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5,305자)

일 위의 지목

소문 순위로 줄 세우는 강호 · 한빛결

새벽 사당 부엌에서 죽 끓는 냄새가 났다⁠. 쌀 반 됫박에 물을 여섯 바가지 부은 죽이었다⁠. 사부가 주걱으로 솥 바닥을 긁을 때마다 아이 다섯이 아궁이 앞에서 고개를 쭉 뺐다⁠. 앞니 빠진 아이는 사부의 무릎에 기대어 앉아 사부의 수염을 만지작거렸다⁠. 사부는 수염을 내주고 주걱을 놓지 않았다⁠.

“⁠할아버지 수염은 왜 하얘요⁠?⁠”

“⁠쌀을 너무 오래 기다려서 그렇다⁠.⁠”

아이들이 웃었다⁠. 목령은 부엌 문턱에 앉아 철검의 이 빠진 자리를 숫돌에 대고 있었다⁠. 숫돌에 물을 치는 손이 자꾸 멈췄다⁠.

고갯길에서 발소리가 뛰어 올라왔다⁠. 숨이 끊어질 듯한 발소리였다⁠. 목령은 숫돌을 내려놓았다⁠.

산문 앞에 백리현이 서 있었다⁠. 흰 비단옷이 아니라 밤에 입던 무명옷 그대로였고⁠, 허리까지 오는 은백색 머리가 묶이지 않은 채 땀에 젖어 등에 붙어 있었다⁠. 부채도 없었다⁠. 리현은 산문 안쪽 부엌에서 죽을 기다리는 아이들의 뒤통수를 보고서야 기둥을 짚고 허리를 굽혔다⁠. 한참 숨만 쉬었다⁠.

“⁠원주가⁠.⁠” 리현이 숨 사이로 말했다⁠. “⁠새벽에 그릇을 셌네⁠. 다섯이 모자랐어⁠. 원주가 처음으로 애들 앞에서 울었네⁠.⁠”

목령은 일어났다⁠. 리현이 허리를 폈다⁠. 리현의 얼굴에서 웃음이 다 빠져 있었다⁠. 목령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자네 진실이 애들 저녁을 먹었네⁠.⁠”

“⁠내가 산 거라고 말했소⁠. 사저 이야기가 거짓이 안 되게⁠.⁠”

“⁠알아⁠. 자네는 옳았네⁠.⁠” 리현의 목소리가 낮고 고르게 떨렸다⁠. “⁠진실은 옳지⁠. 그런데 진실이 누구 밥그릇에서 먼저 덜어 가는지 아나⁠? 제일 작은 그릇부터야⁠. 쌀 상인은 손해 안 보고⁠, 방주는 판을 새로 짜고⁠, 자네는 열한 위로 내려가도 산 위에 사부가 있지⁠. 우리 애들은 물만 먹었네⁠.⁠”

목령은 대답하지 못했다⁠. 부엌 안에서 죽 끓는 소리가 났다⁠. 아이 하나가 리현을 보고 공자님⁠, 하고 불렀다가 리현의 얼굴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그럼 어쩌라는 거요⁠.⁠” 목령이 겨우 말했다⁠. “⁠다시 거짓말을 하라는 거요⁠?⁠”

“⁠아니⁠. 비무를 하자는 거네⁠.⁠”

*

리현은 산문 기둥에 등을 기댔다⁠. 숨이 가라앉자 목소리도 가라앉았다⁠. 늘 하던 느긋한 말투가 반쯤 돌아와 있었다⁠.

“⁠방이 생기기 전 강호에 관례가 하나 있었네⁠. 일 위는 제 상대를 직접 지목할 수 있다⁠. 열 위 밖이든 백 위 밖이든⁠.⁠” 리현이 산 아래를 보았다⁠. 아침 안개 사이로 장강제일객잔 지붕과 비무대 꼭대기가 보였다⁠. “⁠방주가 만든 조건은 방주의 조건이고⁠, 관례는 강호의 것이네⁠. 방주도 관례는 못 물려⁠. 물리면 방이 관례보다 위라는 말이 되거든⁠. 그럼 무림맹이 가만있지 않지⁠.⁠”

“⁠왜 나요⁠?⁠”

“⁠비무가 없으면 아무도 안 먹어⁠.⁠” 리현이 목령을 보았다⁠. “⁠쌀 상인은 비무가 열리면 다시 오겠다고 했네⁠. 내가 진짜로 이기면 산 일 위가 진짜 일 위가 되고⁠, 쌀이 돌아오지⁠. 자네가 이기면⁠.⁠” 리현이 잠깐 말을 멈췄다⁠. “⁠자네가 이기면 쌀은 자네한테 가겠지⁠. 그래도 비무가 없으면 쌀은 아무 데도 안 가⁠.⁠”

“⁠산문은 어차피 닫히오⁠.⁠”

리현의 눈이 커졌다⁠. 목령은 사부가 쌀가마니 속 종이에 도장을 찍었다는 말을 짧게 했다⁠. 리현은 부엌 안의 사부를 보았다⁠. 사부는 죽을 그릇에 나눠 담고 있었다⁠. 들으면서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럼 자네는 잃을 게 없군⁠.⁠” 리현이 천천히 말했다⁠.

“⁠잃을 게 없는 사람이 제일 무섭다고 사부가 그랬소⁠.⁠”

“⁠어르신 말씀은 늘 맞으시군⁠.⁠” 리현이 산문 기둥에서 등을 뗐다⁠. 아이들을 불렀다⁠. 아이들이 죽 그릇을 든 채 몰려나왔다⁠. 리현은 아이들 머리를 하나씩 쓰다듬고⁠, 앞니 빠진 아이를 안아 올렸다⁠. “⁠다 먹고 내려가자⁠. 어르신께 고맙다고 하고⁠.⁠”

아이를 안은 채 리현이 목령에게 말했다⁠.

“⁠정오에 대청으로 오게⁠. 지목은 상대가 앞에 있어야 하네⁠.⁠”

*

아이들을 데리고 고갯길을 내려가는 동안 리현은 앞니 빠진 아이를 내려놓지 않았다⁠. 다른 아이들은 목령의 소매를 하나씩 붙잡고 걸었다⁠. 소매가 모자라서 둘은 참새의 보따리 끈을 잡았다⁠. 고갯길 바위 위의 그림쟁이가 붓을 들었다가⁠, 리현과 눈이 마주치자 붓을 내려놓았다⁠. 리현이 웃으며 말했다⁠. 그려도 되네⁠, 다만 애들 얼굴은 그리지 말게⁠.

은선문 대문 앞에서 원주가 기다리고 있었다⁠. 눈이 붉었고⁠, 앞치마는 새것으로 갈아입은 뒤였다⁠. 원주는 아이들을 혼내지 않았다⁠. 대문을 들어서는 아이들의 머리를 하나씩 손바닥으로 짚으며 입속으로 셌다⁠. 마지막 아이를 들여보내고 원주가 목령을 보았다⁠.

“⁠그릇 세어 달라고 했지⁠. 이기면⁠.⁠”

“⁠아직 안 이겼소⁠.⁠”

“⁠그래도 세어 줘⁠. 오늘 아침은 내가 못 세겠다⁠.⁠”

목령은 부엌 선반에서 엎어 둔 밥그릇을 내려 마당의 아이들 손에 하나씩 쥐여 주었다⁠. 쥐여 줄 때마다 입속으로 셌다⁠. 그릇마다 물기가 남아 있었고⁠, 받는 손마다 크기가 달랐다⁠. 앞니 빠진 아이는 그릇을 받자 머리 위로 들고 배고프다⁠, 하고 외쳤다가 원주의 눈치를 보고 내렸다⁠. 원주는 문턱에 서서 목령의 손을 보았다⁠. 선반이 다 빌 때까지 목령은 셌다⁠.

“⁠백이오⁠.⁠”

“⁠백이네⁠.⁠” 원주가 앞치마에 손을 닦았다⁠. “⁠그럼 됐다⁠. 그릇이 백이면 애들이 백이야⁠. 쌀은 그다음이다⁠.⁠”

원주가 큰솥 뚜껑을 열었다⁠. 솥 안에 청송문에서 사부가 싸 보낸 보리쌀 한 됫박이 불어 있었다⁠. 사부가 목령 모르게 아이들 품에 쥐여 보낸 것이었다⁠.

*

정오의 대청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바구니는 아침에 새로 짠 것으로 바뀌어 있었고⁠, 맨 앞줄은 비어 있었다⁠. 바람잡이들이 앉던 자리에 아무도 앉지 않으려 했다⁠. 손님들은 빈 앞줄을 사이에 두고 뒤에 몰려 서서 서로 눈치를 보았다⁠.

리현은 흰 비단옷을 다시 입고 왔다⁠. 금실 무늬 깃을 바로 여몄고⁠, 허리까지 오는 은백색 머리를 위에서 조금 묶었다⁠. 손에는 먹 그림 접부채를 펴 들었다⁠. 대청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오는 리현의 얼굴에 웃음이 다시 붙어 있었다⁠. 목령은 산문 앞에서 본 얼굴을 기억했다⁠. 웃음은 리현이 입는 또 한 벌의 옷이었다⁠.

방주가 계단 위에서 찻주전자를 들고 내려다보았다⁠.

“⁠공자⁠, 무슨 일이오⁠?⁠”

“⁠옛 관례를 쓰러 왔습니다⁠.⁠” 리현이 부채를 접고 대청 문간의 목령을 가리켰다⁠. “⁠일 위 은선문 백리현은 한가위 비무의 상대로 청송문 단목령을 지목합니다⁠. 열한 위든 백 위든⁠.⁠”

대청이 숨을 멈췄다⁠. 모두가 방주를 올려다보았다⁠. 방주는 찻잔에 차를 따르고 한 모금 머금었다⁠. 오래 굴렸다⁠. 삼켰다⁠.

방주가 웃었다⁠.

“⁠좋다⁠.⁠” 방주가 계단을 내려왔다⁠. “⁠관례는 관례지⁠. 지목받은 사람은 물릴 수 없고⁠, 지목한 사람도 물릴 수 없다⁠.⁠” 방주는 대청 한가운데에 서서 손님들을 둘러보았다⁠. “⁠다들 들으셨소⁠. 이제 한가위 비무는 혼례 비무도 아니고⁠, 일 위 지키기 비무도 아니오⁠. 산 일 위와 산 삼 위가 붙소⁠. 둘 다 산 승리를 가졌소⁠. 비무대 위에서 누가 진짜인지 가리는 비무요⁠.⁠”

손님들이 웅성거렸다⁠. 방주가 찻잔을 높이 들었다⁠.

“⁠진짜를 가리는 비무⁠! 일곱 고을 추천 탁자⁠, 오늘부터 청송문 이야기를 다시 하시오⁠. 비무대는 서른 자로 올리시오⁠.⁠”

대청이 터졌다⁠. 손님들이 엽전을 던지기 시작했다⁠. 앞줄이 비어 있어서 아무도 먼저 던지지 않았고⁠, 그래서 다들 제각각 던졌다⁠. 누구는 너무 일찍 던졌고 누구는 너무 늦게 던졌다⁠. 엽전이 바구니에 떨어지는 소리가 빗소리처럼 고르지 않고 우박처럼 들쭉날쭉했다⁠. 「⁠청송문⁠」 바구니와 「⁠은선문⁠」 바구니에 거의 비슷하게 떨어졌다⁠. 목령은 바구니를 보았다⁠. 엽전 하나가 바구니 테에 맞고 튀어 목령의 발치까지 굴러왔다⁠. 목령은 줍지 않았다⁠.

참새가 대청 문간에서 목령 옆으로 왔다⁠. 오늘 아침 산에서 함께 내려온 참새였다⁠. 참새가 목령의 귀에 대고 말했다⁠.

“⁠봤지⁠? 방주는 쓴맛이 나면 바로 단맛을 섞어⁠. 막을 수가 없어⁠.⁠”

*

대청이 가라앉을 무렵⁠, 계산대 끝에서 국수를 먹던 사내 하나가 그릇을 내려놓았다⁠. 잿빛 도포에 삿갓을 썼고⁠, 아까부터 아무도 사내를 눈여겨보지 않았다⁠. 사내가 국숫값을 계산대에 올려놓았다⁠. 엽전과 함께 손바닥만 한 구리 패가 놓였다⁠. 주방장이 패를 보고 국자를 떨어뜨렸다⁠. 패에는 「⁠무림맹⁠」 세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사자 어른⁠.⁠” 방주가 계단 앞에서 허리를 굽혔다⁠. 처음으로 방주의 찻주전자가 기울어 차가 바닥에 흘렀다⁠. “⁠한가위 전날 오신다고⁠.⁠”

“⁠소문이 빨라서 나도 하루 빨리 왔소⁠.⁠” 무림맹 사자가 삿갓을 벗었다⁠. 마흔 남짓한 얼굴이었고⁠, 표정이 없었다⁠. “⁠국수가 맛있구려⁠. 국물이 진하오⁠.⁠”

사자는 대청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빈 앞줄을 보고⁠, 새로 짠 바구니를 보고⁠, 문간의 목령과 대청 한가운데의 리현을 보았다⁠.

“⁠무림맹은 내년 강남 호위 일감을 방의 차례로 돌릴지⁠, 비무로 정할지 아직 정하지 않았소⁠.⁠” 사자가 삿갓을 다시 들었다⁠. “⁠이번 한가위를 보고 정하겠소⁠. 나는 비무대 아래에서 보겠소⁠. 위에 앉을 자리는 필요 없소⁠.⁠”

사자는 문간을 지나다 목령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목령의 걷어붙인 소매와 팔뚝의 굵은 매듭을 보았다⁠.

“⁠만두 서른 개⁠?⁠”

“⁠서른이오⁠. 삼백 아니고⁠.⁠”

“⁠맹에 온 쪽지에는 삼천이었소⁠.⁠” 사자의 얼굴은 여전히 아무 표정이 없었다⁠. “⁠세 고을을 더 건넜나 보오⁠.⁠”

사자는 객잔을 나갔다⁠. 방주는 바닥에 흘린 차를 내려다보았다⁠. 점원이 걸레를 들고 달려왔다⁠. 방주는 걸레를 받아 제 손으로 닦았다⁠.

*

밤⁠, 백리현은 삼 층 방의 찻상 앞에 앉았다⁠. 방주가 부른 자리였다⁠. 창가의 새장에서 비둘기들이 쉬지 않고 울었다⁠. 오후 내내 일곱 고을로 쪽지가 오갔다⁠.

방주는 차를 우리지 않았다⁠. 찻상 위에 접힌 종이 한 장을 올려놓았다⁠. 붉은 도장이 찍혀 있었다⁠. 리현은 종이를 알아보았다⁠. 은선문 찬장 맨 위에 세 해 동안 있던 종이와 똑같은 종이였다⁠.

“⁠판돈이 뒤집혔다⁠.⁠” 방주가 말했다⁠. “⁠참새 이야기 뒤로 손님들이 막내한테 건다⁠. 오늘 오후에만 열에 일곱이 막내 쪽으로 갔어⁠. 진짜는 막내고 너는 산 일 위라는 거지⁠.⁠”

“⁠그래서요⁠.⁠”

“⁠그래서 이번엔 네가 이겨야 맛이 난다⁠.⁠” 방주가 종이를 리현 앞으로 밀었다⁠. “⁠이기면 이 종이를 태워 주지⁠. 세 해 묵은 쌀 빚이 없어진다⁠. 쌀 상인들도 돌아오고⁠, 애들도 먹고⁠.⁠”

리현은 종이에 손을 대지 않았다⁠. 손목에 감은 천이 비단 소매 밖으로 조금 나와 있었다⁠.

“⁠산 승리입니까⁠?⁠”

“⁠아니⁠. 이번엔 안 산다⁠. 막내는 못 사⁠. 너도 알잖아⁠.⁠” 방주가 찻주전자를 화로에 올렸다⁠. “⁠너는 진짜로 이겨⁠. 나는 비무대를 조금 거들 뿐이야⁠. 서른 자 높이에 널이 몇 장인데⁠, 그중 한 장쯤 말을 안 들어도 누가 알겠나⁠.⁠”

물이 끓기 시작했다⁠. 방주가 차를 우렸다⁠. 첫 물은 버렸다⁠. 두 번째 물을 잔에 따라 리현 앞에 놓았다⁠.

“⁠마셔⁠. 단맛이야⁠. 네가 다섯 해 마신 맛⁠.⁠”

리현은 찻잔을 보았다⁠. 종이를 보았다⁠. 은선문 부엌에서 원주가 처음으로 울었다는 새벽을 생각했다⁠. 리현은 종이를 접은 채로 집어 품에 넣었다⁠. 찻잔에는 손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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