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5,413자)

일곱 번째 계단

신용 무관·소액 대출 · 서강림

12월 10일 목요일 오전 열 시 사십 분⁠, 수원 영통의 상가 2층 보영헤어에서 구보영은 문순자의 머리에 파마 롤을 마는 중이었다⁠. 열두 평짜리 가게에 의자가 셋⁠, 샴푸대가 둘⁠, 창가에는 잎을 다 떨군 가로수 꼭대기가 걸쳐 보였다⁠. 1층에서 2층까지 계단은 스물두 개였다⁠. 보영은 아침마다 계단을 세며 올라왔고⁠, 올해 가을부터는 계단 대신 빚을 셌다⁠.

카드론 두 장⁠, 현금서비스 두 장⁠, 온라인 등록 대부업체 한 곳⁠, 부천의 동백금융 한 곳⁠. 상가 주인이 보증금을 천오백만 원 올려 달라고 한 것이 9월이었고⁠, 여섯 계단을 내려가는 데 석 달이 들었다⁠. 카드론이 연 14%⁠, 현금서비스가 18%⁠, 대부업체 두 곳이 19⁠.9%였다⁠. 금리는 계단을 하나 내려갈 때마다 조금씩 올랐고⁠, 계단마다 갚는 날이 달랐다⁠. 휴대전화 달력에는 날짜마다 색이 다른 점이 여섯 개 찍혀 있었다⁠.

일곱 번째 점은 빨간색이었다⁠. 12월 14일 월요일⁠, 육십만 원⁠.

“⁠원장⁠, 요새 얼굴이 홀쭉해졌어⁠. 다이어트해⁠?⁠”

문순자가 거울 속 보영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예순여덟 살 순자는 세 달에 한 번 파마를 하고⁠, 할 때마다 동네 소식을 롤 개수만큼 풀었다⁠.

“⁠언니 머리 말다 보면 살이 빠져요⁠. 롤이 서른여섯 개예요⁠.⁠”

“⁠나 요새 주식 리딩방 들어갔잖아⁠. 거기 선생님이 이번 주 삼 퍼센트 먹게 해 줬어⁠.⁠”

염색약을 바르고 앉아 있던 최정희가 신문을 접으며 끼어들었다⁠.

“⁠언니⁠, 리딩방 선생님은 언니 돈으로 삼 퍼센트 먹고 자기 돈으로 삼십 퍼센트 먹어⁠. 우리 시누이가 그걸로 차 팔았어⁠.⁠”

“⁠정희는 꼭 남의 잔치에 초를 쳐⁠.⁠”

“⁠초가 아니라 소화제야⁠, 언니⁠.⁠”

보조 미용사 한다은이 샴푸대에서 웃음을 참느라 어깨를 떨었다⁠. 스물네 살 다은은 보영헤어에 온 지 두 해째였고⁠, 손님 두피를 누르는 손이 보영보다 힘이 좋았다⁠. 보영은 롤을 하나 더 말고 고무줄을 튕겼다⁠. 거울 옆에 엎어 둔 휴대전화가 울렸다⁠. 화면에 저장해 두지 않은 번호가 떴다⁠. 끝자리가 4417이었다⁠.

“⁠언니⁠, 잠깐만요⁠. 약제 회사 전화예요⁠.⁠”

보영은 샴푸실 문을 반쯤 닫고 전화를 받았다⁠.

“⁠구보영 원장님⁠, 당일 소액 최 실장입니다⁠. 월요일 이자 날 확인차 연락드렸습니다⁠.⁠”

“⁠알아요⁠. 월요일에 넣을게요⁠.⁠”

“⁠육십입니다⁠. 원금 이백은 그대로 두시고요⁠.⁠”

“⁠실장님⁠, 제가 지난주에 말씀드렸잖아요⁠. 열흘에 육십이면 한 달이면 백팔십이에요⁠. 이걸 어떻게 갚아요⁠?⁠”

“⁠그래서 원금은 안 건드리시라는 겁니다⁠. 이자만 맞춰 주시면 저희는 원장님 편입니다⁠.⁠”

“⁠편이요⁠?⁠”

“⁠그럼요⁠. 원장님 예약 앱 고객 목록⁠, 저희가 비상 연락처로 잘 갖고 있습니다⁠. 이백열두 분⁠. 월요일만 지켜 주시면 한 분도 연락 안 갑니다⁠. 그리고 바깥분 회사 품질팀 번호도요⁠.⁠”

보영은 샴푸실 벽에 등을 붙였다⁠. 타일이 차가웠다⁠. 지난주 금요일⁠, 동백금융에서 추가 대출을 거절당한 다음 날 아침에 문자가 왔다⁠. 「⁠신용 무관 · 당일 소액 · 무방문 즉시 입금⁠」⁠. 가족 연락처를 달라는 말에 보영은 남편 번호 대신 예약 앱 고객 목록을 캡처해 보냈다⁠. 손님 이름이 가족보다 덜 무섭다고⁠, 문자를 받은 아침에는 생각했다⁠.

“⁠손님 번호는 왜 들먹이세요⁠?⁠”

“⁠들먹이는 거 아닙니다⁠. 확인드리는 겁니다⁠. 그럼 월요일 뵙겠습니다⁠.⁠”

전화가 끊겼다⁠. 보영이 샴푸실 문을 열자 다은이 수건 바구니를 안고 문 앞에 서 있었다⁠. 다은의 눈이 보영의 손에 들린 휴대전화 화면에서 멈췄다⁠. 끝자리 4417⁠. 다은의 얼굴에서 핏기가 한 번에 빠졌다⁠.

“⁠다은아⁠, 왜⁠?⁠”

“⁠아⁠, 아니에요⁠. 수건 개러 왔어요⁠.⁠”

다은은 수건을 바구니째 들고 몸을 돌렸다⁠. 개야 할 수건은 이미 개어져 있었다⁠.

오후 세 시⁠, 보영은 손님 사이 이십 분을 쪼개 1층 현금인출기 앞에 갔다⁠. 잔액은 십칠만 원이었다⁠. 인출기 옆 관리실 문이 열리고 상가 주인 남씨가 보온병을 들고 나왔다⁠. 일흔을 넘긴 남씨는 이 건물 하나로 산다고 늘 말했다⁠.

“⁠원장님⁠, 보증금 넣어 줘서 고마워⁠. 요새 다들 못 넣겠다고 해서 내가 은행 이자를 못 내⁠.⁠”

“⁠사장님도 은행 이자 내세요⁠?⁠”

“⁠건물 사면서 빌린 거⁠. 연 오 퍼센트⁠. 비싸지⁠?⁠”

“⁠네⁠. 비싸요⁠.⁠”

보영은 웃으며 대답했다⁠. 오 퍼센트가 비싸다는 사람 앞에서 열흘에 삼십 퍼센트라는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남씨는 보온병 뚜껑에 둥굴레차를 따라 보영에게 내밀었다⁠. 보영은 뜨거운 뚜껑을 두 손으로 받아 한 모금 마시고 스물두 계단을 다시 올라갔다⁠.

*

저녁 일곱 시 반⁠, 마지막 손님이 나가자 보영은 카드 단말기의 하루 정산을 뽑았다⁠. 「⁠매출 합계 412⁠,000원⁠」⁠. 영수증이 혀처럼 길게 빠져나왔다⁠. 월요일 육십만 원까지 남은 것은 금요일과 토요일⁠, 일요일 반나절이었다⁠. 보영은 카운터 밑 깡통을 열었다⁠. 카드 네 장과 대출 계약서 사본 두 장⁠, 동백금융 상환 안내문 한 장이 들어 있었다⁠.

휴대전화가 울렸다⁠. 이번에는 저장된 번호였다⁠. 「⁠동백금융 상담센터⁠」⁠.

“⁠구보영 고객님⁠, 동백금융입니다⁠. 12월 상환일 안내드립니다⁠. 참고로 이번 연락은 이 채권에 대해 이번 주 일곱 번째 연락입니다⁠. 법에 따라 오늘 이후로는 이번 주에 더 연락드리지 않습니다⁠.⁠”

“⁠일곱 번째요⁠? 세면서 하세요⁠?⁠”

“⁠네⁠, 화면에 숫자가 뜹니다⁠. 일곱이 되면 단추가 회색으로 바뀝니다⁠.⁠”

상담원은 진지했다⁠. 보영은 웃음이 나왔다가 목에서 멈췄다⁠. 법을 지키는 빚은 일주일에 일곱 번 전화를 걸었다⁠. 법 밖의 빚은 하루에 몇 번이든 걸 수 있었다⁠. 동백금융에서 거절 문자가 온 것이 12월 3일 목요일 오후였고⁠, 노란 두 마디가 온 것은 이튿날 아침 여덟 시 십 분이었다⁠. 보영은 두 문자의 시각을 처음으로 나란히 놓고 보았다⁠. 하룻밤 사이였다⁠.

남편 김상훈에게서 문자가 왔다⁠. 「⁠오늘 늦어⁠? 김치찌개 끓여 놨어⁠」⁠. 보영은 「⁠손님 하나 남았어⁠」라고 답했다⁠. 손님은 없었다⁠. 가게 안에는 다은이 남아 있었다⁠. 다은은 퇴근 카드를 찍고도 빗자루를 놓지 않고 의자 밑의 머리카락을 세 번째로 쓸고 있었다⁠.

“⁠다은아⁠, 너 가⁠. 내일 아홉 시 반이야⁠.⁠”

“⁠원장님⁠.⁠”

“⁠응⁠.⁠”

“⁠아까 그 번호요⁠.⁠”

보영이 고개를 들었다⁠. 다은은 빗자루 끝을 내려다보았다⁠. 쓸어 모은 머리카락이 검은 둥지처럼 쌓여 있었다⁠.

“⁠약제 회사 맞죠⁠?⁠”

“⁠맞아⁠. 왜⁠?⁠”

“⁠아니에요⁠. 내일 봬요⁠.⁠”

다은은 빗자루를 벽에 세워 두고 나갔다⁠. 계단을 내려가는 발소리가 스물두 번 났다⁠. 보영은 발소리를 끝까지 세고 나서야 가게 불을 껐다⁠.

*

12월 11일 금요일 오전 여덟 시 십오 분⁠, 부천 원미동에서 상동으로 가는 버스 맨 뒷자리에서 한세연은 엄마가 싸 준 반찬 통을 무릎에 올려놓고 있었다⁠. 엄마 김명숙은 느티나무시장에서 반찬 가게를 했고⁠, 딸의 도시락에 팔다 남은 반찬을 넣지 않는 것을 자존심으로 삼았다⁠. 오늘은 새로 무친 시금치와 멸치볶음이었다⁠. 버스가 흔들릴 때마다 통 안에서 멸치가 사각거렸다⁠.

엄마에게서 문자가 왔다⁠. 「⁠통신사 고객센터 오늘도 백 통이야⁠? 목 아끼고 따뜻한 물 마셔⁠」⁠. 세연은 「⁠응 오늘은 구십 통⁠」이라고 답했다⁠. 엄마는 딸이 통신사에 다니는 줄 알았다⁠. 세연이 그렇게 말했고⁠, 엄마는 한 번도 회사 이름을 묻지 않았다⁠. 학자금 대출이 넉 달째 밀려 독촉 문자가 오기 시작한 여름에⁠, 세연은 「⁠주 5일 · 현금 월 350 · 경력 무관 · 상담 업무⁠」 구인 글을 보고 전화를 걸었다⁠. 경력도 사대 보험도 묻지 않는 회사였다⁠.

창밖으로 잎 떨어진 플라타너스가 지나갔다⁠. 세연은 헤드셋 자국이 남은 귀 위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눌러 폈다⁠. 버스가 상동 오피스텔 앞에 멈추자 세연은 반찬 통을 가방에 넣고⁠, 가방 지퍼를 끝까지 잠갔다⁠.

*

오전 아홉 시 이 분⁠, 부천 상동의 오피스텔 3층 「⁠한빛 고객센터⁠」에서 한세연은 헤드셋을 쓰고 출력한 대본 첫 장을 폈다⁠. 칸막이 책상 열네 개에 상담원 열네 사람⁠, 창문은 블라인드로 다 막혀 있었다⁠. 벽에는 실장 나성태가 붙인 표어가 있었다⁠. 「⁠고객의 상환이 우리의 감동⁠」⁠. 대본 첫 줄은 언제나 같았다⁠.

「⁠직장으로 찾아뵙기 전에 먼저 연락드렸습니다⁠.⁠」

세연은 오늘 목록 첫 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권인호 · 신림 · 24/50 · 12/10 미상환 · 연장비 150⁠,000원 · 담당 정우진⁠」⁠. 번호를 누르자 신호음 뒤로 오토바이 엔진 소리가 먼저 들어왔다⁠.

“⁠권인호 고객님 되시죠⁠? 직장으로 찾아뵙기 전에 먼저 연락드렸습니다⁠. 고객님께서는 현재 상환 의사 확인 단계에 계십니다⁠.⁠”

“⁠네⁠? 무슨 단계요⁠?⁠”

“⁠상환 의사 확인 단계입니다⁠. 어제 상환일이 지나 연장비 십오만 원이 발생하였습니다⁠. 금일 중 입금하시면 상환일이 칠 일 연장됩니다⁠. 미입금 시 13일부터 비상 연락처 안내가 진행됩니다⁠.⁠”

“⁠어제 정산이 삼십팔만 원밖에 안 나왔어요⁠. 오십이 안 돼서 못 보낸 거예요⁠. 삼십팔 먼저 받으시면 안 돼요⁠?⁠”

“⁠부분 상환은 접수되지 않습니다⁠. 본 통화는 고객님의 원만한 해결을 위한 안내입니다⁠.⁠”

세연은 대본대로 읽었다⁠. 대본은 관청 공문처럼 썼는데 글자마다 칼이 들어 있었다⁠. 인호의 숨소리가 헤드셋 안에서 가빠졌다⁠. 엔진 소리 사이로 신호등 음악이 들렸다⁠. 횡단보도 앞에 멈춘 오토바이였다⁠.

세연의 등 뒤로 나성태가 걸어왔다⁠. 마흔여섯 살 실장은 상담원 열네 사람의 통화를 번갈아 엿듣는 헤드셋을 쓰고 다녔다⁠. 한 통이 끝날 무렵이면 헤드셋을 벗어 목에 걸고⁠, 다음 책상으로 줄을 옮겨 꽂았다⁠. 벗고 꽂는 데 삼 초가 들었다⁠. 세연은 벗고 꽂는 삼 초를 석 달 전에 처음 세어 보았다⁠.

“⁠그럼 확인 단계 마치겠습니다⁠. 오늘 중 입금 부탁드립니다⁠.⁠”

나성태가 헤드셋을 벗는 소리가 들렸다⁠. 플라스틱 머리띠가 머리카락을 스치는 소리였다⁠. 세연은 마이크에 입술을 붙이고 숨처럼 말했다⁠.

“⁠일⁠, 삼⁠, 삼⁠, 이⁠.⁠”

그리고 끊었다⁠. 손가락이 통화 종료 단추를 누른 것은 나성태의 잭이 옆 책상에 꽂히는 딸깍 소리와 같은 때였다⁠.

목록 둘째 줄은 「⁠구보영 · 영통 · 200 · 이자 600⁠,000원 · 12/14(⁠월⁠)⁠」였다⁠. 세연은 번호를 눌렀다⁠. 이번에는 가위질 소리가 들어왔다⁠. 사각⁠, 사각⁠, 손님 머리를 자르는 소리 사이로 여자가 낮게 받았다⁠.

“⁠손님 머리 하는 중이에요⁠. 월요일에 넣는다고 했잖아요⁠.⁠”

“⁠직장으로 찾아뵙기 전에 먼저 연락드렸습니다⁠. 월요일 이자 육십만 원 확인 안내입니다⁠.⁠”

“⁠직장이 여기예요⁠. 찾아오시면 머리나 하고 가세요⁠.⁠”

여자가 먼저 끊었다⁠. 나성태는 끝까지 헤드셋을 벗지 않고 세연의 줄에 붙어 있었다⁠. 세연은 대본 둘째 장을 넘기며 다음 번호에 손가락을 올렸다⁠. 의자 등받이가 뒤로 조금 기울었다⁠. 나성태가 손을 얹은 것이었다⁠.

“⁠한세연 씨⁠.⁠”

“⁠네⁠, 실장님⁠.⁠”

“⁠아까 첫 통화 끊기 전에⁠, 마이크에 대고 뭐라고 했어⁠?⁠”

세연은 고개를 돌려 웃었다⁠. 웃는 얼굴은 석 달 동안 연습해 둔 얼굴이었다⁠.

“⁠수고하세요요⁠. 요를 한 번 더 붙였어요⁠. 버릇이에요⁠.⁠”

나성태가 등받이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블라인드 틈으로 들어온 아침 볕이 대본 첫 줄 「⁠직장으로 찾아뵙기 전에⁠」 위에 가늘게 누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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