를 갈라 두어야 한다. 첫째는 절제다. 지금 원하는 것을 조금 덜 원하도록 스스로를 다스리는 일이다. 둘째는 체념이다. 원하는 것을 지금은 얻을 수 없다고 받아들이고, 그 대신 다른 때와 다른 곳에서 얻기를 바라는 일이다. 셋째가 그가 말한 부정이다. 원하는 일 자체가 그 사람 안에서 힘을 잃는 일이다. 앞의 둘은 모두 원함의 테두리 안에 있다. 절제는 원함의 양을 고치고, 체념은 원함의 날짜를 고친다. 부정만이 원함의 바탕을 건드린다. 1818년 8월의 머리말이 보여 준 것은 둘째 것이었다.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가 책의 마지막 부분에 쓴 것과는 다른 일이었다.
그는 이 모순을 몰랐을까? 같은 68번째 절에서 그는 이렇게 쓴다.
“성자가 철학자일 필요가 없듯이, 철학자가 성자일 필요도 없다. 완벽하게 아름다운 사람이 위대한 조각가일 필요가 없고, 위대한 조각가가 스스로 아름다운 사람일 필요가 없는 것과 같다. 대체로 도덕을 말하는 사람에게 자기가 가진 덕 말고는 권하지 말라고 요구하는 것은 이상한 요구다. 세상의 본질 전체를 추상적으로, 보편적으로, 분명하게 개념으로 다시 그려 내어, 이성 속에 언제든 꺼내 볼 수 있는 그림으로 남기는 일, 그것이 철학이고 그 밖의 아무것도 아니다.”[주 16-07]
그의 논증은 이렇다. 먼저 전제가 있다. 성자는 이론으로 성자가 되지 않고, 세상을 곧바로 꿰뚫어 보는 직관으로 성자가 된다. 그래서 인도의 성자든 그리스도교의 성자든 라마교의 성자든 저마다 매우 다른 교리로 제 행동을 설명하고, 심지어 터무니없는 미신에 빠져 있어도 성자일 수 있다. 그를 성자로 증명하는 것은 오직 그의 행동이다.[주 16-07] 다음으로 이유가 있다. 철학자가 하는 일은 그 행동을 개념으로 옮겨 놓는 것이다. 조각가가 아름다움을 돌에 새기는 일과 자기 몸이 아름다운 것이 다른 일이듯, 철학자가 부정을 정확히 그려 내는 일과 스스로 부정에 이르는 일은 다른 일이다. 결론은 이렇다. 원칙을 말한 사람이 그 원칙대로 살지 못한다고 해서 그 원칙이 틀린 것은 아니다. 원칙의 참과 거짓은 그것이 세상을 바르게 그렸느냐로 가려진다.
이 논증은 정직하다. 그는 자기가 성자라고 하지 않았다. 그는 성자가 무엇인지를 그렸을 뿐이다. 담배를 끊지 못한 의사가 담배가 해롭다고 말할 때, 그 말이 거짓이 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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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논증은 그를 너무 쉽게 놓아주기도 한다. 조각가와 아름다운 사람의 비유는 그림과 몸이 따로 있을 때만 맞는다. 그가 그린 것은 바깥의 돌이 아니라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였다. 그런 그림을 그린 사람은 그 그림 앞에 자기 삶을 세워 보지 않을 수 없다. 1818년 8월 그는 한 손으로 진리의 긴 기다림을 담담히 받아들인다고 썼고, 같은 달 다른 손으로는 인쇄가 하루라도 늦어지는 것을 견디지 못했다. 원고와 편지를 나란히 놓으면 원고가 틀렸다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원고를 쓴 사람이 원고가 말하는 자리에서 얼마나 멀리 있는지는 또렷이 보인다.
그리고 그 거리는 이제 더 벌어질 참이었다. 머리말은 진리를 처음 말한 사람도 역설이라는 저주를 함께 받곤 한다고 미리 일러 두었다. 그 말이 자기에게 들어맞을지, 그는 알프스 너머에서 기다려야 했다. 원함을 놓으라고 쓴 책의 운명을, 그는 누구보다 간절히 원하며 기다리게 되었다.
그가 떠날 때 머리말의 마지막 문장은 이미 인쇄소에 가 있었다. 삶은 짧고, 진리는 멀리까지 미치며 오래 산다. 그 문장을 쓴 사람은 그 먼 곳보다 올가을 책 시장을 먼저 생각하고 있었다.
후주
[주 16-01]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제1권 「초판 머리말」. 1891년 브로크하우스판(프라우엔슈테트 편), 인쇄 IX~XV쪽. 단 하나의 생각을 전한다는 것, 두 번 읽으라는 것, 박사 논문(『충족 이유율의 네 겹의 뿌리에 관하여』, 1813)과 칸트의 주요 저작을 먼저 알아야 한다는 것, 플라톤과 우파니샤드를 받아들인 독자가 가장 잘 준비되어 있다는 것은 XI~XIII쪽의 취지를 OCR로 읽고 옮겼다(재확인). 머리말은 1891년판에 「초판 머리말」로 그대로 실려 있다. 브로크하우스와의 편지가 날카로워졌다는 것은 빌헬름 그비너, 『쇼펜하우어의 생애』(1878), 173쪽의 서술을 따랐다.
[주 16-02] 같은 머리말, 인쇄 XIII~XIV쪽, PDF 17~18쪽. 스캔으로 대조했다. 인용은 XIII쪽 Aber schon sind die meisten Leser ungeduldig aufgefahren und in den mühsam so lange zurückgehaltenen Vorwurf ausgebrochen … wie man denn, fragt der entrüstete Leser, zu Ende kommen solle, wenn man mit einem Buche so umständlich zu Werke gehen müßte? 의 한국어 의역이다. 「삼천 권」(jährlich in drei Tausend gehaltreichen, originellen und ganz unentbehrlichen Werken)은 원문의 비꼼을 살렸다. 맞설 말이 없다는 것, 미리 일러 준 데 대한 고마움, 「소수의 사람만을 위한」(paucorum hominum), 몇 사람을 「차분하고 겸손하게 기다려야 한다」(gelassen und bescheiden auf die Wenigen warten muß)는 XIII~XIV쪽의 취지를 옮긴 것이다.
[주 16-03] 같은 머리말, 인쇄 XIV쪽, PDF 18쪽. 스캔으로 대조했다. 원문은 Meine letzte Zuflucht ist jetzt, ihn zu erinnern, daß er ein Buch, auch ohne es gerade zu lesen, doch auf mancherlei Art zu benutzen weiß. Es kann, so gut wie viele andere, eine Lücke seiner Bibliothek ausfüllen, wo es sich, sauber gebunden, gewiß gut ausnehmen wird. Oder auch er kann es seiner gelehrten Freundin auf die Toilette, oder den Theetisch legen. Oder endlich er kann ja, was gewiß das Beste von Allem ist und ich besonders rathe, es recensiren. 한국어 의역. 그 앞의 「머리말까지 와서 거절당한 독자는 제 돈을 내고 책을 샀다」(hat das Buch für baares Geld gekauft und fragt, was ihn schadlos hält?)는 같은 쪽의 취지다.
[주 16-04] 같은 머리말, 인쇄 XV쪽, PDF 19쪽. 스캔으로 대조했다. 원문은 Und so, nachdem ich mir den Scherz erlaubt, welchem eine Stelle zu gönnen in diesem durchweg zweideutigen Leben kaum irgend ein Blatt zu ernsthaft seyn kann, gebe ich mit innigem Ernst das Buch hin, in der Zuversicht, daß es früh oder spät Diejenigen erreichen wird, an welche es allein gerichtet seyn kann, und übrigens gelassen darin ergeben, daß auch ihm in vollem Maaße das Schicksal werde, welches in jeder Erkenntniß, also um so mehr in der wichtigsten, allezeit der Wahrheit zu Theil ward, der nur ein kurzes Siegesfest beschieden ist, zwischen den beiden langen Zeiträumen, wo sie als paradox verdammt und als trivial geringgeschätzt wird. Auch pflegt das erstere Schicksal ihren Urheber mitzutreffen — Aber das Leben ist kurz und die Wahrheit wirkt ferne und lebt lange: sagen wir die Wahrheit. (Geschrieben zu Dresden im August 1818.) 한국어 의역이며, 한 문장을 여러 문장으로 나누었다. 이 머리말이 1818년 초판 그대로인지는 판본을 대조하지 못했다(재확인).
[주 16-05] 쇼펜하우어가 브로크하우스에게 보낸 「드레스덴 9월 22일」 편지. 루트비히 셰만 편, 『쇼펜하우어 서신집』(라이프치히: 브로크하우스, 1893), 110~111쪽, 스캔 PDF 170~171쪽. 스캔으로 대조했다. 편지에 해는 적혀 있지 않으나(s. a.) 내용과 그비너 전기 177쪽의 기록으로 보아 1818년이다. 인용은 Käme es auf mich allein an, so sollte auch so nur 1 Band werden. Wenn Sie jedoch 2 machen wollen, so ist nothwendig, daß beide zugleich erscheinen: nicht nur weil ich das Recht habe dies zu fordern, da im Kontrakt ausdrücklich Ein Band bestimmt ist; sondern weil es Ihr Interesse ist: indem aus den ersten Büchern ohne das letzte kein Mensch zum Verständniß kommen kann; worüber das Nähere in der Vorrede steht: daher die beiden Bände getrennt erscheinen zu laßen, ein sicheres Mittel wäre, den Absatz sehr zu schmälern. 의 한국어 의역이다. 교정자 교체, 크반트가 증정본과 로마로 보낼 인쇄 전지를 맡았다는 것, 덧붙인 한 줄(Ich reise im Vertrauen auf das Wort des Druckers, Ende Octr. ganz fertig seyn zu wollen … Ihre Pflicht ist, wie Ihr Interesse)은 취지를 옮긴 것이다. 그비너는 이 편지가 남아 있지 않다고 적었으나 셰만이 뒤에 실었다. 브로크하우스가 두 권을 생각한 까닭은 자료에 없으며, 본문의 짐작은 서술자의 말이다.
[주 16-06] 브로크하우스가 9월 24일 더는 편지를 받지 않겠다고 답한 것, 그가 9월 말 빈을 거쳐 떠난 것은 그비너 전기 177~178쪽(아카이브 스캔 archive.org/details/schopenhauersle00gwin, PDF 205~206쪽). 그 편지의 문장은 다른 화에서 이미 옮겼으므로 여기서는 인용하지 않았다.
[주 16-07]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제1권 제4권 §68. 같은 판 인쇄 453쪽, PDF 497쪽. 스캔으로 대조했다. 앎이 「모든 원함의 진정제」(zum Quietiv alles Wollens)가 되어 제 뜻을 꺾는 일과 금욕(Ertödtung des Eigenwillens, Askesis)이 나타난다는 것, 인도·그리스도교·라마교의 성자가 서로 다른 교리를 말하고 미신에 빠져 있어도 성자일 수 있으며 행동만이 그를 성자로 증명한다는 것(Sein Thun allein beurkundet ihn als Heiligen)은 같은 쪽의 취지를 옮긴 것이다. 인용은 Es ist daher so wenig nöthig, daß der Heilige ein Philosoph, als daß der Philosoph ein Heiliger sei: so wie es nicht nöthig ist, daß ein vollkommen schöner Mensch ein großer Bildhauer, oder daß ein großer Bildhauer auch selbst ein schöner Mensch sei. Ueberhaupt ist es eine seltsame Anforderung an einen Moralisten, daß er keine andere Tugend empfehlen soll, als die er selbst besitzt. Das ganze Wesen der Welt abstrakt, allgemein und deutlich in Begriffen zu wiederholen, und es so als reflektirtes Abbild in bleibenden und stets bereit liegenden Begriffen der Vernunft niederzulegen: dieses und nichts anderes ist Philosophie. 의 한국어 의역이다. 이 판은 1859년 제3판 계열이며 1818년 원고와 문장이 같은지는 확인하지 못했다(재확인).
사료에 근거한 것은 1818년 8월 드레스덴에서 쓴 초판 머리말의 내용과 날짜, 9월 22일 브로크하우스에게 보낸 편지(한 권이냐 두 권이냐, 교정자, 크반트, 인쇄소의 말을 믿고 떠난다는 것), 9월 24일 브로크하우스가 편지를 끊은 일, 9월 말의 출발이다. 브로크하우스가 두 권을 생각한 까닭에 대한 짐작, 의사와 담배의 비유는 서술자의 말이다. 머리말과 68번째 절은 그가 그해 가을 인쇄에 넘긴 원고에 들어 있던 부분이지만, 인용 문장은 1891년판 본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