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5,382자)

서천 농협

예순 살의 가출 · 윤은류

일요일 아침 일곱 시⁠, 수옥과 교대한 두배가 할머니 방 문 앞 의자에서 졸고 있었다⁠. 나는 소파에서 일어나 담요를 갰다⁠. 태루가 방에서 나왔다⁠. 석 주 만에 아침까지 잔 얼굴이 부어 있었다⁠. 수옥은 할머니 침대 옆에서 죽을 식히고 있었다⁠. 손목 안쪽에 그릇을 대 보았다⁠.

할머니가 효자손으로 장롱 위를 가리켰다⁠.

“⁠수옥아⁠, 저 위에 반짇고리 내려라⁠.⁠”

수옥이 의자를 밟고 올라가 장롱 위에서 둥근 반짇고리를 내렸다⁠. 대나무로 엮은 뚜껑에 먼지가 쌓여 있었다⁠. 서천에서 시집올 때 가져온 것이라고 어머니가 말한 적이 있었다⁠. 열다섯 해 동안 장롱 위에 올라가 있어서 나는 반짇고리가 거기 있는 것조차 잊고 있었다⁠. 어머니가 손이 굳은 뒤로 바느질은 내가 했고⁠, 나는 내 바늘쌈지를 따로 썼다⁠.

“⁠다 들어와라⁠.⁠”

두배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넷이 다시 침대 발치에 모였다⁠. 어제 저녁상을 차렸던 자리였다⁠. 어머니가 반짇고리를 무릎에 올리고 뚜껑을 열었다⁠. 실패와 골무와 녹슨 바늘이 들어 있었다⁠. 어머니가 오른손을 넣어 실패들을 한쪽으로 밀어내고⁠, 바닥에 깔린 헝겊을 들어 올렸다⁠. 헝겊 밑에 고무줄로 묶은 통장 다섯 권이 있었다⁠. 맨 위 통장 겉에 「⁠서천 농협⁠」 글자가 바래 있었다⁠.

“⁠태루야⁠, 읽어라⁠. 맨 아래 숫자⁠.⁠”

태루가 통장 다섯 권을 받아 들었다⁠. 고무줄이 삭아서 손이 닿자마자 끊어졌다⁠. 태루가 맨 마지막 통장의 마지막 장을 펼쳤다⁠. 손가락으로 줄을 따라 내려갔다⁠. 태루의 입술이 숫자를 따라 움직이다 멈췄다⁠.

“⁠일억에서 조금 모자라요⁠.⁠”

두배가 숨을 들이켰다⁠.

“⁠엄마⁠.⁠”

“⁠니가 부친 거여⁠. 다달이 오십만 원⁠. 한 번도 안 빠졌어⁠. 설에도 추석에도⁠. 니 가게 안 되는 달에도⁠. 내가 그거 다 봤다⁠. 태루가 은행 문자를 읽어 주면 나는 숫자만 들었어⁠.⁠”

어머니가 통장 한 권을 집어 손바닥으로 쓸었다⁠.

“⁠한 푼도 안 썼다⁠. 이자만 붙었어⁠.⁠”

“⁠왜요⁠?⁠”

두배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누나 반찬값 하라고 부친 건데⁠. 누나한테 안 주고 왜요⁠.⁠”

“⁠니 누나 반찬값은 내 연금으로 됐어⁠. 니 돈은 따로 모았다⁠. 처음부터 쓸 데가 정해져 있었어⁠.⁠”

어머니가 나를 보고⁠, 두배를 보았다⁠.

“⁠종이 아랫단⁠. 십 년이 차면 나는 시설로 간다⁠. 그때 이 돈으로 가려고 했다⁠. 니가 갚은 돈으로 내가 시설에 가면⁠, 그게 니가 날 맡은 거여⁠. 두배가 내 일을 맡아라⁠. 그 말이 그 말이었다⁠. 니한테 기저귀 갈라고 쓴 거 아니여⁠. 니 돈으로 내 남은 날을 맡으라고 쓴 거여⁠.⁠”

방 안이 조용했다⁠. 수옥이 죽 그릇을 쥔 채 굳어 있었다⁠. 태루는 통장을 펼친 채 들고 있었다⁠. 나는 침대 난간을 잡았다⁠. 어머니는 열다섯 해 전 법무사 사무실 탁자에서 이 모든 걸 다 짜 놓았다⁠. 집은 나에게⁠, 돈은 두배에게⁠, 십 년 뒤의 계획은 종이 아랫단과 반짇고리 밑바닥에⁠. 그리고 십 년이 찼을 때⁠, 짜 놓은 판을 뒤집은 사람도 어머니였다⁠.

“⁠십 년 되던 해에 이 통장 꺼내서 두배한테 보여 줄라고 했다⁠. 근데 두배가 종이 들고 와서 시설 알아볼까요⁠, 하는데 내가 울었어⁠. 겁이 나서⁠. 그래서 반짇고리를 도로 덮었다⁠. 다섯 해 동안 안 열었어⁠.⁠”

어머니가 통장을 반짇고리에 다시 넣었다⁠. 뚜껑은 닫지 않았다⁠.

“⁠이제 연다⁠. 나는 고양에 간다⁠. 수옥이 니 엄마 병원에서 걸어서 십 분⁠. 창문이 호숫가로 났다며⁠. 이 돈으로 거기 간다⁠. 두배가 날 맡는 거여⁠. 늦었지만⁠.⁠”

*

두배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등이 장롱에 부딪혔다⁠. 장롱 문이 덜컹 울렸다⁠.

“⁠엄마⁠, 안 돼요⁠.⁠”

“⁠뭐가⁠?⁠”

“⁠그 돈 내 돈이에요⁠.⁠”

두배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수옥이 두배의 팔을 잡았다⁠. 두배가 팔을 뿌리쳤다⁠.

“⁠내가 열다섯 해 동안 카드 돌려 막아 가며 부친 돈이에요⁠. 장사 안 되는 달에는 수옥이 몰래 현금 서비스까지 받아서 부쳤어요⁠. 그 돈이 지금 일억 가까이 있으면 내 가게 살아요⁠. 캐피탈 갚고⁠, 애들 등록금 내고⁠, 가게 살아요⁠. 엄마는 시설 가고 나는 길바닥 가요⁠? 그게 엄마가 짠 판이에요⁠?⁠”

“⁠니가 나한테 갚은 돈이여⁠. 갚은 돈은 받은 사람 거여⁠.⁠”

“⁠엄마가 달라고 했어요⁠? 내가 알아서 갚은 거예요⁠. 엄마가 일억 주면서 이 돈 받고 알아서 살라고 했잖아요⁠. 갚으라고 안 했잖아요⁠. 내가 갚고 싶어서 갚은 거예요⁠. 맡겨진 적이 없으니까⁠, 갚기라도 하고 싶어서⁠.⁠”

두배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어제 새벽 부엌에서 한 말이 오늘 아침 어머니 방에서 다시 나왔다⁠. 어머니가 두배를 보았다⁠. 한참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이 돈은 니 가게에 안 간다⁠. 니 가게 살리면 니는 또 빚진다⁠. 니 무릎은 의사가 타일 그만하래며⁠. 무릎 없는 사람이 가게를 살려서 뭘 혀⁠.⁠”

“⁠그럼 나는요⁠!⁠”

“⁠수옥이⁠.⁠”

어머니가 수옥을 불렀다⁠. 수옥이 두배의 팔을 다시 잡았다⁠. 이번에는 두배가 뿌리치지 않았다⁠.

“⁠여보⁠, 가게 접어⁠.⁠”

수옥의 목소리가 낮고 단단했다⁠.

“⁠의사가 무릎 그만 쓰라고 했잖아⁠. 가게 접고 보증금이랑 차 팔면 캐피탈은 정리돼⁠. 내가 알아봤어⁠. 당신이 밤에 화장실에서 울 때 나 다 들었어⁠. 혼자 알아봤어⁠. 큰 인테리어 회사에서 현장 반장 구한대⁠. 무릎 덜 쓰는 일이래⁠. 당신 이름 걸린 가게는 없어지지만⁠, 당신 손은 남아⁠.⁠”

“⁠수옥아⁠.⁠”

“⁠어머님이 그 돈으로 우리 엄마 옆에 오시면⁠, 나는 이틀에 한 번 가던 길에 두 분을 같이 봐⁠. 당신은 토요일마다 같이 가고⁠. 그게 어머님이 당신한테 맡긴 거야⁠. 늦었어도⁠.⁠”

두배가 수옥을 보고⁠, 어머니를 보고⁠, 나를 보았다⁠. 마지막으로 나를 보았다⁠. 무언가를 바라는 눈이었다⁠. 누나가 편을 들어 주기를⁠, 열다섯 해 전 병원 복도에서처럼 누나가 다 맡겠다고 말해 주기를⁠.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두배가 수옥의 손을 떼어 내고 방을 나갔다⁠. 현관문이 쾅 닫혔다⁠. 계단을 뛰어 내려가는 발소리가 마흔두 번 났다⁠.

*

나는 택시를 탔다⁠. 허리에 손을 받치고 뒷자리에 앉아 일산 주소를 불렀다⁠. 두배의 승합차는 빌라 앞에 그대로 있었다⁠. 두배는 지하철을 탔을 것이고⁠, 지하철을 타면 가게까지 한 시간이었다⁠. 택시는 사십 분이면 갔다⁠. 나는 이십 분 먼저 도착해 가게 앞에서 기다렸다⁠.

택시 라디오에서 아침 뉴스가 나왔다⁠. 올해 문을 닫은 작은 가게가 지난해보다 늘었다는 소식이었다⁠. 기사가 라디오 소리를 줄이며 백미러로 나를 보았다⁠.

“⁠일산 상가 가세요⁠? 거기 요즘 빈 가게 많아요⁠.⁠”

“⁠동생 가게예요⁠.⁠”

“⁠아⁠, 장사는 잘되시고요⁠?⁠”

“⁠접을 거예요⁠. 아마도⁠.⁠”

기사가 한참 말이 없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가게 하다 접고 이거 몰아요⁠. 열두 해 하던 국숫집이요⁠. 접는 날 간판 떼면서 울었는데⁠, 떼고 나니까 살겠더라고요⁠. 간판이 사람을 붙잡고 있었어요⁠. 간판 떼면 사람이 내려와요⁠.⁠”

나는 창밖을 보았다⁠. 자유로 옆으로 한강이 넓게 흘렀다⁠. 회갑 날 아침 기차에서 본 한강과 같은 강이었다⁠. 그때는 내가 강을 건너 떠나는 중이었고⁠, 지금은 동생을 붙잡으러 강을 따라가는 중이었다⁠.

두배타일은 일산 구도심 상가 일 층에 있었다⁠. 유리문에 흰 시트지 글자로 「⁠두배타일 — 욕실 · 주방 · 베란다⁠」가 붙어 있었다⁠. 글자 몇 개의 귀퉁이가 들떠 있었다⁠. 유리문 안쪽에 캐피탈에서 보낸 등기 우편이 뜯지 않은 채 쌓여 있었다⁠. 셔터는 반쯤 내려와 있었다⁠.

두배가 지하철역에서 걸어왔다⁠. 나를 보고 걸음을 멈췄다⁠.

“⁠누나가 왜 여기 있어⁠.⁠”

“⁠택시 탔어⁠.⁠”

“⁠허리로⁠?⁠”

“⁠허리로⁠.⁠”

두배가 셔터를 끝까지 올리고 유리문을 열었다⁠. 가게 안에서 타일 냄새가 났다⁠. 시멘트 가루와 실리콘 냄새였다⁠. 벽에 타일 견본이 빼곡히 붙어 있었다⁠. 흰 타일⁠, 회색 타일⁠, 바다색 타일⁠. 두배는 가게 가운데 놓인 작업대에 걸터앉았다⁠. 나는 손님용 의자에 앉았다⁠. 손님이었다⁠.

“⁠누나⁠, 나 진짜 길바닥이야⁠.⁠”

“⁠알아⁠.⁠”

“⁠누나는 다 가졌잖아⁠. 바다도 있고⁠, 민박도 맡았고⁠, 엄마 미안하다는 소리도 들었고⁠.⁠”

“⁠나 집 내줬어⁠.⁠”

두배가 입을 다물었다⁠.

“⁠두배야⁠, 나 집 내줬어⁠. 열다섯 해 산 집⁠. 엄마한테 돌려줬어⁠. 그 집 갖고 있으면 내가 엄마 옆에서 못 떠나니까⁠. 니 가게도 그래⁠. 니 이름 걸린 가게 갖고 있으면 니는 무릎이 없어져도 여기서 못 떠나⁠.⁠”

두배가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가게 바닥에 회색 타일이 깔려 있었다⁠. 입구에서 세 번째 줄의 타일 하나가 다른 것들보다 조금 높았다⁠. 모서리가 살짝 들려 있었다⁠. 두배가 운동화 끝으로 들뜬 타일을 톡 건드렸다⁠.

“⁠이거 내가 처음 깐 타일이야⁠. 열아홉 해 전에⁠. 엄마가 준 일억으로 가게 얻고⁠, 바닥은 내가 깔았어⁠. 첫 장을 잘못 깔아서 수평이 안 맞았어⁠. 다시 깔려다가 그냥 뒀어⁠. 내 첫 장이니까⁠. 손님들이 걸려 넘어질 뻔하면 내가 말했어⁠. 이게 사장 첫 작품입니다⁠.⁠”

두배가 웃었다⁠. 웃으면서 울었다⁠.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두배 옆으로 가서 첫 타일을 내려다보았다⁠. 운동화를 벗었다⁠. 양말 신은 발로 들뜬 타일 모서리를 밟아 보았다⁠. 발밑에서 타일이 미세하게 덜컥였다⁠. 열아홉 해 동안 덜컥였을 소리였다⁠.

“⁠두배야⁠, 엄마가 너한테 처음 맡긴 일이야⁠. 종이 아랫단⁠. 엄마 남은 날⁠. 그거 하고 나서 서러우면⁠, 그때 나한테 서럽다고 해⁠. 내가 들어 줄게⁠. 손님으로⁠.⁠”

두배가 오래 대답하지 않았다⁠. 가게 밖으로 버스가 지나갔다⁠. 유리문이 떨렸다⁠. 두배가 작업대에서 내려와 유리문 앞으로 갔다⁠. 손톱으로 시트지 글자의 들뜬 귀퉁이를 긁었다⁠. 「⁠두⁠」 자 귀퉁이가 들렸다⁠. 두배는 귀퉁이를 잡고 천천히 당겼다⁠. 시트지가 유리에서 떨어지며 쩍 하는 소리를 냈다⁠. 「⁠두⁠」 자가 통째로 두배 손에 들렸다⁠.

“⁠누나⁠.⁠”

“⁠응⁠.⁠”

“⁠나머지는 내가 혼자 뗄게⁠. 누나는 가⁠.⁠”

나는 운동화를 다시 신었다⁠. 가게를 나서는데 등 뒤에서 시트지 떼는 소리가 하나 더 났다⁠. 「⁠배⁠」 자였다⁠.

*

밤 아홉 시⁠, 화곡동 빌라 초인종이 울렸다⁠. 나는 손님으로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태루가 문을 열었다⁠. 두배가 서 있었다⁠. 손에 둘둘 만 시트지 뭉치를 쥐고 있었다⁠. 두배가 신발을 벗고 곧장 할머니 방으로 들어갔다⁠. 나도 따라 들어갔다⁠.

어머니는 사극을 보고 있었다⁠. 아홉 시 사십 분까지는 끝나지 않는 사극이었다⁠. 두배가 리모컨을 집어 소리를 껐다⁠. 어머니가 두배를 노려보았다가⁠, 손에 든 시트지 뭉치를 보았다⁠.

“⁠엄마⁠.⁠”

“⁠말혀⁠.⁠”

“⁠그 돈으로 가세요⁠. 고양으로⁠. 제가 맡을게요⁠. 토요일마다 갈게요⁠. 수옥이 차 타고⁠.⁠”

어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길게 끄덕였다⁠.

“⁠그려⁠. 그럼 정했다⁠.⁠”

두배가 침대 발치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무릎 보호대 없는 무릎이 방바닥에 닿자 두배가 얼굴을 찡그렸다⁠. 어머니가 효자손으로 두배의 정수리를 한 번 톡 쳤다⁠. 그러고는 효자손 끝을 나에게 돌렸다⁠.

“⁠숙경이⁠.⁠”

“⁠응⁠.⁠”

“⁠니는⁠?⁠”

“⁠나는 강릉⁠.⁠”

“⁠알어⁠. 니는 강릉⁠. 근데 나 고양 들어가기 전에 한 가지만 혀라⁠.⁠”

어머니가 베개 밑을 더듬어 봉투를 꺼냈다⁠. 어제 내가 준 숙박권이었다⁠.

“⁠바다 보이는 방 이틀⁠. 손님 받아라⁠. 밥값은 내가 낸다⁠.⁠”

14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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