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5,028자) · 사규 27조 3항
육백열두 자
옥상 동아리 · 오세림
사규 27조 3항. 나는 그것을 화장실에서 읽었다. 휴대폰으로. 다른 데서 읽으면 얼굴이 보이니까.
제27조(동아리 등록) ③ 등록 동아리는 등록일로부터 14일 이내에 활동내용(500자 이상)을 제출하여야 하며, 미제출 시 등록을 취소한다.
열나흘. 등록일이 시월 십삼일이니까 이십칠일까지. 오늘이 이십일. 일주일 남았다. 공문에는 그 밑에 한 줄이 더 있었다. 등록이 취소되면 협의 절차 없이 활동 장소 변경이 가능하다. 그러니까 이 종이는 우리를 해산시키는 종이가 아니었다. 협의를 없애는 종이였다. 상무는 우리를 부르지 않고도 옥상을 가질 수 있는 길을 일주일 만에 찾았다. 찾은 게 아니라 원래 있었다. 김 과장님이 작년에 써 둔 신청서에 활동내용이 미기재였던 것부터.
총무팀 삼 층. 형광등. 김 과장님은 왼쪽 모니터에 27조를 띄워 놓고 있었다.
“제가 빠뜨렸습니다.”
“과장님이요?”
“3항은 올해 삼월에 신설됐습니다. 제가 신청서를 쓴 게 작년입니다. 올해 개정본을 안 봤습니다.”
“누가 신설했는데요?”
“경영지원실이요.”
“그럼 상무님이 작년에 과장님이 신청서 쓴 걸 알고….”
“아니요. 그건 아닙니다. 3항은 유령 동아리 정리하려고 만든 겁니다. 등록만 해 놓고 활동비 타 가는 데가 열두 곳 있었습니다. 그걸 잡으려고. 우리는 거기 걸린 겁니다. 유령이라서요.”
“유령이 아닌데요.”
“활동내용이 없으면 유령입니다. 규정상.”
김 주임이 파티션 너머로 고개를 냈다.
“오백 자면 얼마 안 돼요, 대리님. 제가 다른 동아리 것 보여 드릴게요.”
주임이 서류철을 가져왔다. 등산 동아리. 활동내용 칸. 월 1회 정기 산행, 연 2회 원정 산행, 안전 교육 실시, 회원 간 친목 도모. 오백 자가 넘게 그런 문장이 이어졌다. 코팅이 돼 있었다. 등산 동아리 활동내용을 코팅한 사람은 김 주임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읽으면서 우리가 뭘 하는지 생각했다. 앉는다. 여덟 시에. 삼십 분. 가끔 오늘 춥네요. 네. 그게 다였다. 오백 자가 안 됐다. 아무리 늘려도.
“이거 제가 써야 돼요?”
“대표가요.”
나는 그날 밤 여덟 시에 옥상에서 안 썼다. 옥상에서는 아무것도 안 쓰니까. 열한 명이 앉았고 열한 명이 아무것도 안 했다. 태오는 잤다. 준희 과장은 벽돌 위에서 두 번 자세를 바꿨다. 팀장은 오지 않았다. 팀원 관리 차원은 하루로 끝난 모양이었다. 집에 가서 썼다. 열두 시까지. 오백 자를 채우는 데 네 시간이 걸렸다. 채운 게 아니라 지우는 데 네 시간이 걸렸다. 첫 문장을 쓰고 지우고. 우리 동아리는 옥상에 앉습니다. 지웠다. 옥상연구회는 옥상을 연구합니다. 지웠다. 등산 동아리 문장을 흉내 냈다. 주 5회 정기 착석. 지웠다. 그건 우리가 아니었다.
열한 시 반에 나는 지우는 것을 그만두고 그냥 썼다. 열두 문장을 만들고 지우는 대신, 만든 것을 안 지웠다. 오백 자가 아니라 육백열두 자가 됐다. 노트북 화면이 어두운 방에서 혼자 밝았다. 나는 그 글을 소리 내서 한 번 읽어 봤다. 방에서 소리 내서 뭘 읽은 것도 오랜만이었다. 목이 아팠다. 안 쓰던 데라서.
다음 날 열 시. 경영지원실. 십오 층 임원실 옆. 카펫이 아니라 타일이었다. 창구가 있었다. 은행처럼. 창구 뒤에 배 차장이 있었다. 마흔 중반. 27조 3항을 만든 사람. 유령 열두 곳을 잡은 사람. 책상에 서류 트레이가 셋인데 셋 다 라벨이 붙어 있었다. 접수, 검토, 반려. 반려 트레이가 제일 두꺼웠다.
“옥상연구회 활동내용 제출하러 왔습니다.”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배 차장이 받았다. 읽었다. 읽는 동안 그 사람 눈썹이 세 번 움직였다. 다 읽고 종이를 내려놓았다. 반려 트레이 쪽으로 손이 갔다가 멈췄다.
“이게 활동내용입니까?”
“네.”
“앉아 있는 게요?”
“네.”
“대리님. 활동이라는 건 뭔가를 하는 겁니다. 산행을 하고, 공을 차고, 책을 읽고. 앉아 있는 건 활동이 아니에요. 그건 활동이 없는 상태예요.”
“회의는 활동입니까?”
“…예?”
“사규에 회의는 업무 활동이라고 돼 있습니다. 27조가 아니라 4조에요. 저는 회의에서 칠 년 동안 말을 안 했습니다. 앉아 있었습니다. 그것도 활동이었습니까?”
배 차장이 나를 봤다. 처음 보는 사람을 보는 눈이었다. 그 사람은 나를 처음 봤으니까 맞는 눈이었다.
“그건 다른 얘기죠.”
“같은 얘깁니다. 앉아 있는 사람이 있어야 회의가 됩니다. 앉아 있는 사람이 있어야 옥상이 됩니다.”
말이 나왔다. 열두 문장 가운데 넷이 나왔다. 집에서 네 시간 동안 지우지 않은 것들이었다. 지우지 않으면 나온다는 것을 서른넷에 알았다. 배 차장이 종이를 다시 들었다. 이번에는 세는 눈이었다. 글자를.
“오백 자는 넘네요.”
“육백열둘입니다.”
“…규정상 요건은 오백 자 이상입니다. 내용에 대한 심사 조항은 없습니다.”
그 사람은 그렇게 말하고 접수 도장을 찍었다. 소리가 컸다. 그 사람은 자기가 만든 조항에 자기가 걸린 얼굴이었다. 유령을 잡으려고 만든 그물에 앉아 있는 사람이 걸렸는데, 그물코가 오백 자라서 빠져나갔다. 종이가 접수 트레이에 들어갔다. 제일 얇은 트레이에.
“대리님. 이거 게시판에 올라갑니다. 등록 동아리 활동내용은 공개입니다. 그것도 3항이에요.”
“네.”
“읽으면 다들 알게 될 겁니다. 대리님이 회의에서 말 안 하는 사람이라는 거.”
“다들 압니다.”
나는 창구를 나왔다. 타일 위에서는 발소리가 났다. 카펫과 달랐다. 그 소리가 좋았다.
열두 시. 게시판.
[등록 동아리 활동내용 공개] 옥상연구회 (대표: 예린)
옥상연구회는 매일 저녁 여덟 시에 본관 옥상에 앉습니다. 삼십 분. 의자는 각자 가져옵니다. 폐기 스티커가 붙은 의자여도 됩니다. 앉아서 하는 일은 없습니다. 말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됩니다. 대개 안 합니다. 누가 「오늘 덥네요」라고 하면 누가 「네」라고 합니다. 그게 이번 주에 한 말 전부입니다. 그런데 매일 갑니다. 회의실에서 숨을 들이켰다가 누가 먼저 말해서 못 한 말이 하루에 열두 개쯤 생깁니다. 그 열두 개를 들고 올라갑니다. 옥상에서는 아무도 먼저 말하지 않으니까 그 열두 개가 거기 있어도 됩니다. 말 안 해도 됩니다. 안 해도 되는 자리가 하루에 삼십 분 있으면 나머지 열 시간이 됩니다. 옥상연구회가 연구하는 것은 그것입니다. 앉아 있어도 되는 자리. 지난 팔월에 회계팀 직원 한 명이 이 옥상에서 울었습니다. 아무도 왜냐고 안 물었습니다. 물어야 하는 자리가 아니라서요. 그 사람이 이번에 가입했습니다. 열한 명입니다. 실외기 3번과 5번이 시끄럽습니다. 시끄러워서 말 안 하는 게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게 옥상연구회의 활동내용입니다. 앉습니다. (612자)
세 시까지 댓글이 서른하나였다. 나는 안 읽었다. 읽으면 열두 문장이 생기니까. 하늘이 내 자리로 왔다.
“대리님, 댓글 봤어요?”
“아,”
“안 보셨죠. 저 읽어 드릴게요. 안 돼요? 알겠어요. 하나만요. 영업팀 준희 과장님이 영업 2팀 전체 회식을 다음 주에 옥상에서 하시겠대요. 술 없이. 그거 김 과장님이 안 된다고 댓글 다셨어요. 사규 27조 아니고 소방법으로요.”
파티션 너머에서 팀장이 이쪽을 봤다. 얼굴 반만. 그 사람은 게시판을 읽은 얼굴이었다. 회의에서 칠 년 동안 말 안 한 사람이 자기 팀원이라는 것을, 그 사람은 원래 알았다. 워크숍에서 그렇게 소개했으니까. 다만 그게 말수가 적은 게 아니라는 것을 오늘 알았다. 그 사람은 아무 말도 안 했다. 그날은 보고서도 안 돌아왔다.
여덟 시. 철문이 열렸다. 열하나가 아니었다. 나는 셌다. 열한 명이 의자를 들고 올라온 다음에 여섯이 더 올라왔다. 소원 뒤에 회계팀 둘. 준희 과장 뒤에 영업팀 둘. 그리고 하늘 뒤에 우리 팀 이 년 차 정민. 의자를 들고. 열일곱. 실외기 여섯 대 사이에 열일곱 개 의자가 놓이는 데 십 분이 걸렸다. 시끄러웠다. 의자 다리가 타일에 끌리는 소리, 접이식 의자가 펴지는 소리, 누가 미안합니다 하는 소리, 태오가 젖힌 의자가 뒤로 넘어가는 소리. 태오는 넘어간 채로 잤다.
열일곱이 다 앉고 나서 철문이 한 번 더 열렸다. 의자가 아니었다. 김 주임이었다. 손에 A4 한 장과 테이프. 코팅된 종이였다. 주임은 옥상에 올라와서 앉지 않고 철문 안쪽에 종이를 붙였다. 테이프 네 귀퉁이. 두 번 눌렀다. 붙이고 나서 뒤로 물러나 비뚤어졌는지 봤다. 안 비뚤어졌다. 그 사람은 그런 사람이다.
“활동내용은 활동 장소에 게시합니다. 27조 3항 뒤에 붙은 시행세칙이에요. 오늘 오후에 배 차장님이 만드셨어요.”
“오늘요?”
“네. 대리님 다녀가시고 두 시간 뒤에요.”
주임은 그 말만 하고 내려갔다. 코팅된 육백열두 자가 철문 안쪽에서 바람에 안 흔들리고 있었다. 코팅은 바람에 안 흔들린다. 종이 귀퉁이가 들썩이지 않는 옥상은 처음이었다. 열일곱 명이 그 종이를 봤다. 다 읽은 사람들이었다. 읽고 올라온 사람들. 여섯은 그 종이 때문에 올라왔다. 배 차장이 그 종이를 붙이라고 세칙을 만든 이유가 우리를 곤란하게 하려던 것이었다면, 오늘 여섯이 더 온 것도 그 사람 세칙 때문이었다.
김 과장님이 나를 봤다. 그 눈에 정원 11이 있었다.
“여섯은 정원 밖입니다.”
“아,”
“정원 변경은 대표자 신청입니다.”
“…또요?”
“네. 늘 때마다요.”
도영 과장님이 종이컵을 무릎에 올렸다. 그 사람은 여섯을 안 봤다. 열일곱을 안 봤다. 난간을 봤다. 열일곱 명 가운데 난간 쪽에 앉은 사람이 넷이었다. 그 사람 눈이 그 넷을 하나씩 짚었다. 나는 그 눈을 봤다. 세는 눈. 상무가 우리 셋을 세던 눈과 같은 눈인데, 세는 이유가 반대였다.
타일이 식어 있었다. 발바닥에 온기가 안 올라왔다. 시월 이십일일. 일주일 전보다 옥상이 또 식었다. 열일곱 명이 앉아 있는데 옥상은 더 추웠다. 사람이 많으면 따뜻한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의자가 많으면 바람이 지나갈 자리가 많아진다.
여덟 시 반. 도영 과장님이 일어섰다. 철문 앞에서 돌아서지 않고 말했다.
“다음 주에 열일곱이 스물이 되면, 저는 안 옵니다.”
그 사람은 내려갔다. 열여섯이 남았다. 아무도 왜냐고 안 물었다. 물어야 하는 자리가 아니라서. 나는 그날 처음으로 그 규칙이 싫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