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5,450자)

당일 소액

신용 무관·소액 대출 · 서강림

2027년 4월 15일 목요일 오전 아홉 시 사십 분⁠, 여의도 금융감독원 본원 2층 브리핑실 옆 대기실에서 국장 장석진은 홍보팀이 만든 발표 화면을 진경에게 보여 주었다⁠. 첫 장은 사진이었다⁠. 반쯤 올라간 셔터⁠, 셔터 아래로 허리를 숙이고 들어가는 남색 조끼들⁠, 간판 「⁠금자네 국수 · 1996⁠」⁠. 3월 26일 아침 기자가 찍은 사진이었다⁠.

“⁠홍보팀이 이게 제일 잘 나왔대⁠.⁠”

“⁠잘 나왔습니다⁠.⁠”

“⁠그런데⁠?⁠”

“⁠첫 장이 이거면 기사 제목이 일흔다섯 일수 할머니가 됩니다⁠.⁠”

국장은 볼펜을 귀에서 뺐다⁠. 탁자를 두 번 두드리려다 한 번만 두드렸다⁠.

“⁠오 분석관 발표는 몇 장이야⁠?⁠”

“⁠한 장입니다⁠.⁠”

“⁠한 장으로 뭘 해⁠?⁠”

“⁠한가운데를 바꿉니다⁠.⁠”

국장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브리핑실에서 기자들이 의자를 끄는 소리가 났다⁠. 국장이 클릭 버튼을 진경에게 내밀었다⁠.

“⁠사진은 둘째 장으로 내려⁠. 첫 장은 오 분석관 거로 가⁠. 대신 개조식으로 해⁠. 여기는 기자들이야⁠.⁠”

*

오전 열 시⁠, 브리핑실 단상에서 진경은 화면을 켰다⁠. 점과 줄로 된 조직도가 떴다⁠. 묶음 017⁠. 맨 위에 숫자가 있었다⁠. 「⁠신고 · 제보 · 민원 4⁠,354건⁠」⁠.

“⁠민생 특사경 첫 사건 개요⁠. 광고 · 대출 · 추심 분업형 불법사금융 조직⁠. 총책 송도 강성민⁠, 3월 26일 검거⁠. 추심 콜센터 실장 1명 입건⁠, 상담원 14명 조사⁠. 수금책 1명 자수⁠. 명의 휴대폰 공급 겸 계좌 개설 1명 3월 12일 경찰 검거⁠.⁠”

기자들이 받아 적었다⁠. 진경은 다음 줄을 짚었다⁠.

“⁠입금 계좌 예금주 27명⁠. 이 가운데 한 명 이름으로 계좌 12개⁠. 예금주 본인은 계좌 개설과 사용을 몰랐음⁠. 명의 도용 피해자로 분류⁠.⁠”

화면 한가운데에 있던 「⁠예금주 도금자⁠」 점이 옆으로 밀려났다⁠. 「⁠명의 도용 피해 · 예금주⁠」⁠. 한가운데로 「⁠송도 · 강성민⁠」이 들어왔다⁠. 진경은 마지막 줄을 눌렀다⁠. 송도에서 한 줄이 아래로 뻗어 나가 부천 중동의 한 점에 닿았다⁠.

“⁠등록 대부업체 1곳⁠. 전 대표가 2015년부터 2026년까지 열두 해 동안 대출을 거절한 고객 번호를 외부에 넘기고 소개비를 받은 기록 확보⁠. 현 대표가 압수수색 현장에서 직접 금고를 열어 제출함⁠. 거절 다음 날 사채 문자를 받은 피해자 1⁠,204건 확인⁠. 해당 업체 갱신 대상 고객 4⁠,021명에게 서민금융 상담 안내문 발송 완료⁠.⁠”

기자 하나가 손을 들었다⁠.

“⁠그 일수 할머니는요⁠? 사진에 나온 국숫집이요⁠.⁠”

“⁠도금자 씨는 이 조직도에서 이름을 빼앗긴 분입니다⁠. 따로 하신 일수는 따로 봅니다⁠. 그것도 연 육십 퍼센트가 넘습니다⁠.⁠”

“⁠등록 업체가 사채 조직에 손님을 넘겼다는 겁니까⁠?⁠”

“⁠네⁠. 법정 최고금리를 지키는 회사의 뒷문이었습니다⁠.⁠”

브리핑실이 술렁였다⁠. 단상 옆에 앉은 국장이 볼펜을 귀에 꽂았다⁠. 미끄러지지 않았다⁠. 진경은 화면을 끄기 전에 한 줄을 더 말했다⁠. 개조식이 아니었다⁠.

“⁠화면의 점은 사천삼백쉰네 개입니다⁠. 점 하나가 사람 하나입니다⁠. 저희는 신고마다 이름을 소리 내어 읽었습니다⁠. 여기서는 읽지 않겠습니다⁠.⁠”

*

오후 두 시⁠, 분석팀 사무실에서 진경은 2011년 봄의 민원 창을 마지막으로 열었다⁠. 인천의 시장 상인⁠. 민원서에 남은 전화번호를 눌렀다⁠.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 진경은 수화기를 내려놓고 민원인의 이름을 소리 내어 읽었다⁠. 열여섯 해 만에 처음으로⁠, 답변 칸 아래에 한 줄을 달았다⁠. 「⁠2027⁠. 4⁠. 15⁠. 재검토⁠. 당시 판단은 당시 법에 맞았으나⁠, 사람에게는 맞지 않았음⁠」⁠. 개조식으로⁠, 맞는 말로⁠. 그리고 창을 닫았다⁠.

선우가 의자를 굴려 와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기사 제목들이 줄줄이 떠 있었다⁠. 「⁠등록 대부업체가 사채 조직에 거절 고객 넘겨 … 12년⁠」 「⁠민생 특사경 첫 사건⁠, 총책 검거⁠」⁠. 일흔다섯 할머니는 제목에 없었다⁠. 둘째 장 사진 밑 설명에만 있었다⁠.

“⁠선배⁠, 국장님이 아까 그러셨대요⁠. 오 분석관 발표가 개조식이 아니었다고⁠.⁠”

“⁠뭐라셨는데⁠?⁠”

“⁠그래서 기자들이 받아 적더라고⁠.⁠”

*

4월 16일 금요일 오후 한 시⁠, 수원 영통 보영헤어의 스물두 계단을 도금자가 올라왔다⁠. 숨 한 번 고르지 않았다⁠. 문을 열자 문순자와 최정희가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원장⁠, 이분이 그 피고야⁠?⁠”

“⁠언니⁠, 피고 아니야⁠. 오늘은 손님이야⁠.⁠”

금자는 의자에 앉아 거울 속 제 머리를 보았다⁠. 용수철 같은 컬이 두 주 사이 조금 풀려 있었다⁠. 보영이 손가락에 컬을 감아 보며 말했다⁠.

“⁠약을 조금만 써서 굵은 롤로 다시 풀어 드릴게요⁠. 짧게 다듬고요⁠.⁠”

“⁠원장 마음대로 해⁠. 나는 국수만 내 마음대로 해⁠.⁠”

보영은 머리를 감기고 굵은 롤을 말았다⁠. 롤은 열여덟 개였다⁠. 순자가 옆 의자에서 금자에게 물었다⁠.

“⁠할머니⁠, 국숫집 하신다며⁠. 요새 장사 돼요⁠?⁠”

“⁠오백사십 그릇 팔아야 돼⁠. 빚이 있어⁠.⁠”

“⁠빚이요⁠? 어디서요⁠?⁠”

“⁠여기 원장한테⁠.⁠”

순자가 보영을 보았다⁠. 정희가 웃음을 참다 보자기 안에서 터뜨렸다⁠. 보영도 웃었다⁠. 금자만 진지했다⁠. 파마가 끝나자 금자는 거울을 오래 보고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지갑에서 만 원짜리 여섯 장을 꺼냈다⁠.

“⁠원장님⁠, 이건 안 받을게요⁠.⁠”

“⁠받아⁠. 손님이 내는 돈이야⁠. 피고가 내는 돈은 따로 갚을 거고⁠.⁠”

보영은 육만 원을 받았다⁠. 영수증을 끊었다⁠. 이번에는 손이 떨리지 않았고⁠, 영수증이 반듯하게 찢어졌다⁠.

*

오후 세 시 오십 분⁠, 부천 원미동 느티나무시장 금자네 국수 앞에 상인들이 모였다⁠. 평상 둘에 다 앉지 못해 골목에 서 있는 사람이 더 많았다⁠. 손마다 손바닥만 한 카드가 한 장씩 들려 있었다⁠. 떡집 주인⁠, 정육점 주인⁠, 채소 가게⁠, 그릇 가게 할아버지⁠, 그리고 명숙⁠. 명숙 옆에 세연이 있었다⁠. 진경과 선우는 평상 끝에 앉았다⁠. 사거리 모퉁이 은행나무에 새잎이 다 피어 있었다⁠.

금자가 솥 앞에서 나와 탁자 하나를 가게 앞에 내놓았다⁠. 앞치마 주머니에서 고무줄로 묶인 카드 마흔 장과 빨간 인주 통과 동그란 나무 도장을 꺼내 탁자 위에 놓았다⁠.

“⁠카드 갖고 왔지⁠? 내 거랑 맞춰 보자⁠.⁠”

3월 12일 생신 뒤로 금자는 오후 네 시에 골목을 돌지 않았다⁠. 셔터를 다시 올린 뒤에도 국수만 말았다⁠. 상인들은 도장 없는 오후 네 시를 한 달 가까이 보냈다⁠. 한 달 동안 아무도 만 이천 원을 들고 국숫집에 오지 않았다⁠. 오지 말라는 말이 없었는데도 오지 않았다⁠. 대신 국수를 먹으러 왔다⁠. 떡집 주인은 하루 두 그릇을 먹다가 바지 단추를 하나 풀었다고 했다⁠. 오늘은 처음으로 다 같이⁠, 카드를 들고 왔다⁠.

상인들이 차례로 카드를 내밀었다⁠. 금자는 제 카드와 상인의 카드를 나란히 놓고⁠, 찍힌 동그라미 수를 맞춰 보았다⁠. 떡집 쉰여덟 개⁠, 정육점 마흔 개⁠, 그릇 가게 할아버지는 2월에 새로 받은 카드에 서른다섯 개⁠. 명숙은 서른여섯 개였다⁠. 맞춰 본 카드는 두 장씩 포개 탁자 한가운데에 쌓였다⁠.

“⁠오늘부터 일수 없다⁠. 남은 날은 안 받는다⁠. 서른한 해 했으면 됐어⁠.⁠”

골목이 조용해졌다⁠. 정육점 주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언니⁠, 그럼 다음 달엔 우리 어디서 빌려⁠?⁠”

“⁠다 같이 은행 가자⁠. 줄은 내가 서 줄게⁠. 안 빌려주면 내가 은행 앞에서 국수 삶을 거야⁠.⁠”

“⁠언니⁠, 그거 무효라며⁠. 이자 낸 거 돌려받아도 된다며⁠.⁠”

“⁠돌려받고 싶으면 말해⁠. 돌려줄게⁠. 국수로⁠.⁠”

정육점 주인이 머리를 긁었다⁠. 떡집 주인이 정육점 주인의 등을 쳤다⁠.

“⁠나는 돌려받기 싫어⁠. 그거 돌려받으면 우리가 언니한테 빌린 게 없어지잖아⁠. 1996년에 언니 보증금⁠, 우리 엄마가 계 들어서 만들어 준 거야⁠. 우리 엄마도 그거 돌려받은 적 없어⁠.⁠”

진경이 평상에서 일어났다⁠.

“⁠다음 주 금요일 네 시에 서민금융진흥원 상담하시는 분들하고 이 평상으로 오겠습니다⁠. 은행에 같이 가실 수 있는 길을 하나씩 알아보겠습니다⁠. 다 되는 건 아닙니다⁠. 되는 것부터요⁠.⁠”

“⁠공무원 아가씨는 맨날 정확하게 말하네⁠.⁠”

“⁠크게 말하는 건 국장님이 하세요⁠.⁠”

상인들이 웃었다⁠. 금자는 웃지 않고 진경 앞에 국수 한 그릇을 놓았다⁠.

“⁠오늘은 돈 받아⁠. 오천 원⁠.⁠”

명숙이 깍두기 한 접시를 국수 옆에 놓았다⁠. 세연이 순댓국집에서 더 맛있다고 했던 깍두기였다⁠. 진경은 한 조각을 먹어 보고 세연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세연이 웃었다⁠.

*

오후 네 시 십 분⁠, 시장 북문으로 오토바이 한 대가 들어왔다⁠. 형광 연두 조끼에 회색 넥워머⁠. 뒷자리에 검은 후드티가 앉아 있었다⁠. 인호는 국숫집 앞에서 시동을 끄고 헬멧을 벗었다⁠. 우진은 헬멧을 벗지 않고 한참 앉아 있다가 내렸다⁠. 불구속으로 조사를 받는 중이었고⁠, 오늘 오전에도 원미서에 다녀왔다⁠.

우진은 명숙 앞으로 가서 고개를 숙였다⁠.

“⁠2월에 시금치 사러 왔던 사람이에요⁠. 죄송합니다⁠.⁠”

명숙은 우진을 아래위로 보았다⁠. 그러고는 물었다⁠.

“⁠밥은 먹고 다니냐⁠?⁠”

“⁠네⁠.⁠”

“⁠거짓말⁠. 얼굴이 반찬 통만 하네⁠.⁠”

명숙이 반찬 가게로 들어가더니 시금치 한 통을 들고 나와 우진의 손에 쥐여 주었다⁠. 뚜껑에 네임펜 글씨가 있었다⁠. 「⁠명숙이네 · 시금치 · 3⁠,000⁠」⁠. 우진이 지갑을 꺼내자 명숙이 손바닥으로 지갑을 덮었다⁠.

“⁠그때 거스름돈 안 받아 갔잖아⁠. 그걸로 쳐⁠.⁠”

세연이 엄마 등 뒤에서 웃었다⁠. 세연은 지난주부터 면접을 보러 다니고 있었다⁠. 대본 없는 일을 찾는 중이라고 했다⁠. 우진은 시금치 통을 두 손으로 들고 금자에게 갔다⁠.

“⁠할머니⁠, 뒷문에 봉투 드린 사람 저예요⁠.⁠”

“⁠알아⁠. 노크 두 번⁠. 우리 현우는 그 소리 나면 멸치 가지러 간다고 나갔어⁠.⁠”

금자는 우진의 후드티 소매를 잡아당겨 평상에 앉혔다⁠. 인호도 옆에 앉았다⁠. 금자가 국수 두 그릇을 내왔다⁠. 우진은 젓가락을 들지 못하고 그릇을 내려다보았다⁠.

“⁠형⁠, 먹어요⁠. 여기서는 돈 받는대요⁠.⁠”

“⁠너는 아직 삼백육십이지⁠?⁠”

“⁠네⁠. 바퀴 달린 빚이요⁠. 2월 3월 냈어요⁠.⁠”

“⁠우희는 괜찮대⁠. 형사가 그러는데 송도에서 나온 목록⁠, 다 묶어서 증거로 갔대⁠. 아무 데도 안 간대⁠.⁠”

우진은 그제야 젓가락을 들었다⁠. 인호는 조끼 가슴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네 번 접은 노란 종이였다⁠. 12월 3일 고시원 골목에서 뽑은 전단⁠. 접힌 자국마다 보풀이 일어 있었다⁠. 인호는 종이를 펴서 탁자 위 카드 더미 옆에 놓았다⁠. 큰 글씨로 「⁠신용 무관⁠」⁠, 아래 붉은 글씨로 「⁠당일 소액⁠」⁠, 맨 아래 작게 「⁠무방문 · 즉시 입금⁠」⁠.

금자가 돋보기를 쓰고 종이를 읽었다⁠.

“⁠이게 그거야⁠?⁠”

“⁠네⁠. 이걸로 시작했어요⁠.⁠”

금자는 노란 종이를 접지 않고 카드 더미 맨 위에 올렸다⁠. 종이 위에 빨간 인주 통을 문진처럼 얹었다⁠.

*

오후 네 시 반⁠, 시장 골목은 대목이 아닌 금요일의 소리로 돌아와 있었다⁠. 떡 써는 소리⁠, 생선 비늘 긁는 소리⁠, 그릇 가게 할아버지의 라디오⁠. 금자의 앞치마 주머니는 처음으로 납작했다⁠. 동그란 나무 도장은 탁자 위 인주 통 옆에 누워 있었다⁠. 인주 뚜껑은 닫혀 있었다⁠. 사거리 은행나무에서 연두색 잎 그림자가 바람에 흔들리며 탁자 위로 내려왔고⁠, 노란 전단과 포개진 카드 여든 장과 마른 도장 위를 차례로 지나갔다⁠. 오후 네 시가 지나는 동안⁠, 골목 어디에서도 탁 소리는 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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