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5,406자)

무효

신용 무관·소액 대출 · 서강림

2027년 2월 24일 수요일 오전 열한 시 이십 분⁠, 수원 영통 보영헤어에서 보영은 손님 앞머리를 자르다가 남편의 전화를 받았다⁠. 김상훈은 회사에서 전화를 걸 때 늘 복도로 나가서 걸었다⁠. 오늘은 복도도 아닌 데서 거는지 목소리가 울렸다⁠.

“⁠여보⁠, 회사로 전화가 왔어⁠. 품질팀 대표 번호로⁠. 당신 이름으로⁠.⁠”

보영은 가위를 내려놓았다⁠. 손님이 거울 속에서 눈을 크게 떴다⁠. 보영은 손님에게 잠깐만요⁠, 하고 샴푸실로 들어갔다⁠.

“⁠뭐라고 했어⁠?⁠”

“⁠구보영 씨 가족분이시냐고⁠. 부인께서 채무를 연체 중이시라고⁠. 근데 내가 받은 게 아니라 팀장님이 받았어⁠.⁠”

“⁠팀장님이⁠?⁠”

“⁠팀장님이 그 사람한테 그랬대⁠. 귀사 품질 인증 번호부터 대 보시라고⁠. 인증 없는 업체 전화는 저희 팀에서 안 받는다고⁠. 그러고 끊었대⁠.⁠”

보영은 웃음이 나오려다 목에서 걸려 기침이 되었다⁠. 샴푸실 타일이 차가웠다⁠. 상훈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여보⁠, 무슨 일이야⁠? 팀장님이 나보고 집에 일찍 가 보래⁠.⁠”

“⁠저녁에 말할게⁠. 다 말할게⁠.⁠”

전화를 끊고 보영은 손등에 볼펜으로 숫자를 썼다⁠. 「⁠2/24 11⁠:02 남편 회사⁠」⁠. 1332 상담원이 날짜와 시각을 다 남겨 두라고 했다⁠. 채무자대리인이 붙은 뒤로 업자는 보영에게 직접 전화하지 않았다⁠. 대신 보영의 둘레에 전화했다⁠. 손등의 숫자가 손님 앞머리 위에서 움직였다⁠. 보영은 손을 씻지 않고 다시 가위를 들었다⁠.

*

같은 날 저녁 여덟 시⁠, 영통 아파트 식탁 위에 김치찌개가 올라와 있었다⁠. 상훈이 끓인 찌개였다⁠. 상훈은 찌개를 끓일 때 두부를 꼭 정사각형으로 잘랐다⁠. 품질팀 사람의 두부였다⁠.

보영은 숟가락을 들지 않고 말했다⁠. 9월의 보증금 천오백만 원⁠. 카드론 두 장⁠, 현금서비스 두 장⁠, 온라인 대부업체 한 곳⁠, 부천 동백금융 한 곳⁠. 동백금융에서 거절당한 다음 날 아침의 노란 두 마디⁠. 이백만 원과 열흘마다 육십만 원⁠. 손님 이백열두 명⁠. 미용실 의자에 앉아 커트를 받고 간 남자⁠.

상훈은 끝까지 듣고 냅킨 한 장을 펼쳤다⁠. 볼펜으로 가운데에 선을 긋고 위아래로 가지를 쳤다⁠. 생선 뼈 모양이었다⁠.

“⁠뭐 해⁠?⁠”

“⁠원인 분석⁠. 불량 나면 이렇게 그려⁠.⁠”

상훈은 가지마다 글자를 썼다⁠. 「⁠보증금⁠」 「⁠금리⁠」 「⁠거절⁠」 「⁠문자⁠」⁠. 마지막 가지 끝에서 볼펜이 오래 멈췄다⁠. 상훈이 썼다⁠. 「⁠말 안 함⁠」⁠.

“⁠천오백이면 내 적금 깨면 됐잖아⁠.⁠”

“⁠당신 적금은 당신 거잖아⁠.⁠”

“⁠우리 가게잖아⁠. 간판에 당신 이름 있다고 당신 혼자 가게야⁠?⁠”

보영은 대답하지 못했다⁠. 상훈은 냅킨을 접어 셔츠 주머니에 넣었다⁠. 그러고는 숟가락을 들어 보영의 밥 위에 정사각형 두부 하나를 올렸다⁠.

“⁠내일 반차 낼게⁠. 1332에서 변호사 붙여 준다며⁠. 같이 가⁠.⁠”

“⁠회사는⁠?⁠”

“⁠팀장님이 오늘 그 사람 끊고 나서 나한테 그랬어⁠. 김 과장⁠, 인증 없는 업체가 우리 집 문 두드리면 우리는 안 열어 줘⁠. 근데 집 안에 있는 사람은 끝까지 지켜⁠.⁠”

보영은 두부를 먹었다⁠. 찌개가 다 식어 있었다⁠. 식은 찌개가 이렇게 맛있는 줄 처음 알았다⁠.

*

2월 25일 목요일 오전 열한 시⁠, 예약 앱에 「⁠나 실장 · 커트⁠」가 다시 떠 있었다⁠. 열흘마다 온다던 손님은 날짜를 지켰다⁠. 보영은 스물두 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를 세면서 가위를 소독기에서 꺼냈다⁠.

“⁠실장님⁠, 저 채무자대리인 붙었어요⁠. 저한테 연락하시면 안 돼요⁠.⁠”

“⁠연락 아니에요⁠. 머리 자르러 왔어요⁠. 예약도 했고요⁠.⁠”

“⁠그럼 자르고 가세요⁠. 말은 하지 마시고요⁠.⁠”

나성태는 의자에 앉아 고개를 끄덕였다⁠. 보영은 커트 보를 둘렀다⁠. 열흘 사이 자란 머리는 손가락 한 마디쯤이었다⁠. 보영은 아무 말 없이 잘랐다⁠. 가위 소리만 났다⁠. 샴푸대 앞의 다은은 수건을 개는 손을 멈추지 못했다⁠. 같은 수건을 세 번 갰다⁠.

뒷머리를 바리캉으로 다듬을 때 나성태가 입을 열었다⁠.

“⁠남편분 회사 팀장님⁠, 재밌는 분이시더라고요⁠. 인증 번호를 대래요⁠.⁠”

“⁠말하지 마시라고 했어요⁠.⁠”

“⁠하나만 하고 갈게요⁠. 우리 회사에 어떤 직원이 그러더라고요⁠. 삼 년 늦은 거면 지금 하면 삼 년하고 한 달 늦은 거라고⁠.⁠”

보영은 무슨 말인지 몰랐다⁠. 거울 속 나성태는 보영에게 하는 말이 아닌 얼굴이었다⁠. 회색 머리카락이 커트 보 위로 떨어졌다⁠. 열흘 전보다 회색이 많았다⁠.

나성태는 만 오천 원을 카운터에 놓고 나갔다⁠. 보영은 손등에 썼다⁠. 「⁠2/25 11⁠:00 나성태 방문 · 커트⁠」⁠. 그리고 만 오천 원을 봉투에 넣어 봉투 겉에도 같은 날짜를 썼다⁠. 증거가 될지 머리값이 될지는 법원이 정할 일이었다⁠.

*

2월 26일 금요일 오후 두 시⁠, 수원의 대한법률구조공단 사무실 상담실에서 윤재희 변호사는 보영이 가져온 서류를 탁자에 한 장씩 늘어놓았다⁠. 이체 내역⁠, 문자 캡처⁠, 1332 접수 번호⁠, 손등 대신 수첩에 옮겨 적은 날짜와 시각들⁠. 마흔 안팎의 변호사는 서류를 다 늘어놓고 나서야 고개를 들었다⁠.

“⁠이백 받으시고 열흘마다 육십⁠, 네 번 내시고 한 번은 삼십⁠. 다 합치면 이백칠십만 원이네요⁠. 연 육십 퍼센트를 넘는 계약이라 원금과 이자 모두 무효입니다⁠. 이백은 안 갚으셔도 되고⁠, 낸 이백칠십은 돌려받는 소송을 내실 수 있어요⁠. 공단이 대리합니다⁠. 비용은 안 드세요⁠.⁠”

상훈이 수첩을 꺼내 받아 적었다⁠. 품질팀 사람의 받아 적기는 빨랐다⁠.

“⁠누구를 상대로 내요⁠? 최 실장이라는 사람은 이름도 가짜일 텐데⁠.⁠”

“⁠업자 얼굴은 모릅니다⁠. 돈이 들어간 계좌는 압니다⁠. 돈이 들어간 계좌의 주인을 피고로 합니다⁠. 계좌 주인이 자기는 모른다고 하면 법정에서 가려지고⁠, 그러면 계좌 주인 이름을 빌려 간 사람이 드러납니다⁠. 금감원 무효 확인서도 같이 신청하세요⁠. 증거로 씁니다⁠.⁠”

“⁠예금주가 도금자예요⁠. 일흔넷 할머니래요⁠. 1332에서 같은 이름 신고가 있다고 했어요⁠.⁠”

변호사가 서류 한 장을 뒤집었다⁠.

“⁠할머니가 진짜 업자일 수도 있고⁠, 이름만 빌려준 분일 수도 있습니다⁠. 어느 경우든 원장님이 낸 이백칠십은 할머니 이름으로 들어갔어요⁠.⁠”

보영은 속으로 몇 번이고 도금자라는 이름을 굴렸다⁠. 정희가 돈 받기 좋은 이름이라고 했던 이름이었다⁠.

“⁠일흔넷이면 우리 엄마보다 많으세요⁠. 그런 분을 법정에 부르는 거예요⁠?⁠”

“⁠원장님 손님 이백열두 명한테 문자 보내겠다고 한 사람은 원장님 나이를 따지지 않았어요⁠.⁠”

변호사는 담담하게 말하고 다음 서류를 넘겼다⁠. 상훈이 수첩에 무언가를 쓰다 말고 볼펜을 내려놓았다⁠. 상담실 밖 대기실에서는 번호표 기계가 「⁠딩동⁠」 하고 울렸다⁠. 대기 의자의 할아버지 한 분이 직원에게 여기는 돈 빌려주는 데냐고 묻고 있었다⁠. 보영은 신용회복위원회 대기실에서 본 할아버지가 아닌지 문틈으로 내다보았다⁠. 다른 할아버지였다⁠. 같은 물음을 하는 할아버지가 수원에 여럿이었다⁠.

“⁠그리고 증인이 있으면 좋습니다⁠. 같은 번호에서 빌린 분⁠, 같은 협박을 받은 분⁠.⁠”

상훈이 보영을 보았다⁠. 보영은 탁자 위 이체 내역만 보았다⁠.

*

2월 27일 토요일 저녁 여덟 시⁠, 미용실 뒷방 접이식 탁자에서 보영은 다은에게 컵라면을 건넸다⁠. 다은은 뚜껑을 반만 뜯었다⁠.

“⁠다은아⁠, 증인 좀 서 줄 수 있어⁠? 네 이름은 소송 서류에만 들어가⁠. 그 사람들한테 가는 게 아니야⁠.⁠”

“⁠원장님⁠, 그 사람들은 서류를 다 봐요⁠. 제 주소록도 봤고 원장님 손님 목록도 봤어요⁠. 법원 서류는 왜 못 봐요⁠?⁠”

보영은 할 말이 없었다⁠. 다은은 젓가락으로 면을 풀지 않고 뚜껑 위에 올려 두었다⁠.

“⁠이번 주에도 연장비 냈어요⁠. 십오만 원⁠. 아빠 생신이 다음 주인데 선물을 못 샀어요⁠.⁠”

“⁠그러니까 같이 하자는 거야⁠. 언제까지 낼 건데⁠?⁠”

“⁠다 낼 때까지요⁠.⁠”

“⁠다 내는 날은 안 와⁠. 이백이 이백칠십 되는 거 내가 봤어⁠. 너는 오십이 이백팔십이 됐잖아⁠.⁠”

보영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커졌다⁠. 다은이 컵라면을 내려놓았다⁠. 국물이 탁자에 조금 튀었다⁠.

“⁠원장님은 남편분이 있잖아요⁠. 두부 잘라 주는 남편분이요⁠. 저는 아빠가 저 서울에서 잘 사는 줄만 알아요⁠. 아빠 세차장에 사진 한 장 가면 아빠는 세차장 문 닫아요⁠. 우리 아빠는 그런 사람이에요⁠.⁠”

다은은 일어나 휴지로 탁자의 국물을 닦았다⁠. 다 닦고 나서도 같은 자리를 한 번 더 닦았다⁠.

“⁠증언은 못 해요⁠. 대신 원장님 소송 끝날 때까지 안 그만둘게요⁠. 그건 할게요⁠.⁠”

보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이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

3월 2일 화요일 오전 열 시⁠, 문순자가 스물두 계단을 평소보다 빨리 올라왔다⁠. 숨이 차서 문틀을 붙잡고 휴대전화부터 내밀었다⁠.

“⁠원장⁠, 이게 뭐야⁠? 나한테 이상한 문자가 왔어⁠.⁠”

화면에 문자가 떠 있었다⁠. 「⁠[채무자 공개] 보영헤어 원장 구보영 · 채무 미이행 · 본 업소 이용 고객님들께 알려 드립니다⁠」⁠. 보영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졌다⁠. 이백열두 명⁠. 먼저 순자에게 갔다⁠. 순자는 이 가게 단골 가운데 가장 오래된 손님이었다⁠.

뒤따라 올라온 최정희가 순자의 휴대전화를 빼앗아 읽었다⁠.

“⁠언니⁠, 이거 리딩방보다 나쁜 거야⁠. 이건 남의 집 문에 빨간 칠 하는 거야⁠.⁠”

“⁠그래서 내가 뭘 하면 돼⁠?⁠”

“⁠아무것도 하지 마⁠. 답장도 하지 말고⁠.⁠”

순자는 휴대전화를 돌려받고 한참 화면을 보았다⁠. 그러고는 지갑을 꺼냈다⁠.

“⁠원장⁠, 나 다음 달 파마 미리 계산할게⁠. 십만 원⁠. 그다음 달 것도⁠.⁠”

“⁠언니⁠, 그러지 마세요⁠.⁠”

“⁠내 돈으로 내 머리 하는 거야⁠. 코인보다 이게 확실해⁠.⁠”

정희가 웃음을 터뜨렸다⁠. 보영은 웃다가 울었다⁠. 우는 얼굴로 순자의 십만 원을 받고⁠, 영수증을 끊었다⁠. 손이 떨려 영수증이 비뚤게 찢어졌다⁠. 순자는 비뚤어진 영수증을 반듯하게 접어 지갑에 넣었다⁠. 보영은 손등에 숫자를 하나 더 썼다⁠. 「⁠3/2 문순자⁠」⁠.

*

3월 3일 수요일 오전 열 시 반⁠, 수원지방법원 민원실에서 윤재희 변호사가 소장을 접수 창구에 밀어 넣었다⁠. 창구 직원이 도장을 찍었다⁠. 금자의 도장보다 네모나고 소리가 작았다⁠. 상훈은 반차를 또 내고 와서 보영 옆에 서 있었다⁠. 냅킨 원인 분석도는 셔츠 주머니에 아직 있었다⁠.

접수증과 소장 사본이 보영의 손에 돌아왔다⁠. 사건 이름은 「⁠부당이득금 반환⁠」이었고⁠, 청구 금액은 2⁠,700⁠,000원이었다⁠. 원고 칸에 보영의 이름이 있었다⁠. 피고 칸에 처음 보는 사람의 이름이 있었다⁠.

「⁠피고 도금자 · 74세 · 경기 부천 원미동 느티나무시장 금자네 국수⁠」

상훈이 어깨 너머로 소장을 들여다보았다⁠.

“⁠이 할머니도 지금 무서우실까⁠?⁠”

“⁠모르겠어⁠. 나는 무서웠어⁠.⁠”

윤재희 변호사가 서류 가방을 닫으며 첫 변론은 4월 초에 잡힐 거라고 했다⁠. 소장이 부천 시장의 국숫집에 닿는 데 며칠⁠, 할머니가 답을 내는 데 몇 주⁠. 보영은 날짜를 따져 보지 않았다⁠. 열흘마다 오던 날들보다 길기만 하면 되었다⁠.

보영은 소장을 들고 민원실을 나왔다⁠. 법원 정문 계단은 열한 개였다⁠. 보영은 내려가면서 세었다⁠. 스물두 계단의 반이었다⁠. 정문 앞 은행나무에는 아직 잎이 없었고⁠, 가지 끝마다 연두색 눈이 쌀알만 하게 부풀어 있었다⁠. 보영은 소장의 피고 칸을 엄지로 덮었다가 떼었다⁠. 일흔네 살의 이름은 그대로 거기 있었다⁠.

10화는 어땠나요?

댓글 0

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 보세요.

무효 · 신용 무관·소액 대출 · 나오늘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