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5,348자)
생신
신용 무관·소액 대출 · 서강림
2027년 3월 8일 월요일 낮 열두 시 십 분, 부천 상동 오피스텔에서 버스 정류장 두 개 떨어진 순댓국집 구석 자리에서 진경은 한세연과 마주 앉았다. 세연의 점심시간은 사십 분이었다. 세연은 앉자마자 휴대전화가 없다는 것부터 말했다. 출입문 옆 보관함에서 휴식을 취하는 중이라고.
“휴대전화가 휴식을 취해요?”
“실장님 공지 말투예요. 우리 회사는 휴대폰도 사람처럼 대해요. 사람은 휴대폰처럼 대하고요.”
진경은 웃지 않으려다 실패했다. 순댓국 두 그릇이 나왔다. 세연은 숟가락을 들기 전에 말을 시작했다. 정해 온 순서대로 말하는 사람이었다.
“실장님은 매일 저녁 정산을 송도로 보내요. 강 사장이라고 불러요. 2월 25일 목요일에 강 사장이 사무실에 왔어요. 사십 대, 키 크고, 구두가 반짝였어요. 사무실을 한 바퀴 돌더니 다음 달에 옮길 수도 있다고 했어요.”
진경은 수첩에 적었다. 「송도 · 강 사장 · 2/25 방문 · 이전 언급」.
“그리고 휴대폰 상자 가져오는 사람이 있어요. 도 사장이요. 끊긴 번호만큼 새 휴대폰을 가져와요. 서른쯤, 갈색 패딩에 운동화가 늘 새거예요. 우리 할머니도 이 동네 장사하신다고 했어요.”
진경의 볼펜이 멈췄다. 2월 4일 오후, 국숫집 뒷문에서 흰 봉투를 받아 패딩 안주머니에 넣던 남자. 「현우야, 육수 떨어졌다」. 진경은 수첩 위 「도 사장」 옆에 「도현우」라고 썼다.
“우진 씨는요?”
“다음 주에 대전으로 간대요. 거기 새 사무실이 생긴대요. 실장님이 그러셨어요. 신림 일은 이제 우진이가 너무 얼굴이 알려졌다고.”
“한세연 씨, 출범까지 두 주 남았어요. 그때까지만 거기 계실 수 있어요?”
세연은 순댓국을 한 숟가락 떴다. 국물을 넘기고 물었다.
“엄마 가게는요?”
“부천원미경찰서에 신변 보호 요청 넣겠습니다. 오늘 오후에요.”
세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남은 이십 분 동안 두 사람은 순댓국만 먹었다. 세연은 일어나기 전에 깍두기 한 조각을 더 집어 먹고 말했다.
“우리 엄마 깍두기가 이거보다 맛있어요. 다 끝나면 드시러 오세요.”
*
3월 9일 화요일 오후 네 시 반, 느티나무시장 금자네 국수 앞 평상에서 진경은 갈색 패딩의 남자와 마주 앉았다. 금자는 일수 카드를 들고 시장을 도는 중이었다. 도현우는 진경을 보자마자 할머니에게 들었다고 했다. 금감원 아줌마가 국수를 두 그릇 먹고 갔다고.
“도현우 씨. 휴대폰 가게 하셨죠.”
“작년 여름에 접었어요.”
“가게 접고 나서 할머니 이름으로 계좌 열두 개를 여셨죠. 그리고 남의 이름으로 개통한 휴대폰을 상동 콜센터에 대 주시고요.”
현우는 부인하지 않았다. 평상 모서리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시장 골목을 보았다. 골목 저편에서 도장 소리가 났다. 탁.
“가게 접을 때 빚이 이천이었어요. 송도에서 빌렸어요. 못 갚으니까 그 사람들이 할머니 이름을 달라고 했어요. 할머니 이름은 이 시장에서 제일 믿을 만한 이름이라고. 할머니 이름으로 돈이 오면 사람들이 안 무서워한다고.”
“그래서 드렸어요?”
“드렸어요. 할머니가 일수 돈 계좌로 받으면 편하다고 하셨거든요. 열두 개는 할머니가 안 세 봤어요. 할머니는 도장만 세요.”
진경은 현우의 손을 보았다. 국수를 마는 할머니의 손과 닮은 손이었다. 손톱이 짧았다.
“금요일이 할머니 생신이에요. 일흔다섯. 시장 사람들이 잔치를 열어 준대요. 서른 해 장사하면서 처음이에요. 생신 끝나면 제 발로 갈게요. 그 앞에서 제가 끌려가는 거, 할머니 보게 하기 싫어요.”
“신림의 스물세 살은 엄마와 지점장과 단톡방에 채무자 공개 문자를 받았어요. 수원의 미용실 원장은 손님 이백열두 명 앞에서요. 그분들한테는 생신까지 기다려 준 사람이 없었어요.”
현우는 고개를 숙였다. 평상 밑에서 시장 고양이가 기어 나와 현우의 새 운동화 끈을 건드렸다. 현우는 고양이를 쫓지 않았다.
“알아요. 그래도 부탁드려요.”
진경은 약속하지 않았다. 일어나서 국숫집 셔터 위의 간판을 보았다. 「금자네 국수 · 1996」. 골목 끝에서 금자가 돌아오고 있었다. 앞치마 주머니가 불룩했다.
*
3월 10일 수요일 오전 아홉 시, 국장실에서 장석진은 진경의 보고서를 끝까지 읽고 볼펜을 귀에서 뺐다. 묶음 017의 신고는 삼천구백구십네 건이었다.
“도현우. 손자. 휴대폰 공급, 계좌 개설, 수금 봉투 수령. 좋아. 그림이 더 좋아졌어. 할머니와 손자.”
“국장님, 그림 말고 조직도로 봐 주십시오. 한가운데는 할머니가 아닙니다. 송도의 강 사장입니다. 할머니 이름은 강 사장이 빌려 간 이름입니다.”
“그러니까 출범 날 한 번에 치자는 거야. 3월 22일. 송도, 상동, 시장, 동백. 시장 사진이 첫 장이다. 일흔넷 할머니 국숫집 앞에 특사경 조끼. 금융위가 특사경 예산 깎자는 판에, 첫 사건이 작으면 내년은 없어.”
“출범까지 열이틀입니다. 수금책 정우진이 다음 주에 대전으로 갑니다. 그 사람이 사라지면 신림에서 송도로 가는 계단이 하나 빠집니다.”
“계단은 또 생겨.”
“사람은 또 안 생깁니다.”
국장은 볼펜을 다시 귀에 꽂았다. 이번에는 미끄러지지 않았다.
“오 분석관. 2011년에 시장 일수 민원 닫은 거 기억하나? 사인 간 거래. 그때 그 판단이 틀린 게 아니었어. 그때는 그게 법이었어. 지금은 법이 바뀌었고, 바뀐 법이 살려면 첫 사건이 커야 돼. 나도 그게 맞다고 생각해서 하는 말이야.”
진경은 대답하지 않고 일어났다. 국장실 문을 닫기 전에 국장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출범 날까지 아무것도 넘기지 마. 이건 지시야.”
*
3월 11일 목요일 밤 열 시, 분석팀 사무실에서 진경은 2011년 봄의 민원 창을 다시 열었다. 인천의 시장 상인. 「사인 간 금전 거래로 감독 대상이 아님」. 진경은 민원인의 이름을 소리 내어 읽었다. 열여섯 해째 같은 이름이었다. 묶음 017 창에서는 신고가 사천 건을 넘어 있었다.
진경은 관악경찰서 노형철 경위에게 전화했다. 신호가 길게 가다가 피곤한 목소리가 받았다.
“노형철입니다.”
“금감원 오진경입니다. 권인호 씨 사건이요. 계좌 열두 개의 예금주는 도금자인데, 계좌를 연 사람은 손자 도현우입니다. 상동 콜센터에 명의 휴대폰을 대고, 시장에서 수금 봉투를 받습니다. 자료 지금 보내겠습니다.”
“국장님은 아세요?”
“모르십니다. 내일 아침에 보고서로 아시게 됩니다.”
수화기 너머에서 노형철이 한숨인지 웃음인지 모를 숨을 쉬었다.
“오 분석관님, 내일 잘리시는 거 아닙니까?”
“특사경이 아직 안 떠서 저를 잡을 사람이 없어요.”
“내일이 할머니 생신이라면서요. 잔치는 끝나고 들어가겠습니다. 초는 끄시게.”
*
3월 12일 금요일 오전 아홉 시 반, 국장은 진경을 부르지 않고 전화를 걸었다. 진경의 보고서는 아침 여덟 시에 국장의 메일함에 들어가 있었다.
“넘겼어?”
“넘겼습니다. 어젯밤 열 시 사십 분에요.”
국장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수화기 너머로 볼펜이 탁자를 두 번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개조식으로 말하는 사람이 개조식을 고르는 소리였다.
“출범 날 시장은 그대로 간다. 오 분석관은 출범 날 동백 맡아. 시장 근처엔 오지 마.”
“알겠습니다.”
“그리고 하나 더. 다음부터는 열 시 사십 분에 넘기기 전에, 열 시 삼십 분에 나한테 전화해. 받든 안 받든.”
전화가 끊겼다. 옆자리 선우가 의자를 굴려 와 속삭였다.
“선배, 잘린 거예요?”
“동백으로 밀린 거야.”
“그거 개조식으로 하면요?”
“보직 조정됨.”
*
3월 12일 금요일 저녁 여섯 시, 금자네 국수의 탁자 넷이 한 줄로 붙어 있었다. 시장 상인 서른여 명이 평상까지 넘쳐 앉았다. 떡집 주인이 떡케이크를 들고 들어왔다. 케이크 위에 흰 앙금 글씨가 있었다. 「금자 언니 일흔다섯 · 이자 없음」. 상인들이 박수를 쳤다. 정육점 주인이 고기 한 판을 내놓았고, 명숙이 반찬 통 열한 개를 상 위에 펼쳤다. 깍두기가 제일 앞에 있었다.
상인회장 박영수가 일어나 종이를 펼쳤다. 예순 넘은 회장은 축사를 길게 하는 사람이었다.
“에, 우리 금자 언니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1996년 이 시장에 국수 솥을 거신 이래로.”
“회장님, 국수 불어요.”
“에, 줄이겠습니다. 언니, 생신 축하드립니다. 이상입니다.”
상인들이 웃었다. 명숙이 깍두기 통을 금자 앞으로 밀며 물었다.
“이모, 오늘은 도장 안 찍어요?”
“생일엔 도장도 쉰다.”
“그럼 오늘 일수는요?”
“오늘 거는 너희가 나한테 국수 사 주는 걸로 쳐.”
“이모, 국수는 이모 가게 거잖아요.”
“그러니까 남는 장사지.”
상인들이 또 웃었다. 진경은 문밖 평상 끝에 앉아 국수 한 그릇을 받았다. 문밖 골목 어귀에 노형철과 형사 둘이 서 있었다. 노형철은 진경과 눈이 마주치자 손목시계를 가리켰다. 진경은 떡케이크를 가리켰다. 노형철은 고개를 끄덕이고 기다렸다.
현우가 초에 불을 붙였다. 일흔다섯 개는 꽂을 데가 없어서 큰 초 일곱 개와 작은 초 다섯 개였다. 상인들이 생일 노래를 불렀다. 박자가 서른 명마다 달랐다. 금자는 노래가 끝나기도 전에 초를 불었다. 한 번에 다 꺼졌다. 연기가 국수 김과 섞여 천장으로 올라갔다.
현우가 골목 어귀를 보았다. 형사들을 보았다. 현우는 패딩을 벗어 금자의 의자 등받이에 걸쳤다. 그러고는 할머니 귀에 대고 말했다.
“할머니, 생신 축하드려요. 국물 떨어지면 멸치는 냉동실 둘째 칸이에요.”
“어디 가?”
“잠깐요.”
현우는 문밖으로 나갔다. 노형철이 신분증을 보이고 낮은 목소리로 몇 마디를 했다. 현우는 두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수갑 채우는 소리는 시장 소음에 묻혔다. 상인들 가운데 몇이 엉덩이를 들었다가, 아무도 말을 하지 못하고 도로 앉았다.
금자는 의자에서 일어나 문밖을 내다보았다. 현우가 형사들 사이로 걸어 골목을 빠져나갔다.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금자는 진경을 보았다. 평상 끝에 앉은 진경을, 오래 보았다.
“먹던 거 마저 먹어. 공무원은 배고프면 일 못 한다니까.”
금자는 다시 앉지 않았다. 상인회장이 남은 종이를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떡집 주인이 떡케이크를 칼로 서른 조각에 나누었고, 아무도 먹지 않은 조각들이 접시 위에 그대로 남았다. 상인들은 한 사람씩 일어나 금자의 손을 한 번씩 잡고 나갔다. 명숙이 마지막이었다. 명숙은 반찬 통 열한 개를 다 두고 갔다.
밤 아홉 시, 손님이 다 나간 가게 앞에서 금자는 셔터 손잡이를 잡았다. 서른한 해 동안 아침마다 올리고 밤마다 내린 셔터였지만, 오늘은 손이 손잡이를 오래 놓지 않았다. 금자가 손잡이를 당기자 셔터가 덜컹거리며 내려왔다. 「금자네 국수 · 1996」 간판 아래로 철판 마디가 하나씩 펼쳐져 내려왔고, 셔터 밑으로 가게 안의 불빛이 점점 가늘어졌다. 의자 등받이에 걸린 갈색 패딩이 가는 불빛 속에 마지막으로 보였다. 떡케이크 위의 초 열두 개에서 남은 연기가 실처럼 올라와 셔터 틈으로 빨려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