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5,312자)

짐 싸는 밤

신용 무관·소액 대출 · 서강림

2027년 3월 25일 목요일 오후 다섯 시 사십 분⁠, 부천 상동 한빛 고객센터의 열네 책상 위에 빈 상자가 하나씩 놓였다⁠. 나성태는 공지문 없이 말했다⁠. 손가락으로 따라갈 종이가 없는 공지는 처음이었다⁠.

“⁠오늘 밤 이사합니다⁠. 송도⁠. 대본은 상자에 넣고⁠, 통화 목록은 따로 묶으세요⁠. 휴대폰은 보관함에서 꺼내지 마세요⁠. 상자째 갑니다⁠.⁠”

박은주가 손을 들었다⁠.

“⁠실장님⁠, 휴대폰도 이사 가요⁠?⁠”

“⁠갑니다⁠.⁠”

“⁠걔들은 휴식 끝나면 송도에서 깨어나요⁠? 나보다 먼저 송도 구경하네⁠.⁠”

아무도 웃지 않았다⁠. 은주도 웃지 않고 대본을 상자에 넣었다⁠. 사흘 전 월요일⁠, 휴게실 텔레비전에 「⁠금감원 민생 특사경 출범⁠」 자막이 지나갔고⁠, 나성태가 리모컨으로 텔레비전을 껐다⁠. 월요일부터 사무실에서 텔레비전 소리가 사라졌다⁠. 3월 12일 시장에서 도 사장이 잡혀간 뒤로 휴대폰 상자도 더는 오지 않았다⁠. 대전에 생긴다던 새 사무실 이야기도 사라졌다⁠. 대전으로 간다던 우진은 비품 책상에 그대로 앉아 있었고⁠, 오늘 밤 트럭을 몰 사람으로 다시 불렸다⁠.

세연은 대본 첫 장을 상자에 넣기 전에 한 번 읽었다⁠. 「⁠직장으로 찾아뵙기 전에 먼저 연락드렸습니다⁠」⁠. 여섯 달 넘게 하루 백 번 읽은 줄이었다⁠. 이제 직장이 이사를 가고 있었다⁠.

*

저녁 여섯 시 십 분⁠, 세연은 저녁거리를 사 오겠다며 오피스텔 1층 편의점에 내려갔다⁠. 보관함의 휴대전화는 상자 안에 있었다⁠. 진경의 번호는 머릿속에 있었다⁠. 순댓국집에서 일어나기 전에 세 번 외운 번호였다⁠. 세연은 삼각김밥 열네 개를 계산대에 올리고 아르바이트생에게 말했다⁠.

“⁠죄송한데 휴대폰 한 번만 빌려주실 수 있어요⁠? 엄마한테 급히 할 말이 있어서요⁠.⁠”

아르바이트생이 휴대전화를 쥔 채 세연을 아래위로 보았다⁠.

“⁠보이스피싱 아니죠⁠?⁠”

“⁠제가 그런 전화 거는 사람이었어요⁠. 오늘 그만둬요⁠.⁠”

아르바이트생은 무슨 말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하더니⁠,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세연은 번호를 눌렀다⁠. 진경이 두 번째 신호에 받았다⁠.

“⁠한세연입니다⁠. 오늘 밤 송도로 옮겨요⁠. 열 시쯤 상동 지하 주차장에서 출발해요⁠. 흰색 1톤 트럭⁠, 짐칸에 파란 덮개⁠. 대본이랑 통화 목록이랑 휴대폰 상자가 다 실려요⁠. 우진 씨가 운전해요⁠.⁠”

“⁠알겠습니다⁠. 부천원미경찰서와 특사경 현장 팀에 바로 알리겠습니다⁠. 세연 씨는 트럭에 타지 마세요⁠.⁠”

“⁠실장님이 저보고 대본 상자 들고 가운데 앉으래요⁠. 안 타면 엄마 가게로 사람이 가요⁠.⁠”

수화기 너머가 잠깐 조용했다⁠.

“⁠그럼 타세요⁠. 대신 문 옆 말고 가운데 앉으세요⁠. 손잡이에서 멀리요⁠.⁠”

세연은 고맙다고 하고 휴대전화를 돌려주었다⁠. 아르바이트생이 삼각김밥 봉지를 내밀며 말했다⁠.

“⁠열네 개 맞죠⁠? 엄마한테 효도하세요⁠.⁠”

*

같은 시각⁠, 신림역 근처 라이더 쉼터에서 인호의 휴대전화가 떨었다⁠. 「⁠오늘 밤 송도⁠. 트럭⁠. 상동에서 열 시⁠.⁠」 끝에 마침표가 있었다⁠. 한 통이 더 왔다⁠. 「⁠따라오지 마⁠.⁠」 이번에도 마침표였다⁠.

인호는 헬멧을 집었다⁠. 화이트보드에는 지난달 내기판이 아직 남아 있었다⁠. 「⁠인호 일요일까지 형 데려온다⁠」⁠. 일요일은 진작 지났고⁠, 못 데려온다에 건 사람들은 삼각김밥 열 개를 받아 먹은 지 오래였다⁠. 곽 형이 전기난로 앞에서 고개를 들었다⁠.

“⁠어디 가⁠? 저녁 콜 지금부터야⁠.⁠”

“⁠형 데리러요⁠.⁠”

곽 형은 일어나 화이트보드 앞으로 갔다⁠. 지우개로 「⁠일요일까지⁠」를 지우고 매직으로 「⁠오늘 밤⁠」이라고 고쳐 썼다⁠. 그러고는 데려온다 줄 맨 끝에 자기 이름을 하나 더 썼다⁠.

“⁠컵라면 한 박스 내가 산다⁠. 가서 데려와⁠. 신호는 지키고⁠.⁠”

“⁠형⁠, 상동까지 사십 분이에요⁠.⁠”

“⁠그럼 사십 분 동안 지켜⁠.⁠”

인호는 쉼터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형광 연두 조끼 위로 회색 넥워머를 코까지 올렸다⁠. 3월 밤바람이 아직 찼다⁠.

신림에서 상동까지는 콜로 달려 본 적 없는 길이었다⁠. 인호는 내비게이션을 켰다⁠. 내비게이션은 이륜차 경로라며 큰길만 골라 주었다⁠. 배달 앱 AI가 육교 계단으로 안내했다던 막내 이야기가 떠올랐다⁠. 오늘 밤만은 기계가 계단을 고르지 않기를 바랐다⁠. 신호마다 인호는 멈췄다⁠. 곽 형이 사십 분 동안 지키라고 했다⁠.

*

밤 열 시⁠, 상동 오피스텔 지하 주차장에서 1톤 트럭 짐칸에 상자가 실렸다⁠. 대본 상자 열네 개⁠, 통화 목록 묶음⁠, 모니터 넷⁠, 그리고 휴대전화가 든 상자 셋⁠. 상담원들은 짐을 다 싣고 나서 택시 다섯 대에 나눠 탔다⁠. 송도에서 내일 아침 아홉 시에 다시 출근한다고 했다⁠. 은주가 택시에 타기 전에 세연의 손을 잡았다⁠.

“⁠세연아⁠, 송도에도 정수기 있겠지⁠?⁠”

“⁠있겠죠⁠.⁠”

“⁠없으면 내가 사장한테 정수기 이야기부터 할 거야⁠. 대본 없이⁠.⁠”

택시가 떠나고 주차장에 세 사람이 남았다⁠. 우진이 짐칸 덮개 끈을 묶다가 세연을 돌아보았다⁠.

“⁠누나⁠, 어머님 깍두기 맛있어요⁠?⁠”

“⁠맛있어요⁠. 왜요⁠?⁠”

“⁠2월에 시금치 사러 갔을 때 어머님이 물으셨어요⁠. 밥은 먹고 다니냐고⁠. 우리 엄마 말고 그거 물어본 사람 처음이에요⁠. 빚 받으러 간 사람한테요⁠.⁠”

우진은 끈을 한 번 더 당겨 매듭을 지었다⁠. 매듭이 반듯했다⁠. 세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 대신 편의점 봉지에서 삼각김밥 하나를 꺼내 우진에게 건넸다⁠. 우진은 받아서 후드 주머니에 넣었다⁠. 업무폰 두 대 사이에⁠.

트럭 운전석에 우진이 앉았고⁠, 조수석에 나성태가 앉았다⁠. 세연은 두 사람 사이 가운데 자리에 앉아 대본 상자 하나를 무릎에 얹었다⁠. 상자가 무거웠다⁠. 종이의 무게였다⁠. 우진이 시동을 걸었다⁠. 엔진이 떨자 무릎 위 상자도 떨었다⁠.

나성태가 휴대전화를 귀에 댔다⁠.

“⁠네⁠, 사장님⁠. 지금 출발합니다⁠. 고속도로 타면 사십 분이요⁠. 네⁠. 다 실었습니다⁠. 목록도요⁠.⁠”

트럭이 지하 주차장 경사로를 올라갔다⁠. 바깥은 비가 그친 뒤라 도로가 검게 젖어 있었다⁠. 세연은 조수석 사이드미러를 보았다⁠. 큰길 신호등 아래⁠, 오토바이 한 대가 시동을 켠 채 서 있었다⁠. 형광 연두가 젖은 도로에 비쳐 두 개로 보였다⁠.

*

밤 열 시 이십 분⁠, 인호는 트럭 뒤 세 대쯤을 두고 따라갔다⁠. 파란 덮개가 신호마다 멈췄다가 다시 움직였다⁠. 우진은 운전을 반듯하게 했다⁠. 깜빡이를 켜고 차선을 바꾸고⁠, 노란불에 서고⁠, 제한 속도를 넘지 않았다⁠. 인호는 우진이 운전을 이렇게 하는 줄 몰랐다⁠. 협박 문자에 마침표를 찍는 사람의 운전이었다⁠.

큰길 끝에 고속도로로 올라가는 진입로가 보였다⁠. 진입로 앞 표지판에 하얀 글씨가 있었다⁠. 「⁠이륜자동차 진입 금지⁠」⁠. 인호는 브레이크를 잡았다⁠. 오토바이는 고속도로와 자동차 전용도로에 들어갈 수 없었다⁠. 배달 일 첫날 곽 형이 제일 먼저 가르쳐 준 것이 진입로 표지판이었다⁠. 저기 올라가면 콜보다 벌금이 먼저 온다고⁠.

인호는 갓길에 오토바이를 세우고 헬멧을 벗었다⁠. 트럭이 진입로로 다가가고 있었다⁠. 인호는 오토바이에서 내려 표지판 아래로 걸어갔다⁠. 인호가 할 수 있는 일은 여기까지였다⁠. 형광 연두 조끼가 가로등 아래 환했다⁠. 인호는 두 팔을 들지도⁠, 소리를 지르지도 않았다⁠. 그냥 서 있었다⁠. 트럭 사이드미러에 보이는 자리에⁠.

*

진입로가 보이기 전⁠, 트럭 안에서 나성태가 앞 유리를 본 채 말했다⁠. 세연에게 하는 말이었다⁠.

“⁠한세연 씨⁠, 나도 처음엔 상담원이었어⁠. 십 년 전에 가게 망하고 신용불량 되고⁠, 받아 주는 데가 여기밖에 없었어⁠. 첫 달에 우리 엄마 같은 목소리를 받았어⁠. 끊고 나서 화장실에 한참 앉아 있었지⁠. 둘째 달부터는 안 앉았어⁠. 셋째 달에 실장이 됐어⁠.⁠”

“⁠신복위 안내문은요⁠?⁠”

“⁠삼 년 전에 받아 왔어⁠. 서랍에 넣고 안 꺼냈어⁠. 꺼내면 여기서 나가야 하니까⁠.⁠”

세연은 대본 상자 모서리를 손가락으로 쓸었다⁠. 상자 안에서 종이가 사각거렸다⁠. 나성태는 더 말하지 않았다⁠.

트럭 안에서 세연은 사이드미러 속 형광 연두를 보았다⁠. 우진도 보았다⁠. 우진의 손이 핸들 위에서 한 번 미끄러졌다⁠. 트럭이 진입로 앞에서 속도를 줄였다⁠.

“⁠왜 서⁠?⁠”

나성태가 물었다⁠. 우진은 대답 대신 물었다⁠.

“⁠실장님⁠, 저 대전 안 간 거 사장님이 이 트럭 몰라고 해서죠⁠?⁠”

“⁠그래서⁠.⁠”

“⁠저 사백오십 이제 안 갚아도 된대요⁠. 무효래요⁠.⁠”

“⁠우희⁠.⁠”

나성태가 이름 하나만 말했다⁠. 우진의 어깨가 굳었다⁠. 세연은 무릎 위 상자를 두 팔로 끌어안았다⁠.

“⁠우희 번호는 위를 잡아야 끝난대요⁠. 인호가 형사한테 들었대요⁠. 위가 지금 이 짐칸에 다 있잖아요⁠. 목록이랑 대본이랑 휴대폰이랑⁠.⁠”

진입로 표지판이 앞 유리에 가까워졌다⁠. 우진이 깜빡이를 켰다⁠. 진입로와 반대로 가는 깜빡이였다⁠. 나성태가 몸을 틀어 핸들로 손을 뻗었다⁠. 세연은 생각보다 먼저 손이 나갔다⁠. 두 손으로 나성태의 팔을 잡았다⁠.

“⁠실장님⁠, 삼 년하고 한 달이에요⁠.⁠”

나성태의 팔이 세연의 손 안에서 멈췄다⁠. 힘이 들어갔다가⁠, 빠졌다⁠. 나성태는 팔을 거두고 조수석 창에 머리를 기댔다⁠. 우진이 핸들을 진입로 반대로 꺾었다⁠. 트럭이 진입로를 지나쳐 큰길로 들어갔다⁠. 사이드미러 속 형광 연두가 뒤에서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성태의 휴대전화에서 사장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여보세요⁠, 나 실장⁠, 여보세요⁠. 나성태는 통화 종료 단추를 눌렀다⁠. 이번에는 실장의 화면에서⁠, 실장의 손가락이었다⁠.

*

밤 열 시 오십오 분⁠, 부천원미경찰서 정문으로 흰색 1톤 트럭 한 대가 들어왔다⁠. 깜빡이를 켜고⁠, 서행으로⁠, 주차선 안에 반듯하게⁠. 뒤따라 오토바이 한 대가 들어와 트럭 옆에 멈췄다⁠. 당직실 문이 열리고 경찰관 둘이 뛰어나왔다⁠. 무전기가 지직거렸다⁠. 송도로 간다던 트럭이 왜 여기 있느냐는 소리가 들렸다⁠.

우진이 시동을 껐다⁠. 업무폰 두 대를 계기판 위에 나란히 올려놓았다⁠. 문자 앱이 열린 채였다⁠. 지우지 못한 문자들이 화면 가득 마침표를 달고 있었다⁠. 우진은 운전석 문을 열고 내렸다⁠. 후드를 머리에서 벗겼다⁠. 짧은 머리가 경찰서 마당의 조명 아래 드러났다⁠.

경찰관 하나가 손전등을 들고 운전석으로 왔다⁠.

“⁠누가 운전했어요⁠?⁠”

“⁠제가요⁠. 정우진⁠. 신림에서 수금했어요⁠. 짐칸에 콜센터가 다 있어요⁠. 대본이랑 목록이랑 휴대폰이요⁠. 조수석은 실장님이고⁠, 가운데는 상담원인데 신고한 사람이에요⁠.⁠”

우진은 한 번도 끊지 않고 말했다⁠. 경찰관이 손전등을 내리고 무전기를 들었다⁠. 나성태는 조수석 문을 스스로 열고 내려 트럭 옆에 두 손을 내리고 기다렸다⁠.

인호가 헬멧을 벗고 다가왔다⁠. 두 사람 사이에 트럭 바퀴 하나가 있었다⁠.

“⁠형⁠, 쉼터에서 컵라면 한 박스 내기 했어요⁠.⁠”

“⁠누가 이겼는데⁠?⁠”

“⁠곽 형이요⁠. 데려온다에 걸었어요⁠. 저도요⁠.⁠”

“⁠나는 어디 걸었어야 했냐⁠?⁠”

“⁠형은 운전했잖아요⁠.⁠”

우진이 웃었다⁠. 처음 보는 웃음이었다⁠. 트럭 가운데 자리에서 세연이 대본 상자를 안은 채 내렸다⁠. 젖은 아스팔트 위로 경찰서 마당의 불빛이 길게 번졌고⁠, 트럭 짐칸의 파란 덮개 아래에서 비닐에 싸인 휴대전화 상자들이 비상등이 깜빡일 때마다 노랗게 떠올랐다가 꺼졌다⁠.

12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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