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5,345자)

가라

새벽 러닝크루장이 도깨비였다 · 도결애

“⁠안 접을게요⁠.⁠”

나는 우산 그늘 밖으로 한 걸음 나왔다⁠. 강바람이 다시 얼굴을 쳤다⁠.

“⁠접으면 크루장님 길이 아니에요⁠. 천 년 동안 밤마다 도신 길이요⁠. 그 길 반을 접어서 이기면⁠, 크루장님은 자기 길에서 진 게 아니잖아요⁠.⁠”

“⁠아가씨⁠, 지금 남의 길 걱정할 때야⁠?⁠”

“⁠제 길도 아니게 돼요⁠. 제가 엿새 동안 나물 먹고 만든 표에는 다리가 열두 개예요⁠.⁠”

좌장은 우산을 접었다⁠. 사근사근한 목소리에서 웃음기가 빠졌다⁠.

“⁠촌스럽긴⁠. 두억이 닮아 간다니까⁠.⁠”

좌장은 가지 않고 계단 난간에 기대 나를 내려다보았다⁠. 숫자가 올라오기를 같이 기다리는 얼굴이었다⁠.

“⁠아가씨가 이기면 내일모레부터 반포가 어떻게 될지 말해 줄까⁠? 분수 앞에서 회사원들이 해 뜰 때까지 돌아⁠. 라면 기계 앞에서는 술 취한 대학생들이 돌고⁠. 아침에 정신 들면 다 집 앞이야⁠. 아무도 안 다쳐⁠. 아무도 피곤을 덜지도 못하고⁠.⁠”

“⁠제 발로 나오는 사람이 있으면 빈 땅이 아니라면서요⁠.⁠”

“⁠그건 두억이 말이지⁠.⁠” 좌장이 웃었다⁠. “⁠천 년 전엔 그랬어⁠. 배 띄우는 사람⁠, 물 긷는 사람⁠. 지금은 다 묶어야 나와⁠. 묶은 끈 풀리면 다들 집에 있지⁠. 아가씨도 알잖아⁠. 가입할 때 뭐라고 썼는지⁠.⁠”

혼자 뛰기 무서워서요⁠. 나는 대답하지 않고 손목을 보았다⁠. 「⁠74⁠」였다⁠.

십오 분이 다 지나자 숫자가 「⁠78⁠」이었다⁠. 나는 일어났다⁠. 일곱 번째 다리를 향해 걷기 시작했을 때⁠, 손목 시계가 「⁠05⁠:00⁠」을 띄웠다⁠.

다리가 반포를 향해 끌려갔다⁠.

*

끈이 당기는 힘은 성북동에서 막내가 보여 준 그대로였다⁠. 발이 내 생각보다 반 박자 먼저 나갔다⁠. 무릎이 펴지기도 전에 다음 걸음이 앞에 있었다⁠. 반포는 결승선이었다⁠. 끈은 나를 결승선으로 끌고 있었다⁠.

치과의사가 자전거로 옆에 붙었다⁠. “⁠예서 씨⁠, 속도가 갑자기 붙었습니다⁠. 심박 백육십삼⁠.⁠”

“⁠끈이에요⁠. 다섯 시라서요⁠.⁠”

“⁠멈출 수 있습니까⁠?⁠”

“⁠못 멈춰요⁠. 대신 늦출 수는 있어요⁠.⁠”

나는 숨을 셌다⁠. 들이쉬고 둘⁠, 내쉬고 둘⁠. 발이 앞으로 끌려가면 몸을 뒤로 세우고⁠, 보폭을 줄였다⁠. 끈은 나를 끌었고⁠, 나는 끈의 박자 안에서 내 박자를 셌다⁠. 숫자가 「⁠158⁠」로 내려왔다⁠. 끈과 내가 나란히 걷는 꼴이었다⁠.

막내의 자전거가 내 옆에서 혼자 빨라졌다⁠. 막내가 브레이크를 쥐고 비명을 질렀다⁠. “⁠누나⁠, 저도 끌려가요⁠! 페달이 혼자 돌아요⁠!⁠” 막내는 다섯 시의 끈에 끌려 반포 방향으로 쭉 미끄러져 나갔다가⁠, 브레이크를 잡고 겨우 돌아왔다⁠. 치과의사는 자전거에서 내려 끌고 걷고 있었다⁠. 치과의사의 발도 반포를 향해 반 박자씩 빨랐다⁠. 끈에 묶인 사람은 모두 같은 방향으로 끌리고 있었다⁠. 결승선이었다⁠.

막내의 자전거가 앞에서 돌아왔다⁠. 헤드랜턴이 내 얼굴을 비췄다⁠.

“⁠누나⁠! 앞에 크루장님 따라잡았는데요⁠, 페메 님이 크루장님한테 누나 출석 부르라고 했어요⁠. 콩 하나 옮기면 누나 발이 멈춘다고⁠, 그럼 누나 못 쫓아온다고요⁠!⁠”

“⁠크루장님이 뭐래⁠?⁠”

“⁠안 부른대요⁠. 오늘은 출석 안 부른대요⁠. 내기라서요⁠.⁠” 막내가 숨을 헐떡였다⁠. “⁠페메 님이 울었어요⁠. 깃발 들고 우는데 속도는 안 늦췄어요⁠.⁠”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할 말이 목에서 넘어가지 않았다⁠. 콩 한 알이면 끝나는 내기였다⁠. 두억은 콩을 주머니에 넣어 둔 채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

일곱 번째 다리⁠, 청담대교⁠. 여덟 번째⁠, 영동대교⁠. 다리마다 누군가가 있었다⁠. 청담대교에는 교각을 도는 대학생 둘⁠, 영동대교에는 편의점 알바⁠. 두억은 다리마다 멈췄고⁠, 나는 다리마다 조금씩 가까워졌다⁠.

영동대교 한가운데에서 나는 두억을 지나쳤다⁠. 두억은 편의점 조끼를 입은 알바의 어깨를 두드리던 중이었다⁠. 페메가 깃발을 움켜쥔 채 나를 노려보았다⁠. 내가 지나칠 때 두억이 고개를 들지 않고 물었다⁠.

“⁠숫자 몇이냐⁠.⁠”

“⁠칠십팔이요⁠.⁠”

“⁠잘 세네⁠.⁠”

두억은 한마디만 던지고 알바의 어깨에서 방망이를 거두었다⁠. 알바가 기지개를 켜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고⁠, 금세 고무 밑창 소리가 나를 다시 지나쳤다⁠. 지나치면서 두억의 그림자가 다리 조명 아래 내 그림자와 잠깐 겹쳤다⁠. 뿔이 내 머리 위에 올라앉았다가 떨어져 나갔다⁠. 다리 위에서는 걸었다⁠. 끈이 걷는 발을 뛰는 발로 바꾸려 했지만⁠, 나는 둘을 세며 걸음을 지켰다⁠.

아홉 번째 다리⁠, 성수대교에서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이름이 아니었다⁠. 별명이었다⁠.

“⁠바나나 사장님⁠!⁠”

성수대교 남단 벤치에 배달 라이더가 앉아 있었다⁠. 한 달 전 바나나를 헬멧 옆에 놓아 주었던 라이더였다⁠. 라이더는 휴대전화를 흔들었다⁠. 화면에 막내의 실시간 영상이 떠 있었다⁠.

“⁠사장님 영상 보고 나왔어요⁠! 콜 다 끄고요⁠!⁠” 라이더가 벤치에서 일어나 내 옆에서 몇 걸음 같이 뛰었다⁠. “⁠여기 다리 밑에 저 같은 사람 많아요⁠. 다들 사장님 혈당 보고 있어요⁠. 칠십 밑으로 가면 멈추세요⁠!⁠”

라이더는 다리 초입에서 멈춰 손을 흔들었다⁠. 다리 밑 그늘에서 사람 몇이 고개를 내밀었다⁠. 야간 근무 조끼⁠, 편의점 조끼⁠, 대리운전 조끼⁠. 좌장이 깔아 놓은 사람들이 아니었다⁠. 제 발로 나온 사람들이었다⁠. 두억이 밤마다 어깨를 두드려 온 다리 밑 사람들이었다⁠.

사탕 하나를 깨물었다⁠. 아홉이었다⁠.

*

열 번째 다리⁠, 동호대교 한가운데에서 깃발이 쓰러져 있었다⁠.

페메가 다리 보도에 주저앉아 있었다⁠. 오른 종아리를 두 손으로 움켜쥐고 있었고⁠,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두억이 페메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깃발이 보도 위에 누워 「⁠4⁠:00⁠」을 하늘로 향하고 있었다⁠. 일 킬로미터에 사 분으로 두 시간을 뛴 다리였다⁠.

나는 멈췄다⁠. 끈이 나를 반포로 당겼고⁠, 나는 다리 난간을 잡고 버텼다⁠.

“⁠페메 님⁠.⁠”

“⁠쥐가 났어요⁠. 괜찮아요⁠.⁠” 페메가 이를 악물었다⁠. “⁠괜찮지 않아요⁠.⁠”

두억이 페메의 종아리를 손바닥으로 감쌌다⁠. 방망이로 어깨를 두드리지 않았다⁠. 쥐는 피곤이 아니었다⁠. 두억이 덜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두억은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동쪽 하늘이 붉게 번지기 시작했다⁠. 손목의 시계가 「⁠06⁠:31⁠」을 띄웠다⁠. 해 뜨는 시각까지 삼십사 분이었다⁠.

“⁠가라⁠.⁠”

“⁠크루장님은요⁠?⁠”

“⁠내가 업는다⁠.⁠”

“⁠업고 뛰면 크루장님 지세요⁠.⁠”

“⁠안다⁠.⁠”

두억은 페메를 등에 업으려고 페메의 팔을 제 어깨에 둘렀다⁠. 페메가 두억의 어깨 너머로 나를 보았다⁠. 눈물에 젖은 얼굴이었다⁠. 눈가가 접혔다⁠.

“⁠가요⁠, 예서 씨⁠. 가서 이겨요⁠.⁠” 페메가 숨을 들이켰다⁠. “⁠이길 수 있으면요⁠.⁠”

나는 난간을 놓았다⁠. 끈이 나를 당겼고⁠, 이번에는 내가 끈보다 먼저 발을 내디뎠다⁠. 등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면 멈출 것이었다⁠. 동호대교 남단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등 뒤에서 무거운 발소리가 다리를 울렸다⁠. 사람 하나를 업은 도깨비의 발소리였다⁠.

*

열한 번째⁠, 한남대교⁠. 남단에서 북단으로⁠. 다리 위의 바람이 맞바람이었다⁠. 나는 몸을 숙이고 걸었다⁠. 숫자가 「⁠74⁠」였다⁠. 사탕을 하나 먹었다⁠. 마지막 사탕이었다⁠. 막내가 자전거로 옆에 붙어 헤드랜턴을 껐다⁠. 하늘이 랜턴보다 밝았다⁠.

“⁠누나⁠, 크루장님 오고 있어요⁠. 페메 님 업고요⁠. 다리 반 뒤예요⁠. 근데 빨라요⁠. 업었는데 누나보다 빨라요⁠.⁠”

“⁠알아⁠.⁠”

“⁠동접 십만이에요⁠. 댓글이 다 「⁠가라⁠」예요⁠.⁠”

막내는 잠깐 말이 없다가⁠, 페달을 천천히 밟으며 물었다⁠.

“⁠누나⁠. 이기면 크루장님 진짜 가요⁠?⁠”

“⁠응⁠.⁠”

“⁠그럼 내일 새벽엔 누가 콩 세요⁠?⁠”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한남대교 북단이 가까워졌다⁠. 다리 끝 가로등이 하나씩 꺼지고 있었다⁠. 내일 새벽 다섯 시에 분수 앞에 콩을 셀 사람은 없었다⁠. 끈이 풀리면 다섯 시에 분수 앞에 올 사람이 있을지도 알 수 없었다⁠. 나는 그것을 다 알고 엿새 동안 나물을 먹었다⁠. 알고 뛰는 것과 모르고 뛰는 것은 다리가 다르게 무거웠다⁠.

열두 번째⁠, 잠수교⁠. 북단에서 남단으로⁠. 다리 난간 아래로 강물이 손에 닿을 만큼 가까웠다⁠. 강물에 분홍과 하늘색이 번져 있었다⁠. 잠수교 한가운데에서 고무 밑창 소리가 등 뒤로 다가왔다⁠. 다리 반이 다리 사분의 일이 되고⁠, 다리 사분의 일이 열 걸음이 되었다⁠. 두억의 숨소리가 들렸다⁠. 천 년 동안 밤마다 다리 열두 개를 돌던 도깨비의 숨이 처음으로 거칠었다⁠. 페메가 두억의 등에서 말했다⁠. “⁠크루장님⁠, 저 내려 주세요⁠. 걸을 수 있어요⁠.⁠” 두억은 내려 주지 않았다⁠.

잠수교 남단을 내려와 반포 둔치에 발이 닿았다⁠. 분수까지 백 미터였다⁠. 분수 앞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크루원들⁠, 구경꾼들⁠, 공원 관리원⁠, 그리고 맨 앞에 엄마⁠. 엄마가 두 손을 입에 모으고 있었다⁠. 무슨 말을 외치는지 들리지 않았다⁠.

다리가 꺾였다⁠.

끈이 당겨도 다리가 따라가지 못했다⁠. 무릎이 잔디 위에 떨어졌다⁠. 손바닥이 땅을 짚었다⁠. 손목의 시계가 「⁠63⁠」을 띄웠다⁠. 사탕이 없었다⁠. 귀에서 심장 소리가 멀어지려 했다⁠.

등 뒤에서 발소리가 멈췄다⁠.

두억이 내 옆에 있었다⁠. 페메를 잔디 위에 내려놓고⁠, 내 앞에 쪼그려 앉았다⁠. 두억은 분수를 보지 않았다⁠. 분수까지 백 미터였고⁠, 두억이라면 열 걸음이었다⁠. 두억은 손목의 방망이를 쥐었다⁠. 방망이가 내 어깨를 향해 다가오다가 멈췄다⁠.

“⁠건드리지 마세요⁠.⁠” 내가 말했다⁠. 말이 숨보다 작았다⁠.

“⁠안 건드린다⁠.⁠”

두억은 방망이를 내리고 손바닥을 내밀었다⁠. 손바닥 위에 포도당 사탕 하나가 놓여 있었다⁠. 치과의사의 봉지에서 나온 사탕이었다⁠. 언제 챙겼는지 알 수 없었다⁠.

“⁠이건 피곤 아니다⁠. 원장 거다⁠.⁠”

나는 사탕을 입에 넣었다⁠. 단맛이 혀를 덮었다⁠. 숨을 셌다⁠. 들이쉬고 둘⁠, 내쉬고 둘⁠. 두억도 나와 같이 셌다⁠. 둘보다 큰 수로는 세지 않았다⁠. 둘⁠, 둘⁠, 둘⁠. 심장이 귀에서 가슴으로 내려왔다⁠.

나는 일어났다⁠. 두억은 일어나지 않았다⁠. 페메 곁에 쪼그려 앉은 채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걸었다⁠. 뛰지 않았다⁠. 백 미터를 걸었다⁠. 엄마의 외침이 들리기 시작했다⁠. “⁠예서야⁠! 예서야⁠!⁠” 크루원들이 손뼉을 쳤다⁠. 막내가 휴대전화를 들지 않고 두 손을 흔들었다⁠. 치과의사가 빈 사탕 봉지를 머리 위로 흔들었다⁠.

분수 난간에 손바닥이 닿았다⁠. 쇠가 차가웠다⁠.

손목의 시계가 「⁠07⁠:01⁠」을 띄웠다⁠.

엄마가 나를 안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엄마 패딩 주머니에서 은박지 뭉치가 바스락거렸다⁠. 엄마는 나를 안은 채 은박지를 꺼내 내 손에 쥐여 주었다⁠. 나물만 넣고 만 김밥 한 줄이었다⁠. 밥은 맨 끝에 조금⁠. 나는 김밥을 쥔 채 엄마 어깨 너머로 백 미터 뒤를 보았다⁠.

강 끝에서 해가 올라온 것은 그로부터 사 분 뒤였다⁠. 해가 등 뒤에서 비쳤고⁠, 분수 앞 잔디 위에 그림자들이 길게 누웠다⁠. 엄마의 그림자⁠, 크루원들의 그림자⁠, 내 그림자⁠. 백 미터 뒤에서 뿔 하나 달린 그림자가 쓰러진 페메 곁에 무릎을 꿇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잠수교 난간 위에서 좌장이 우산을 펼쳤다⁠.

“⁠두억이 패⁠. 증인이 봤어⁠.⁠” 좌장의 목소리가 강을 건너왔다⁠. “⁠내일 해 뜨기 전까지 반포 비워⁠, 두억아⁠. 그다음엔 빈 땅이야⁠.⁠”

11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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