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5,354자)

엄마 이름

신용 무관·소액 대출 · 서강림

2027년 2월 19일 금요일 오후 한 시⁠, 부천 상동 한빛 고객센터에 나성태가 돌아왔다⁠. 실장은 외투도 벗지 않고 세연의 책상으로 와서 서류철 하나와 투명한 반찬 통 하나를 내려놓았다⁠. 반찬 통 안에 시금치가 들어 있었다⁠. 참기름 냄새가 칸막이 안에 퍼졌다⁠.

“⁠우진이가 오전에 인사만 하고 왔다⁠. 빈손으로 가기 뭐해서 하나 사 왔다더라⁠. 한세연 씨 먹어⁠.⁠”

세연은 반찬 통의 뚜껑을 보았다⁠. 뚜껑 위에 네임펜으로 쓴 글씨가 있었다⁠. 「⁠명숙이네 · 시금치 · 3⁠,000⁠」⁠. 초등학교 때부터 보아 온 글씨였다⁠.

“⁠김명숙 고객⁠. 오늘부터 한세연 씨 담당이다⁠. 월요일 아침 첫 통화⁠.⁠”

나성태는 서류철을 세연에게 밀어 주지 않았다⁠. 책상 한가운데에 놓고 손을 뗐다⁠. 세연이 서류철을 열었다⁠. 「⁠김명숙 · 원미동 느티나무시장 · 명숙이네 반찬 · 3⁠,000⁠,000 · 이자 600⁠,000원 · 열흘마다 · 연체 4일⁠」⁠. 아래에 납입 기록이 있었다⁠. 1월 18일⁠, 1월 26일⁠, 2월 5일⁠. 2월 15일은 비어 있었다⁠.

1월 18일 아침 세연이 셋째 장 열한째 줄을 건너뛴 뒤로⁠, 엄마의 줄은 다음 날부터 7번 책상 남자 상담원의 목록에 가 있었다⁠. 나성태는 건너뛴 줄을 두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실장을 세연은 한 달 동안 가장 무서워했다⁠. 7번 책상 상담원이 점심시간에 세연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한세연 씨⁠, 내 고객 중에 반찬 가게 아주머니 있는데⁠, 전화 받을 때마다 멸치볶음 냄새 나는 목소리야⁠. 목소리에도 냄새가 나더라⁠.⁠”

세연은 멸치볶음 냄새 이야기를 들은 날 점심을 먹지 못했다⁠. 오늘도 먹지 못할 것이었다⁠.

나성태가 실장 책상으로 돌아가자 세연은 일어나 비품 책상으로 갔다⁠. 우진은 업무폰 화면을 엎어 놓고 볼펜 뚜껑을 씹고 있었다⁠. 세연이 앞에 서자 뚜껑을 입에서 뺐다⁠.

“⁠우리 엄마 가게 갔어요⁠?⁠”

“⁠인사만 했어요⁠. 시금치 값 냈어요⁠. 삼천 원⁠.⁠”

“⁠엄마가 뭐라고 했어요⁠?⁠”

“⁠오늘 새로 무쳤다고요⁠. 그리고 나 얼굴 보더니⁠, 밥은 먹고 다니냐고⁠.⁠”

우진은 볼펜 뚜껑을 다시 끼웠다⁠. 끼우는 손이 두 번 헛나갔다⁠. 세연은 아무 말 없이 자리로 돌아왔다⁠. 엄마는 처음 보는 사람에게 늘 밥을 물었다⁠. 빚을 받으러 온 사람에게도 물었다⁠.

*

같은 날 저녁 일곱 시⁠, 셔터를 반쯤 내린 명숙이네 반찬 가게 안에서 김명숙은 내일 낼 깍두기를 버무리고 있었다⁠. 세연이 허리를 숙이고 셔터 밑으로 들어왔다⁠. 엄마는 고무장갑을 낀 손으로 깍두기를 뒤집으며 딸을 보지 않았다⁠.

“⁠엄마⁠, 아침에 검은 옷 입은 남자 왔지⁠?⁠”

“⁠시금치 사 갔어⁠. 돈 내고⁠. 거스름돈은 안 받더라⁠.⁠”

“⁠그 사람 뭐라고 했어⁠?⁠”

“⁠인사만 했어⁠. 김명숙 사장님 맞으시냐고⁠. 맞다니까 고개 숙이고 시금치 달래⁠.⁠”

엄마의 손이 깍두기 위에서 멈췄다⁠. 고무장갑 끝에서 고춧가루 물이 떨어졌다⁠.

“⁠너는 그걸 어떻게 아니⁠?⁠”

세연은 가방에서 반찬 통을 꺼내 도마 옆에 놓았다⁠. 뚜껑 위의 네임펜 글씨가 형광등 아래 또렷했다⁠. 엄마가 통을 보고⁠, 딸을 보았다⁠.

“⁠엄마⁠, 그 전화 거는 데가 내 회사야⁠.⁠”

엄마는 오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깍두기 대야 위로 냉장고 모터 소리만 지나갔다⁠. 한참 뒤 엄마가 물었다⁠.

“⁠통신사 아니었어⁠?⁠”

“⁠하청이라고 했잖아⁠.⁠”

“⁠그게 하청이야⁠?⁠”

엄마가 고무장갑을 벗었다⁠. 벗은 장갑을 대야 가장자리에 걸쳐 두고 의자에 앉았다⁠. 앉아서 처음부터 다 말했다⁠. 1월 6일 아침에 문자가 왔다고⁠. 「⁠신용 무관 · 당일 소액 · 무방문 즉시 입금⁠」⁠. 설 대목에 고춧가루와 참기름 선금을 넣어야 하는데 은행은 안 된다고 했고⁠, 금자 이모의 일수는 한 집에 카드 한 장인데 엄마는 이미 한 장을 쓰고 있었다고⁠. 삼백을 빌린다고 했는데 이백사십이 들어왔다고⁠.

“⁠보낸 사람 이름이 도금자였어⁠. 이모가 요새 손자가 통장으로 한다길래⁠, 이모가 문자로도 빌려주는 줄 알았지⁠. 이모 이름이니까 믿었어⁠.⁠”

“⁠엄마⁠, 그 사람들이 엄마한테 그 이름으로 보낸 거야⁠. 엄마가 믿으니까⁠.⁠”

“⁠그럼 이모도 몰라⁠?⁠”

“⁠몰라⁠. 이모 이름만 쓴 거야⁠.⁠”

엄마는 앞치마에 손을 문질렀다⁠. 손등의 고춧가루 물이 앞치마에 붉게 번졌다⁠.

“⁠엄마가 너한테 학자금 잘 갚고 있냐고 물었잖아⁠. 너는 그때 벌써⁠.⁠”

“⁠응⁠. 벌써⁠.⁠”

두 사람은 웃지 않았다⁠. 냉장고 모터가 멈추자 가게 안이 조용해졌다⁠.

*

밤 아홉 시⁠, 반찬 가게 계산대 앞에서 세연은 엄마의 휴대전화로 금감원 홈페이지의 불법금융 신고 창을 열었다⁠. 빌린 날⁠, 받은 돈⁠, 이자⁠, 낸 날짜⁠. 엄마는 돋보기를 쓰고 딸이 치는 글자를 따라 읽었다⁠.

“⁠이걸 쓰면 안 갚아도 돼⁠?⁠”

“⁠연 육십 퍼센트 넘으면 원금까지 무효야⁠. 이백사십 받고 열흘마다 육십이면 연 천 퍼센트가 넘어⁠. 엄마는 이미 백팔십을 냈어⁠. 더 안 내도 돼⁠.⁠”

“⁠그럼 너는⁠? 네 회사는⁠?⁠”

“⁠월요일 아침에 내가 엄마한테 전화할 거야⁠. 회사 전화로⁠. 실장이 옆에서 다 들어⁠. 나는 대본을 읽을 거야⁠. 엄마는 대본에 안 넘어가면 돼⁠.⁠”

엄마가 돋보기를 벗었다⁠.

“⁠엄마가 대본 연습을 해야 하니⁠?⁠”

“⁠응⁠.⁠”

“⁠그럼 해 봐⁠. 네 대본⁠.⁠”

세연은 숨을 고르고 관청 말투로 말했다⁠.

“⁠직장으로 찾아뵙기 전에 먼저 연락드렸습니다⁠.⁠”

“⁠여기가 직장이에요⁠. 반찬이나 사 가세요⁠.⁠”

엄마가 너무 빨리 대답해서 세연이 웃음을 터뜨렸다⁠. 엄마는 웃지 않고 진지하게 다음 줄을 기다렸다⁠. 세연은 상환 의사 확인 단계를 읽었고⁠, 엄마는 상환 의사가 없다고 했다⁠. 세연은 비상 연락처 안내를 읽었고⁠, 엄마는 한 번 틀렸다가 다시 했다⁠. 세 번째 연습에서 엄마는 대본보다 빨랐다⁠. 네 번째 연습이 끝나자 엄마가 말했다⁠.

“⁠엄마 잘하지⁠?⁠”

“⁠엄마⁠, 상담원 해도 되겠다⁠.⁠”

“⁠그건 싫다⁠. 목소리에 냄새 나는 일은 반찬 가게로 족해⁠.⁠”

*

2월 20일 토요일 오후 네 시⁠, 세연은 반찬 가게 계산대 뒤에서 엄마 대신 콩자반을 담고 있었다⁠. 시장 골목에 도장 소리가 가까워졌다⁠. 탁⁠, 탁⁠. 금자가 앞치마 주머니를 불룩하게 하고 가게 앞에 왔다⁠. 엄마는 계산대 밑 깡통에서 만 이천 원을 꺼내다가 손을 멈췄다⁠.

“⁠이모⁠, 1월에 이모 이름으로 이백사십이 들어왔어요⁠. 문자 보고 빌린 거예요⁠. 이모가 보낸 거 아니죠⁠?⁠”

금자는 도장을 든 손을 허공에 둔 채 엄마를 보았다⁠.

“⁠누가 보냈다고⁠?⁠”

“⁠도금자요⁠. 받는 분⁠, 보낸 분⁠, 다 이모 이름이에요⁠.⁠”

“⁠나는 문자를 못 쳐⁠. 글씨가 작아서⁠.⁠”

금자는 엄마의 일수 카드를 꺼내 계산대에 놓았다⁠. 도장을 인주에 찍고 카드 위에 눌렀다⁠. 평소보다 오래 눌렀다⁠. 도장을 떼자 빨간 동그라미가 옆 동그라미까지 번져 있었다⁠. 금자는 번진 자국을 엄지로 문지르다 그만두었다⁠.

“⁠오늘 거는 안 받는다⁠.⁠”

“⁠이모⁠, 돈 있어요⁠.⁠”

“⁠있으면 고춧가루 사⁠. 현우한테 물어볼게⁠.⁠”

금자는 만 이천 원을 받지 않고 다음 가게로 갔다⁠. 다음 가게 앞에서 도장 소리가 났다⁠. 탁⁠. 세연에게는 도장 소리가 아까보다 한 박자 느리게 들렸다⁠. 엄마는 받지 않은 만 이천 원을 손에 쥔 채 골목을 오래 내다보았다⁠.

*

2월 22일 월요일 오전 여덟 시 오십오 분⁠, 세연은 출입문 옆 보관함 제 칸에 휴대전화를 넣었다⁠. 넣기 전에 마지막으로 엄마의 문자를 보았다⁠. 「⁠엄마 준비됐다 · 깍두기도 다 담갔다⁠」⁠. 박은주가 옆 칸에 휴대전화를 넣으며 하품을 했다⁠.

“⁠월요일 아침마다 우리 휴대폰은 주말 다 쉬고 또 쉬네⁠. 나보다 팔자가 좋아⁠.⁠”

“⁠언니⁠, 휴대폰은 언니처럼 주말에 시댁 안 가잖아요⁠.⁠”

“⁠맞아⁠. 휴대폰은 효도를 안 해⁠.⁠”

은주가 웃었다⁠. 세연도 웃었다⁠. 웃는 얼굴은 다섯 달 동안 연습해 둔 얼굴이었다⁠.

*

오전 아홉 시 십 분⁠, 세연은 헤드셋을 쓰고 목록 첫 줄을 짚었다⁠. 「⁠김명숙⁠」⁠. 등 뒤에서 나성태가 다가와 세연의 줄에 잭을 꽂았다⁠. 딸깍⁠. 실장의 숨소리가 헤드셋 안으로 들어왔다⁠. 통화가 끝날 때까지 벗지 않을 숨소리였다⁠.

번호를 눌렀다⁠. 단축번호 1번을 손가락으로 하나씩 누르는 것은 처음이었다⁠. 신호가 두 번 가고 엄마가 받았다⁠.

“⁠네⁠, 명숙이네 반찬입니다⁠.⁠”

“⁠김명숙 고객님 되시죠⁠? 직장으로 찾아뵙기 전에 먼저 연락드렸습니다⁠.⁠”

“⁠여기가 직장이에요⁠. 지난주에 찾아오셨잖아요⁠. 시금치 사 가셨고⁠.⁠”

세연은 대본을 따라 읽었다⁠. 상환 의사 확인 단계⁠, 연체 나흘⁠, 이자 육십만 원에 연체료⁠. 엄마는 숨 한 번 고르지 않았다⁠.

“⁠상환 의사 없습니다⁠. 이백사십 받고 백팔십 냈어요⁠. 연 육십 퍼센트 넘는 계약은 원금까지 무효라던데요⁠. 신고도 했고⁠, 변호사도 붙일 거예요⁠.⁠”

“⁠미입금 시 비상 연락처 안내가 진행됩니다⁠.⁠”

“⁠비상 연락처요⁠? 우리 딸이에요⁠? 그럼 우리 딸한테 연락하세요⁠. 지금 하고 계시네⁠.⁠”

헤드셋 안에서 나성태의 숨이 한 박자 멈췄다⁠. 세연은 대본 마지막 줄을 읽었다⁠.

“⁠그럼 확인 안내 마치겠습니다⁠.⁠”

통화 종료는 실장의 화면에 있었다⁠. 실장의 손가락이 단추로 가는 동안⁠, 세연은 마이크에 입술을 붙이지 않았다⁠. 속삭이지도 않았다⁠. 사무실 열네 책상에 다 들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일⁠, 삼⁠, 삼⁠, 이⁠, 엄마⁠.⁠”

딸깍⁠. 통화가 끊겼다⁠. 칸막이 너머 열세 사람의 키보드 소리가 한꺼번에 멎었다⁠.

*

오전 아홉 시 이십 분⁠, 실장 책상 옆에서 나성태는 헤드셋을 목에 건 채 앉아 있었다⁠. 세연은 앉으라는 말을 듣지 못해 서 있었다⁠.

“⁠녹음 다 됐다⁠.⁠”

“⁠알아요⁠. 다 되고 있다는 거⁠, 실장님이 알려 주셨잖아요⁠.⁠”

“⁠목요일에 위에서 사람 온다⁠. 그때까지 아무 데도 가지 마⁠. 출근하고⁠, 대본 읽고⁠, 퇴근해⁠. 너 어머니 가게는 우진이가 길 안다⁠.⁠”

나성태의 목소리는 협박하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피곤한 목소리였다⁠. 세연은 모니터 아래 반쯤 열린 서랍을 보았다⁠. 구겨진 안내문이 아직 거기 있었다⁠.

“⁠실장님 서랍에 신용회복위원회 안내문 있죠⁠. 삼 년 전 날짜⁠.⁠”

나성태가 서랍을 발로 밀어 닫았다⁠. 닫히는 소리가 컸다⁠.

“⁠나는 늦었어⁠.⁠”

“⁠삼 년 늦은 거면⁠, 지금 하면 삼 년하고 한 달 늦은 거예요⁠.⁠”

나성태는 대답하지 않았다⁠. 헤드셋을 다시 썼다⁠. 다음 책상으로 줄을 옮겨 꽂았다⁠. 이번에는 벗고 꽂는 데 삼 초가 들지 않았다⁠. 일 초도 들지 않았다⁠.

*

밤 열한 시⁠, 원미동 다세대 2층 세연의 방에서 세연은 제 휴대전화로 불법금융 신고 창을 열었다⁠. 신고인 칸에 제 이름을 썼다⁠. 신고 내용 첫 줄은 오래 지웠다 썼다⁠.

「⁠저는 부천 상동 한빛 고객센터에서 추심 전화를 거는 상담원입니다⁠. 통화 끝에 1332를 말한 사람이 저입니다⁠.⁠」

제출 단추를 누르자 접수 번호가 떴다⁠. 세연은 접수 번호를 손바닥에 볼펜으로 받아 썼다⁠. 부엌에서 엄마가 깍두기 통 뚜껑을 닫는 소리가 들렸다⁠. 딸칵⁠, 딸칵⁠. 엄마는 뚜껑을 닫을 때마다 손바닥으로 한 번씩 눌렀다⁠. 공기가 빠져나가는 작은 소리가 통마다 났다⁠. 세연은 손바닥의 숫자를 주먹 안에 쥐고 엄마가 뚜껑을 다 닫을 때까지 소리를 세었다⁠. 열한 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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