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5,381자)

나라 끈, 도깨비 끈

새벽 러닝크루장이 도깨비였다 · 도결애

계도 첫날⁠, 분수 앞 잔디밭에 주황색 고깔이 둥글게 놓였다⁠. 고깔 사이에 노란 줄이 쳐졌고⁠, 줄에 코팅한 종이가 매달렸다⁠. 「⁠해 뜨기 전 단체 모임 금지 구역 · 한강공원⁠」 공원 관리원 둘이 무전기를 들고 줄 앞에 서 있었다⁠. 네 시 오십 분이었다⁠.

네 시 오십팔 분부터 크루가 하나씩 도착했다⁠. 필라테스 강사는 머리에 수건을 감은 채였고⁠, 새벽 배송 기사는 배송 조끼에 운송장 묶음을 든 채였고⁠, 공시생은 한 손에 단어장을 펴 들고 있었다⁠. 은퇴한 수학 교사는 잠옷 위에 코트를 걸쳤다⁠. 다들 줄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싶은 얼굴이었는데⁠, 발은 멈추지 않고 고깔 사이로 들어갔다⁠.

“⁠들어오시면 안 돼요⁠.⁠” 관리원이 팔을 벌렸다⁠.

“⁠알아요⁠. 저도 안 들어가고 싶어요⁠.⁠” 공시생이 고깔을 넘으며 말했다⁠. “⁠제 발한테 말씀하세요⁠.⁠”

다섯 시 정각⁠, 다리 밑에서 검은 후드가 걸어 나왔다⁠. 관리원이 무전기를 들었다⁠.

“⁠크루장님⁠. 오늘부터 계도입니다⁠. 해산해 주세요⁠.⁠”

“⁠다섯 시까지는 와야 한다⁠.⁠”

“⁠왜요⁠?⁠”

두억은 대답 대신 콩 주머니를 꺼냈다⁠. 관리원이 두억의 손목을 막았다⁠. 손목의 방망이가 관리원의 손등에 닿았다⁠. 관리원의 어깨가 푹 내려갔다⁠. 밤샘 근무를 끝낸 사람의 어깨였다⁠. 관리원은 무전기를 쥔 채 눈을 크게 떴다⁠.

“⁠…방금 뭐 하셨어요⁠?⁠”

“⁠네 어깨가 무거웠다⁠.⁠”

관리원이 무전기에 대고 무슨 말을 하려다 말았다⁠. 나는 고깔 사이로 들어가 두억과 관리원 사이에 끼어들었다⁠. 손목의 시계가 「⁠04⁠:59⁠」를 지나 「⁠05⁠:01⁠」을 띄웠다⁠.

“⁠나눠서 할게요⁠.⁠” 나는 관리원에게 말했다⁠. “⁠다섯 명 넘게 모이지 않으면 되잖아요⁠. 다섯씩 다른 데서 출석할게요⁠. 한 무리는 여기 분수⁠, 한 무리는 동작대교 교각⁠, 남은 사람은 편의점 앞⁠. 크루장님이 콩 들고 돌아다니시면 돼요⁠.⁠”

관리원은 두억을 보고⁠, 고깔을 보고⁠, 자기 어깨를 만졌다⁠.

“⁠…해 뜨기 전에 소리 지르지 마세요⁠. 메밀묵 통 버리지 마시고요⁠.⁠”

그날부터 크루의 출석은 세 군데로 갈라졌다⁠. 두억은 분수에서 콩 다섯 알⁠, 교각에서 콩 다섯 알⁠, 편의점 앞에서 콩 두 알을 옮겼다⁠. 열둘을 한자리에서 세지 못하게 되자⁠, 두억은 다섯과 다섯과 둘을 손가락으로 몇 번이고 다시 셌다⁠. 은퇴한 수학 교사가 옆에서 거들었다⁠. “⁠크루장님⁠, 다섯 더하기 다섯 더하기 둘은 열둘입니다⁠. 사십 년 가르친 제가 보증합니다⁠.⁠” 두억은 고맙다고 하고 손가락으로 한 번 더 셌다⁠. 막내가 영상을 찍으려다 말았다⁠. 휴대전화 화면에 좌장의 쪽지가 여전히 열려 있었다⁠.

편의점 앞 출석이 끝나자 페메가 라면 기계 앞에서 나를 불렀다⁠. 청계천에 다녀온 뒤로 페메가 나를 먼저 부른 것은 처음이었다⁠.

“⁠막내 쪽지 봤죠⁠.⁠”

“⁠봤어요⁠.⁠”

“⁠말려요⁠, 예서 씨⁠.⁠” 페메는 은박 그릇을 기계에 넣지 않고 손에 쥐고 있었다⁠. “⁠예서 씨가 내기를 걸어서 막내가 저러는 거예요⁠. 끈이 풀릴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되니까⁠, 기다리지 못하고 남의 손을 빌리는 거예요⁠.⁠”

“⁠페메 님이 묶어 달라고 해서 막내가 끈을 달고 군대에 가게 된 거예요⁠.⁠”

말이 먼저 나갔다⁠. 페메의 손에서 은박 그릇이 구겨졌다⁠. 페메는 구겨진 그릇을 펴려다가 그만두었다⁠.

“⁠맞아요⁠. 둘 다 맞아요⁠.⁠” 페메가 그릇을 쓰레기통에 넣었다⁠. “⁠그러니까 둘 다 말려야죠⁠. 저는 크루장님한테 말할게요⁠. 예서 씨는 막내한테 말하세요⁠.⁠”

“⁠크루장님한테 뭐라고요⁠?⁠”

“⁠막내 하나만 먼저 풀어 달라고요⁠. 입대 전에⁠.⁠” 페메가 깃발을 고쳐 꽂았다⁠. “⁠제가 묶어 달라고 했으니까⁠, 풀어 달라는 것도 제가 해야죠⁠.⁠”

페메는 교각 무리로 뛰어갔다⁠. 깃발이 다리 밑 어둠 속에서 파랗게 흔들렸다⁠. 나는 페메가 두억에게 무엇을 부탁할지 알았고⁠, 두억이 뭐라고 대답할지도 알았다⁠. 두억은 끈을 하나만 풀지 않는다⁠. 하나를 풀면 열하나가 나도 풀어 달라고 할 것이었다⁠. 내기를 건 날 내가 한 말이 그랬다⁠.

*

회사 회의실에 대표가 들어온 것은 팝업 개막 보름 전이었다⁠. 대표는 탁자에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화면에 막내의 영상이 떠 있었다⁠. 「⁠입동 새벽 다리 열두 개 · 결승선은 반포 분수⁠」

“⁠입동 새벽에 반포 분수 앞에서 시식 부스 엽시다⁠. 결승선 앞에서⁠. 「⁠먹는 순서가 있는 디저트⁠」⁠, 신입 러너가 들어오면 채소 칩부터 건네고⁠.⁠” 대표는 나를 보았다⁠. “⁠소예서 씨가 결승선에 들어오는 그 신입이죠⁠? 그림이 완벽해요⁠.⁠”

“⁠안 돼요⁠.⁠”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팀장이 탁자 밑에서 내 발을 툭 찼다⁠.

“⁠결승선은 행사장이 아니에요⁠. 크루가 걸린 내기예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오죠⁠. 걸린 게 있으니까⁠.⁠” 대표는 웃었다⁠. “⁠우리 디저트도 걸면 되잖아요⁠.⁠”

“⁠제가 결승선에 들어가는 순간 크루장님이 반포를 떠나요⁠. 원장님은 딸 결혼식에 가고⁠, 막내는 군대에 가고⁠, 페메 님은 방으로 돌아갈 수도 있어요⁠. 그 앞에서 채소 칩을 나눠 드릴 수는 없어요⁠.⁠”

대표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하는 얼굴로 팀장을 보았다⁠. 팀장이 헛기침을 했다⁠.

“⁠예서 씨가 요즘 운동을 좀 세게 해서요⁠.⁠”

회의가 끝나고 팀장이 나를 옥상으로 불렀다⁠. 팀장은 난간에 기대 자판기 커피를 두 잔 뽑았다⁠. 한 잔은 내 몫이었고⁠, 설탕이 빠진 블랙이었다⁠.

“⁠팝업 담당⁠, 다른 사람이 받기로 했어⁠. 예서 씨는 시식 준비만 해⁠.⁠” 팀장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대표님이 정한 거야⁠. 나는 말렸어⁠. 반만⁠.⁠”

“⁠반만요⁠.⁠”

“⁠나머지 반은 나도 이해가 안 가서⁠.⁠” 팀장은 컵을 난간에 올려놓았다⁠. “⁠예서 씨⁠. 그 사람들 예서 씨한테 뭐야⁠? 크루 들어간 지 두 달도 안 됐잖아⁠.⁠”

나는 블랙커피를 들여다보았다⁠. 대답할 말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친구라고 하기엔 아는 게 없었다⁠. 이름도 몰랐다⁠. 페메⁠, 원장님⁠, 막내⁠. 다들 직함과 별명으로만 서로를 불렀다⁠. 그래도 넉 달 뒤⁠, 한 해 뒤에 분수 앞에 페메와 원장님과 막내가 없다고 생각하면 커피가 목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새벽 다섯 시에 제 어깨를 알아보는 사람들이에요⁠.⁠”

팀장은 한참 나를 보다가 커피를 마저 마셨다⁠.

“⁠시식 준비 잘해⁠. 입동 날 아침엔 출근 안 해도 돼⁠. 연차 내⁠.⁠”

*

입동을 열흘 앞둔 주에 나는 아홉 번째 다리까지 밟았다⁠. 잠수교에서 시작해 동쪽으로⁠, 성수대교와 영동대교를 지나 잠실철교 북단까지⁠. 내기 길을 거꾸로 아홉 개였다⁠. 잠실철교 위를 지날 때 지하철이 옆으로 지나갔고⁠, 객차 창마다 졸고 있는 얼굴이 하나씩 실려 있었다⁠. 다리 끝에서 사탕을 깨물었다⁠. 그래프가 「⁠84⁠」에서 고개를 들었다⁠. 아홉이었다⁠. 남은 것은 셋이었고⁠, 내 다리는 아홉에서 바닥을 보였다⁠.

집에 돌아오자 엄마의 음성 메시지가 와 있었다⁠. 삼 분 사십 초짜리였다⁠.

“⁠예서야⁠, 메밀묵 쑤는 법⁠. 혹시 몰라서⁠. 메밀가루 한 컵에 물 여섯 컵⁠, 소금 조금⁠. 약한 불에서 나무 주걱으로 한 방향으로만 저어⁠. 반대로 저으면 묵이 풀어진다⁠. 이십 분은 저어야 돼⁠. 팔 아프다고 쉬면 눌어붙어⁠. 그리고 너 지라는 소리 아니다⁠. 이기면 엄마가 쑤어서 크루장님 갖다 드릴게⁠.⁠”

메시지 끝에 엄마의 걷기 모임 언니들이 뒤에서 외치는 소리가 섞여 있었다⁠. “⁠예서 화이팅⁠!⁠” “⁠나물 먹어⁠!⁠” 나는 메시지를 두 번 들었다⁠. 메밀가루 한 컵에 물 여섯 컵⁠. 이긴 다음에 쑬 묵인지 진 다음에 쑬 묵인지⁠, 엄마도 정하지 않은 목소리였다⁠.

*

막내는 대학 운동장 트랙에 있었다⁠. 체육교육과 실기 연습 시간이라고 했다⁠. 막내는 백 미터를 세 번 뛰고 나서 트랙 바깥 잔디에 드러누웠다⁠. 나는 옆에 앉았다⁠.

“⁠답장했어⁠?⁠”

“⁠아직요⁠.⁠” 막내는 하늘을 보고 있었다⁠. “⁠근데 할 거예요⁠.⁠”

“⁠좌장은 사람을 밤새 교각 돌리는 애들 대장이야⁠. 끈 끊어 준다는 거 믿지 마⁠.⁠”

“⁠누나⁠, 이길 확률이 이 할이래요⁠. 밤길 판에서 그렇게 걸었대요⁠. 누나가 지면 저는 논산에서 새벽마다 철조망 넘는 탈영병이에요⁠. 좌장은 지금 끊어 준대요⁠. 입대 전에⁠.⁠”

“⁠크루장님한테 부탁해 봐⁠. 너 하나는⁠…⁠…⁠.⁠”

“⁠해 봤어요⁠.⁠” 막내가 고개를 돌렸다⁠. “⁠크루장님이 그러셨어요⁠. 다섯 주면 짧다⁠, 탈영 안 하게 내가 논산까지 매일 새벽 가서 어깨를 두드리겠다⁠. 이백 킬로미터를요⁠. 매일요⁠. 그게 말이 돼요⁠?⁠”

나는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두억이라면 정말로 갈 것이었다⁠. 고무 냄새 나는 훈련소 연병장에 검은 후드가 새벽마다 나타나 콩을 한 알 옮기는 장면이 떠올랐다⁠. 막내도 같은 장면을 떠올렸는지 웃다가 멈췄다⁠.

“⁠누나도 크루장님도 저 위해서 그러는 거 알아요⁠. 근데 누나는 누나 내기를 하고⁠, 크루장님은 크루장님 크루를 지키잖아요⁠. 저는요⁠?⁠” 막내가 잔디를 한 움큼 뜯었다⁠. “⁠재수할 때 다들 정해 줬어요⁠. 학원은 여기⁠, 학교는 저기⁠, 과는 이거⁠. 재수 끝나니까 크루장님이 정해 줬어요⁠. 새벽 다섯 시엔 여기⁠. 저 스물이에요⁠. 하나쯤은 제가 정하고 싶어요⁠.⁠”

나는 스물에 무엇을 정했는지 떠올려 보았다⁠. 과는 점수가 정했고⁠, 회사는 합격 문자가 정했고⁠, 흑석동 원룸은 월세가 정했다⁠. 내가 정한 것은 사흘째에 그만두는 일뿐이었다⁠. 그만두는 것 하나만은 늘 내 손으로 정했다⁠.

“⁠좌장이 정해 주는 거잖아⁠, 그것도⁠.⁠”

“⁠제가 답장 누르는 거잖아요⁠.⁠”

막내는 휴대전화를 꺼내 화면을 보여 주었다⁠. 답장 칸에 「⁠네⁠」 한 글자가 쓰여 있었다⁠. 막내의 엄지가 보내기 단추 위에서 멈췄다⁠.

“⁠누나⁠, 막을 거예요⁠?⁠”

나는 막내의 손을 보았다⁠. 엄지를 누르지 못하게 붙잡을 수 있었다⁠. 휴대전화를 빼앗아 트랙 너머로 던질 수도 있었다⁠. 크루장이 내 어깨를 처음 두드렸을 때 내가 한 말이 떠올랐다⁠. 묻지도 않고 남의 몸에 손대지 마세요⁠.

“⁠안 막아⁠. 대신 위치 공유 켜 놔⁠. 나한테⁠.⁠”

막내는 위치 공유를 켰다⁠. 그리고 보내기를 눌렀다⁠. 「⁠네⁠」 옆에 숫자 일이 떴다가⁠, 바로 사라졌다⁠. 좌장은 막내 과 동기들과 달리 쪽지를 읽자마자 답했다⁠.

「⁠오늘 자정⁠. 기숙사 앞⁠. 대리 부를게⁠.⁠」

*

밤 열한 시 오십오 분⁠, 나는 원룸 책상에 휴대전화를 세워 두고 막내의 점을 보았다⁠. 파란 점은 대학 기숙사 위에 가만히 떠 있었다⁠. 같은 시각 페메에게 쪽지를 보냈다⁠. 사흘 만의 쪽지였다⁠. 「⁠막내가 좌장한테 끈 끊어 달라고 했어요⁠. 자정이에요⁠.⁠」 일 초 만에 숫자가 사라졌다⁠. 답은 오지 않았다⁠.

자정이 되자 점이 움직였다⁠. 기숙사를 나와 큰길로⁠, 큰길에서 북쪽으로⁠. 점은 강과 반대 방향으로 나아갔다⁠. 걸음 속도가 아니었다⁠. 자전거 속도였다가⁠, 다시 걸음 속도였다가⁠, 한 골목을 세 번 돌았다⁠.

나는 조끼를 입고 러닝화 끈을 두 번 감아 묶었다⁠. 원룸 문을 나서는데 휴대전화가 떨렸다⁠. 페메였다⁠.

「⁠크루장님 지금 잠실 쪽 다리 돌고 계세요⁠. 제가 연락할게요⁠. 예서 씨는 막내 점 따라가요⁠.⁠」

반포까지 뛰어가 공공 자전거를 뽑았다⁠. 흑석동 언덕을 내려가는 동안 막내의 점은 종로를 지나 북쪽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강에서 점점 멀어졌다⁠. 그리고 한 시가 되자⁠, 점이 처음으로 멈추고 돌기 시작했다⁠.

화면 위에서 파란 점이 작은 원을 그렸다⁠.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 원은 줄어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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