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5,331자)

빈 땅

새벽 러닝크루장이 도깨비였다 · 도결애

페메와 나는 사흘 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출석 콩이 돌면 페메는 앞 무리를 끌고⁠, 나는 뒤 무리 맨 끝에 붙었다⁠. 다섯씩 갈라지는 안내판 앞에서도 우리는 같은 다섯에 들지 않았다⁠. 크루 열둘이 모두 그것을 알았다⁠.

“⁠둘이 말 안 하니까 우리 크루 단톡방 조용해요⁠.⁠” 막내가 동작대교 반환점에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평소엔 페메 님이 「⁠오늘 바람 세요⁠」 올리고 누나가 「⁠심박 높아요⁠」 올렸잖아요⁠. 이제 원장님 치실 사진만 올라와요⁠.⁠”

“⁠치실 사진은 정보입니다⁠. 어제 건 어금니 사이 각도였어요⁠.⁠” 치과의사가 말했다⁠. “⁠두 분 사이에 끼는 것보다는 이 사이에 끼는 게 낫습니다⁠.⁠”

나는 웃지 않으려다 웃었다⁠. 앞 무리에서 페메의 깃발이 한 번 흔들렸다⁠. 웃음소리가 들렸는지 바람이 분 건지 알 수 없었다⁠.

*

새벽 한 시⁠, 휴대전화가 울렸다⁠. 「⁠고객님이 부르신 대리 기사가 도착했습니다⁠」 나는 대리를 부른 적이 없었다⁠. 차도 없었다⁠. 원룸 창밖을 내다보자 골목 가로등 아래 오토바이 헬멧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형광 「⁠대리운전⁠」 조끼가 가로등 빛을 받아 번쩍였다⁠.

“⁠좌장님이 보자셔⁠.⁠”

“⁠안 가요⁠.⁠”

“⁠안 오면 내일 반포에서 회사원 다섯을 돌려 볼까 하는데⁠. 분수 앞에서⁠. 해 뜰 때까지⁠.⁠”

나는 형광 주황 조끼를 입고 내려갔다⁠. 헬멧은 공공 자전거 두 대를 끌고 와 있었다⁠. 한 대를 내게 밀어 주며 말했다⁠. “⁠도깨비는 면허가 없어서⁠.⁠”

헬멧을 따라 한강을 건너고 도심으로 들어갔다⁠. 밤의 종로는 대낮처럼 밝은 골목과 불 꺼진 골목이 번갈아 나왔다⁠. 불 꺼진 골목마다 누군가가 같은 자리를 돌고 있었다⁠. 정장 차림의 남자가 전봇대를 돌았고⁠, 하이힐을 손에 든 여자가 편의점 앞 화단을 돌았다⁠. 돌고 있는 사람 곁에는 꼭 무언가가 쪼그려 앉아 있었다⁠. 헬멧 쓴 것⁠, 모자 쓴 것⁠, 우산 든 것⁠. 모두 사람 모양이었고⁠, 가로등 앞을 지날 때마다 그림자에 뿔이 솟았다⁠.

나는 편의점 앞에서 자전거를 세웠다⁠. 하이힐을 든 여자가 화단을 다섯 바퀴째 돌고 있었다⁠. 맨발 뒤꿈치가 빨갰다⁠. 내가 여자의 팔을 잡으려 하자 화단 옆에 앉아 있던 우산이 손을 들었다⁠.

“⁠손님 건드리지 마세요⁠. 지금 귀가 중이세요⁠.⁠”

“⁠이게 무슨 귀가예요⁠. 화단을 돌잖아요⁠.⁠”

“⁠집이 화단 너머에 있다고 생각하시는 중이에요⁠. 해 뜨면 진짜로 집 앞에 계실 거예요⁠. 저희가 서비스는 확실해요⁠.⁠”

헬멧이 뒤에서 내 자전거 안장을 툭 쳤다⁠. “⁠아가씨⁠, 늦으면 좌장님 기분 나빠지셔⁠.⁠” 나는 하이힐 여자의 손에 핫팩 하나를 쥐여 주고 페달을 밟았다⁠. 여자는 핫팩을 쥔 채 여섯 바퀴째로 들어갔다⁠.

청계천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가 황학동 근처 다리 밑에서 헬멧이 자전거를 세웠다⁠. 낮에는 중고 물건을 파는 골목이 가까운 자리였다⁠. 다리 밑 돌계단에 사람 모양의 것들이 서른쯤 앉아 있었다⁠. 맞은편 상가의 꺼진 광고판 하나에만 글자가 떠 있었다⁠.

「⁠입동 · 반포 · 두억 패 8 : 2⁠」

“⁠여기가 밤길 판이야⁠.⁠” 헬멧이 말했다⁠. “⁠서울 밤길 도깨비들은 다 여기 걸어⁠. 술 취한 사람⁠, 길 잃은 사람⁠, 막차 놓친 사람⁠. 누가 몇 바퀴 도는지 걸고 노는 데지⁠. 이번 판은 아가씨야⁠.⁠”

*

좌장은 돌계단 맨 위에 앉아 있었다⁠. 반포대교 밑에서 본 작은 노인이었다⁠. 검은 롱패딩⁠, 새하얀 운동화⁠, 접은 우산⁠. 좌장이 우산 끝으로 맞은편 계단을 가리켰다⁠.

“⁠앉아⁠, 아가씨⁠. 다리 아플 텐데⁠. 요즘 많이 뛰더라⁠. 청담에서 주저앉은 것도 봤어⁠.⁠”

나는 앉지 않았다⁠.

“⁠하실 말씀 하세요⁠.⁠”

“⁠사근사근하지 않네⁠. 두억이 닮아 가⁠.⁠” 좌장은 웃었다⁠. “⁠아가씨⁠, 다리 열두 개 해 뜨기 전에 못 뛰어⁠. 내가 봤어⁠. 여섯이 한계야⁠. 근데 내가 길을 접어 줄 수 있어⁠. 열두 개를 여섯으로⁠. 아가씨는 여섯만 뛰면 돼⁠. 두억이는 열둘을 다 뛰어야 하고⁠.⁠”

“⁠그런 게 돼요⁠?⁠”

“⁠밤길은 우리 거니까⁠. 사람들 밤새 같은 자리 돌게 하는 거나⁠, 아가씨 길을 반으로 접는 거나 같은 재주야⁠.⁠”

“⁠왜 저를 도와주세요⁠?⁠”

“⁠아가씨가 이기면 두억이가 반포를 뜨잖아⁠. 그럼 반포는 빈 땅이야⁠. 빈 땅엔 우리가 들어가⁠.⁠” 좌장은 우산을 무릎 위에 가로로 눕혔다⁠. “⁠반포 둔치는 서울에서 밤에 제일 사람 많은 강가야⁠. 자전거 타는 사람⁠, 술 마시는 사람⁠, 라면 먹는 사람⁠, 새벽에 뛰는 사람⁠. 지친 사람이 그렇게 많은데⁠, 천 년 동안 두억이 혼자 피곤을 덜어 주고 아침이면 집에 보냈어⁠. 아까워 죽겠어⁠.⁠”

“⁠들어가서 뭐 하시게요⁠.⁠”

“⁠돌리지⁠. 해 뜰 때까지⁠. 아침에 정신 들면 집 앞이야⁠. 다치는 사람은 없어⁠. 지각하는 사람은 좀 있겠지만⁠.⁠” 좌장의 목소리는 끝까지 부드러웠다⁠. “⁠사람이 밤새 헤매는 걸 보는 게 우리는 제일 재밌어⁠. 두억이는 촌스러워서 그걸 못 해⁠.⁠”

나는 광고판의 「⁠8 : 2⁠」를 보았다⁠. 내가 이기면 크루가 풀린다⁠. 크루가 풀리면 두억이 뜬다⁠. 두억이 뜨면 반포 둔치의 지친 사람들이 밤새 교각을 돈다⁠. 성수대교 벤치의 라이더가⁠, 영동대교 편의점 알바가⁠, 한남대교의 회사원이⁠.

“⁠길 안 접어 주셔도 돼요⁠.⁠”

“⁠그럼 지지⁠. 지면 아가씨는 평생 묶여⁠.⁠”

“⁠그럼 안 뛸게요⁠.⁠”

“⁠안 뛰면 그것도 진 거야⁠. 도깨비 내기는 건 사람이 물리면 진 거거든⁠.⁠” 좌장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가씨⁠, 어느 걸 골라도 우리는 손해가 없어⁠. 아가씨가 이기면 반포가 우리 거고⁠, 아가씨가 지면 아가씨는 두억이 거고⁠. 두억이 거면 언젠가 우리 거지⁠. 두억이도 천 년은 살았으니까⁠.⁠”

돌계단의 것들이 낄낄거렸다⁠. 광고판의 숫자가 「⁠8⁠.5 : 1⁠.5⁠」로 바뀌었다⁠.

*

다리 위에서 고무가 아스팔트를 미끄러지는 소리가 났다⁠. 계단 아래로 키 큰 그림자가 뛰어내렸다⁠. 검은 후드가 바람에 젖혀졌고⁠, 헝클어진 머리 위의 작은 뿔이 광고판 불빛을 받았다⁠. 두억은 숨 한 번 고르지 않고 계단 밑에 버텼다⁠.

“⁠남의 크루를 왜 데려왔냐⁠.⁠”

“⁠데려온 게 아니라 모신 거야⁠. 대리 기사가⁠.⁠” 좌장이 우산 끝으로 헬멧을 가리켰다⁠. “⁠두억아⁠, 오랜만이다⁠. 강 밖으로 나온 거 백 년 만이지⁠?⁠”

“⁠예서 데리고 간다⁠.⁠”

“⁠아가씨는 제 발로 왔어⁠.⁠”

“⁠회사원 다섯 돌리겠다고 했다며⁠. 그게 제 발이냐⁠.⁠”

좌장이 웃음을 거두었다⁠. 돌계단의 것들이 몸을 일으켰다⁠. 헬멧이 계단을 내려와 두억 앞에 버티고 서서 대리운전 조끼를 벗었다⁠.

“⁠씨름 한 판⁠. 이기면 데려가⁠.⁠”

두억은 대답 대신 후드를 벗어 내게 던졌다⁠. 둘은 청계천 돌바닥 위에서 서로의 허리춤을 잡았다⁠. 돌계단의 것들이 손뼉을 쳤고⁠, 광고판에 「⁠씨름 · 두억 패 6 : 4⁠」가 떴다⁠. 헬멧이 먼저 다리를 걸었다⁠. 두억은 한 발로 버티더니 헬멧의 허리를 들어 올렸다⁠. 헬멧이 공중에서 반 바퀴를 돌고 청계천 물에 엉덩이부터 떨어졌다⁠. 물이 튀어 광고판까지 올라갔다⁠.

광고판이 잠깐 꺼졌다 다시 켜졌다⁠. 「⁠씨름 · 두억 승⁠」

헬멧은 물속에 주저앉은 채 헬멧 유리를 올렸다⁠. 처음으로 얼굴이 보였다⁠. 사람 얼굴이었는데⁠, 코가 조금 길었다⁠.

“⁠천 년 묵은 거랑 백 년 묵은 거를 붙이면 어떡해요⁠, 좌장님⁠.⁠”

좌장은 우산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두억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두억아⁠, 아직 힘이 남았네⁠. 근데 그 힘⁠, 입동까지 남을까⁠? 다리 열두 개를 뛰면서 다리마다 멈춰서 남의 피곤을 줍겠지⁠. 너는 그거 못 참잖아⁠.⁠”

“⁠참을 일이 아니다⁠.⁠”

“⁠그래서 지는 거야⁠.⁠” 좌장의 목소리가 다시 사근사근해졌다⁠. “⁠반포가 빈 땅 되면 그때 보자⁠.⁠”

두억이 나를 보지 않고 좌장에게 말했다⁠.

“⁠천 년 전 반포 나루엔 끈이 없었다⁠. 사람들이 새벽마다 제 발로 강에 나왔다⁠. 배 띄우러⁠, 물 길러⁠, 그냥 강 보러⁠. 그런 사람들이 있는 땅은 빈 땅이 아니었다⁠. 너희도 못 들어왔지⁠.⁠”

“⁠그런 사람들⁠, 이젠 없어⁠.⁠” 좌장이 우산을 펼쳤다⁠. 비는 오지 않았다⁠. “⁠그래서 너도 묶었잖니⁠.⁠”

*

두억과 나는 청계천을 거슬러 걸었다⁠. 자전거는 두억이 한 손에 한 대씩 끌었다⁠. 동대문을 지날 무렵 내가 물었다⁠.

“⁠페메 님이 사흘 졸라서 묶으셨다면서요⁠.⁠”

“⁠사흘 졸랐다⁠.⁠”

“⁠그럼 크루장님도 사흘 만에 그만두신 거네요⁠. 안 묶겠다는 거⁠.⁠”

두억이 걸음을 멈췄다⁠. 한참 있다가 웃었다⁠. 입꼬리가 귀 밑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너 말 정말 밉게 한다⁠.⁠”

“⁠사흘이면 저도 그만둬요⁠. 근데 이번엔 사흘 넘겼어요⁠. 오늘로 서른하루째예요⁠.⁠”

두억은 다시 걸었다⁠. 자전거 바퀴 두 개가 나란히 돌았다⁠. 한강이 보이기 시작할 때 두억이 말했다⁠.

“⁠좌장 말 들었지⁠. 네가 이기면 반포가 빈 땅이 된다⁠.⁠”

“⁠들었어요⁠.⁠”

“⁠그래도 뛸 거냐⁠.⁠”

“⁠제 발로 나오는 사람이 있으면 빈 땅이 아니라면서요⁠.⁠”

“⁠천 년 전 얘기다⁠.⁠”

“⁠입동은 천 년 전이 아니잖아요⁠.⁠”

두억은 대답하지 않았다⁠. 둔치로 내려가는 계단에서 두억이 자전거를 세우고 강을 보았다⁠. 동작대교 너머로 하늘이 아직 검었다⁠.

“⁠천 년 전에 저기 나루에서 메밀묵 한 그릇을 얻어먹었다⁠.⁠”

“⁠누구한테요⁠?⁠”

“⁠뱃사공 마누라⁠. 이름은 모른다⁠. 새벽에 배 띄우기 전에 묵을 쑤던 여자였다⁠. 나는 그때 어린 도깨비였고⁠, 밤새 남의 길을 홀리다가 지쳐서 나루터에 쓰러져 있었다⁠. 여자가 묵 한 그릇을 놓고 갔다⁠. 아무것도 안 묻고⁠.⁠”

“⁠그게 다예요⁠?⁠”

“⁠그게 다다⁠. 그 뒤로 갚는 중이다⁠. 새벽마다 강에 나오는 사람들 피곤을 들어 주면서⁠.⁠” 두억은 손목의 방망이를 만지작거렸다⁠. “⁠도깨비는 갚은 걸 잊는다⁠. 잊어서 또 갚는다⁠. 그러다 보니 천 년이 갔다⁠.⁠”

“⁠천 년이면 다 갚으셨겠네요⁠. 메밀묵 한 그릇인데⁠.⁠”

“⁠갚았는지 안 갚았는지 받은 사람이 말해 줘야 아는데⁠, 받은 사람이 천 년 전에 죽었다⁠.⁠”

두억이 자전거 두 대를 대여소에 꽂았다⁠. 덜컥⁠, 덜컥⁠. 반납 소리가 강가에 두 번 울렸다⁠.

*

이튿날 새벽⁠, 출석 콩이 다 돌고 나서 페메가 두억 앞으로 나왔다⁠. 깃발을 등에서 뽑아 두 손으로 들고 있었다⁠.

“⁠크루장님⁠. 입동에 제가 크루장님 페이스메이커 할게요⁠. 처음부터 끝까지 옆에서 뛸게요⁠. 크루장님이 다리마다 멈추시면⁠, 제가 끌고 갈게요⁠.⁠”

“⁠나는 페이스메이커 필요 없다⁠.⁠”

“⁠필요하세요⁠. 좌장이 다리마다 지친 사람을 깔아 놓을 거예요⁠. 크루장님은 못 지나가시잖아요⁠.⁠” 페메는 깃발을 다시 등에 꽂았다⁠. 나를 처음으로 똑바로 보았다⁠. “⁠예서 씨⁠. 저 이번엔 예서 씨 속도 안 맞춰요⁠. 크루장님 속도 맞춰요⁠.⁠”

“⁠알아요⁠.⁠”

“⁠이기세요⁠, 예서 씨⁠. 이길 수 있으면요⁠.⁠”

페메가 앞 무리로 뛰어갔다⁠. 나는 깃발을 보며 뒤 무리 끝에 붙었다⁠. 동작대교 반환점에서 막내가 걸음을 늦추었다⁠. 휴대전화 화면을 보고 있었다⁠. 막내의 얼굴이 화면 불빛에 하얗게 떴다⁠.

“⁠누나⁠. 저 답장 안 했어요⁠. 아직요⁠.⁠”

막내가 화면을 내밀었다⁠. 화면을 쥔 엄지가 답장 칸 위에서 까딱거렸다⁠. 숏폼 플랫폼의 쪽지함이었다⁠. 보낸 계정의 사진은 접은 우산 하나였다⁠.

「⁠입대 전에 끈 끊어 줄까⁠? 논산까지 발이 안 따라가게⁠. 원하면 답장해⁠. — 좌장⁠」

7화는 어땠나요?

댓글 0

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