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9,449자)
나의 편안함과 타인의 고통 사이
쇼펜하우어의 삶 · 네오
1815년 5월, 드레스덴. 쇼펜하우어는 스물일곱 살이었고, 이 도시에 온 지 한 해가 되어 가고 있었다. 책은 아직 머릿속에서 모양을 잡아 가는 중이었다. 그의 하루는 오롯이 그 일에 쓰였고, 그 하루를 받쳐 주는 것은 아버지가 남긴 재산에서 나오는 이자였다.
그 무렵 편지 한 통이 왔다. 보낸 사람은 그가 깊이 존경한다고 쓴 친구였다. 훗날 그 편지들을 책으로 엮은 사람은 이 친구의 이름과 사는 곳을 별표로 지워 두었다.[주 15-01] 친구는 전에 쇼펜하우어에게서 천 탈러를 빌려 간 사람이었다. 탈러는 그 무렵 독일 여러 나라에서 쓰던 은화였고, 천 탈러는 적은 돈이 아니었다. 갚을 날은 정해진 날에 돈을 갚겠다고 써 준 증서인 어음에 적혀 있었다. 친구는 그 돈을 한 해만 더 써도 되겠느냐고 물어 왔다.
그 친구가 얼마나 어려웠는지는 남은 편지에 없다. 남아 있는 것은 쇼펜하우어의 답장뿐이다.
*
그는 자기 재산에 관한 일을 혼자 정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돈 문제를 맡겨 두는 친구가 따로 있었다. 그는 그 친구의 판단과 자기를 향한 선의를 높이 샀고, 재산에 관한 일이라면 아무리 작은 걸음도 그 친구에게 묻지 않고는 내딛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정해 준 대로, 거의 명령처럼 따랐다.[주 15-01] 천 탈러를 어떻게 할지도 두 사람 사이에서 이미 정해져 있었다. 돈을 거둬들이기로 한 결정이었다.
부탁의 편지를 받은 뒤 그는 그 친구를 다시 찾아갔다.
“한 해만 더 두자는 겁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저는 압니다. 재산이 넉넉해서가 아니라, 사람됨과 판단을 알아서 하는 말입니다. 그는 갚을 사람입니다.”
“그 사람을 믿는 건 자네 일이고, 돈을 지키는 건 내 일일세. 우리는 이미 정했네. 그 돈을 어디에 둘지까지 골라 두었지.”
“제안을 하나 더 드리겠습니다. 이자를 올려서 그 사람에게 계속 맡기는 길도 있지 않습니까? 처음에 의논할 때도 그 안이 있었습니다.”
“있었지. 그리고 우리는 그걸 고르지 않았네. 빌린 돈을 한 해 더 쓰게 해 달라는 사람은, 한 해 뒤에도 같은 부탁을 할 수 있는 사람일세. 자네는 그 사람의 사람됨을 안다고 했지. 나는 그 사람의 사정을 모르네. 자네도 모르고.”
“사정을 몰라서 사람을 믿지 못한다면, 사람을 믿는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자네가 그 돈으로 무엇을 하는지 생각해 보게. 자네는 그 돈의 이자로 하루를 사네. 하루 종일 책을 읽고 생각만 할 수 있는 것도 그 돈 덕분이야. 자네가 좋은 사람이 되려다 그 하루를 잃으면, 그때 자네의 일은 누가 대신 해 주나?”
쇼펜하우어는 대답하지 못했다. 친구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 돈은 그의 하루였고, 그 하루는 그가 쓰려는 책이었다. 그의 말도 틀리지 않았다. 존경한다고 쓴 사람의 부탁을 사정도 묻지 않고 거절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그는 확신하지 못했다. 한 사람은 그의 편안함을 지키라고 했고, 한 사람의 부탁은 그 편안함을 조금 내놓으라고 했다. 둘 다 그에게 무리한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
1815년 5월 6일, 그는 답장을 썼다.
그는 먼저 친구의 부탁에 응하지 못해 몹시 마음이 아프다고 썼다. 자기 혼자라면 천 탈러를 한 해 더 맡기는 데 아무 망설임이 없었을 것이고, 그렇게 해도 돈이 안전하다고 믿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 까닭으로 그는 친구의 재산 형편이 아니라 그 사람됨과 성격과 판단을 알기 때문이라고 적었다.[주 15-01]
그리고 그는 자기 원칙을 털어놓았다. 자기 일, 곧 세상의 평판이 그리 좋지 않은 철학에 관해서는 자기 판단 하나만 따른다. 모든 스승이 그렇다고 해도 자기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자기가 공부하지 않은 일, 제대로 판단할 만큼 알지 못하는 일에서 스스로 판단하려 드는 것은 서투른 짓이고 어리석은 오만이다. 그래서 그런 일에서는 믿을 만한 권위를 찾아 온전히 따른다. 돈이 바로 그런 일이다.[주 15-01]
그는 이렇게 결론을 냈다.
“그러니 제 이익을 돌보면서 동시에 당신께 기쁜 일을 해 드릴 수 있다면 저는 진심으로 기뻤을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당신의 뜻을 들어드릴 수가 없습니다. 어음이 만기가 되면 원금을 갚을 수 있도록 마련해 두시기를 부탁드립니다.”[주 15-01]
그는 친구의 제안을 돈 문제를 맡긴 그 친구에게 한 번 더 전하겠다고 덧붙였다. 다만 결정이 바뀔 것 같지는 않으니 거기에 기대지 말라고 했다. 6월 초까지 따로 소식이 없으면 돈을 누가 치를지 알려 달라고, 드레스덴에서 받든 라이프치히에서 받든 상관없다고 적었다.
편지의 끝에서 그는 친구가 자기 안부를 물어 준 데 고맙다고 하고, 드레스덴의 생활을 짧게 전했다.[주 15-01] 그 생활은 하루 종일 책을 읽고 생각만 할 수 있는 생활이었고, 그 생활을 받친 것이 바로 지금 돌려 달라고 한 그 돈과 같은 종류의 돈이었다.
친구가 그 돈을 갚았는지, 한 해를 어떻게 넘겼는지는 전하는 자료가 없다.
*
남을 돕는 마음은 결국 나를 위한 것인가? 남을 돕는 마음이 남의 괴로움을 제 괴로움처럼 느끼는 데서 나온다면, 그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대개의 마음에는 둘이 섞여 있다. 쇼펜하우어가 드레스덴에서 쓰던 책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제1권은 번호를 붙인 짧은 절로 나뉘는데, 삶과 행동을 다루는 넷째 부분의 66번째 절과 67번째 절이 이 물음을 다룬다.
그는 세 가지 사람을 나란히 세운다. 첫째는 남의 고통을 즐기는 악한 사람, 그리고 남의 고통을 제 행복을 위한 수단으로 반기는 불의한 사람이다. 둘째는 정의로운 사람이다. 정의로운 사람은 남을 해치지 않는다. 남이 살려고 애쓰는 자리를 넘어가 그를 짓밟지 않는다. 셋째는 선한 사람이다. 그는 남의 고통을 줄이려고 제 것을 내놓는다. 그는 이 셋을 가르는 기준이 무엇인지 묻고, 이렇게 답한다.
“이 차이가 많은 사람의 눈에는 너무 크다. 악한 사람에게 남의 고통은 곧바로 기쁨이고, 불의한 사람에게는 제 안락을 위한 반가운 수단이다. 그저 정의로운 사람은 그 고통을 일으키지 않는 데서 멈춘다. 대부분의 사람은 제 곁에 있는 남의 수많은 고통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덜어 주기로 마음먹지 않는다. 덜어 주려면 저 자신이 무언가를 조금 덜 누려야 한다. 이들 모두에게는 제 자신과 남 사이에 큰 차이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주 15-02]
선한 사람에게는 그 차이가 그리 크지 않다고 그는 이어서 말한다. 남이 겪는 고통이 그에게 거의 제 고통만큼 가깝다. 그래서 그는 둘 사이의 균형을 맞추려 하고, 제 즐거움을 줄이고 덜 누리면서 남의 고통을 덜어 준다. 그는 나와 남을 가르는 그 차이가 덧없고 속이는 겉모습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따지지 않고도 곧바로 안다. 그런 사람은 짐승도 괴롭히지 않는다.[주 15-02]
그가 고른 낱말을 보면 1815년 5월의 편지가 어느 자리에 있는지 보인다. 그는 친구를 해치지 않았다. 빌려준 돈을 정한 날에 돌려 달라고 했을 뿐이다. 그는 정의로운 사람의 자리에 정확히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멈췄다. 그 무렵 그가 덜 누려야 했던 것은 한 해 동안의 천 탈러 이자, 그리고 재산은 모두 남에게 묻고 정한다는 자기 원칙의 예외 하나였다.
그는 이 구분이 나와 남을 어떻게 보느냐에서 나온다고 본다. 이기적인 사람은 낯설고 적대적인 것들에 둘러싸여 있다고 느끼고, 그의 모든 희망은 제 안녕에 걸려 있다. 선한 사람은 친근한 것들의 세상에 산다. 그 하나하나의 안녕이 곧 제 안녕이다.[주 15-03] 그는 고대 인도의 경전 베다에서 한 마디를 빌려 이것을 줄인다. ‘그것이 바로 너다.’ 눈앞의 괴로워하는 존재를 보며 그것이 바로 나라고 분명하게 알아보는 사람은 모든 덕으로 가는 곧은 길 위에 있다.[주 15-03]
그리고 그는 같은 절의 끝에 하나의 역설을 걸어 둔다. “모든 사랑은 연민이다.”[주 15-04] 67번째 절에서 그는 그 말을 이렇게 풀어 간다. 삶은 본래 괴로움이고, 기쁨은 무언가를 새로 주는 것이 아니라 고통 하나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선의와 사랑과 너그러움이 남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언제나 그 사람의 고통을 덜어 주는 일뿐이다. 우리를 좋은 일로 움직이는 것도 남의 고통을 알아보는 일, 그것을 제 고통처럼 곧바로 알아듣는 일뿐이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쓴다.
“참되고 순수한 사랑은 모두 연민이고, 연민이 아닌 사랑은 모두 제 욕심이다. 제 욕심의 사랑은 에로스이고, 연민의 사랑은 아가페다. 둘은 자주 섞인다. 참된 우정에도 언제나 제 욕심과 연민이 섞여 있다.”[주 15-05]
에로스와 아가페는 그리스어에서 사랑을 가리키던 두 낱말로, 앞의 것은 갖고 싶어 하는 사랑, 뒤의 것은 내어 주는 사랑이다. 그는 우정의 제 욕심 쪽이 마음 맞는 사람과 함께 있는 즐거움이고, 연민 쪽이 친구의 안녕과 괴로움에 진심으로 마음을 쓰는 일과 대가 없는 희생이라고 덧붙인다.[주 15-05]
여기에 물음의 답이 있다. 남을 돕는 마음이 나를 위한 것인지 아닌지는 돕는 행동의 겉모양으로 가려지지 않는다. 그 마음이 무엇을 보고 움직였느냐로 가려진다. 남의 고통을 보고 그것을 덜어 주려고 움직였다면, 돕고 난 뒤 내 마음이 흐뭇해도 그 마음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다. 내가 좋은 사람으로 보이려고, 돌려받으려고, 위에서 내려다보며 베푸는 기쁨을 누리려고 움직였다면, 그것은 남의 고통을 내 쓸모로 삼은 것이다. 연민은 불쌍히 여기며 내려다보는 마음이 아니다. 그는 연민을 남의 고통이 내 고통과 다르지 않게 느껴지는 일로 보았다. 그 사람이 나보다 아래에 있어서가 아니라, 그 사람과 내가 다르지 않아서 아프다.
*
그런데 1815년 5월의 편지에는 그 자신이 나중에 쓴 말로도 다 풀리지 않는 것이 있다. 편지에서 그는 친구를 돕는 일을 「당신께 기쁜 일을 해 드리는 것」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친구의 고통을 덜어 주는 일로 불리지 않았다. 그는 친구가 정말로 괴로운지 묻지 않았고, 묻지 않았기에 알지 못했다. 그리고 결정을 남에게 맡겼다. 자기가 모르는 일은 권위를 따른다는 원칙은 지혜로운 것이었지만, 그 원칙 덕분에 그는 거절의 무게를 혼자 지지 않아도 되었다.
연민의 철학이 그에게 요구하는 것은 그가 이 편지에서 하지 않은 일이었다. 남의 고통을 알아보려면 먼저 그 고통 쪽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은 제 곁의 고통을 알면서도 덜어 주기로 마음먹지 않는다고 그는 썼다. 그보다 앞서는 일이 있다. 제 편안함이 걸린 자리에서 사람은 남의 고통을 굳이 알려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가 친구에게 돈을 맡겨야 했다고 쉽게 말할 수도 없다. 그의 철학은 연민이 끝없는 자기희생을 요구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연민은 남을 해치지 않는 정의와, 남의 고통을 덜어 주는 사랑 둘로 나뉘고, 그 사이 어디에 설지는 사람마다 다르다. 그가 정의의 자리에 섰다는 것은 비난받을 일이 아니었다. 다만 그가 세운 기준으로 보면, 그 자리는 선의 자리가 아니었다.
스물다섯 해 뒤, 쉰두 살의 그는 『도덕의 기초에 관하여』라는 논문에서 연민을 모든 도덕의 바탕으로 다시 세운다. 1815년 5월의 그는 아직 그 책을 쓰지 않았고,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의 그 절도 아직 쓰지 않았다. 그가 쓴 것은 답장 한 통이었다. 그 답장에서 그는 남의 부탁과 자기의 하루 사이에서 자기의 하루를 골랐고, 그 하루로 돌아가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그는 답장을 접어 봉했다. 편지 위에는 받는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었지만, 그 이름은 지금 별표 셋으로만 남아 있다.
후주
[주 15-01] 쇼펜하우어가 이름을 밝히지 않은 사람에게 보낸 1815년 5월 6일 편지(서신집은 받는 사람의 이름과 사는 곳을 별표로 가렸다). 루트비히 셰만 편, 『쇼펜하우어 서신집』(Schopenhauer-Briefe, 라이프치히: 브로크하우스, 1893), 106~108쪽, 스캔 PDF 158~160쪽. 스캔으로 대조했다. 받는 사람의 이름과 사는 곳은 이 책에서 별표로 가려져 있다. 상대가 천 탈러를 한 해 더 빌려 달라고 청한 것, 그는 상대의 재산 형편이 아니라 사람됨·성격·판단을 알기에 그대로 두어도 안전하다고 믿는다고 쓴 것, 자기 전공이 아닌 일에서는 믿을 만한 권위를 찾아 따르며 재산 문제는 「판단과 선의를 높이 사는 친구」에게 묻고 「거의 명령처럼」(fast wie eine Ordre) 따른다는 것, 이자를 올려 계속 맡기는 안도 그 친구에게 냈으나 이미 다른 결정을 했다는 것, 6월 초까지 기별이 없으면 돈을 치를 사람을 알려 달라는 것은 편지의 내용이며 취지를 옮겼다. 「그러니 제 이익을 돌보면서 …」 인용은 107쪽 So sehr es mich also von Herzen freuen würde, indem ich für mein Interesse sorge, zugleich Ihnen etwas Angenehmes zu erweisen; so kann ich Ihnen leider doch nicht willfahren, und muß Sie bitten das Kapital auf Verfall des Wechsels bereit zu halten. 의 한국어 의역이다. 편지 끝의 드레스덴 생활에 대한 말(107~108쪽, Ich wünsche mir in jeder Hinsicht Glück zur Wahl meines Aufenthalts u. glaube daß im Ganzen genommen ich nirgends so viel Ruhe, u. zugleich so viel Hülfsmittel von Außen, um dem Zweck, durch den allein das Leben für mich Werth hat, nachstreben zu können, würde gefunden haben, als grade hier. Auch bin ich nie heitrer, nie mi[t] mir selbst mehr zufrieden gewesen, als eben hier. )은 앞서 다른 대목에서 인용했으므로 여기서는 그 내용을 옮기지 않고 「생활을 짧게 전했다」로만 가리켰다. 철학을 「세상의 평판이 그리 좋지 않은」(in einigem Mißkredit stehenden) 일이라 부르고 아벨라르의 말(si omnes patres sic: at ego non sic)을 인용한 대목은 「모든 스승이 그렇다고 해도 자기는 아니라고」로 풀었다. 돈 문제를 맡긴 친구의 이름은 편지에 없다. 그 친구를 찾아가 나눈 대화는 소설의 창작이며, 편지에 적힌 두 사람의 결정과 제안을 대사로 옮겼다. 친구가 돈을 갚았는지는 자료에 없다. 「아버지가 남긴 재산에서 나오는 이자」는 [주 1-11]의 상속 사실에 기댄 서술이다.
[주 15-02]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제1권 제4권 §66. 1891년 브로크하우스판(프라우엔슈테트 편), 인쇄 439~440쪽, PDF 483~484쪽. 스캔으로 대조했다. 인용은 439쪽 끝 Wenn eben dieser Unterschied, in den Augen manches Andern, so groß ist, daß fremdes Leiden dem Boshaften unmittelbare Freude, dem Ungerechten ein willkommenes Mittel zum eigenen Wohlseyn ist; wenn der bloß Gerechte dabei stehen bleibt, es nicht zu verursachen; wenn überhaupt die meisten Menschen unzählige Leiden Anderer in ihrer Nähe wissen und kennen, aber sich nicht entschließen sie zu mildern, weil sie selbst einige Entbehrung dabei übernehmen müßten; wenn also Jedem von diesen Allen ein mächtiger Unterschied obzuwalten scheint zwischen dem eigenen Ich und dem fremden … 의 한국어 의역이다. 원문은 「…라면, 그 고귀한 사람에게는 이 차이가 그리 크지 않다」로 이어지는 한 문장이며, 본문은 앞뒤를 나누어 옮겼다. 선한 사람이 「나와 남 사이에 보통보다 덜 차이를 둔다」(daß er weniger, als sonst geschieht, einen Unterschied macht zwischen sich und Anderen, 439쪽)는 것, 남의 고통이 제 고통만큼 가깝고 덜 누리며 덜어 준다는 것, 짐승도 괴롭히지 않는다는 것은 440쪽의 취지를 옮긴 것이다. 정의(Gerechtigkeit)와 선의·인간애(Menschenliebe)의 구분은 같은 쪽 앞부분의 취지다. 원문의 이유절(weil)은 「덜어 주려면 … 덜 누려야 한다」로 풀었다.
[주 15-03] 같은 절, 인쇄 442쪽, PDF 486쪽. 스캔으로 대조했다. 이기적인 사람은 낯설고 적대적인 것들에 둘러싸여 있다고 느끼고 선한 사람은 친근한 것들의 세상에 산다는 대목(Der Egoist fühlt sich von fremden und feindlichen Erscheinungen umgeben … Der Gute lebt in einer Welt befreundeter Erscheinungen), 베다의 「그것이 바로 너다」(Tat twam asi)는 취지를 옮긴 것이다.
[주 15-04] 같은 절 끝, 인쇄 443쪽, PDF 487쪽. 스캔으로 대조했다. 원문은 „Alle Liebe (ἀγάπη, caritas) ist Mitleid.“ 한국어 작업 번역.
[주 15-05] 같은 책 §67, 인쇄 443~444쪽, PDF 487~488쪽. 스캔으로 대조했다. 기쁨은 고통이 없어지는 것이고 선의·사랑·너그러움이 남에게 하는 일은 언제나 고통을 덜어 주는 일뿐이라는 설명은 443~444쪽의 취지를 옮긴 것이다. 인용은 444쪽 alle wahre und reine Liebe ist Mitleid, und jede Liebe, die nicht Mitleid ist, ist Selbstsucht. Selbstsucht ist der ἔρως; Mitleid ist die ἀγάπη. Mischungen von beiden finden häufig Statt. Sogar die ächte Freundschaft ist immer Mischung von Selbstsucht und Mitleid 의 한국어 의역이며, 그 사이의 「칸트와 정면으로 어긋나게」라는 앞말은 줄였다. 우정의 두 쪽에 대한 설명은 같은 쪽의 취지다. 에로스·아가페의 풀이는 서술자의 말이다.
사료에 근거한 것은 1815년 5월 6일 편지의 날짜와 내용, 천 탈러와 한 해 연장 부탁, 재산 문제를 맡긴 친구의 조언을 따른다는 원칙, 같은 편지에 쓴 드레스덴의 행복이다. 돈 문제를 맡긴 친구를 찾아간 장면과 그 대화, 편지를 봉하는 장면은 소설의 창작이다. 부탁한 친구의 이름, 형편, 그 뒤의 일은 자료에 없어 지어내지 않았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1818년 말에 나온 책으로, 1815년 5월에는 아직 쓰이지 않은 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