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5,325자)

신용 무관

신용 무관·소액 대출 · 서강림

2026년 12월 3일 목요일 오후 두 시 사십 분⁠, 점심 콜이 끝나자 권인호는 신림동 청솔고시원 골목으로 오토바이를 몰고 들어왔다⁠. 건물 3층 높이에 세로 간판 「⁠고시원⁠」이 붙어 있었고⁠, 간판 밑 은행나무는 잎을 다 떨군 채 가지만 하늘로 뻗고 있었다⁠. 노란 잎은 지난주 비에 쓸려 가고 없었다⁠. 인호는 나무 밑 늘 세우던 자리에 오토바이를 대고 시동을 껐다⁠. 엔진이 식으면서 똑⁠, 똑⁠, 쇠 우는 소리를 냈다⁠.

손잡이에 노란 종이가 꽂혀 있었다⁠. 앞 브레이크 레버와 손잡이 고무 사이에 한 장⁠, 좌석과 뒤 짐칸 틈에 또 한 장⁠. 골목에 세워 둔 오토바이 여섯 대가 다 같았다⁠. 손바닥만 한 전단 한가운데 큰 글씨로 「⁠신용 무관⁠」⁠, 아래에 붉은 글씨로 「⁠당일 소액⁠」⁠, 맨 아래 작게 「⁠무방문 · 즉시 입금⁠」과 휴대전화 번호 하나⁠. 바람이 골목을 훑자 전봇대에 붙은 같은 전단 몇 장이 귀퉁이를 파닥였다⁠.

조끼 주머니에서 휴대전화가 떨었다⁠.

「⁠[할부 안내] 권인호 고객님 오토바이 할부금 300⁠,000원 연체 3회 · 12월 4일 낮 12시까지 미납 시 차량 회수 절차가 시작됩니다⁠」

인호는 문자를 두 번 읽고 화면을 껐다⁠. 꺼진 화면에 제 얼굴이 비쳐서 다시 켰다⁠. 오늘 콜 열한 개⁠, 배달비로 사만 칠천 원⁠. 통장에는 육만 이천 원⁠. 내일 낮 열두 시까지는 스물한 시간 이십 분이 남아 있었다⁠. 시간을 분으로 세는 것은 라이더의 버릇이었다⁠.

고시원 현관 유리문에 사람 하나가 비쳤다⁠. 스물세 살 한국 남자⁠, 마른 몸⁠, 헬멧 자국 난 덥수룩한 검은 머리⁠, 볕에 그을린 얼굴⁠, 형광 연두 배달 조끼 안에 검은 바람막이⁠, 목에 회색 넥워머⁠, 손등에 체인 기름 자국⁠. 유리 속 남자는 노란 전단을 쥐고 있었다⁠. 인호는 전단을 구겼다가⁠, 주먹 안에서 도로 폈다⁠.

고개를 들자 3층 끝에서 두 번째 창에 사람이 서 있었다⁠. 검은 후드티를 입은 마른 남자가 휴대전화를 든 채 골목을 내려다보았다⁠. 311호였다⁠. 공용 주방에서 밥솥 앞에 몇 번 같이 서 본 얼굴이었다⁠. 눈이 마주쳤는데도 남자는 휴대전화를 내리지 않았다⁠. 한참 뒤에야 창에서 한 걸음 물러났고⁠, 블라인드가 반쯤 내려왔다⁠.

인호는 편 전단을 네 번 접어 조끼 가슴 주머니에 넣었다⁠.

*

오후 다섯 시 이십 분⁠, 신림역 근처 상가 2층의 라이더 쉼터에는 저녁 콜을 기다리는 헬멧이 탁자마다 엎어져 있었다⁠. 정수기 옆 전기난로 앞자리는 늘 곽민수 차지였다⁠. 십 년 차 라이더 곽 형은 휴대전화를 들어 보이며 목소리를 높였다⁠.

“⁠AI 배차가 나보고 언덕 꼭대기 아파트 열두 층을 이 분 안에 올라가래⁠. 엘리베이터 점검 중인데⁠. 내가 무릎에 프로펠러 달았냐⁠?⁠”

“⁠형 무릎은 프로펠러 달아도 안 돌아요⁠.⁠”

“⁠인호 너 오늘 몇 개 뛰었어⁠?⁠”

“⁠열한 개요⁠.⁠”

“⁠나는 열세 개⁠. 저녁에 내가 두 개 너한테 양보한다⁠. AI 몰래⁠.⁠”

벽걸이 텔레비전에서는 저녁 뉴스가 소리 없이 흘렀다⁠. 자막이 지나갔다⁠. 「⁠금감원 “⁠AI로 흩어진 불법사금융 신고 엮어 조직 추적⁠” … 흩어진 신고·제보·민원 연결⁠」⁠. 곽 형이 화면을 턱으로 가리켰다⁠.

“⁠저거 봐⁠. AI가 사채업자도 잡는대⁠. 우리 배차 AI는 누가 잡아 주나⁠.⁠”

쉼터 사람들이 웃었다⁠. 인호도 웃는 시늉을 하면서 은행 앱을 열었다⁠. 「⁠대출 한도 조회 결과 · 고객님께서 지금 이용하실 수 있는 상품이 없습니다⁠」⁠. 신용점수는 612점이었다⁠. 지난여름 할부가 처음 밀린 뒤로 숫자는 한 번도 오르지 않았다⁠. 인호는 앱을 닫고 조끼 주머니 위를 손바닥으로 눌렀다⁠. 네 번 접은 종이가 바스락거렸다⁠.

엄마 박미정에게서 전화가 왔다⁠. 대전의 식당 주방에서 거는 전화라 뒤에서 그릇 부딪는 소리가 먼저 들렸다⁠.

“⁠아들⁠, 이번 토요일 김장인데 못 오지⁠?⁠”

“⁠콜 많아요⁠, 엄마⁠. 토요일 저녁이 제일 비싸요⁠.⁠”

“⁠오토바이 할부는 다 갚았고⁠?⁠”

“⁠그럼요⁠. 지난달에 끝났어요⁠.⁠”

“⁠거짓말할 때 너 꼭 ‘⁠그럼요⁠’ 하더라⁠.⁠”

“⁠엄마⁠, 손님 왔어요⁠.⁠”

손님은 없었다⁠. 인호는 전화를 끊고 헬멧을 썼다⁠. 곽 형이 난로 앞에서 팔을 뻗어 인호의 헬멧을 두 번 두드렸다⁠. 양보한다는 콜 두 개는 끝내 오지 않았다⁠.

*

밤 열 시 십 분⁠, 마지막 콜을 넘긴 인호는 신림역 뒤 편의점 앞 파라솔 의자에 앉아 대출 비교 앱을 위아래로 밀었다⁠. 바람이 파라솔 천을 부풀렸다 꺼뜨렸다⁠. 은행은 한도 없음⁠, 캐피탈은 한도 없음⁠, 등록 대부업체 두 곳은 「⁠심사 결과는 1⁠~3영업일 안에 문자로 안내드립니다⁠」⁠. 내일 낮 열두 시까지 남은 시간은 열세 시간 오십 분이었다⁠. 영업일이라는 낱말 앞에서 인호는 처음으로 시간을 분으로 세지 않았다⁠.

배달 지점장 황재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 대신 컬러링이 나왔다⁠. 「⁠안전 운전이 최고의 서비스입니다⁠」⁠. 지점장이 받자마자 본사 공지를 읽는 목소리로 말했다⁠.

“⁠권인호 라이더님⁠, 이 시간에 무슨 일이십니까⁠?⁠”

“⁠지점장님⁠, 가불 되나요⁠? 삼십만 원만요⁠. 목요일 정산에서 빼시면 돼요⁠.⁠”

“⁠가불은 본사 규정상 불가합니다⁠. 대신 이번 주 피크 시간 콜을 우선 배정해 드리겠습니다⁠. 이상입니다⁠.⁠”

“⁠지점장님⁠, 사람한테 이상입니다 하지 마세요⁠.⁠”

“⁠습관입니다⁠. 미안하다⁠, 인호야⁠. 내 카드도 막혔어⁠.⁠”

전화가 끊겼다⁠. 편의점 유리 안에서 알바생이 삼각김밥 진열대를 채우고 있었다⁠. 인호는 조끼 주머니에서 노란 종이를 꺼내 무릎 위에 폈다⁠. 접힌 자국 네 줄이 「⁠신용 무관⁠」 글자를 가로질렀다⁠. 접힌 자리를 손톱으로 눌러 펴도 「⁠당일 소액⁠」의 붉은 글씨만 또렷했다⁠.

*

밤 열한 시 사 분⁠, 인호는 312호 침대에 걸터앉아 전단의 번호를 눌렀다⁠. 창문이 옆 건물 벽을 마주 보는 한 평 반짜리 방이었다⁠. 신호가 두 번 가고⁠, 서른 살쯤 된 남자 목소리가 받았다⁠.

“⁠네⁠, 당일 소액 상담 최 실장입니다⁠. 필요 금액 말씀해 주세요⁠.⁠”

“⁠삼십이요⁠. 내일 낮 열두 시까지요⁠.⁠”

“⁠가능합니다⁠. 본인 신분증을 손에 들고 얼굴이 같이 나오게 셀카 한 장⁠, 가족관계증명서 한 부⁠, 그리고 휴대전화 연락처를 받습니다⁠. 링크 하나 보내 드리면 누르시고 전체 공유 누르시면 돼요⁠.⁠”

인호는 침대 모서리를 손가락으로 긁었다⁠. 매트리스 천이 일어나 보풀이 손톱 밑에 끼었다⁠.

“⁠연락처는 왜요⁠?⁠”

“⁠비상 연락용입니다⁠. 날짜만 지키시면 한 번도 안 씁니다⁠.⁠”

“⁠안 보내면요⁠?⁠”

“⁠그럼 진행이 어렵죠⁠. 고객님 뒤로 대기하시는 분이 일곱 분 계세요⁠.⁠”

목소리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인호는 정부 민원 사이트에서 가족관계증명서를 내려받아 보냈다⁠. 엄마의 이름과 생년월일이 증명서 맨 위에 박혀 있었다⁠. 다음으로 신분증을 들고 형광등 아래에서 셀카를 찍었다⁠. 첫 장은 손가락이 주민등록번호를 가렸다고 다시 찍으라고 했다⁠. 두 번째 장에서 인호는 웃지 않았다⁠.

링크가 왔다⁠. 누르자 파일 공유 앱이 열렸고⁠, 「⁠연락처 전체 공유⁠」 단추 아래 숫자가 떴다⁠. 「⁠312명⁠」⁠. 엄마⁠, 곽 형⁠, 배달 지점장⁠, 고등학교 3학년 7반 단톡방 사람들⁠, 작년에 그만둔 편의점 점장⁠, 이름 대신 「⁠치킨집 사장님 착함⁠」으로 저장한 번호까지⁠. 인호는 엄지를 단추 위에 올려 두고 숨을 한 번 쉬었다⁠. 고시원 방 번호와 주소록 사람 수가 같다는 것이 이상하게 우스웠다⁠. 단추를 눌렀다⁠.

“⁠확인됐습니다⁠. 삼십 요청하셨고⁠, 선이자하고 수수료 육만 원 빼고 이십사 들어갑니다⁠. 다음 주 목요일 12월 10일까지 오십 보내시면 끝입니다⁠.⁠”

“⁠이십사 받고 오십이요⁠?⁠”

“⁠삼십 빌리시고 오십이요⁠. 계산 쉽게 하세요⁠.⁠”

“⁠일찍 갚으면요⁠? 월요일에 갚으면요⁠?⁠”

“⁠오십이요⁠. 이틀 만에 주셔도 오십⁠.⁠”

통화가 끊기고 사 분 뒤 알림이 울렸다⁠. 「⁠입금 240⁠,000원 · 보낸 분 도금자⁠」⁠. 인호는 화면을 가까이 들여다보았다⁠. 회사 이름도 실장 이름도 아닌⁠, 어느 동네 할머니 같은 이름이었다⁠. 바로 뒤에 문자 한 통이 따라왔다⁠. 「⁠상환 계좌 안내 · 예금주 도금자 · 12/10(⁠목⁠) 500⁠,000원 · 늦으시면 연장 안내 드립니다⁠.⁠」

열한 시 삼십일 분⁠, 인호는 할부금 계좌로 삼십만 원을 보냈다⁠. 「⁠출금 300⁠,000원 · 잔액 2⁠,000원⁠」⁠. 할부 회사의 회수 안내 문자는 다시 오지 않았다⁠. 인호는 휴대전화 계산기를 열어 숫자를 눌러 보았다⁠. 이십사만 원을 일주일 쓰고 이십육만 원을 더 내는 돈⁠. 한 해로 늘리면 오천 퍼센트가 넘었다⁠. 화면의 숫자가 너무 길어서 인호는 계산기를 닫았다⁠. 목요일은 주급 정산 날이었다⁠. 칠십 콜을 뛰면 오십은 나온다고⁠, 인호는 천장을 보며 콜 수를 셌다⁠.

*

12월 4일 새벽 한 시 십이 분⁠, 3층 공용 주방은 형광등 하나가 껌벅이며 버티고 있었다⁠. 냉장고 문에는 메모지가 겹겹이 붙어 있었다⁠. 「⁠밥솥 밥은 무료 · 김치는 한 번에 두 젓가락까지 · 총무⁠」 「⁠제 계란에 이름 써 놨는데 두 개 없어졌습니다 · 302⁠」 「⁠302님 계란 이름 봤습니다 · 글씨가 너무 작아요 · 305⁠」 「⁠305님 돋보기 사 드릴까요 · 302⁠」⁠. 인호는 메모지 전쟁을 읽으며 짜파게티 물을 올렸다⁠.

슬리퍼 끄는 소리가 들어왔다⁠. 검은 후드티의 311호가 휴대전화 두 대를 손에 쥐고 밥솥 앞으로 갔다⁠. 남자는 밥을 그릇 가득 푸고 김치통을 열어 젓가락을 네 번 넣었다⁠. 인호는 냄비를 보다가 말했다⁠.

“⁠두 젓가락까지래요⁠.⁠”

“⁠총무 자요⁠.⁠”

남자가 식탁에 앉았다⁠. 스물다섯쯤 되어 보였다⁠. 손톱 밑이 까맣고⁠, 후드 끈 하나가 씹혀 납작했다⁠. 남자가 김치를 밥에 얹으며 인호의 조끼 주머니를 보았다⁠. 접힌 노란 종이 귀퉁이가 주머니 밖으로 나와 있었다⁠.

“⁠전단 봤어요⁠?⁠”

“⁠그거 형이 꽂은 거예요⁠?⁠”

“⁠한 장에 이백 원⁠.⁠”

“⁠오토바이마다 두 장씩 꽂으면 손잡이가 안 잡혀요⁠. 브레이크 레버에 끼우지 마세요⁠. 그러다 사람 죽어요⁠.⁠”

“⁠레버가 제일 잘 보여요⁠.⁠”

남자는 밥을 한 숟가락 크게 떠 넣었다⁠. 인호는 끓어오르는 냄비 불을 줄이고 식탁 맞은편 의자 등받이를 잡았다⁠.

“⁠오늘 밤에 전화한 사람이 몇 명이나 돼요⁠?⁠”

“⁠나한테 물어봐야 몰라요⁠. 나는 골목만 맡아요⁠.⁠”

“⁠골목이 몇 개인데요⁠?⁠”

“⁠신림동 고시원 골목 열네 개⁠.⁠”

남자는 열넷을 말하면서 숟가락으로 밥그릇 바닥을 긁었다⁠. 쇠가 사기그릇에 닿는 소리가 주방에 길게 남았다⁠.

“⁠전화 오면 뭐 해 주는 건데요⁠?⁠”

“⁠아무것도 안 해요⁠. 꽂기만 해요⁠.⁠”

식탁 위에 엎어 둔 휴대전화 두 대 가운데 한 대가 진동했다⁠. 남자가 뒤집기 전에 화면이 먼저 켜졌다⁠. 인호는 밥그릇 너머로 글자를 읽었다⁠.

「⁠신림 312 권인호 · 24 / 50 · 12/10(⁠목⁠) · 담당 정우진⁠」

남자⁠, 정우진이 휴대전화를 집어 화면을 끄지 않고 인호 앞으로 돌려 보였다⁠. 숨기려는 손이 아니었다⁠. 우진은 김치를 한 젓가락 더 집으며 말했다⁠.

“⁠312호⁠, 목요일에 봐요⁠.⁠”

냄비에서 짜파게티 물이 넘쳐 가스 불을 덮었다⁠. 파란 불꽃이 칙 소리를 내며 꺼지고⁠, 냉장고 문의 메모지 한 장이 바람에 떨어져 식탁 밑으로 미끄러졌다⁠.

1화는 어땠나요?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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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산없음2026.11.02· 1화

    골목 오토바이 여섯 대에 다 꽂힌 노란 전단 「신용 무관」. 배달하는 친구 말로는 진짜 매주 꽂혀 있대요.

    • 서강림작가2026.11.02

      전단은 여섯 대에 똑같이 꽂혀도 받는 사람 사정은 다 달라요. 인호는 하필 그 주에 통장이 비어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