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5,435자)

피고 도금자

신용 무관·소액 대출 · 서강림

2027년 4월 8일 목요일 오전 아홉 시 사십 분⁠, 수원지방법원 소액 법정 앞 복도는 버스 정류장 같았다⁠. 의자마다 사람이 앉았고⁠, 앉은 사람마다 서류 봉투를 무릎에 얹고 있었다⁠. 법정 문에 붙은 종이에 오늘 사건이 서른한 건이었다⁠. 보영의 사건은 열네 번째였다⁠.

“⁠한 건에 몇 분씩 해요⁠?⁠”

“⁠빠르면 삼 분⁠, 길면 십 분이요⁠.⁠”

윤재희 변호사의 대답에 상훈이 손목시계를 보았다⁠. 반차를 세 번째로 낸 날이었다⁠. 팀장은 이번에도 군말 없이 도장을 찍었다⁠. 반차 사유에는 「⁠인증 업체 대응⁠」이라고 썼다고 했다⁠.

복도 끝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문순자와 최정희가 김밥 봉지를 들고 걸어오고 있었다⁠.

“⁠언니들⁠, 여기까지 왜 오셨어요⁠?⁠”

“⁠방청⁠. 텔레비전에서 보니까 방청은 아무나 한대⁠.⁠”

“⁠김밥은요⁠?⁠”

“⁠재판 길어지면 배고프잖아⁠. 원장 것도 쌌어⁠.⁠”

정희가 김밥 한 줄을 상훈에게 내밀었다⁠. 상훈은 받아 들고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서류 봉투 위에 얹었다⁠. 법정 경위가 복도에 나와 음식은 법정 안에 갖고 들어갈 수 없다고 말했다⁠. 순자는 김밥 봉지를 핸드백 깊숙이 넣었다⁠. 들고 들어가는 게 아니고 숨겨 들어가는 거라고 했다⁠.

*

오전 열 시 십 분⁠, 복도 저편에서 짙은 남색 외투를 입은 노인이 걸어왔다⁠. 키가 작고⁠, 걸음이 빨랐다⁠. 옆에 예순 넘은 남자가 서류철을 들고 따랐다⁠. 노인의 머리는 짧고 흰 파마였는데⁠, 파마가 너무 꼬불거렸다⁠. 귀 옆의 컬이 용수철처럼 튀어나와 있었다⁠.

보영은 노인의 머리부터 보았다⁠. 롤을 너무 가는 것으로 말고 약을 너무 오래 둔 머리였다⁠. 시장 미용실에서 급하게 한 파마였다⁠. 보영은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제 귀 옆을 만졌다⁠.

“⁠저분이에요⁠?⁠”

“⁠네⁠. 도금자 씨⁠. 옆은 상인회장이시래요⁠.⁠”

상인회장은 복도 사람들에게 연신 고개를 숙이며 명함을 돌렸다⁠. 「⁠느티나무시장 상인회장 박영수 · 반찬 · 국수 · 떡 배달 됩니다⁠」⁠. 윤 변호사도 한 장을 받았다⁠. 원고 측 변호사라는 것을 알고 나서도 상인회장은 명함을 도로 달라고 하지 않았다⁠.

금자는 복도 의자에 앉지 않았다⁠. 법정 문 앞에 서서 사건 목록 종이를 돋보기로 읽었다⁠. 「⁠피고 도금자⁠」⁠. 금자는 목록의 제 이름을 손가락으로 짚고 오래 들여다보았다⁠. 그러고는 돋보기를 벗고 복도를 한 번 둘러보았다⁠. 원고석에 앉을 사람을 찾는 눈이었다⁠. 보영과 눈이 마주쳤다⁠. 금자가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 인사였다⁠.

*

오전 열 시 십오 분부터 사건이 하나씩 불렸다⁠. 보영은 방청석 둘째 줄에 앉아 앞 사건들을 들었다⁠. 첫 사건은 중고 거래로 산 냉장고였다⁠. 원고는 냉장고가 냉동만 된다고 했고⁠, 피고는 냉동도 냉장의 일종이라고 했다⁠. 판사는 냉동은 냉장의 일종이 아니라고 했다⁠. 둘째 사건은 아랫집 강아지였다⁠. 원고는 강아지가 밤마다 짖어 잠을 못 잔다고 했고⁠, 피고는 강아지를 안고 법정에 들어오려다 경위에게 막혔다⁠.

“⁠강아지는 피고가 아닙니다⁠. 밖에 두고 오세요⁠.⁠”

순자가 정희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속삭임이 방청석 셋째 줄까지 다 들렸다⁠.

“⁠저 판사 총각 잘생겼다⁠. 말도 똑 부러지고⁠.⁠”

“⁠언니⁠, 총각인지 어떻게 알아⁠?⁠”

“⁠반지가 없잖아⁠.⁠”

“⁠판사는 재판할 때 반지를 빼는 거야⁠.⁠”

경위가 방청석을 돌아보았다⁠. 두 사람은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보영은 웃음을 참느라 손등을 꼬집었다⁠. 지난겨울 날짜와 시각을 볼펜으로 쓰던 자리였다⁠. 여섯 사건이 지나는 동안 법정 시계는 이십 분밖에 가지 않았다⁠. 남의 사정은 삼 분이면 끝났다⁠. 제 사정은 넉 달째였다⁠.

*

오전 열 시 삼십오 분⁠, 보영의 사건이 불렸다⁠. 원고석에 보영과 윤 변호사가⁠, 피고석에 금자가 앉았다⁠. 상인회장 박영수가 피고석 옆에 따라 앉으려 하자 판사가 손을 들었다⁠.

“⁠어느 분이세요⁠?⁠”

“⁠에⁠, 저는 느티나무시장 상인회장 박영수입니다⁠. 우리 금자 언니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소송대리인이 아니시면 방청석으로 가 주세요⁠.⁠”

“⁠에⁠, 줄이겠습니다⁠.⁠”

상인회장은 방청석 맨 앞줄로 물러났다⁠. 순자와 정희가 앉은 줄이었다⁠. 정희가 상인회장에게 김밥 냄새가 안 나게 조용히 자리를 내주었다⁠.

판사는 서류를 넘기며 원고 청구를 요약했다⁠. 이백만 원 대여⁠, 열흘마다 육십만 원⁠, 다섯 번에 걸쳐 이백칠십만 원 입금⁠, 연 육십 퍼센트를 넘는 계약으로 원금과 이자 모두 무효⁠, 입금된 이백칠십만 원 반환 청구⁠. 윤 변호사가 금감원장 명의의 무효 확인서 사본을 냈다⁠. 판사가 사본을 읽고 금자를 보았다⁠.

“⁠피고⁠, 원고가 보낸 돈이 피고 이름의 계좌로 들어갔습니다⁠. 하실 말씀 있으세요⁠?⁠”

금자가 일어났다⁠. 앉아서 하라는 판사의 말에도 서서 말했다⁠.

“⁠나는 그 돈 받은 적 없어요⁠. 영통도 가 본 적 없고⁠, 저 원장님도 오늘 처음 봐요⁠. 통장은 손자가 만들어 줬어요⁠. 일수 돈 받기 편하라고⁠. 손자는 지금 구치소에 있어요⁠.⁠”

법정 안이 조용해졌다⁠. 판사가 서류에서 눈을 들었다⁠.

“⁠그럼 청구를 다투시는 겁니까⁠?⁠”

“⁠다투는 게 뭔데요⁠?⁠”

“⁠돌려줄 돈이 아니라고 하시는 겁니까⁠?⁠”

“⁠그건 아직 안 했어요⁠. 아직 할 말이 남았어요⁠. 판사님⁠, 하나만 물어볼게요⁠. 무효가 뭐예요⁠? 안 갚아도 된다는 거예요⁠?⁠”

“⁠연 육십 퍼센트를 넘는 대부 계약은 원금과 이자 모두 효력이 없다는 뜻입니다⁠. 갚을 의무가 없고⁠, 이미 낸 돈은 돌려받을 수 있습니다⁠.⁠”

“⁠그럼 내 일수도 무효예요⁠? 백만 원에 백 일 만 이천 원⁠.⁠”

“⁠오늘은 원고 사건만 봅니다⁠, 피고⁠.⁠”

“⁠알아요⁠. 나도 알아요⁠. 그냥 물어본 거예요⁠.⁠”

금자는 앞치마 주머니가 없는 외투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가 뺐다⁠. 손이 갈 데를 찾지 못했다⁠.

*

법정 문이 열렸다⁠. 경위가 고개를 돌렸다⁠. 한다은이 숨을 몰아쉬며 들어왔다⁠. 미용실 앞치마를 벗고 오느라 블라우스 단추가 하나씩 어긋나 있었다⁠. 다은은 방청석에 앉지 않고 원고석 뒤 난간까지 걸어왔다⁠.

“⁠판사님⁠, 저 증인 설 수 있어요⁠? 원장님 가게 직원이에요⁠. 같은 번호에서 빌렸어요⁠.⁠”

판사가 윤 변호사를 보았다⁠. 윤 변호사는 보영을 보았다⁠. 보영은 다은을 보았다⁠. 다은의 어깨가 떨렸지만 고개는 들려 있었다⁠.

“⁠원고 측 참고인으로 듣겠습니다⁠. 앞으로 나오세요⁠.⁠”

다은은 증언대 앞으로 갔다⁠. 손에 아무것도 들지 않았다⁠.

“⁠한다은입니다⁠. 스물넷이에요⁠. 작년 시월에 끝자리 4417 번호에서 오십만 원 빌린다고 했는데 삼십오만 원이 들어왔어요⁠. 일주일마다 연장비를 냈는데 지금 이백팔십이에요⁠. 처음 빌릴 때 아빠 번호를 줬어요⁠. 평택에서 세차장 하세요⁠. 안 갚으면 아빠 세차장 단골들한테 사진 보낸다고 했어요⁠. 원장님 손님 목록도 그 사람들이 갖고 있다고 했고⁠, 3월 2일에 원장님 단골 문순자 님한테 실제로 문자가 갔어요⁠.⁠”

방청석에서 순자가 손을 반쯤 들었다가 내렸다⁠. 판사가 다은에게 물었다⁠.

“⁠지금은 왜 나오셨어요⁠?⁠”

“⁠송도 사장이 잡혔다는 뉴스를 봤어요⁠. 그날 밤 아빠한테 전화해서 다 말했어요⁠. 아빠가 세차장 문 닫고 올라온다는 걸 말렸어요⁠. 아빠가 그러더라고요⁠. 우리 딸 사진 보내면 세차해서 돌려보낸다고⁠.⁠”

방청석 어딘가에서 짧은 웃음이 났다⁠. 정희였다⁠. 정희는 웃고 나서 코를 훌쩍였다⁠. 다은은 판사를 보고 마지막으로 말했다⁠.

“⁠제 빚은 원장님 빚이랑 예금주가 달라요⁠. 그래도 같은 사람들이에요⁠. 저도 신고할 거예요⁠. 오늘 오후에요⁠.⁠”

다은은 증언을 마치고 원고석 뒤 난간으로 돌아와 보영의 어깨에 손을 한 번 얹었다⁠. 보영은 다은의 손등을 제 손으로 덮었다⁠. 두 사람의 손등이 똑같이 차가웠다⁠.

*

판사가 금자를 보았다⁠.

“⁠피고⁠, 남은 말씀 하세요⁠.⁠”

금자는 증언대의 다은을 오래 보았다⁠. 그다음 원고석의 보영을 보았다⁠. 보영의 무릎 위 수첩에는 손등에서 옮겨 적은 날짜들이 펼쳐져 있었다⁠. 맨 아래 줄은 「⁠3/2 문순자⁠」였다⁠.

“⁠나는 받은 적 없어요⁠. 그래도 내 이름으로 들어갔으면 내 이름이 받은 거예요⁠. 서른 해 동안 시장 사람들이 내 이름 보고 돈을 빌리고 갚았어요⁠. 그 이름이 영통 원장님 돈을 받았으면⁠, 그 이름이 돌려줘야지⁠. 현우가 한 거면 내가 한 거예요⁠. 내가 키웠으니까⁠.⁠”

“⁠그럼 원고 청구를 받아들이시는 겁니까⁠?⁠”

“⁠이백칠십 맞죠⁠? 돌려줄게요⁠.⁠”

윤 변호사가 숨을 내쉬었다⁠. 판사가 말했다⁠.

“⁠피고가 원고 청구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조서에 남기겠습니다⁠. 돈은 어떻게 마련하실 거예요⁠? 피고 이름의 계좌들은 지금 수사 중이라 묶여 있을 텐데요⁠.⁠”

“⁠국수 팔아서요⁠. 한 그릇에 오천 원⁠. 오백사십 그릇이면 돼요⁠. 셔터는 3월 말에 다시 올렸어요⁠.⁠”

판사가 처음으로 서류에서 손을 뗐다⁠. 방청석 맨 앞줄에서 상인회장이 큰 소리로 말했다⁠.

“⁠에⁠, 시장 사람들이 한 그릇씩 더 먹겠습니다⁠.⁠”

“⁠방청석에서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에⁠, 줄이겠습니다⁠.⁠”

법정 안에 웃음이 퍼졌다⁠. 판사도 웃음을 참느라 다음 사건 서류를 일찍 펼쳤다⁠. 보영은 웃지 못했다⁠. 피고석의 작은 노인이 오백사십 그릇의 국수를 마는 손을⁠, 보영은 거기 앉아서 이미 보고 있었다⁠.

*

오전 열한 시 반⁠, 법원 정문 계단 아래에서 금자는 상인회장에게 말했다⁠.

“⁠영수야⁠, 시장 사람들한테 다 말해⁠. 다음 주 금요일 네 시에 가게로 와⁠. 카드 갖고⁠.⁠”

“⁠카드요⁠? 일수 카드요⁠?⁠”

“⁠그래⁠. 한 장도 빼지 말고⁠.⁠”

상인회장이 서류철을 안고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을 하려는 것이냐고 묻지 않았다⁠. 서른 해 동안 물은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금자는 다은을 불렀다⁠.

“⁠아가씨⁠, 아빠 세차장이 평택 어디야⁠?⁠”

“⁠왜요⁠?⁠”

“⁠국수 한 솥 갖고 가려고⁠. 딸 키운 사람한테 인사는 해야지⁠. 우리 현우 같은 놈이 아가씨한테 그랬으니까⁠.⁠”

다은은 대답을 못 하고 고개만 숙였다⁠. 금자는 다은의 어긋난 블라우스 단추를 하나씩 풀어 다시 채워 주었다⁠. 국수를 마는 손처럼 짧고 빨랐다⁠.

상훈이 셔츠 주머니에서 냅킨을 꺼냈다⁠. 2월 24일 밤 식탁에서 그린 생선 뼈 그림이었다⁠. 상훈은 냅킨을 반으로 찢고⁠, 다시 반으로 찢어 법원 쓰레기통에 넣었다⁠.

“⁠원인 분석 끝⁠.⁠”

“⁠불량은⁠?⁠”

“⁠고쳤잖아⁠. 말했으니까⁠.⁠”

금자는 계단 위의 보영을 올려다보았다⁠.

“⁠원장⁠. 내 파마 어때⁠?⁠”

보영은 계단을 내려가 금자 앞으로 갔다⁠. 손을 뻗어 귀 옆의 용수철 같은 컬을 손가락에 감아 보았다⁠. 약이 너무 셌다⁠. 머리카락이 바스락거렸다⁠.

“⁠롤이 너무 가늘었어요⁠. 약도 오래 두셨고요⁠. 두 주쯤 지나면 풀려요⁠.⁠”

“⁠두 주 못 기다려⁠. 원장이 하나 해 줘⁠. 다음 주 금요일 전에⁠.⁠”

“⁠영통까지 오세요⁠? 계단이 스물두 개예요⁠.⁠”

“⁠나는 서른 해 시장 골목을 돌았어⁠. 계단 스물둘쯤은 일수 한 바퀴야⁠.⁠”

다은이 뒤에서 웃음을 터뜨렸다⁠. 상훈은 정희가 준 김밥을 그제야 꺼내 금자에게 내밀었다⁠. 금자는 김밥을 받아 들고 상훈의 얼굴을 보았다⁠.

“⁠남편이구나⁠. 김밥도 반듯하게 쥐네⁠.⁠”

상훈이 얼굴을 붉혔다⁠. 보영은 계단을 세지 않았다⁠. 법원 정문 앞 은행나무 가지마다 쌀알만 하던 눈이 한 달 사이에 아기 손톱만 한 잎으로 벌어져 있었다⁠. 금자의 꼬불거리는 흰머리 위로 연두색 잎 그림자가 흔들렸고⁠, 금자는 김밥을 쥔 손으로 그림자를 털어 내려는 듯 머리를 한 번 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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