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5,393자)

개조식

신용 무관·소액 대출 · 서강림

12월 21일 월요일 오전 열 시⁠, 여의도 금융감독원 본원 11층 소회의실에서는 모두가 개조식으로 말했다⁠. 오진경은 화면에 열일곱 번째 묶음을 띄워 놓고 보고서 첫 장을 읽었다⁠.

“⁠열일곱 번째 묶음⁠. 신고·제보·민원 삼천이백사 건⁠. 광고⁠, 대출⁠, 추심이 나뉜 분업형 정황 확인됨⁠. 추심 발신 번호 마흔한 개 이용 중지 요청 예정⁠. 수사 의뢰 필요함⁠.⁠”

국장 장석진은 쉰넷이었고 볼펜을 귀에 꽂고 다녔다⁠. 국장이 볼펜을 귀에서 빼 탁자를 두 번 두드렸다⁠.

“⁠수사 의뢰는 보류함⁠.⁠”

“⁠국장님⁠, 보류 사유를 개조식 말고 말로 해 주십시오⁠.⁠”

옆자리 박선우가 기침을 했다⁠. 국장은 웃지도 않고 말로 했다⁠.

“⁠민생 특사경이 석 달 안에 뜬다⁠. 법무부가 법안을 준비하고 있고⁠, 우리 직원 마흔 명이 압수수색이랑 영장 신청 연수를 받았어⁠. 출범하면 우리가 직접 수사한다⁠. 지금 경찰에 넘기면 우리가 한 일은 수사 의뢰 공문 한 장으로 끝나⁠. 금융위는 지금도 특사경이 왜 필요하냐고 묻는다⁠. 첫 사건이 크게 보여야 다음 사건이 생겨⁠.⁠”

“⁠석 달이면 신고가 천 건 더 늡니다⁠. 하루 열 건씩이요⁠. 신림동 스물세 살이 얼굴 합성 사진을 받은 게 지난주입니다⁠.⁠”

“⁠그래서 번호는 끊자는 거야⁠. 경고 문자도 보내고⁠. 계좌 거래 정지는 아직 하지 마⁠. 계좌부터 막으면 저 사람들이 냄새 맡고 흩어진다⁠.⁠”

“⁠신고하신 분들한테는 뭐라고 합니까⁠?⁠”

“⁠채무자대리인 붙여 드리고⁠, 무효 확인서 내 드리고⁠, 번호 끊어 드리고⁠. 그건 지금도 다 해⁠.⁠”

“⁠수금책이 옆방에 사는 신고자한테는요⁠?⁠”

“⁠이사 가라고 해⁠.⁠”

국장은 말해 놓고 볼펜을 다시 귀에 꽂았다⁠. 귀에 꽂힌 볼펜이 한 번 미끄러졌다⁠. 국장은 볼펜을 고쳐 꽂으며 목소리를 낮췄다⁠.

“⁠농담이야⁠. 관악서에 그 친구 신변 보호 요청은 넣어⁠. 그건 수사 의뢰가 아니니까⁠.⁠”

진경은 펜 끝으로 보고서의 「⁠수사 의뢰 필요함⁠」 아래에 줄을 그었다⁠. 줄 아래에 국장의 말을 받아 적었다⁠. 「⁠보류함⁠. 사유 — 첫 사건이 크게 보여야 함⁠」⁠. 받아 적고 나서 보니 진경의 글씨가 평소보다 컸다⁠.

“⁠국장님 말씀도 보고서 말투네요⁠.⁠”

“⁠이 건물에서 삼십 년 살아 봐⁠. 잠꼬대도 개조식이다⁠.⁠”

*

같은 날 밤 아홉 시⁠, 분석팀 사무실에 남은 사람은 진경 하나였다⁠. 번호 이용 중지 요청 공문 마흔한 장에 번호를 하나씩 옮겨 적고 나서⁠, 진경은 오래된 민원 하나를 열었다⁠. 신입이던 2011년 봄에 진경이 처리한 민원이었다⁠. 인천의 시장 상인이 일수 이자가 너무 세다고 낸 글이었고⁠, 진경은 답변 칸에 「⁠사인 간 금전 거래로 감독 대상이 아님⁠」이라고 썼다⁠. 개조식으로⁠, 맞는 말로⁠.

민원인의 이름을 작게 소리 내어 읽었다⁠. 열다섯 해 만에 처음 읽는 이름이었다⁠. 인천 상인이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는 화면 어디에도 없었다⁠. 진경은 민원 창을 닫지 않고 묶음 017 창 뒤에 깔아 두었다⁠. 신고 숫자가 삼천이백사에서 삼천이백칠로 바뀌었다⁠.

*

12월 22일 화요일 오후 두 시 십 분⁠, 금감원 본원 1층 로비 출입문 앞에서 형광 연두 조끼를 입은 인호가 경비원에게 막혀 있었다⁠. 경비원은 인호의 조끼를 보고 손을 내밀었다⁠.

“⁠배달은 지하 일층 하역장으로 가세요⁠.⁠”

“⁠배달 아니에요⁠. 신고하러 왔어요⁠.⁠”

“⁠신고도 배달처럼 오시네⁠.⁠”

진경이 내려와 출입증을 찍어 주었다⁠. 1층 민원상담센터 옆 작은 상담실에는 탁자 하나와 의자 둘⁠, 휴지 한 통이 있었다⁠. 인호는 헬멧을 무릎에 올려놓고 휴대전화를 탁자 가운데에 놓았다⁠. 자동으로 녹음된 통화였다⁠. 12월 11일 오전 아홉 시 사 분⁠, 사 분 십이 초짜리⁠.

진경은 소리를 키웠다⁠. 「⁠직장으로 찾아뵙기 전에 먼저 연락드렸습니다⁠」로 시작하는 여자 목소리가 관청 말투로 흘러나왔다⁠. 연장비⁠, 상환 의사 확인 단계⁠, 비상 연락처 안내⁠. 인호는 녹음 속 제 목소리를 듣다가 고개를 숙였다⁠. 삼십팔 먼저 받으면 안 되느냐고 비는 목소리였다⁠.

끝나기 직전⁠, 플라스틱이 머리카락을 스치는 작은 소리가 났다⁠. 이어 숨 같은 목소리⁠.

「⁠일⁠, 삼⁠, 삼⁠, 이⁠.⁠」

딸깍⁠. 통화가 끊겼다⁠. 진경은 녹음을 되돌려 두 번 더 들었다⁠. 머리띠 스치는 소리에서 딸깍까지⁠, 손가락을 접어 가며 세었다⁠.

“⁠삼 초네요⁠.⁠”

“⁠네⁠?⁠”

“⁠이 사람은 누가 안 듣는 삼 초를 알아요⁠. 그 틈에 말하는 거예요⁠.⁠”

진경은 노트북을 열어 묶음 017의 동그라미 친 점에 새 이름을 붙였다⁠. 「⁠삼 초⁠」⁠. 인호가 화면을 들여다보다가 물었다⁠.

“⁠옆방 형은요⁠? 형도 오십 빌렸다가 사백 됐대요⁠. 형도 신고한 사람이 되면 안 돼요⁠?⁠”

“⁠정우진 씨는 피해자이면서 피의자예요⁠. 협박 문자를 보낸 손이니까요⁠.⁠”

“⁠그럼 저는 형을 판 거예요⁠?⁠”

진경은 대답하지 않고 금감원 홈페이지의 불법사금융 지킴이 이자율 계산기를 열었다⁠. 빌린 날⁠, 받은 돈⁠, 갚기로 한 날⁠, 갚기로 한 돈⁠. 인호가 불러 주는 대로 넣자 숫자가 떴다⁠. 연 오천육백 퍼센트가 넘었다⁠.

“⁠권인호 씨는 아무것도 안 팔았어요⁠. 이 숫자를 판 사람이 있는 거예요⁠. 지난 3월부터 이런 계약에는 원장 명의로 무효 확인서를 내 드려요⁠. 신청하면 검토해서 업자 번호로도 보내고요⁠.⁠”

“⁠업자 번호요⁠?⁠”

“⁠권인호 씨한테 문자 보낸 번호요⁠.⁠”

인호는 헬멧 턱끈을 손가락에 감았다가 풀었다⁠. 문자를 보낸 번호는 옆방 형의 두 번째 휴대전화였다⁠.

“⁠엄마한테 간 문자는요⁠? 그것도 불법이에요⁠?⁠”

“⁠가족이나 지인한테 빚을 알리는 건 불법이에요⁠. 밤 아홉 시 넘어 연락하는 것도요⁠. 다 신고서에 넣어 두세요⁠. 날짜하고 시각까지⁠.⁠”

“⁠시각은 제가 잘 알아요⁠. 분 단위로요⁠.⁠”

인호는 헬멧 속에 넣어 둔 메모지를 꺼냈다⁠. 12월 13일 오전 열 시 오십이 분 엄마⁠, 열한 시 사 분 단톡방⁠, 열한 시 칠 분 지점장⁠. 12월 14일 오후 여덟 시 사십 분 사진⁠. 진경은 메모지를 받아 들고 숫자를 눈으로 따라 내려갔다⁠. 신고서 삼천 건 가운데 시각을 분까지 적은 사람은 처음이었다⁠.

“⁠라이더라서요⁠. 콜 잡을 때 분으로 세요⁠.⁠”

진경은 메모지를 복사기에 올렸다⁠. 상담실 밖 로비에서 경비원이 누군가에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배달은 하역장으로 가세요⁠.

*

2027년 1월 7일 목요일 오전 열한 시⁠, 부천 중동 상가 5층 동백금융 대표실 벽에는 액자가 하나 있었다⁠. 「⁠정직한 금리 연 19⁠.9%⁠」⁠. 진경과 선우가 현장 점검 공문을 내밀자 대표 고태준이 일어나서 액자부터 바로잡았다⁠. 마흔 살 태준은 짙은 남색 양복에 넥타이를 끝까지 올려 매고 있었다⁠.

책상 뒤 선반에는 감사패 세 개가 키 순서로 놓여 있었다⁠. 「⁠서민금융 이바지 · 동백금융 대표 고만석⁠」⁠. 세 개 모두 아버지 이름이었고⁠, 태준의 이름이 든 것은 책상 위 명패 하나뿐이었다⁠. 명패의 금박이 아직 반짝였다⁠.

“⁠법정 최고금리 안입니다⁠. 연체 연락도 일주일에 일곱 번을 넘긴 적이 없습니다⁠. 화면에 숫자가 떠요⁠.⁠”

“⁠알아요⁠. 고객분이 일곱 번째 전화에서 세면서 하냐고 물으셨다더군요⁠.⁠”

진경은 태블릿을 돌려 보였다⁠. AI가 새해 첫날 묶음 017에 붙인 새 칸이었다⁠. 「⁠등록 대부업체 동백금융 · 대출 거절 뒤 24시간 안에 ‘⁠신용 무관 · 당일 소액⁠’ 문자 수신 · 1⁠,204건⁠」⁠.

“⁠동백금융에서 거절당한 분들 가운데 천이백 명이⁠, 거절 문자를 받은 다음 날 같은 사채 문자를 받았습니다⁠. 우연이라면 동백금융은 운이 나쁜 회사예요⁠.⁠”

태준은 태블릿을 오래 보았다⁠. 직원들이 앉은 바깥 사무실에서 상담 전화 받는 목소리가 유리벽을 넘어왔다⁠. 「⁠고객님⁠, 이번 주 일곱 번째 연락입니다⁠」⁠.

“⁠거절한 손님 번호는 저희가 안 팝니다⁠. 저희 직원 열두 명은 법 안에서 일합니다⁠.⁠”

“⁠그럼 번호는 어디서 나갔을까요⁠?⁠”

“⁠감독원은 저희가 문 닫으면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태준이 서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탁자에 놓았다⁠. 「⁠갱신 대상 고객 4⁠,021명 · 신용평점 하위 10%⁠」⁠.

“⁠이분들은 은행도 카드사도 다 거절했습니다⁠. 저희가 연 19⁠.9%로 다음 달 갱신을 해 드려서 버티는 분들입니다⁠. 저희가 영업 정지를 맞으면 사천 명이 다음 달에 어디로 갈 것 같습니까⁠? 노란 전단 번호로 갑니다⁠. 감독원 계산기에 넣으면 오천 퍼센트 나오는 데로요⁠.⁠”

“⁠그 사천 명 가운데 천이백 명은 이미 거기 갔습니다⁠. 동백금융 문 앞에서요⁠.⁠”

두 사람 사이 탁자 위에 종이 두 장이 나란히 놓였다⁠. 사천이십일 명과 천이백사 건⁠. 선우가 볼펜을 쥔 채 숨을 참고 있었다⁠. 태준이 먼저 눈을 들었다⁠.

“⁠점검 기간이 언제부터입니까⁠?⁠”

“⁠2025년 7월부터요⁠. 개정법 시행일부터⁠.⁠”

“⁠작년 봄 전까지 저는 대표가 아니었습니다⁠. 아버지 회사였어요⁠.⁠”

태준은 한마디만 하고 다시 일어나 액자를 만졌다⁠. 액자는 이미 반듯했다⁠.

상가를 나와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계단에서 선우가 점검 서류철을 가슴에 안고 말했다⁠.

“⁠선배⁠, 저 사람 거짓말은 안 했어요⁠. 번호를 판 게 저 사람이라는 말도 없었고요⁠.⁠”

“⁠거짓말 안 하는 사람이 제일 어려워⁠. 한 문장씩 다 맞거든⁠.⁠”

“⁠사천 명은 진짜일까요⁠?⁠”

“⁠진짜일 거야⁠. 그래서 어려운 거야⁠.⁠”

공용 차 안은 아침 볕에 데워져 있었다⁠. 진경은 안전띠를 매다 말고 태블릿을 다시 켰다⁠. 동백금융 칸에서 뻗은 줄 천이백네 개가 모두 같은 두 마디로 이어져 있었다⁠. 「⁠신용 무관⁠」 「⁠당일 소액⁠」⁠. 진경은 동백금융 칸 옆에 작게 한 줄을 달았다⁠. 「⁠2026년 봄 대표 교체 · 아버지⁠」⁠.

*

같은 날 밤 열한 시 사십 분⁠, 인호는 배차 정지가 풀리고 처음으로 열여섯 콜을 채운 다리로 고시원 3층에 올라왔다⁠. 311호 문이 활짝 열려 있었고⁠, 총무가 마대 걸레로 바닥을 밀고 있었다⁠.

“⁠311호 방 뺐어⁠. 짐은 다음 주에 가지러 온대⁠. 월세는 열흘 치 남았는데 안 받는대⁠.⁠”

방 안은 침대 하나와 접이식 탁자 하나였다⁠. 벽에 붙은 노란 전단 묶음은 다 떼어져 있었다⁠. 침대 밑에 작은 검은 가방 하나만 남아 있었다⁠. 열린 지퍼 사이로 신분증 크기의 사진 한 장이 보였다⁠. 앞치마를 두른 중년 여자와 교복 입은 여자아이⁠, 그리고 앳된 얼굴의 우진이 어느 식당 앞에서 나란히 웃고 있었다⁠. 식당 간판의 글자가 반쯤 잘려 있었다⁠. 「⁠전주 콩나물⁠」⁠. 우진은 동네 이야기를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인호는 사진 뒷면을 뒤집어 보았다⁠. 볼펜으로 「⁠우희 중학교 졸업 · 2019⁠」라고 쓰여 있었다⁠.

“⁠총무님⁠, 이 가방 제가 갖고 있을게요⁠. 옆방이었어요⁠.⁠”

“⁠가져가⁠. 버리면 나도 일이야⁠.⁠”

인호는 가방을 들고 312호로 들어가 우진에게 문자를 보냈다⁠. 「⁠형 가방 두고 갔어요⁠. 사진 들어 있어요⁠」⁠. 답은 십 분 뒤에 왔다⁠. 「⁠버려⁠.⁠」 일 분 뒤에 한 통이 더 왔다⁠. 「⁠아니⁠. 갖고 있어⁠.⁠」 두 문자 모두 끝에 마침표가 찍혀 있었다⁠. 우진은 협박 문자에도 마침표를 꼭 찍었다⁠. 인호는 마침표를 이제야 알아보았다⁠.

공용 주방 냉장고 문에 메모지가 한 장 더 붙어 있었다⁠. 「⁠김치 두 젓가락 넘게 먹은 거 죄송합니다 · 311⁠」⁠. 인호는 메모지를 떼지 않았다⁠. 냉장고 모터가 낮게 돌기 시작했고⁠, 메모지 끝이 바람에 한 번 들렸다가 내려앉았다⁠.

4화는 어땠나요?

댓글 0

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