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5,409자)

첫 압수수색

신용 무관·소액 대출 · 서강림

2027년 3월 26일 금요일 새벽 다섯 시 오십 분⁠, 부천 중동 상가 앞 인도에서 진경은 처음 입어 보는 조끼의 지퍼를 올렸다⁠. 남색 조끼 등판에 흰 글씨로 「⁠금융감독원 특별사법경찰⁠」이 찍혀 있었다⁠. 옆에서 박선우가 제 조끼를 내려다보았다⁠. 선우의 조끼는 두 치수쯤 컸다⁠.

“⁠선배⁠, 글씨가 등에만 있어요⁠. 앞에서 보면 그냥 등산 가는 사람이에요⁠.⁠”

“⁠그럼 뒤로 걸어 들어가⁠.⁠”

“⁠그거 보고서에 쓸까요⁠?⁠”

“⁠쓰지 마⁠.⁠”

출범하고 나흘이 지났다⁠. 국장은 출범 날 한 번에 치겠다고 했지만⁠, 영장이 나오기까지 나흘이 더 들었다⁠. 어젯밤 열한 시⁠, 부천원미경찰서 마당에 콜센터를 통째로 실은 트럭이 들어왔다는 소식에 현장 팀은 밤새 계획을 고쳤다⁠. 송도 오피스텔⁠, 동백금융⁠, 비어 버린 상동 콜센터⁠. 세 곳에 새벽 여섯 시에 동시에⁠. 국장은 시장으로 갔다⁠. 진경에게는 동백이 남았다⁠. 보직 조정됨⁠.

트럭을 몬 수금책은 경찰서 마당에서 묻기도 전에 제 이름부터 댔다고 했다⁠. 진경은 새벽 네 시에 현장 팀 보고를 읽고 이름을 소리 내어 읽었다⁠. 정우진⁠. 스물다섯⁠. 신림⁠. 인호의 신고서 맨 끝 줄에 「⁠이 사람도 빚이 있다고 합니다⁠」라고 쓰여 있던 사람이었다⁠. 묶음 017에 「⁠신림 · 수금책 · 옆방⁠」이라는 점을 만든 지 백하루 만이었다⁠.

여섯 시 정각⁠, 현장 팀장이 상가 경비실 문을 두드렸다⁠.

*

새벽 여섯 시 이십 분⁠, 동백금융 대표실 불이 켜졌다⁠. 경비실 전화를 받고 달려온 고태준은 넥타이를 끝까지 매고 있었다⁠. 새벽 다섯 시에 넥타이를 매는 사람이었다⁠. 태준은 영장을 끝까지 읽었다⁠. 읽고 나서 영장을 반으로 접지 않고 탁자 위에 반듯하게 내려놓았다⁠.

“⁠금고는 제가 엽니다⁠. 비밀번호를 아는 사람이 저밖에 없어요⁠.⁠”

책상 뒤 선반 아래에 회색 금고가 있었다⁠. 태준이 숫자판을 돌렸다⁠. 여섯 자리였다⁠. 금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대표실에 크게 울렸다⁠.

“⁠아버지 생신이에요⁠. 아버지는 비밀번호를 바꾼 적이 없어요⁠.⁠”

금고 안에는 계약서 묶음과 인감 도장⁠, 그리고 갈색 가죽 수첩 네 권이 있었다⁠. 태준은 수첩 네 권을 꺼내 탁자에 한 권씩 놓았다⁠. 표지에 연도가 금박으로 찍혀 있었다⁠. 2015부터 2026까지⁠, 세 해씩 한 권⁠. 열두 해였다⁠.

“⁠작년 10월에 찾았습니다⁠. 아버지 감사패 뒤에 금고 열쇠가 붙어 있었어요⁠. 아버지가 거절한 손님 번호를 바깥에 넘긴 기록입니다⁠. 날짜⁠, 이름⁠, 번호⁠, 그리고 금액⁠. 소개비요⁠.⁠”

진경은 장갑을 끼고 마지막 수첩을 펼쳤다⁠. 칸마다 볼펜 글씨가 빼곡했다⁠. 날짜 옆에 이름⁠, 이름 옆에 번호⁠, 번호 옆에 작은 숫자⁠. 작년 12월 3일 목요일 줄에 「⁠구보영 · 영통⁠」이 있었다⁠. 진경은 이름을 소리 내어 읽었다⁠. 선우가 등 뒤에서 숨을 멈췄다⁠.

“⁠이거 바깥에 내놓으시면 동백금융은 끝납니다⁠.⁠”

“⁠압니다⁠.⁠”

“⁠왜 지금 내놓으세요⁠?⁠”

태준은 선반 위 감사패 세 개를 보았다⁠. 「⁠서민금융 이바지 · 동백금융 대표 고만석⁠」⁠. 키 순서대로 세워진 아버지의 이름들이었다⁠.

“⁠1월에 감독원이 왔다 가고 석 달 동안 금고를 매일 봤어요⁠. 열면 회사가 끝나고 안 열면 제가 아버지가 됩니다⁠. 아버지는 이걸 소개라고 불렀어요⁠. 거절한 손님한테 다른 길을 소개해 준다고⁠. 그 다른 길이 노란 종이라는 걸 아버지가 몰랐을 리 없어요⁠.⁠”

태준은 감사패 세 개를 하나씩 엎었다⁠. 엎은 감사패 뒤판에 테이프 자국이 남아 있었다⁠. 열쇠가 붙어 있던 자리였다⁠.

태준의 휴대전화가 탁자 위에서 떨었다⁠. 화면에 「⁠아버지⁠」가 떴다⁠. 태준은 화면을 오래 내려다보다가⁠, 진경이 보는 앞에서 전화를 받았다⁠.

“⁠아버지⁠, 금고 열었어요⁠. 감독원 분들 와 계세요⁠. 네⁠. 제가 열었어요⁠. 아버지 생신 그대로였어요⁠.⁠”

수화기 너머에서 늙은 목소리가 한참 무언가를 말했다⁠. 태준은 끝까지 듣고 한마디만 했다⁠.

“⁠그 다른 길⁠, 아버지가 직접 가 보신 적 있으세요⁠?⁠”

태준이 전화를 끊었다⁠. 휴대전화를 엎은 감사패 옆에 내려놓고 진경을 보았다⁠.

“⁠감독원에 하나만 묻겠습니다⁠. 오늘 동백금융 문이 닫히면⁠, 사천 명은 다음 달에 어디로 갑니까⁠?⁠”

*

진경은 대답을 고르지 않았다⁠. 고를 만큼 많지 않았다⁠.

“⁠오늘 영장은 아버님 기록에 대한 겁니다⁠. 영업 정지 영장이 아니에요⁠. 법 안에서 하시는 갱신은 계속하세요⁠. 그게 사천 명한테 제일 나은 길입니다⁠.⁠”

“⁠감독원이 문 닫으라고 안 하면⁠, 손님들이 알아서 문을 닫고 나갑니다⁠. 뉴스에 동백 이름 나오면요⁠.⁠”

“⁠압니다⁠. 그래서 하나 더 하겠습니다⁠. 갱신 대상 고객 사천이십일 명한테 보낼 안내문을 감독원이 같이 만들겠습니다⁠. 서민금융진흥원 1397⁠, 신용회복위원회 1600-5500⁠, 그리고 1332⁠. 노란 종이보다 먼저 닿게요⁠.⁠”

“⁠안내문 한 장이요⁠?⁠”

“⁠네⁠. 제가 할 수 있는 건 한 장입니다⁠. 한 장을 사천 번 보내겠습니다⁠.⁠”

태준이 처음으로 웃었다⁠. 웃음 끝에 넥타이를 조금 풀었다⁠.

“⁠숫자로 말하시니까 믿겠습니다⁠. 저도 숫자로 말하면 옳다고 믿는 사람이라⁠.⁠”

태준은 벽의 액자 앞으로 갔다⁠. 「⁠정직한 금리 연 19⁠.9%⁠」⁠. 이번에는 액자를 바로잡지 않았다⁠. 액자를 벽에서 떼어 엎은 감사패 옆에 나란히 눕혔다⁠. 벽에 액자 크기만 한 하얀 자국이 남았다⁠. 햇볕이 닿지 않아 하얗게 남은 벽이었다⁠.

*

새벽 여섯 시 사십 분⁠, 선우의 휴대전화에 현장 팀 단체방 문자가 연달아 올라왔다⁠. 선우가 화면을 진경에게 내밀었다⁠. 모두 개조식이었다⁠.

「⁠송도 오피스텔 진입 완료⁠」 「⁠강성민(⁠44⁠) 현장 확보⁠」 「⁠현금 다발 · 휴대폰 다수 · 서류 압수⁠」 「⁠상동 사무실 · 집기 일부 · 인원 없음⁠」 「⁠상동 사무실 정수기 한 대 남아 있음⁠」

“⁠선배⁠, 정수기는 왜 보고해요⁠?⁠”

“⁠정확하게 가자고 했잖아⁠.⁠”

진경은 송도 줄을 오래 보았다⁠. 강성민⁠. 마흔넷⁠. 순댓국집에서 세연이 말한 키 크고 구두가 반짝이는 사람⁠. 묶음 017의 점 사천백여 개가 이제 한 사람에게로 줄을 대고 있었다⁠. 할머니의 이름이 아니라 사람의 이름이었다⁠.

오전 일곱 시 오십 분⁠,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세연이었다⁠. 목소리가 쉬어 있었다⁠.

“⁠밤새 원미서에 있었어요⁠. 진술하고⁠, 또 하고요⁠. 휴대폰은 아직 상자째 증거라서 형사님 걸 빌렸어요⁠.⁠”

“⁠우진 씨는요⁠?⁠”

“⁠입건됐대요⁠. 근데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가 다 말했대요⁠. 형사님이 이렇게 말 잘하는 피의자는 처음이라고⁠. 실장님도요⁠. 실장님이 조사실에서 지갑을 꺼내더니 접힌 종이를 형사님한테 보여 줬어요⁠. 신복위 안내문이요⁠. 삼 년 전 날짜⁠. 어제 짐 쌀 때 서랍에서 꺼내 지갑에 넣었대요⁠.⁠”

“⁠세연 씨는 괜찮아요⁠?⁠”

“⁠엄마가 깍두기 싸 들고 경찰서 앞에 와 계세요⁠. 아침 아홉 시까지 안 나오면 들어오신대요⁠.⁠”

진경은 웃었다⁠. 동백금융 대표실 하얀 벽 앞에서⁠, 특사경 조끼를 입고⁠.

*

오전 여덟 시 반⁠, 진경은 국장의 전화를 받았다⁠. 국장의 목소리 뒤로 시장 소음과 확성기 소리가 섞여 있었다⁠.

“⁠오 분석관⁠, 시장이다⁠. 할머니가 셔터를 안 올린다⁠. 예금주 계좌 압수수색 영장이 있는데 문을 안 열어⁠. 상인들이 셔터 앞에 천막을 쳤다⁠. 기자 둘이 기다리고 있고⁠.⁠”

“⁠송도에서 강성민이 잡혔습니다⁠. 한가운데는 송도입니다⁠.⁠”

“⁠알아⁠. 근데 강성민은 얼굴이 없어⁠. 마스크 쓰고 모자 쓰고 고개 숙이고 나올 거야⁠. 기자들은 얼굴을 원해⁠.⁠”

“⁠가겠습니다⁠.⁠”

“⁠오지 말라고 했지⁠.⁠”

“⁠보직 조정은 오늘 새벽 여섯 시까지였습니다⁠. 동백은 끝났습니다⁠.⁠”

국장은 대답하지 않고 끊었다⁠. 끊기 전에 볼펜으로 무언가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두 번이었다⁠.

*

오전 아홉 시 사십 분⁠, 느티나무시장 사거리의 금자네 국수 앞에 흰 천막 두 동이 서 있었다⁠. 천막 기둥에 매직으로 쓴 종이가 붙어 있었다⁠. 「⁠금자 언니는 은행이었다⁠」 「⁠우리가 빌렸다 · 우리가 갚았다⁠」⁠. 천막 아래 상인 수십 명이 접이식 의자에 앉아 있었다⁠. 떡집 주인⁠, 정육점 주인⁠, 그릇 가게 할아버지⁠, 그리고 명숙⁠. 상인회장 박영수가 확성기를 들고 있었다⁠.

“⁠에⁠, 특사경 여러분⁠, 우리 금자 언니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회장님⁠, 길게 하지 마세요⁠.⁠”

“⁠에⁠, 줄이겠습니다⁠. 할머니 가게 들어가시려면 우리 먼저 넘으세요⁠. 이상입니다⁠.⁠”

셔터 앞에 특사경 조끼를 입은 현장 팀 다섯이 서 있었고⁠, 현장 팀 앞에 국장이 있었다⁠. 국장 옆에 카메라를 든 기자 둘⁠. 진경이 천막 사이로 걸어오자 국장이 볼펜을 귀에서 뺐다⁠.

“⁠영장이 있어⁠. 들어가야 해⁠.⁠”

“⁠국장님⁠, 계좌 열두 개는 손자가 열었습니다⁠. 손자는 3월 12일에 잡혔고요⁠. 할머니 가게 안에 있는 건 일수 카드 마흔 장입니다⁠.⁠”

“⁠일수 카드도 불법이야⁠. 연 칠십 퍼센트⁠.⁠”

“⁠맞습니다⁠. 그것도 원금까지 무효입니다⁠. 그런데 오늘 첫 장 사진이 일흔다섯 할머니 셔터면⁠, 송도 사진은 둘째 장으로 밀립니다⁠. 사람들은 첫 장만 기억합니다⁠. 국장님이 그러셨잖아요⁠. 첫 사건이 크게 보여야 한다고⁠. 크게 보여야 할 건 송도입니다⁠.⁠”

천막 아래에서 떡집 주인이 일어났다⁠.

“⁠아가씨⁠, 그때 국수 먹고 간 공무원이지⁠? 하나만 물어보자⁠. 언니 일수 없어지면 다음 달엔 우리 어디서 빌려⁠? 은행⁠? 은행은 우리 얼굴도 안 봐⁠.⁠”

진경은 대답하지 못했다⁠. 1397과 1600-5500이 입안에 있었지만⁠, 떡집 주인이 원하는 답은 번호가 아니었다⁠. 정육점 주인이 거들었다⁠.

“⁠노란 종이 붙는 거 다 봤어⁠. 언니 셔터 내린 지 열나흘 만에 우리 시장 전봇대에 세 장 붙었어⁠. 내가 다 뗐어⁠.⁠”

“⁠떼 주셔서 고맙습니다⁠.⁠”

“⁠고맙다는 말 들으려고 뗀 거 아니야⁠.⁠”

국장은 기자들을 보았다⁠. 상인들을 보았다⁠. 천막 기둥의 종이를 보았다⁠. 「⁠우리가 빌렸다 · 우리가 갚았다⁠」⁠.

셔터 안에서 쇠 긁히는 소리가 났다⁠. 상인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셔터가 천천히 올라갔다⁠. 무릎 높이에서⁠, 허리 높이에서 멈췄다⁠. 반쯤 올라간 셔터 아래로 앞치마를 두른 다리가 보였다⁠. 금자가 허리를 숙여 셔터 밑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짧게 볶은 흰머리가 열나흘 사이 조금 자라 있었다⁠.

“⁠밖에서 떠들지 말고 들어와⁠. 새벽부터 고생들 했지⁠. 국수 삶을게⁠.⁠”

국장이 무슨 말을 하려고 입을 열었다⁠. 금자가 먼저 말했다⁠.

“⁠영장인지 뭔지 그거 보여 줘⁠. 국수 먹으면서 볼게⁠. 나는 돋보기가 있어야 글씨를 봐⁠.⁠”

기자 하나가 카메라를 들었다⁠. 명숙이 일어나 카메라 앞을 막지 않고⁠, 대신 기자에게 깍두기 통을 내밀었다⁠. 기자는 카메라와 깍두기 통을 한 손씩 들고 어쩔 줄 몰라 했다⁠.

국장이 볼펜을 귀에 꽂았다⁠. 현장 팀장에게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들어가라는 끄덕임이었다⁠. 압수수색이었고⁠, 아침밥이었다⁠.

셔터 안에서 가스 불 켜지는 소리가 났다⁠. 딸깍⁠, 화르르⁠. 반쯤 올라간 셔터 아래로 남색 조끼 다섯 벌이 차례로 허리를 숙이고 들어갔다⁠. 등판의 흰 글씨가 한 줄씩 셔터 밑으로 접혀 들어갔다⁠. 솥에서 김이 피어올라 셔터 틈으로 새어 나왔고⁠, 천막 아래 상인들은 아무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 금자네 국수 간판 위로 아침 볕이 비스듬히 내려앉았다⁠. 사거리 모퉁이의 은행나무 가지 끝에 연두색 잎눈이 손톱만 하게 벌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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