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5,503자)

콩 한 알

새벽 러닝크루장이 도깨비였다 · 도결애

파란 점은 성북동 언덕 꼭대기의 작은 놀이터에서 돌고 있었다⁠. 자전거를 골목 아래에 세우고 계단을 뛰어 올라가자 미끄럼틀 둘레를 걷는 막내가 보였다⁠. 헤드랜턴 불빛이 미끄럼틀 기둥을 한 바퀴 돌 때마다 놀이터 담장을 쓸었다⁠. 막내는 휴대전화를 들고 혼자 말하고 있었다⁠.

“⁠구독자 여러분⁠, 지금 미끄럼틀 사십 바퀴째입니다⁠. 다리가 제 다리가 아니에요⁠. 근데 멈출 수가 없어요⁠. 이거 실화고요⁠, 연출 아니고요⁠.⁠”

막내는 웃는 목소리로 말했다⁠. 웃는 얼굴이 아니었다⁠.

그네 옆 벤치에 좌장이 앉아 있었다⁠. 접은 우산을 무릎에 세우고⁠, 헬멧이 옆에서 보온병의 차를 따르고 있었다⁠. 좌장이 나를 보고 손을 흔들었다⁠.

“⁠아가씨도 왔네⁠. 앉아⁠. 구경하기 좋은 자리야⁠.⁠”

“⁠끈 끊어 준다면서요⁠.⁠”

“⁠끊는 중이야⁠. 반포에서 멀리⁠, 해 뜰 때까지 데리고 있으면 끊겨⁠. 반포 끈이 늘어나다 늘어나다 툭⁠.⁠” 좌장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근데 다섯 시가 되면 발이 반포로 가고 싶어 하거든⁠. 그때부터는 우리가 당기는 힘하고 두억이가 당기는 힘하고 줄다리기야⁠. 재밌지⁠.⁠”

“⁠그러다 쓰러져요⁠.⁠”

“⁠쓰러지면 끊기는 거지⁠.⁠”

나는 막내에게 뛰어갔다⁠. 미끄럼틀 둘레를 같이 돌며 막내의 팔을 잡았다⁠. 막내의 팔이 얼음처럼 차가웠다⁠. 손목의 시계가 네 시 이십 분을 넘어가고 있었다⁠.

“⁠막내야⁠, 멈춰⁠.⁠”

“⁠누나⁠, 저 멈추고 싶어요⁠. 근데요⁠, 미끄럼틀이 자꾸 앞에 있어요⁠.⁠”

*

네 시 사십 분⁠, 놀이터 계단 아래에서 검은 후드가 올라왔다⁠. 두억이었다⁠. 뒤에 페메가 따라오고 있었다⁠. 페메는 숨을 몰아쉬며 계단 꼭대기에 주저앉았다⁠. 잠실에서 성북동까지⁠, 두억을 쫓아 뛰어온 얼굴이었다⁠.

두억은 놀이터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담장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좌장⁠. 막내 내놔라⁠.⁠”

“⁠여긴 내 밤길이야⁠, 두억아⁠. 네 반포가 아니고⁠.⁠” 좌장이 우산 끝으로 놀이터 바닥을 톡톡 쳤다⁠. “⁠남의 밤길에선 어깨 못 두드리는 거 알지⁠?⁠”

두억의 손이 손목의 방망이를 쥐었다⁠. 방망이가 담장 너머의 막내를 향했다가 내려갔다⁠. 두억은 담장을 넘지 못했다⁠. 놀이터 바닥의 보도블록 한 줄이 두억의 고무 밑창 앞에서 끝나 있었고⁠, 두억은 줄 끝을 넘지 않았다⁠.

네 시 오십 분⁠, 막내의 걸음이 비틀렸다⁠. 미끄럼틀을 돌던 발이 한쪽으로 쏠렸다⁠. 남쪽이었다⁠. 반포였다⁠. 막내의 몸이 미끄럼틀로 돌아가려다 남쪽으로 끌리고⁠, 다시 미끄럼틀로 돌아갔다⁠. 줄다리기였다⁠. 막내가 비명을 질렀다⁠. 다리에 쥐가 난 사람의 비명이었다⁠.

좌장이 하품을 했다⁠.

“⁠생각보다 두억이 끈이 질기네⁠. 재미없다⁠.⁠” 좌장이 우산을 펼쳤다⁠. “⁠가 봐⁠, 막내⁠. 반포까지 걸어서⁠. 다섯 시까지 못 가면 어떻게 되는지 나도 궁금하네⁠.⁠”

좌장이 손가락을 튕겼다⁠. 미끄럼틀의 원이 끊어졌다⁠. 막내가 남쪽으로 튕겨 나가듯 걸음을 옮겼다⁠. 놀이터를 빠져나가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다섯 시까지 십 분이었고⁠, 반포까지는 십 킬로미터가 넘었다⁠.

*

나는 막내의 왼쪽에서 뛰었고⁠, 두억은 오른쪽에서 뛰었다⁠. 페메가 뒤에서 깃발을 들고 따라왔다⁠. 성북동 언덕을 내려가 혜화를 지나 종로로⁠. 막내의 발은 제멋대로 빨랐다가 제멋대로 꺾였다⁠. 나는 막내의 팔꿈치를 잡아 연석을 피하게 했고⁠, 두억은 막내가 넘어지려 할 때마다 등 뒤의 바람막이를 움켜쥐었다⁠.

다섯 시 정각⁠, 막내의 다리가 꺾였다⁠. 종로 한복판⁠, 불 꺼진 귀금속 상가 앞이었다⁠. 막내가 무릎을 꿇었다⁠.

두억이 막내 앞에 쪼그려 앉았다⁠. 콩 주머니에서 콩 한 알을 꺼내 왼손에서 오른손으로 옮겼다⁠.

“⁠출석⁠.⁠”

막내가 숨을 들이켰다⁠. 꺾였던 다리가 조금 풀렸다⁠. 막내가 고개를 들었다⁠.

“⁠…여기 반포 아닌데요⁠.⁠”

“⁠내가 있는 데서 콩을 옮기면 출석이다⁠. 다섯 시에 내 앞에 있으면 된다⁠.⁠” 두억이 막내를 일으켜 세웠다⁠. “⁠그래서 논산까지 간다고 했잖냐⁠. 매일⁠.⁠”

막내는 웃다가 울었다⁠. 웃음과 울음이 한 얼굴에 같이 있었다⁠. 두억은 막내의 어깨를 두드리지 않았다⁠. 남의 밤길이 끝나는 자리까지는 두드릴 수 없었다⁠. 대신 막내를 등에 업었다⁠. 막내는 두억의 등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화면을 켰다가 껐다⁠.

“⁠크루장님⁠. 좌장한테 답장한 거⁠, 제가 누른 거예요⁠.⁠”

“⁠안다⁠.⁠”

“⁠제가 정하고 싶었어요⁠.⁠”

“⁠정했으면 됐다⁠. 다음에는 더 잘 정해라⁠.⁠”

우리는 남산을 끼고 돌아 한남대교로 내려갔다⁠. 두억이 막내를 업고 앞에서 뛰었고⁠, 페메가 두억의 옆에 붙었다⁠. 나는 뒤에서 따라갔다⁠. 한남대교 위에서 하늘 아래쪽이 분홍빛으로 번졌다⁠. 다리 위 바람이 옆에서 밀었다⁠. 나는 비스듬히 기운 채 뛰었다⁠. 막내가 두억의 어깨 너머로 나를 돌아보았다⁠.

“⁠누나 사탕 있어요⁠? 저 손이 떨려요⁠.⁠”

나는 주머니의 포도당 사탕을 전부 꺼내 막내의 손에 쥐여 주었다⁠. 다섯 개였다⁠. 막내가 하나를 입에 넣었다⁠. 나는 손목을 보지 않았다⁠. 볼 여유가 없었다⁠.

*

반포 분수 앞에 닿은 것은 다섯 시 사십 분이었다⁠. 두억이 막내를 잔디 위에 눕히고 방망이로 어깨를 두드렸다⁠. 반포였다⁠. 막내의 숨이 길어졌다⁠. 크루원들이 교각과 편의점 앞에서 모여들었다⁠. 치과의사가 막내의 맥을 짚었다⁠.

“⁠괜찮습니다⁠. 맥이 고릅니다⁠. 열 시간쯤 자면 됩니다⁠.⁠”

나는 분수 난간을 잡고 서 있었다⁠. 난간이 이상하게 기울었다⁠. 아니⁠, 내가 기울고 있었다⁠. 귀 안에서 심장이 쿵쿵 뛰다가⁠,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손목이 떨렸다⁠. 시계 화면에 빨간 글씨가 떴다⁠.

「⁠저혈당 · 52⁠」

전날 점심 김밥 반 줄이 마지막이었다⁠. 회사⁠, 운동장⁠, 원룸⁠, 성북동⁠, 종로⁠, 한남대교⁠. 사탕은 막내 손에 다 있었다⁠. 페메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물속에서 들렸다⁠. 하늘이 분홍에서 하얗게 바뀌었다⁠.

*

눈을 뜨자 천장의 형광등이 보였다⁠. 흑석동 대학 병원 응급실이었다⁠. 왼팔에 링거 줄이 꽂혀 있었고⁠, 링거병에는 「⁠포도당⁠」이 적혀 있었다⁠. 위팔의 패치는 그대로 붙어 있었다⁠.

응급의학과 의사가 차트를 들고 침대 옆으로 왔다⁠. 마흔쯤 된 여자였고⁠, 눈 밑이 나보다 검었다⁠.

“⁠저혈당에 탈진이에요⁠. 근육 수치도 높아요⁠. 근육이 너무 많이 깨져서 피에 섞여 나온 거예요⁠. 조금 더 높았으면 콩팥까지 갈 뻔했어요⁠.⁠” 의사가 차트에 무언가를 적었다⁠. “⁠밤새 뭐 하셨어요⁠?⁠”

“⁠뛰었어요⁠.⁠”

“⁠얼마나요⁠?⁠”

“⁠성북동에서 반포까지요⁠. 그 전엔 일하고요⁠.⁠”

의사는 펜을 멈추고 나를 보았다⁠. 그리고 종이 한 장을 뜯어 침대 난간에 끼웠다⁠. 「⁠2주간 장거리 운동 금지 · 수분 섭취 · 재검 예약⁠」

“⁠두 주예요⁠. 걷는 것도 천천히⁠.⁠”

입동은 엿새 뒤였다⁠.

의사가 커튼 밖으로 나가자 휴대전화가 연달아 떨렸다⁠. 크루 단톡방이었다⁠. 처음 보는 속도로 말이 올라오고 있었다⁠.

「⁠예서 씨 괜찮습니까⁠. 응급실 수액은 보통 두 시간입니다⁠. 수액 끝나면 양치하세요⁠. 포도당은 치아에 남습니다⁠」 치과의사였다⁠. 밑에 치실 사진이 한 장 붙어 있었다⁠.

「⁠누나 저 열 시간 잤어요⁠. 크루장님이 기숙사 앞까지 업어다 줬어요⁠. 경비 아저씨가 크루장님 보고 신고하려고 했어요 ㅋㅋㅋ⁠」 막내였다⁠. 밑에 「⁠오운완⁠」 사진이 붙어 있었다⁠. 기숙사 침대에 누운 발바닥 사진이었다⁠.

「⁠예서 씨 물 많이 드세요⁠」 페메였다⁠. 한 줄이었다⁠. 일 분 뒤에 한 줄이 더 올라왔다⁠. 「⁠사탕 다 막내 준 거 봤어요⁠」

필라테스 강사가 박수 이모티콘을⁠, 은퇴한 수학 교사가 「⁠몸이 먼저입니다⁠」를⁠, 쌍둥이 자매가 같은 이모티콘을 동시에 보냈다⁠. 크루장은 휴대전화가 없어서 단톡방에 없었다⁠. 열하나가 크루장 없이 떠드는 방이었다⁠. 나는 화면을 끄지 않고 한참 들고 있었다⁠.

*

엄마는 오후 세 시에 왔다⁠. 대전에서 첫 기차를 놓치고 두 번째 기차를 탔다고 했다⁠. 엄마는 응급실 커튼을 걷자마자 내 손목부터 잡았다⁠. 시계를 보지 않고 맥을 짚었다⁠. 그리고 내 위팔의 패치를 손가락으로 쓸었다⁠.

“⁠숫자 보면서 이렇게 될 때까지 뛰었어⁠?⁠”

“⁠숫자 볼 틈이 없었어⁠.⁠”

“⁠그럼 왜 붙이고 다녀⁠.⁠”

엄마는 가방에서 홍시를 꺼냈다가⁠, 내 링거병을 보고 도로 넣었다⁠. 대신 보온병을 꺼냈다⁠. 시래깃국이었다⁠. 엄마는 국을 한 숟가락 떠서 내 입에 넣었다⁠. 응급실 옆 침대 할아버지가 부러운 눈으로 보았다⁠. 엄마는 할아버지에게도 한 숟가락을 건넸다⁠.

“⁠그만해⁠, 예서야⁠. 내기고 크루고 다⁠.⁠”

“⁠엄마⁠.⁠”

“⁠엄마는 네가 다리 열두 개 뛰다 쓰러지는 거 못 본다⁠. 엄마 인슐린 맞는 것도 너 대신 맞는 거라고 생각하고 맞았어⁠.⁠”

엄마는 국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손이 떨려서 국이 흘렀다⁠. 나는 엄마에게 끈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다섯 시면 발이 반포로 간다는 것을⁠, 엄마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

새벽 네 시 사십 분⁠, 발목이 먼저 깼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링거 줄이 팽팽해졌다⁠. 발이 바닥에 닿았고⁠, 슬리퍼를 찾지도 않고 걸음을 옮겼다⁠. 링거대가 바퀴를 굴리며 따라왔다⁠. 커튼을 걷고⁠, 간호사실을 지나⁠, 자동문 앞까지⁠. 간호사가 “⁠환자분⁠!⁠” 하고 불렀다⁠. 엄마가 보호자 의자에서 깨어 뛰어왔다⁠.

“⁠예서야⁠, 어디 가⁠!⁠”

“⁠엄마⁠, 나 못 멈춰⁠.⁠”

자동문이 열렸다⁠. 새벽 공기가 얼굴을 쳤다⁠. 반포까지 이 킬로미터였다⁠. 나는 링거대를 끌고 응급실 앞 비탈을 내려갔다⁠. 다리에 힘이 없어서 발이 앞서고 몸이 뒤따랐다⁠.

비탈 아래에 검은 후드가 서 있었다⁠.

두억은 나를 보고 다가와 링거대를 한 손으로 붙잡았다⁠. 다른 손으로 콩 주머니를 꺼냈다⁠. 콩 한 알이 왼손에서 오른손으로 건너갔다⁠.

“⁠출석⁠.⁠”

발목이 풀렸다⁠. 다리가 내 다리로 돌아왔다⁠. 나는 비탈에 주저앉을 뻔했고⁠, 두억이 내 겨드랑이를 받쳤다⁠. 엄마가 맨발로 비탈을 뛰어 내려와 두억의 팔을 쳤다⁠.

“⁠누구세요⁠? 우리 딸한테서 손 떼요⁠!⁠”

“⁠크루장입니다⁠.⁠”

엄마가 두억을 올려다보았다⁠. 엄마 머리가 두억의 가슴에도 닿지 않았다⁠. 가로등이 두억의 등 뒤에서 비쳤고⁠, 비탈 위에 그림자가 길게 누웠다⁠. 엄마는 그림자를 보았다⁠. 그림자 정수리의 뿔을 보았다⁠. 엄마는 뒷걸음질 치지 않았다⁠.

“⁠당신이 우리 딸 묶었어요⁠?⁠”

“⁠네⁠.⁠”

“⁠풀어요⁠. 지금⁠.⁠”

두억은 엄마에게 고개를 숙였다⁠. 깊이 숙였다⁠. 헝클어진 머리 위의 작은 뿔이 엄마 눈앞에 왔다⁠. 두억은 고개를 숙인 채로 내게 말했다⁠.

“⁠예서⁠. 너 하나는 오늘 푼다⁠. 내기는 접어라⁠. 입동에 안 뛰어도 된다⁠. 진 걸로 안 친다⁠.⁠”

엄마가 내 손을 잡았다⁠. 엄마 손이 시래깃국처럼 뜨거웠다⁠. 나는 엄마 손을 쥐고 두억을 보았다⁠.

“⁠막내는요⁠? 원장님은요⁠? 페메 님은요⁠?⁠”

“⁠너 하나다⁠.⁠”

“⁠그럼 안 풀래요⁠.⁠”

“⁠예서야⁠!⁠”

“⁠다 풀거나⁠, 아무도 안 풀거나요⁠. 하나만 풀어 주시면 저는 내일 분수 앞에 안 가요⁠. 끈이 없으니까요⁠. 그럼 다른 열하나는 크루장님이랑 영원히 다섯 시예요⁠.⁠” 나는 숨을 골랐다⁠. 들이쉬고 둘⁠, 내쉬고 둘⁠. “⁠입동에 뛸게요⁠. 크루장님 이기러요⁠.⁠”

두억이 고개를 들었다⁠. 엄마가 내 손을 놓지 않은 채 두억을 노려보았다⁠. 두억은 엄마를 보고⁠, 내 링거대를 보고⁠, 침대 난간에 끼워 두었다가 내 주머니로 옮겨 온 종이를 보았다⁠. 「⁠2주간 장거리 운동 금지⁠」

“⁠엿새 남았다⁠.⁠”

두억은 콩 주머니를 닫고 비탈을 내려갔다⁠. 엄마가 내 어깨에 담요를 덮었다⁠. 링거병 안에서 포도당이 한 방울씩 떨어졌다⁠. 하늘 끝이 밝아 오고 있었다⁠. 나는 여전히 묶여 있었다⁠.

9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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