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5,391자)

너도 사백이잖아

신용 무관·소액 대출 · 서강림

2027년 2월 9일 화요일 오후 두 시⁠, 관악경찰서 지능범죄수사팀 조사실은 생각보다 밝았다⁠. 형광등 네 개가 다 켜져 있었고⁠, 벽에는 「⁠친절한 수사⁠」라는 액자가 비뚤게 붙어 있었다⁠. 노형철 경위는 마흔여덟 살이었고⁠, 믹스커피 두 잔을 들고 들어와 한 잔을 인호 앞에 놓았다⁠.

“⁠금감원 오진경 분석관이 자료를 보냈어⁠. 신변 보호 요청도 같이⁠. 권인호 씨 메모지 복사본도 왔는데⁠, 분 단위로 쓴 신고는 나도 처음 본다⁠.⁠”

“⁠라이더라서요⁠.⁠”

“⁠알아⁠. 별점은 몇이야⁠?⁠”

“⁠사 점 구요⁠.⁠”

“⁠나보다 높네⁠. 나는 민원 별점으로 치면 이 점이야⁠.⁠”

노형철은 웃지 않고 말했다⁠. 웃지 않고 말하는 농담이었다⁠. 인호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너무 달았다⁠. 노형철이 서류 봉투에서 사진 여섯 장을 꺼내 탁자에 늘어놓았다⁠. 이십 대 남자 여섯이었다⁠. 셋째 장에서 인호의 눈이 멈췄다⁠. 앳된 얼굴⁠, 짧은 머리⁠, 증명사진 특유의 굳은 입⁠. 전주 콩나물 식당 앞 사진보다 몇 해 늦고⁠, 고시원 복도의 얼굴보다 몇 해 이른 얼굴이었다⁠.

“⁠옆방 사람⁠, 이 가운데 있어⁠?⁠”

사진 속 우진은 정면을 보고 있었다⁠. 정면에는 인호가 앉아 있었다⁠. 인호는 사진을 짚지 않았다⁠. 손가락을 커피 잔에 감았다⁠.

“⁠형도 빚이 사백오십이에요⁠. 삼십 빌렸다가 일 년 만에 사백 됐고⁠, 제 오십까지 붙었어요⁠. 형 빚도 무효잖아요⁠.⁠”

“⁠무효 맞아⁠. 정우진 씨도 피해자 맞고⁠. 그런데 권인호 씨 어머니한테 문자 친 손도 그 사람이야⁠. 둘 다 맞아⁠.⁠”

“⁠그럼 형을 잡아요⁠?⁠”

“⁠얼굴 맞다고 바로 안 잡아⁠. 위를 보려면 아래를 한동안 놔둬야 할 때도 있어⁠. 근데 아래 이름이 하나도 없으면 위로 가는 계단이 없어⁠.⁠”

인호는 셋째 장을 오래 보았다⁠. 조사실 문밖으로 누가 복사기를 돌리는 소리가 지나갔다⁠. 종이가 한 장씩 나올 때마다 기계가 숨을 몰아쉬었다⁠.

“⁠일주일만 주세요⁠. 형이 직접 오게 할게요⁠. 제가 짚는 거 말고⁠, 형이 와서 형 입으로요⁠.⁠”

노형철은 사진 여섯 장을 다시 봉투에 넣었다⁠. 넣으면서 셋째 장만 맨 위에 두었다⁠.

“⁠일주일⁠. 그 안에 그 사람이 다치면 네 탓이 아니고 내 탓이다⁠. 그러니까 일주일 안에 와⁠.⁠”

*

2월 10일 수요일 오후 다섯 시⁠, 신림역 근처 라이더 쉼터의 화이트보드에는 곽 형의 글씨로 내기판이 그려져 있었다⁠. 「⁠인호 일요일까지 형 데려온다 · 컵라면 한 박스⁠」 「⁠못 데려온다 · 삼각김밥 열 개⁠」⁠. 라이더들 이름이 두 줄로 나뉘어 있었다⁠. 데려온다에 셋⁠, 못 데려온다에 다섯⁠.

“⁠형⁠, 이걸 왜 써 놨어요⁠?⁠”

“⁠사람이 희망이 있어야 콜을 잡지⁠.⁠”

“⁠못 데려온다가 다섯인데요⁠?⁠”

“⁠그 다섯은 현실이 있어야 콜을 잡는 사람들이고⁠.⁠”

막내 라이더가 휴대전화를 흔들며 끼어들었다⁠.

“⁠형들⁠, 나 오늘 AI가 최적 경로라고 육교 계단으로 안내했어요⁠. 오토바이 들고 올라가래요⁠.⁠”

“⁠AI가 너 헬스장 보내 주는 거야⁠. 무료로⁠.⁠”

쉼터가 웃음으로 찼다⁠. 인호도 웃다가 휴대전화가 울려 화면을 보았다⁠. 「⁠[할부 안내] 권인호 고객님 남은 할부금 4⁠,200⁠,000원 · 2월 납부일 2월 25일 · 납부액 300⁠,000원⁠」⁠. 곽 형이 어깨 너머로 읽었다⁠.

“⁠사백이십이면 네 오토바이가 네 빚이네⁠. 바퀴 달린 빚⁠.⁠”

“⁠형⁠, 바퀴 없으면 빚도 못 갚아요⁠.⁠”

“⁠그러니까 바퀴 달린 빚이지⁠.⁠”

인호는 화이트보드 앞에 가서 못 데려온다 줄 맨 끝에 자기 이름을 썼다가 지웠다⁠. 데려온다 줄에 다시 썼다⁠. 매직이 말라서 글씨가 흐렸다⁠. 곽 형이 새 매직을 던져 주었다⁠.

밤 열 시⁠, 마지막 콜을 끝낸 인호에게 엄마가 전화했다⁠. 대전 식당의 마감 시간이라 뒤에서 의자 올리는 소리가 났다⁠.

“⁠인호야⁠, 경찰서 갔다며⁠. 형사님이 밥은 사 주셨니⁠?⁠”

“⁠커피요⁠. 너무 달았어요⁠.⁠”

“⁠단 거 주는 사람은 착한 사람이야⁠. 엄마가 사장님한테 다 말했다⁠. 사장님 아들도 작년에 그런 문자 받았대⁠. 사장님이 너 혼내지 말래⁠.⁠”

“⁠엄마⁠, 그걸 왜 말해요⁠?⁠”

“⁠말하니까 엄마가 덜 무섭더라⁠. 할부는 얼마 남았어⁠? 엄마가 반 낼게⁠.⁠”

“⁠사백이십이요⁠. 근데 엄마⁠, 그건 내 거예요⁠. 바퀴 달린 빚이에요⁠.⁠”

“⁠그게 무슨 말이야⁠?⁠”

“⁠곽 형이 그랬어요⁠.⁠”

엄마가 웃었다⁠. 지난 12월 13일 일요일 아침 이후로 처음 듣는 웃음이었다⁠. 엄마는 웃다가 의자를 하나 더 올리고 말했다⁠. 오십만 원이든 오만 원이든 엄마한테 다시는 숨기지 말라고⁠. 인호는 그러겠다고 했다⁠. 이번에는 「⁠그럼요⁠」를 붙이지 않았다⁠.

*

2월 12일 금요일 밤 열한 시⁠, 문 닫은 쉼터 앞 자판기 불빛 아래로 검은 후드티가 걸어왔다⁠. 인호가 보낸 문자는 한 줄이었다⁠. 「⁠형 할 말 있어요⁠. 쉼터 앞⁠.⁠」 답도 한 줄이었다⁠. 「⁠열한 시⁠.⁠」

우진은 자판기에서 캔커피 두 개를 뽑아 하나를 인호에게 던졌다⁠. 인호는 받지 않았다⁠. 캔이 인도 블록에 떨어져 굴렀다⁠.

“⁠관악서 형사가 형 얼굴 물어봤어요⁠. 사진 여섯 장 중에 형이 셋째였어요⁠. 저 아직 안 짚었어요⁠.⁠”

“⁠짚지 그랬어⁠.⁠”

“⁠형이 직접 가요⁠. 형 빚 사백오십도 무효예요⁠. 형도 1332에 하면 변호사 붙어요⁠. 저도 붙었어요⁠.⁠”

우진은 굴러간 캔을 주워 바지에 닦았다⁠. 그러고는 인호의 오토바이 좌석을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너도 사백이잖아⁠.⁠”

“⁠네⁠?⁠”

“⁠오토바이⁠. 사백이십⁠. 아까 문자 봤어⁠. 그건 무효 아니지⁠? 너는 갚을 빚이 남았고⁠, 나는 갚을 빚이 없어진대⁠. 근데 왜 내가 더 무섭냐⁠?⁠”

인호는 대답하지 못했다⁠. 우진이 캔을 땄다⁠. 따는 소리가 밤길에 크게 울렸다⁠.

“⁠처음 빌릴 때 주소록 넘겼어⁠. 우희 번호 들어갔어⁠. 우희 지금 전주에서 간호학과 다녀⁠. 실습 나가는 병원 이름까지 위에서 알아⁠. 내가 경찰 가면 내 빚은 무효가 돼⁠. 우희 번호는 무효가 안 돼⁠.⁠”

“⁠형 엄마는요⁠?⁠”

“⁠엄마 콩나물국밥집⁠, 작년 가을에 접었어⁠. 단골들한테 문자 가고 나서⁠.⁠”

“⁠그 문자⁠, 형이 쳤어요⁠?⁠”

“⁠아니⁠. 나는 그때 받는 사람이었어⁠. 지금은 치는 사람이고⁠.⁠”

인호는 우진의 후드 앞섶을 잡았다⁠. 3층 복도에서처럼 벽으로 밀지는 않았다⁠. 잡기만 했다⁠. 우진은 앞섶을 잡힌 채 캔커피를 마셨다⁠.

“⁠형⁠, 계속 치면 형이 위가 돼요⁠. 형 밑에 또 누가 생겨요⁠.⁠”

“⁠알아⁠.⁠”

“⁠알면⁠.⁠”

“⁠알면 뭐⁠. 아는 거랑 하는 거랑 달라⁠. 너도 전단 뽑을 때 알았잖아⁠.⁠”

인호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우진이 앞섶을 털고 오토바이 좌석에 캔을 올려놓았다⁠.

“⁠사진 뒤에 쓴 거 봤냐⁠?⁠”

“⁠우희 중학교 졸업이요⁠.⁠”

“⁠우희가 그날 처음 울었어⁠. 졸업식 끝나고 엄마 가게에서 콩나물국밥 먹다가⁠. 고등학교는 전주에서 제일 좋은 데 붙었는데⁠, 엄마가 등록금 걱정하는 소리를 들었대⁠. 나는 그날 서울 가서 돈 번다고 했어⁠.⁠”

우진은 캔을 마저 비웠다⁠. 빈 캔을 자판기 옆 수거함에 넣었다⁠. 넣는 손이 반듯했다⁠.

“⁠일요일까지 생각해 볼게⁠.⁠”

우진은 걸어갔다⁠. 십 분 뒤 인호의 휴대전화가 떨었다⁠. 「⁠생각해 볼게⁠.⁠」 같은 말에 마침표가 하나 더 붙어 있었다⁠.

*

2월 14일 일요일 저녁 여섯 시부터 밤 아홉 시까지⁠, 인호는 관악경찰서 정문 건너편 인도에 오토바이를 세워 두고 서 있었다⁠. 우진은 오지 않았다⁠. 문자도 오지 않았다⁠. 밤 아홉 시 십 분⁠, 노형철이 정문을 나와 길을 건너왔다⁠. 손에 편의점 봉지가 들려 있었다⁠.

“⁠일요일엔 나도 쉬어야 하는데⁠, 네가 앞에 있으니까 퇴근을 못 하겠다⁠.⁠”

봉지 안에는 삼각김밥 두 개가 있었다⁠. 노형철이 하나를 인호에게 주었다⁠. 쉼터 화이트보드가 떠올라 인호는 웃음이 났다가 멈췄다⁠. 삼각김밥 열 개는 못 데려온다에 건 사람들 몫이었다⁠.

“⁠안 왔지⁠?⁠”

“⁠안 왔어요⁠.⁠”

인호는 비닐을 뜯지 않고 삼각김밥을 손에 쥐었다⁠. 손바닥이 차가웠다⁠. 일주일이 아직 이틀 남아 있었다⁠. 이틀을 더 기다리면 우진이 올 수도 있었다⁠. 이틀 동안 엄마에게⁠, 곽 형에게⁠, 다른 고시원 다른 312호에게 문자가 갈 수도 있었다⁠.

“⁠셋째 사진 맞아요⁠.⁠”

노형철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수첩을 꺼내지도 않았다⁠.

“⁠동생 번호는요⁠? 그거 먼저 지켜 주세요⁠.⁠”

“⁠그건 아래를 잡아서 되는 일이 아니야⁠. 위를 잡아야 끝나⁠. 그래서 위로 가는 거야⁠.⁠”

인호는 오토바이에 올라 우진에게 문자를 보냈다⁠. 「⁠형 얼굴 말했어요⁠. 미안해요⁠.⁠」 답은 신호등이 두 번 바뀌는 동안 오지 않았다⁠. 세 번째 초록불에 답이 왔다⁠. 「⁠잘했어⁠.⁠」 이어서 한 통이 더⁠. 「⁠우희한테는 아무것도 가지 않게 해⁠.⁠」

*

2월 16일 화요일 새벽 한 시⁠, 고시원 3층 공용 주방 냉장고에는 새 메모지가 붙어 있었다⁠. 「⁠311호 새로 왔습니다 · 공시생입니다 · 제 반찬 통에는 이름 대신 수험 번호를 써 놨습니다 · 합격하면 다 드립니다⁠」⁠. 메모지 아래 302의 답이 이미 달려 있었다⁠. 「⁠합격 기원 · 근데 계란은 안 드림⁠」⁠.

인호는 메모지를 읽으며 라면 물을 올렸다⁠. 311호 문틈으로 형광등 불빛과 인터넷 강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형법 총론이었다⁠. 「⁠범죄의 성립 요건은 구성요건 해당성⁠, 위법성⁠, 책임⁠」⁠. 인호는 라면이 끓는 동안 강의를 들었다⁠. 옆방 형의 무엇이 구성요건이고 무엇이 책임인지⁠, 강의는 알려 주지 않았다⁠. 인호는 냉장고 문에 메모지 한 장을 붙였다⁠. 「⁠311호님 합격 기원 · 김치는 두 젓가락까지 · 312⁠」⁠.

*

2월 19일 금요일 오전 열 시 사십 분⁠, 정우진은 회색 승합차를 부천 원미동 느티나무시장 북문 앞 갓길에 세웠다⁠. 비상등 소리가 차 안에서 째깍거렸다⁠. 조수석의 나성태가 서류철을 넘겼다⁠.

“⁠김명숙⁠. 명숙이네 반찬⁠. 삼백⁠, 연체 나흘⁠. 들어가서 인사만 해⁠. 큰 소리 내지 말고⁠. 딸 이름은 꺼내지 마⁠. 아직⁠.⁠”

“⁠딸이요⁠?⁠”

“⁠우리 회사 한세연 씨 어머니다⁠. 입사할 때 비상 연락처로 써 낸 번호가 이 번호야⁠.⁠”

라디오에서 정오 뉴스 예고가 흘러나왔다⁠. 「⁠금융감독원 민생 특별사법경찰 다음 달 출범 … 불법사금융 직접 수사⁠」⁠. 나성태가 손을 뻗어 라디오를 껐다⁠. 끈 뒤에도 손가락을 단추에서 떼지 않았다⁠.

“⁠위에서 그러더라⁠. 너 이번 달 방문 잘하면 사백오십에서 오십 빼 준대⁠.⁠”

“⁠권인호 오십이요⁠?⁠”

“⁠누구 오십이든⁠. 숫자는 이름이 없어⁠.⁠”

우진은 핸들 위에 두 손을 얹었다⁠. 2월 4일에 흰 봉투를 들고 걸어 들어간 시장이었다⁠. 국숫집 뒷문은 이 북문에서 골목 둘을 지나야 했다⁠. 반찬 가게는 북문을 들어서자마자 있었다⁠. 유리문 안으로 반찬 통이 층층이 쌓여 있었고⁠, 앞치마를 두른 여자가 통마다 뚜껑을 덮고 있었다⁠.

“⁠실장님⁠, 저 방문은 처음이에요⁠.⁠”

“⁠처음이니까 인사만 하라는 거야⁠. 두 번째부터는 인사가 길어져⁠.⁠”

우진은 차에서 내렸다⁠. 겨울 볕이 시장 천막 위로 하얗게 내려앉아 있었다⁠. 반찬 가게 유리문 앞에 서자 안의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고춧가루 물이 든 손을 앞치마에 닦으며 여자가 유리문을 밀었다⁠. 문에 달린 종이 딸랑 울렸다⁠.

“⁠반찬 사러 오셨어요⁠? 오늘 시금치 새로 무쳤어요⁠.⁠”

김명숙이 웃으며 말했다⁠. 우진의 검은 후드티 주머니 안에서 업무폰이 떨었다⁠. 유리문 안 진열대에서는 멸치볶음이 볕을 받아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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