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5,012자) · 경로당의 밤
취하서
규칙이 매일 바뀌는 민원실 · 오세림
월요일 오후 두 시 사십 분. 문달수 씨가 왔다.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봉투에서 종이를 꺼냈다. 이번에는 계약서가 아니었다.
서식 제이십칠호. 민원 취하서.
“취하요?”
“그렇소. 반려된 거 다 취하하오. 서른두 번 치.”
나는 서식을 받았다. 양식이 맞았다. 편람에 이 서식 옆에 주석이 달려 있다. 본 서식의 사용 사례는 극히 드묾. 규정집에 드물다고 적힌 서식을 실제로 받아 보는 사람이 되는 것은 좀 이상한 기분이었다.
“반려된 건 취하하실 필요가 없어요. 이미 반려된 거라.”
“기록이 남잖소. 서른두 번 신청했다는 기록. 그게 남아 있으면 조합이 싫어하오.”
그는 점퍼 안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더 꺼냈다. 누런 봉투에 들어 있던 것. 조합 명의 합의서. 본인은 성원연립 에이 동 백일 호를 이달 삼십일까지 인도하며, 주거이전비 등 일체의 보상 청구를 포기한다. 합의금 일백만 원. 서명란은 비어 있었다.
“이거 쓰면 소송은 안 한다고 하오. 백만 원 주고. 이사비지. 쓸 거요. 오늘 저녁에.”
“어르신, 공람공고일이 다음 달 십오일이에요. 그 전에 에이 동으로 전입만 되면 주거이전비 받으세요. 넉 달 치 생활비 기준이에요. 백만 원이 아니라.”
“알아요. 그 전에 전입이 되겠소? 서른두 번 안 됐는데.”
그는 봉투에서 마지막으로 종이 뭉치를 꺼냈다. 손글씨였다. 두께가 손가락 한 마디. 창구 유리 아래로 밀어 넣었다.
“이게 내 기록이오.”
나는 그것을 받았다. 날짜와 요구 서류와 반려 사유. 서른두 장. 한 장에 한 번. 작년 이월 첫 화요일부터. 글씨가 반듯하고 컸다. 눈이 어두운 사람이 크게 쓴 글씨. 내 노트와 같은 내용이었다. 다만 이쪽이 일 년 더 길었다. 그리고 마지막 줄마다 한 문장이 붙어 있었다. 반려 사유 아래, 괄호 안에.
첫 장. 담당 아가씨가 울었다. 내가 소리를 질러서.
둘째 장. 담당 아가씨가 또 울었다. 나는 이번엔 소리 안 질렀다.
일곱째 장. 담당이 바뀌었다. 새 아가씨가 처음부터 다시 설명했다.
열여섯째 장. 담당이 또 바뀌었다. 새 총각이 편람을 뒤지다 팀장한테 불려 갔다.
서른두째 장. 됐다고 했다. 그리고 안 됐다. 새 아가씨는 안 울었다. 팀장한테 키보드를 뺏겼다.
나는 서른두째 장에서 손을 멈췄다. 종이 끝이 손가락에 닿는 감촉이 거칠었다. 몇 번을 넘겨 본 종이였다.
“어르신, 첫 장.”
“아, 그거.”
문달수 씨가 무릎을 한 번 쓸었다.
“처음 왔을 때 원본을 가져오라고 합디다. 두 달 뒤에 원본을 가져왔더니 사본만 받는다고 하더이다. 그때 나는 화를 냈소. 창구 유리를 쳤소. 주 사무장처럼. 그랬더니 그 아가씨가 우는 거요. 그 아가씨가 정한 게 아니잖소. 그 아가씨도 아침에 와서 그걸 봤을 거요. 그다음부터는 화를 안 냈소. 대신 세기 시작했지. 그게 서른두 장이오.”
“이걸 왜 저한테 주세요.”
“아가씨도 몇 달 하고 나갈 거 아니오. 다들 그랬소. 나갈 때 이거 다음 사람한테 주시오. 그럼 그 사람은 처음부터 안 해도 되오.”
그는 일어섰다. 의자를 밀어 넣었다. 서른세 번째.
“취하서는 받아 주시오.”
“안 받을게요.”
그가 나를 봤다.
“서른두 번이 다 없던 게 되잖아요. 어르신이 그러셨잖아요. 세면 안 억울하다고. 취하하면 센 게 없어져요.”
나는 서른두 장을 내 노트 위에 올려놓았다. 노트에는 서른세 줄. 합치면 한 권이었다.
“어르신 거랑 제 거 합쳐서 이 년이에요. 이 년 치 기록이면 뭘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백만 원보다는 무거울 거예요. 오늘 저녁에 합의서 쓰지 마세요. 저 이따 연립에 갈게요. 다른 분들도 만나고 싶어요. 같은 모양인 분들.”
문달수 씨는 한참 창구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취하서를 도로 봉투에 넣었다. 합의서도.
“일곱 시에 연립 경로당. 서른 집 다는 안 올 거요. 반은 벌써 썼으니까.”
오후 네 시, 윤 팀장이 내 자리 옆을 지나가다 멈췄다. 책상 위에 서른두 장이 펼쳐져 있었다. 첫 장. 담당 아가씨가 울었다. 내가 소리를 질러서. 윤 팀장은 그 줄을 오래 봤다.
“이거 그 어르신 거예요?”
“네.”
“첫 장 날짜가 작년 이월이네요.”
“네.”
“그때 3번 창구 담당이 은지 씨였어요. 신규. 울면서 나한테 왔어요. 팀장님, 이 화면 왜 바뀌어요. 나는 모른다고 했어요. 그 주에 은지 씨 구청으로 전보 올렸고요. 좋은 데로.”
윤 팀장은 서른두 장 가운데 한 장을 손가락 끝으로 조금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조심스럽게. 남의 물건을 만지는 손으로.
“미소 씨는 안 울더라고요.”
“울 시간에 적어요.”
그는 대답하지 않고 갔다. 가다가 한 번 돌아봤다.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저녁 일곱 시, 성원연립 경로당. 비 동 일 층 구석방. 형광등 하나가 깜빡였다. 벽지에 누수 얼룩이 지도처럼 번져 있었다. 방석 위에 사람이 열여섯 앉아 있었다. 대부분 예순 넘은 얼굴. 젊은 부부 하나가 아기를 안고 있었다. 고 주임이 따라왔다. 퇴근길이라고 했다. 퇴근길이 반대 방향인데. 커피를 두 잔 들고. 하나를 문달수 씨에게 줬다.
나는 방석 한가운데에 표를 펼쳤다. 사람들이 무릎걸음으로 다가왔다. 노랑 줄. 서른 명. 삼백열두 번. 그리고 누리집 공고. 공람공고일 시월 십오일. 공람공고일 현재 구역 안 주민등록 세입자는 주거이전비 대상.
“여러분 다 같은 경우세요. 이 년 전 누수 보수 때 같은 연립 안에서 호수를 옮기셨고, 새 호수로 전입이 안 되셨어요. 비 동 뒤쪽 절반이랑 씨 동은 이번 구역 밖이에요. 옛 주소로 남아 있으면 구역 밖 사람이에요.”
방이 조용했다. 형광등이 한 번 더 깜빡였다. 아기가 칭얼거렸다. 젊은 엄마가 등을 토닥였다.
“그럼 어떻게 해요.”
“다음 달 십사일까지, 새 호수로 전입신고만 되면 돼요. 안내문이 뭐라고 하든, 법에 필요한 서류는 신고서하고 신분증뿐이에요.”
“서른 번 넘게 안 됐는데요.”
“저 혼자 하면 또 안 될 거예요. 팀장님이 뒤집어요. 근데 서른 분이 같은 날 한꺼번에 오시면요. 서른 건을 다 뒤집으려면 처리자 칸에 팀장님 이름이 서른 번 찍혀요.”
고 주임이 커피를 마시다 사레들렸다. 오늘은 한 번도 안 들렸는데.
그때 경로당 문이 열렸다. 주 사무장이었다. 뒤에 검은 점퍼 둘. 주 사무장은 방석 위 열여섯 얼굴을 한 번 훑어보고, 나를 봤다.
“담당자님, 근무 시간 아니죠. 공무원이 조합원 아닌 세입자들 모아 놓고 뭐 하시는 거예요. 선동이에요, 이거.”
“안내요. 편람 안내.”
주 사무장은 대꾸하지 않고 품에서 서류 뭉치를 꺼냈다. 합의서. 열여섯 장. 방석 위에 한 장씩 던졌다.
“어르신들, 백만 원이에요. 이번 달 안에 쓰시면. 다음 달 되면 오십만 원. 공람공고 나면 영 원. 그리고 명도 소송. 소송비는 본인 부담. 판사님이 불법 점유자 편 들어 줄 것 같아요?”
아기가 울었다. 크게. 젊은 엄마가 합의서를 집어 들었다. 손이 떨렸다.
문달수 씨가 일어섰다. 자기 합의서를 봉투에서 꺼냈다. 주 사무장 앞에서 반으로 찢었다. 또 반으로. 네 조각을 주 사무장 발 앞에 놓았다.
“서른두 번 셌소. 서른세 번째는 같이 가겠소.”
주 사무장이 웃었다. 금색 배지가 형광등 아래 번쩍였다. 그리고 문달수 씨 가슴을 손가락으로 밀었다. 가볍게. 문달수 씨가 한 발 물러섰다. 고 주임이 커피를 내려놓고 그 사이에 섰다. 도장은 없었다. 대신 휴대폰을 들었다. 녹화 중이었다.
“사무장님, 저 1번 창구 도장 찍는 사람인데요. 방금 그거, 이거에도 찍혔어요.”
주 사무장은 한참 고 주임을 봤다. 그리고 나갔다. 검은 점퍼 둘이 따라갔다. 문이 닫혔다.
젊은 엄마가 합의서를 방석 위에 도로 내려놓았다. 아기가 울음을 그쳤다.
아기 아빠가 그제야 입을 열었다. 「저 씨 동 삼백이 호에서 에이 동 이백일 호로 옮겼어요. 아기 태어나기 전에. 곰팡이 때문에. 여기 출생신고도 이 센터에서 했어요. 그건 한 번에 됐어요.」 출생신고는 1번 창구다. 고 주임이 고개를 들었다. 「그거 내가 받았을 거예요. 이름이 뭐예요.」 「하율이요.」 고 주임이 한참 생각하다가 말했다. 「기억나요. 이름 예쁘다고 제가 그랬어요.」 아기 엄마가 처음으로 웃었다.
모임이 끝나고 명단을 받았다. 달력 뒷장에 볼펜으로. 시월 십사일, 같이 가는 사람. 이름이 스물둘. 오늘 안 온 여덟 집은 문달수 씨가 내일 한 집씩 문을 두드리겠다고 했다. 할머니 한 분이 명단에 이름을 쓰다 말고 나를 봤다.
“아가씨, 신분증만 있으면 된다며. 나 신분증 잃어버렸는데.”
“재발급 신청하시면 임시 증명서 나와요. 서식 제삼호.”
“그것도 3번 창구야?”
“1번이요. 고 주임님.”
할머니가 고 주임을 봤다. 고 주임이 커피를 들어 올렸다. 할머니가 말했다. 「그 양반 도장 소리 크더라.」 고 주임이 뿌듯한 얼굴을 했다.
돌아오는 길, 연립 앞 골목에서 고 주임이 걸음을 멈췄다. 가로등 아래.
“미소 씨. 사이니지 관리 프로그램 있잖아. 거기 예약 게시 로그가 남아. 누가 몇 시에 무슨 문구를 예약했는지. 관리자 계정은 팀장님이고, 열람 권한은 전산 담당이야. 우리 센터 전산 담당이 누군지 알아?”
“몰라요.”
“나야. 육 년 전에 떠맡았어. 아무도 안 하려고 해서. 로그 볼 줄 알아. 한 번도 안 열어 봤어. 열면 알게 되니까.”
그는 가로등을 올려다봤다. 나방이 빙빙 돌았다. 한 마리가 불에 부딪혀 떨어졌다가 다시 날아올랐다.
“육급 심사가 내년 삼월이야. 우리 애 둘이야. 큰애가 내년에 중학교 가.”
“주임님.”
“알아. 하라는 말 안 해도 돼. 나도 방금 경로당에서 찍었잖아. 사무장 밀치는 거. 찍고 나니까 손이 안 떨려. 육 년 동안 도장 찍을 때도 손이 떨렸는데.”
다음 날 아침 아홉 시, 3번 창구 화면이 깜빡였다.
[3번 창구 안내] 성원연립 소재 전입신고는 조합 합의서 사본 제출자에 한해 우선 접수합니다.
나는 그 문구를 소리 내어 읽었다. 대기 의자의 민원인 하나가 따라 읽다가 웃었다. 우선 접수라니. 합의서를 쓰면 이주비를 포기하는 건데, 이주비를 포기한 사람만 전입을 받아 준다는 말이었다. 이 화면을 예약한 사람도 쓰면서 웃었을지 모른다. 웃지 않았다면 그게 더 무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