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5,548자)

제 발로

새벽 러닝크루장이 도깨비였다 · 도결애

두억은 콩 주머니를 거꾸로 들었다⁠.

분수 앞 잔디 위로 메주콩이 쏟아졌다⁠. 열두 알이었다⁠. 두억은 쪼그려 앉아 콩을 한 알씩 집어 크루원들에게 나눠 주었다⁠. 은퇴한 수학 교사에게 한 알⁠, 필라테스 강사에게 한 알⁠, 쌍둥이에게 한 알씩⁠, 새벽 배송 기사에게⁠, 공시생에게⁠. 콩을 받은 사람마다 발목을 한 번 내려다보았다⁠. 무언가가 풀린 사람의 얼굴이었다⁠. 아무도 기뻐하지 않았다⁠. 다들 손바닥의 콩을 오래 보았다⁠.

“⁠네 콩이다⁠.⁠” 두억이 치과의사에게 콩을 주었다⁠. “⁠멜버른 가라⁠.⁠”

“⁠표 사겠습니다⁠. 오늘요⁠.⁠”

“⁠네 콩⁠.⁠” 막내에게 주었다⁠. “⁠논산 가라⁠. 철조망 넘지 마라⁠.⁠”

“⁠크루장님이 넘어오시면 어떡해요⁠.⁠”

“⁠안 간다⁠. 이제 못 간다⁠.⁠”

두억은 페메 앞에 쪼그려 앉았다⁠. 페메는 종아리에 치과의사가 감아 준 붕대를 하고 잔디 위에 앉아 있었다⁠. 두억이 페메의 손바닥을 펴서 콩을 올려놓았다⁠. 페메의 손가락이 콩을 감싸지 못하고 떨렸다⁠.

“⁠처음 묶은 게 너다⁠. 마지막으로 푸는 것도 너다⁠.⁠”

“⁠크루장님⁠, 저⁠…⁠…⁠.⁠”

“⁠네가 정해라⁠.⁠”

마지막 한 알이 내 몫이었다⁠. 두억은 콩을 내 손바닥에 올려놓고 일어났다⁠. 발목에서 무언가가 미끄러져 나갔다⁠. 두 달 동안 다섯 시마다 나를 끌던 것이 사라진 자리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다리는 그대로 무거웠다⁠. 무거운 것은 내 피곤이었다⁠.

“⁠내일 해 뜨기 전까지 있는다⁠. 해 뜨면 간다⁠.⁠”

두억은 말을 마치고 다리 밑 그늘로 걸어갔다⁠. 손목의 방망이 열쇠고리가 팔찌 끝에서 흔들렸다⁠.

*

입동 날 나는 오후 두 시까지 잤다⁠. 두 달 만에 알람도 끈도 없이 잔 잠이었다⁠. 깨어 보니 온몸이 쑤셨다⁠. 계단을 내려갈 때는 옆으로 내려가야 했고⁠, 앉을 때는 의자 팔걸이를 짚어야 했다⁠. 다리 열두 개를 건넌 몸이 하루 늦게 비명을 질렀다⁠. 두억이 덜어 주지 않은 피곤이었다⁠. 전부 내 것이었다⁠.

단톡방이 쉬지 않고 떨렸다⁠. 막내가 이발소 의자에 앉은 사진을 올렸다⁠. 「⁠까까머리 실화 · 내일 논산 · 구독자 여러분 오 주 뒤에 뵙겠습니다⁠」 치과의사가 비행기 표 화면을 올렸다⁠. 「⁠멜버른 · 12월 첫 토요일 전날 출발⁠」 밑에 딸이 보낸 답장을 캡처해 붙였다⁠. 「⁠아빠 진짜 오는 거지⁠? 치실 챙겨 와⁠」 필라테스 강사는 아무것도 올리지 않았다⁠. 공시생은 「⁠열네 시간 잤습니다⁠」를 올렸다⁠. 페메는 하루 종일 아무 말이 없었다⁠. 저녁에 나는 페메에게 따로 쪽지를 보냈다⁠. 「⁠내일 다섯 시⁠, 저 가요⁠」 숫자 일이 사라졌다⁠. 답은 오지 않았다⁠. 묶어 달라고 사흘을 졸랐던 사람에게⁠, 오라고 조를 수는 없었다⁠.

엄마는 대전에 내려가지 않았다⁠. 저녁에 원룸 부엌에서 메밀가루 봉지를 뜯었다⁠.

“⁠이겼으니까 쑤어야지⁠. 크루장님 갖다 드린다고 했잖아⁠.⁠”

“⁠엄마가 쑤는 거 아니었어⁠?⁠”

“⁠네가 쑤어⁠. 엄마는 옆에서 본다⁠.⁠”

메밀가루 한 컵에 물 여섯 컵⁠, 소금 조금⁠. 약한 불에서 나무 주걱으로 한 방향으로만⁠. 이십 분을 저으라고 했는데⁠, 십 분이 지나자 팔이 쑤셨다⁠. 어제 다리 열두 개를 건넌 팔이었다⁠. 내가 주걱을 멈추자 엄마가 손등을 쳤다⁠.

“⁠쉬면 눌어붙어⁠.⁠”

“⁠엄마⁠, 나 팔도 피곤해⁠.⁠”

“⁠피곤한 팔로 저은 게 맛있어⁠.⁠”

이십 분을 저었다⁠. 냄비 바닥이 군데군데 눌었고⁠, 묵은 한쪽이 울퉁불퉁하게 굳었다⁠. 엄마가 묵을 반찬통에 옮겨 담으며 웃었다⁠. “⁠첫 묵은 다 이래⁠. 엄마 것도 이랬어⁠.⁠”

*

새벽 네 시⁠, 알람 없이 눈이 떠졌다⁠. 끈 때문이 아니었다⁠. 다리가 아파서였다⁠. 나는 형광 주황 조끼를 입고 검은 레깅스를 입었다⁠. 머리를 하나로 묶었다⁠. 메밀묵 반찬통을 가방에 넣었다⁠. 엄마는 자고 있었다⁠. 엄마 머리맡에 「⁠다녀올게⁠」 쪽지를 놓았다⁠.

러닝화 끈을 두 번 감아 묶었다⁠. 내 손으로⁠, 내가 아는 채로⁠.

반포 분수 앞은 캄캄했다⁠. 공원 계도 고깔은 치워져 있었다⁠. 다리 밑 조명 아래 벤치에 검은 후드가 앉아 있었다⁠. 두억은 콩 주머니 없이 빈손을 무릎 위에 얹고 있었다⁠. 나를 보고도 일어나지 않았다⁠.

“⁠왜 왔냐⁠. 끈도 없는데⁠.⁠”

“⁠다리가 아파서 잠이 깼어요⁠.⁠”

“⁠그럼 집에서 쉬지⁠.⁠”

“⁠쉬려고 했는데 발이 여기로 오더라고요⁠.⁠” 나는 벤치 끝에 앉았다⁠. “⁠제 발이요⁠. 이번엔⁠.⁠”

네 시 반이 되자 잔디밭 가장자리에 그림자들이 모였다⁠. 헬멧⁠, 모자⁠, 우산⁠, 그리고 맨 앞에 검은 롱패딩⁠. 좌장은 분수 계단 맨 위에 앉아 접은 우산을 무릎에 세웠다⁠. 밤길 도깨비 서른쯤이 좌장 뒤의 계단에 자리를 잡았다⁠. 반포를 차지하러 온 것들이었다⁠.

“⁠두억아⁠, 아직 있었네⁠.⁠” 좌장이 말했다⁠. “⁠해 뜨면 가는 거지⁠?⁠”

“⁠간다⁠.⁠”

“⁠그럼 다섯 시에 빈 땅 구경 좀 하자⁠.⁠” 좌장이 나를 보았다⁠. “⁠아가씨⁠. 혼자네⁠?⁠”

“⁠아직 다섯 시 아니에요⁠.⁠”

“⁠다섯 시 되면 뭐가 달라지는데⁠? 끈도 없는데⁠.⁠” 좌장의 목소리가 사근사근했다⁠. “⁠제 발로 오는 사람 있는 땅은 빈 땅이 아니라며⁠. 아가씨 하나로는 크루가 안 돼⁠. 혼자 뛰면 그냥 혼자 뛰는 사람이지⁠.⁠”

나는 손목을 보았다⁠. 「⁠04⁠:51⁠」 팔의 패치가 「⁠96⁠」을 보냈다⁠. 공복이었다⁠. 숫자는 좋았다⁠. 숫자는 아무것도 장담해 주지 않았다⁠.

두억이 벤치에서 나를 보지 않고 물었다⁠.

“⁠아무도 안 오면 어떡할 거냐⁠.⁠”

“⁠혼자 뛰어요⁠. 내일 또 오고요⁠.⁠”

“⁠사흘째엔⁠?⁠”

“⁠사흘째에도요⁠. 그다음은 저도 몰라요⁠. 해 본 적이 없어서요⁠.⁠”

*

다섯 시 정각⁠, 분수 앞에는 나 하나였다⁠.

계단의 것들이 낄낄거렸다⁠. 좌장이 우산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다리 밑에서 첫 버스 소리가 내려왔다⁠. 두억이 벤치에서 고개를 숙였다⁠.

다섯 시 일 분⁠, 계단 위에서 발소리가 났다⁠.

파란 깃발이 먼저 보였다⁠. 「⁠6⁠:30⁠」 페메가 붕대 감은 종아리로 한 계단씩 내려오고 있었다⁠. 난간을 잡고⁠, 한 발 내리고⁠, 다른 발을 붙이고⁠. 끈이 끌던 걸음이 아니었다⁠. 끈이 끌었다면 저렇게 느릴 리가 없었다⁠. 페메는 계단 맨 아래에서 숨을 고르고 잔디밭으로 걸어왔다⁠.

“⁠콩 받고 하루 종일 집에 있었어요⁠. 커튼도 쳤어요⁠.⁠” 페메가 깃발을 등에서 뽑았다⁠. “⁠네 시에 깼는데 아무도 저를 안 데려가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왔어요⁠.⁠”

“⁠다리는요⁠?⁠”

“⁠걸을 수 있어요⁠. 뛰는 건 예서 씨가 저를 깃발로 끌어 줘야 돼요⁠.⁠”

페메가 깃발을 내게 내밀었다⁠. 나는 받지 않고 페메의 손 위에 내 손을 얹었다⁠. 둘이 같이 쥐었다⁠.

계단 위에서 바퀴 소리가 났다⁠. 여행 가방이었다⁠. 치과의사가 가방을 끌고 내려왔다⁠. 한 손에 치실을 들고 있었다⁠. “⁠비행기는 열두 시입니다⁠. 그 전에 한 바퀴는 됩니다⁠.⁠” 뒤이어 까까머리가 내려왔다⁠. 막내는 입영 가방을 메고 있었다⁠. 헤드랜턴이 민머리 위에서 미끄러졌다⁠. “⁠아홉 시 기차예요⁠. 레전드 마지막 회 찍으러 왔어요⁠. 아⁠, 오늘은 안 찍어요⁠. 그냥 왔어요⁠.⁠”

은퇴한 수학 교사가 왔다⁠. 쌍둥이 중 하나가 왔다⁠. 남은 하나는 단톡방에 「⁠언니가 내 레깅스 입고 나감⁠」을 올렸다⁠. 필라테스 강사는 오지 않았다⁠. 공시생도 오지 않았다⁠. 새벽 배송 기사는 「⁠배송 끝내고 일곱 시에 갈게요⁠」를 올렸다⁠.

그리고 처음 보는 얼굴들이 왔다⁠. 형광 조끼를 벗고 러닝화를 신은 공원 관리원이었다⁠. 배달 오토바이를 계단 위에 세워 두고 헬멧을 손에 든 라이더였다⁠. “⁠바나나 사장님⁠, 저 오늘 콜 안 받아요⁠.⁠” 영동대교 편의점 조끼를 입은 야간 알바가 하품을 하며 내려왔다⁠. 영상을 보고 왔다는 대학생 넷이 쭈뼛거리며 잔디밭 끝에서 머뭇거렸다⁠. 나와 같은 혈당 패치를 위팔 바깥쪽에 붙인 여자도 하나 있었다⁠. 여자는 내 패치를 보고 제 팔을 들어 보였다⁠.

잔디밭에 사람이 열넷이 되었다⁠. 아무도 끈에 묶여 있지 않았다⁠.

공원 관리원이 안내판을 가리켰다⁠. 「⁠다섯 명 넘게 줄지어 달리지 마세요⁠」 우리는 군말 없이 다섯씩 갈라졌다⁠. 다섯⁠, 다섯⁠, 넷⁠.

좌장이 계단 위에서 우산을 내렸다⁠. 우산 끝이 계단을 톡 쳤다⁠. 사근사근한 목소리가 처음으로 갈라졌다⁠.

“⁠제 발로 온 것들이 이렇게 많으면 우리가 못 들어가지⁠.⁠”

“⁠네⁠.⁠”

“⁠몇 날이나 가나 보자⁠, 아가씨⁠. 사흘⁠? 아가씨 사흘이면 그만둔다며⁠.⁠”

“⁠보세요⁠.⁠” 나는 페메와 같이 쥔 깃발을 들었다⁠. “⁠사흘째에 또 오시면 되잖아요⁠.⁠”

좌장은 대답하지 않았다⁠. 우산을 펼쳤다⁠. 비는 오지 않았다⁠. 계단의 것들이 하나씩 몸을 일으켜 다리 밑 어둠으로 흩어졌다⁠. 헬멧이 마지막으로 남아 내게 손을 흔들었다⁠. “⁠아가씨⁠, 다음 판엔 내가 아가씨한테 걸게⁠.⁠” 헬멧도 사라졌다⁠.

*

출석은 누구도 부르지 않았다⁠. 페메가 깃발을 등에 다시 꽂았고⁠, 나는 페메 옆에 붙었다⁠. “⁠일 킬로미터에 육 분 삼십 초요⁠.⁠” 페메가 말했다⁠. “⁠아니⁠, 오늘은 칠 분이요⁠. 저 다리 아파요⁠.⁠” 열넷이 다섯씩 나뉘어 동작대교로 뛰었다⁠. 두억은 벤치에 앉아 있었다⁠. 뛰지 않았다⁠. 크루장이 아니었다⁠.

동작대교 교각 밑 반환점에서 페메가 강을 보았다⁠.

“⁠여기 옛날엔 나루였대요⁠.⁠”

“⁠알아요⁠.⁠”

돌아오는 길에 하늘이 밝아졌다⁠. 강 위에 분홍과 하늘색이 번졌다⁠. 분수 앞으로 돌아오자 두억이 벤치에서 일어나 있었다⁠. 아무도 어깨를 두드려 달라고 하지 않았다⁠. 다들 무거운 다리를 제 손으로 주물렀다⁠. 막내가 종아리를 두드리며 말했다⁠. “⁠와⁠, 리셋 없으니까 진짜 피곤하다⁠. 이게 원래 달리기구나⁠.⁠”

*

일곱 시⁠, 두억이 잠수교로 걸어갔다⁠. 나는 가방을 메고 따라갔다⁠. 잠수교 한가운데에서 두억이 멈췄다⁠. 강 끝에서 해가 올라오기 직전이었다⁠.

나는 가방에서 반찬통을 꺼냈다⁠. 뚜껑을 열자 울퉁불퉁한 메밀묵이 나왔다⁠. 한쪽이 눌어서 갈색이었다⁠.

“⁠엄마랑 쑤었어요⁠. 제가 저었어요⁠. 이십 분이요⁠. 팔 아파서 중간에 한 번 쉬었어요⁠. 그래서 눌었어요⁠.⁠”

두억은 반찬통을 받아 들고 오래 보았다⁠.

“⁠천 년 전에 나루에서 메밀묵 한 그릇 얻어먹고 지금까지 갚으셨다면서요⁠. 갚았는지 안 갚았는지 받은 사람이 말해 줘야 안다면서요⁠.⁠” 나는 숨을 골랐다⁠. 들이쉬고 둘⁠, 내쉬고 둘⁠. “⁠저 받았어요⁠. 두 달 동안⁠, 다섯 시마다요⁠. 제가 말할게요⁠. 다 갚으셨어요⁠. 이번엔 크루장님이 받으세요⁠.⁠”

두억은 손가락으로 묵 한 조각을 집어 먹었다⁠. 눌은 자리였다⁠. 천천히 씹었다⁠. 일곱 통을 오 분 만에 비우던 도깨비가⁠, 한 조각을 오래 씹었다⁠.

“⁠눌었다⁠.⁠”

“⁠네⁠.⁠”

“⁠맛있다⁠.⁠”

두억은 반찬통을 다 비웠다⁠. 빈 통을 내게 돌려주며 처음으로 내 어깨를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방망이가 아니었다⁠. 손바닥이었다⁠. 어깨는 가벼워지지 않았다⁠. 무거운 채로 따뜻했다⁠.

“⁠반찬통은 돌려줘야 한다더라⁠. 네 엄마 법이다⁠.⁠”

해가 올라왔다⁠. 두억은 잠수교를 건너 북단으로 걸어갔다⁠. 강을 따라 동쪽으로⁠, 다리 열두 개가 놓인 쪽으로⁠. 아침 해가 등 뒤에서 비쳐 잠수교 위에 그림자가 길게 누웠다⁠. 헝클어진 머리 위로 뿔 하나가 솟은 그림자였다⁠. 그림자는 점점 길어지다가⁠, 북단 끝에서 강변 둔치의 아침 그늘 속으로 들어갔다⁠.

나는 빈 반찬통을 들고 남단으로 돌아왔다⁠. 다리가 아파서 둔치로 내려가는 계단을 옆으로 내려갔다⁠. 주머니 속에서 콩 한 알이 걸음마다 굴렀다⁠. 분수 앞 잔디밭에서 페메가 깃발을 등에 꽂은 채 종아리를 주무르고 있었고⁠, 치과의사는 여행 가방 위에 앉아 막내의 민머리에 선크림을 발라 주고 있었다⁠. 막내가 따갑다고 소리를 질렀다⁠. 라면 기계 앞에서 일곱 시에 오겠다던 배송 기사가 배송 조끼를 입은 채 은박 그릇에 면을 넣고 있었다⁠. 파란 깃발이 웃음소리에 맞춰 흔들렸다⁠.

여기까지가 지금까지 나온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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