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5,367자)

파도 끝

예순 살의 가출 · 윤은류

십이월의 사천진 해변은 바람이 셌다⁠. 아침마다 나는 운동화를 벗어 들고 모래사장을 열 걸음 걸었다⁠. 열 걸음이 넘으면 발가락이 얼었다⁠. 열 걸음까지는 뒤꿈치가 아프지 않았다⁠. 강릉 정형외과 원장은 물리치료를 석 달 더 받으면 수술 이야기를 안 해도 되겠다고 했다⁠. 읍내 정형외과 접수대 간호사는 이제 내 얼굴을 보고 보호자가 오셨느냐고 묻지 않았다⁠. 혈압약은 하루도 빼먹지 않았다⁠. 내 약 시간을 내 휴대전화가 알려 주었다⁠. 「⁠조숙경 님⁠, 혈압약 드실 시간입니다⁠」 열다섯 해 동안 어머니 약 시간만 울리던 알람이었다⁠.

말춘은 십이월 첫 주에 서울로 올라갔다⁠. 아들이 흰 승용차를 몰고 내려와 이민 가방 두 개를 실어 갔다⁠. 말춘은 떠나기 전에 마루 기둥에 걸린 열쇠 꾸러미를 떼어 내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열쇠 일곱 개가 달린 꾸러미였다⁠. 방 다섯⁠, 대문⁠, 창고⁠.

“⁠이불 빨래는 읍내 세탁소⁠. 화요일에 걷으러 와요⁠. 보일러는 이 층 끝 방이 제일 먼저 식어⁠. 그 방 손님한테는 전기장판 줘요⁠.⁠”

“⁠사장님⁠.⁠”

“⁠이제 숙경 씨가 사장이지⁠. 나는 석 달짜리 손님이고⁠.⁠”

말춘이 웃으며 차에 올랐다⁠. 차가 골목을 빠져나가기 전에 창문이 내려갔다⁠.

“⁠마카 잘 지키시오⁠!⁠”

열흘 뒤 말춘에게서 영상이 왔다⁠. 네 살 손주가 거실에서 장난감을 늘어놓으며 「⁠마카 내 거⁠!⁠」라고 외치고 있었다⁠. 영상 밑에 말춘이 썼다⁠. 「⁠며느리가 서울 애한테 강릉 말 가르친다고 뭐라 해요⁠. 나는 모른 척하고 있소⁠」

호주 청년은 겨울을 나러 고향에 갔다⁠. 떠나기 전에 이불 일곱 채를 다 걷어 창고에 쌓아 주었다⁠. 지난주에 사진 한 장이 왔다⁠. 햇볕 쨍한 바닷가에서 반바지 차림으로 서핑 보드를 들고 있었다⁠. 「⁠보스⁠, 여기는 여름⁠」 나는 사진을 확대해 보았다⁠. 호주 바다도 파도 끝이 하얬다⁠.

골목 끝 호텔 부지에서는 공사가 시작되었다⁠. 가림막 너머로 굴착기가 땅을 파는 소리가 아침부터 났다⁠. 물빛민박은 굴착기 소리를 들으며 그대로 서 있었다⁠. 파란 함석지붕에 「⁠방 있음 · 장기 환영⁠」 종이가 붙어 있었다⁠. 종이를 새로 써 붙인 사람은 나였다⁠.

*

금요일 오후⁠, 회색 승합차가 골목으로 들어왔다⁠. 차 문에 붙어 있던 「⁠두배타일⁠」 시트지는 떼어지고 없었다⁠. 글자를 뗀 자리에 먼지가 덜 앉아서⁠, 차 문에 「⁠두배타일⁠」이 희미한 그림자로 남아 있었다⁠. 글자는 없는데 글자 모양은 보였다⁠.

두배가 운전석에서 내렸다⁠. 작업복 대신 새 회사의 회색 점퍼를 입고 있었다⁠. 가슴에 인테리어 회사 이름이 수놓여 있었다⁠. 두배는 다음 주 월요일부터 현장 반장으로 출근한다고 했다⁠. 가게는 지난주에 비웠다⁠. 보증금과 장비를 판 돈으로 캐피탈을 정리했다⁠. 열아홉 해 동안 깔아 둔 바닥 타일은 새로 들어올 세입자가 다 걷어 낸다고 했다⁠.

“⁠첫 장은⁠?⁠”

“⁠내가 떼 왔어⁠.⁠”

두배가 점퍼 주머니에서 회색 타일 한 장을 꺼냈다⁠. 모서리가 살짝 들린 타일이었다⁠. 시멘트가 뒷면에 붙은 채였다⁠.

“⁠엄마 요양원 방 문턱에 깔아 드리려고⁠. 원장이 허락했어⁠. 엄마가 넘어지지 않게 수평은 이번엔 맞출 거야⁠.⁠”

수옥이 조수석에서 내리며 웃었다⁠.

“⁠이 사람이 그 타일 들고 밤새 수평자를 들여다봤어요⁠.⁠”

태루가 뒷문을 열고 휠체어를 꺼냈다⁠. 태루는 일월 삼일부터 연수였다⁠. 어제 화곡동 빌라의 자기 방 짐을 반쯤 쌌다고 했다⁠. 빌라는 할머니가 고양으로 가시면 전세를 놓기로 했다⁠. 전세금은 할머니 이름으로 들어가고⁠, 할머니가 정한 대로 쓰기로 했다⁠.

두배가 어머니를 조수석에서 안아 내렸다⁠. 무릎 밑에 한 팔⁠, 등 뒤에 한 팔⁠. 어머니가 휠체어에 앉으며 선글라스를 이마에 올렸다⁠. 겨울인데 꽃무늬 스카프를 하고 있었다⁠. 스카프 위에 수옥이 털목도리를 한 겹 더 감아 주었다⁠.

“⁠손님 왔다⁠.⁠”

어머니가 마당을 둘러보았다⁠. 빨랫줄은 비어 있었고 평상 위에 전기장판이 개켜져 있었다⁠.

“⁠주인 양반은⁠?⁠”

“⁠서울 갔어⁠. 이제 내가 주인이야⁠.⁠”

“⁠니가⁠?⁠”

어머니가 나를 아래위로 한 번⁠, 다시 위로 한 번 보았다⁠.

“⁠주인 얼굴이 됐네⁠.⁠”

*

마루에서 숙박 카드를 받았다⁠. 손님 이름⁠, 인원⁠, 머무는 날⁠. 어머니 이름은 태루가 대신 썼다⁠. 「⁠마봉실 외 넷⁠, 이틀⁠」 다 쓰고 나서 어머니가 무릎 담요 밑에서 흰 봉투를 꺼냈다⁠.

“⁠밥값⁠.⁠”

봉투 겉에 볼펜 글씨가 있었다⁠. 획이 떨리고 줄이 비뚤었다⁠. 오른손으로 꾹꾹 눌러 쓴 글씨였다⁠. 열다섯 해 전 편지지의 글씨와 같은 손이었다⁠.

「⁠밥값 마봉실⁠」

나는 봉투를 받았다⁠. 봉투가 생각보다 두꺼웠다⁠. 열어 보지 않았다⁠. 강릉에 처음 온 날 말춘이 내 코트 주머니에 밀어 넣던 봉투가 떠올랐다⁠. 「⁠조숙경 일당⁠」 그날은 남이 내 이름을 쓰고 돈을 넣어 주었다⁠. 오늘은 어머니가 어머니 이름을 쓰고 나에게 돈을 건넸다⁠. 열다섯 해 동안 어머니에게서 나에게로 건너온 것은 집 하나와 「⁠나를 맡아 다오⁠」 한마디였다⁠. 돈이 반대로 건너오는 건 처음이었다⁠.

“⁠엄마⁠, 많아⁠.⁠”

“⁠바다 보이는 방이라며⁠. 바다값이여⁠.⁠”

“⁠바다는 공짜야⁠.⁠”

“⁠공짜 싫다며⁠. 공짜로 받으면 또 맡아야 한다며⁠. 나는 너한테 아무것도 안 맡길라고 낸다⁠.⁠”

나는 봉투를 앞치마 주머니에 넣었다⁠. 받는 손이 떨리지 않았다⁠.

*

저녁은 내가 끓인 감자옹심이였다⁠. 이번에는 내가 새알만 하게 빚었다⁠. 어머니가 한 숟갈 떠서 오래 오물거렸다⁠.

“⁠간이 맞네⁠.⁠”

“⁠말춘 씨한테 배웠어⁠.⁠”

“⁠숙경이 거가 남의 집 맛이 됐구먼⁠. 맛있다⁠.⁠”

설거지를 마치고 나니 태루가 마당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방파제를 따라 빨간 등대까지 걸었다⁠. 수옥과 걸었던 길이었다⁠. 겨울 방파제는 바람이 세서 태루가 내 바람막이를 해 주듯 바다 편에 서서 걸었다⁠.

“⁠엄마⁠, 나 가도 돼⁠?⁠”

“⁠어디⁠?⁠”

“⁠연수⁠. 그다음엔 지방⁠. 첫 발령이 어디일지 몰라⁠. 할머니 고양 가시면 나는 토요일에 못 갈 수도 있어⁠.⁠”

“⁠가⁠.⁠”

태루가 나를 보았다⁠.

“⁠엄마는 열다섯 해 동안 아무 데도 못 갔잖아⁠.⁠”

“⁠그러니까 너는 가⁠. 니가 못 가면 열다섯 해 뒤에 니가 회갑 날 기차 타⁠.⁠”

태루가 웃었다⁠. 등대 밑 난간을 잡고 한참 바다를 보다가 휴대전화를 꺼냈다⁠. 화면을 내 쪽으로 돌렸다⁠. 「⁠가족 지킴이 — 앱을 삭제하시겠습니까⁠?⁠」 태루가 내가 보는 앞에서 삭제 단추를 눌렀다⁠. 초록 아이콘이 흔들리다 사라졌다⁠.

“⁠엄마 위치 이제 안 봐⁠. 엄마가 어디 있는지는 엄마가 말해 줘⁠.⁠”

“⁠말할게⁠.⁠”

“⁠진짜⁠?⁠”

“⁠손님 받는 날은 민박⁠, 안 받는 날은 바다⁠. 물리치료 받는 날은 읍내⁠. 토요일 아닌 날에 한 번씩 고양⁠.⁠”

“⁠토요일은 왜 빼⁠.⁠”

“⁠토요일은 삼촌 날이야⁠.⁠”

태루가 고개를 끄덕였다⁠. 등대 위에서 불빛이 한 바퀴 돌았다⁠. 우리는 불빛이 세 번 돌 때까지 서 있다가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태루는 바다 편이 아니라 내 옆에서 걸었다⁠.

밤에 어머니는 이 층 맨 끝 방에서 주무시겠다고 했다⁠. 말춘의 시어머니가 십 년을 누워 있던 방이었고⁠, 내가 강릉에 와서 첫 밤을 잔 방이었다⁠. 두배가 어머니를 업고 계단을 올라갔다⁠. 수옥이 전기장판을 깔았다⁠. 태루가 기저귀 가방을 머리맡에 두었다⁠. 다들 각자 방으로 가고 나서 어머니가 효자손으로 방바닥을 두 번 두드렸다⁠. 땅⁠, 땅⁠. 나는 문지방에 서 있었다⁠.

“⁠기저귀 아니여⁠. 앉아⁠.⁠”

나는 어머니 머리맡에 앉았다⁠. 창밖으로 파도 소리가 일정하게 들어왔다⁠. 호텔 공사장 조명이 창유리에 희미하게 비쳤다⁠.

“⁠숙경아⁠.⁠”

“⁠응⁠.⁠”

“⁠십 년 되던 날 아침에 니 손이 따뜻했다고 했지⁠.⁠”

“⁠응⁠. 강릉 마루에서⁠.⁠”

“⁠거짓말이여⁠.⁠”

나는 어머니를 보았다⁠. 어머니는 천장을 보고 있었다⁠.

“⁠그날도 니 손 찼어⁠. 니 손은 열다섯 해 내내 찼어⁠. 하루에 손을 마흔 번씩 씻으니께⁠. 찬물로⁠. 더운물 아낀다고⁠. 나는 니 손이 차가운 거 다 알았어⁠. 그날 아침에 니 찬 손이 내 엉덩이에 닿는데⁠, 내가 겁이 나서 따뜻하다고 생각했다⁠. 따뜻하다고 생각해야 니를 붙잡을 수가 있었어⁠.⁠”

어머니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벽을 보지 않았다⁠. 얼굴을 보았다⁠.

“⁠니 손 차갑게 만든 거⁠, 나여⁠.⁠”

나는 어머니 손을 잡았다⁠. 어머니 손이 따뜻했다⁠. 전기장판 때문이었다⁠. 아니⁠, 전기장판 때문만은 아니었다⁠.

“⁠엄마⁠.⁠”

“⁠말혀⁠.⁠”

“⁠한 번만 해 줘⁠.⁠”

“⁠뭘⁠?⁠”

“⁠열다섯 해 동안 한 번도 안 한 거⁠.⁠”

어머니가 나를 오래 보았다⁠. 입술이 몇 번 움직였다가 닫혔다⁠. 회갑 날 아침처럼 벽으로 돌아누울 줄 알았다⁠. 어머니는 돌아눕지 않았다⁠. 내 얼굴을 보고⁠, 아흔 해 동안 가장 담담했던 목소리로 말했다⁠.

“⁠고맙다⁠, 숙경아⁠.⁠”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 대신 어머니 이불을 어깨까지 덮어 주었다⁠. 어머니가 눈을 감았다⁠. 나는 불을 끄고 방을 나왔다⁠. 밤새 나는 새벽 세 시에 깨지 않았다⁠. 강릉에 와서 처음이었다⁠.

*

이튿날 아침 바다는 맑았다⁠. 바람이 자서 파도가 낮았다⁠. 두배가 어머니를 업었다⁠. 수옥이 담요를 들고⁠, 태루가 접은 휠체어를 들고 뒤따랐다⁠. 나는 운동화를 벗어 들고 맨발로 앞서 걸었다⁠. 모래가 차서 발바닥이 저렸다⁠. 열 걸음이 넘었는데 나는 멈추지 않았다⁠.

두배가 모래에 발이 빠져 휘청였다⁠. 어머니가 두배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두배야⁠, 넘어지면 나 고양 안 가고 여기 묻힌다⁠.⁠”

“⁠안 넘어져요⁠, 엄마⁠.⁠”

“⁠니 무릎 의사가 그만 쓰랬다며⁠.⁠”

“⁠엄마 업는 데는 써도 된대요⁠.⁠”

두배의 귀가 빨갰다⁠. 거짓말이었다⁠. 어머니는 알면서 웃었다⁠.

물가에서 두배가 무릎을 꿇고 어머니를 모래 위에 앉혔다⁠. 수옥이 담요를 깔고⁠, 어머니 엉덩이 밑에 비닐을 한 겹 더 깔았다⁠. 모래 들어가면 기저귀에 들어간다는 어머니 말을 수옥도 들어서 알았다⁠. 태루가 휠체어를 펴 옆에 세웠다⁠. 나는 어머니 앞에 쪼그려 앉아 양말을 벗겼다⁠. 무언가를 드는 일이 아니었다⁠. 양말을 벗기는 일이었다⁠. 오른발이 먼저 나왔고⁠, 굳은 왼발이 나왔다⁠. 아흔 해를 걸은 발이었다⁠. 내 손바닥보다 작았다⁠. 발톱이 두껍고 뒤꿈치가 갈라져 있었다⁠. 서천 갯벌에서 바지락을 캐던 발이었다⁠.

두배가 어머니 겨드랑이를 받쳐 물가로 조금 더 당겼다⁠. 태루가 어머니 왼다리를 펴 주었다⁠. 나는 어머니 옆에 맨발로 앉았다⁠. 두 쌍의 발이 나란히 모래 위에 놓였다⁠.

파도가 밀려왔다⁠. 하얀 거품 끝이 모래를 타고 올라와 어머니 발가락에 닿고⁠, 내 발가락에 닿았다⁠.

“⁠어머⁠, 어머⁠!⁠”

어머니가 소리쳤다⁠. 회갑 날 오후 내가 냈던 소리와 같은 소리였다⁠. 물이 빠지면서 발밑 모래를 끌고 갔다⁠. 어머니가 간지럽다고 웃었다⁠. 웃음소리가 크게 났다⁠. 두배가 따라 웃었고⁠, 수옥이 웃었고⁠, 태루가 휴대전화를 꺼냈다가 도로 넣었다⁠. 찍지 않았다⁠.

다음 파도가 밀려왔다⁠. 이번에는 어머니가 놀라지 않았다⁠. 어머니는 굳은 왼발을 조금이라도 물에 더 담그려고 엉덩이를 들썩였다⁠. 두배가 어머니를 받쳤다⁠. 파도 끝이 어머니의 발목까지 올라왔다가⁠, 내 발목까지 올라왔다가⁠, 함께 빠졌다⁠. 빠지면서 두 사람의 발밑 모래를 같은 쪽으로 쓸어 갔다⁠. 어머니의 발과 내 발이 모래 속으로 조금씩 꺼졌다가⁠, 받쳐졌다⁠.

여기까지가 지금까지 나온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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