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5,605자)

받은 점수

선발전 라이벌과 룸메이트가 되었습니다 · 진해솔

412호로 돌아오는 복도에서 둘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새벽 다섯 시 이십 분의 숙소동 복도는 비상등만 켜져 있어서 바닥이 초록색이었다. 세인은 목발 없이 걸었다. 오른 다리를 디딜 때마다 다예가 반 걸음 뒤에서 손을 들었다가 내렸다. 세인은 그 손을 보지 않았다.

방에 들어오자 세인은 아래 칸으로 가지 않았다. 사다리 앞에 섰다. 첫 칸에 왼발을 올렸다.

“세인아, 무릎.”

“다 나았다며. 125도.” 세인이 둘째 칸을 밟았다. 오른 무릎이 접히면서 숨이 짧게 끊겼다. “말해. 지금.”

다예는 아래 칸에 앉았다. 머리맡에 테이프로 붙여 둔 「임시 양도」 종이가 눈에 들어왔다. 다예는 그 종이를 떼어 손에 쥐었다.

“작년 결승. 14대 14. 네 팔이 먼저 펴졌어.” 다예가 말했다. 목소리가 생각보다 담담하게 나왔다. 열한 달 동안 혼자 속으로 너무 많이 말해 봐서 그런 것 같았다. “나는 기다리다가 반 박자 늦게 나갔어. 내 팔이 알았어. 늦었다고. 근데 손이 내 쪽으로 올라갔어. 그날 심판 임창도였어.”

위 칸이 조용했다. 세인이 사다리 셋째 칸에 서 있었다. 얼굴이 위 칸 난간에 가려 다예 쪽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탈의실에 장 위원님이 왔어. 축하한다고. 도운건설에서 나 데려가고 싶어 한다고. 계약서 보낸다고. 4월에 거절했어. 청주시청 언니들 두고 못 가서. 그 뒤로 그 사람이 나한테 안 웃어. 차도희가 그 점퍼 입었고.”

“그럼 기다렸다는 건.” 세인의 목소리가 위에서 내려왔다. “내가 참지 못해서 졌다는 거. 그것도 거짓말이야?”

“아니. 기다린 건 진짜야. 네가 참지 못한 것도 진짜고. 늦게 나간 것도 진짜야.” 다예가 종이를 접었다. “다 진짜인데, 점수만 가짜였어.”

세인이 사다리를 올라가 위 칸에 누웠다. 침대 전체가 삐걱거렸다. 매트리스 밑판이 다예의 머리 위에서 내려앉았다.

“열한 달.” 세인이 말했다. 천장에 대고 말하는 소리였다. “열한 달 동안 그 장면만 봤어. 길 코치님 손이 아니라 임창도 손. 내가 들어간 각도. 네 오른발. 매일 밤 다시 봤어. 내가 뭘 틀렸는지 찾으려고. 근데 틀린 게 없었네.”

“응.”

“청주에서 15대 14로 이겼을 때.” 세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나 갚았다고 생각했어. 처음으로 그 장면이 안 떠올랐어. 그날 밤에 잠을 잤어. 근데 그게 뭐였어? 원래 내 거였던 점수를 내가 다시 따 온 거야? 너한테 진 빚을 갚은 게 아니라, 네가 나한테 진 빚을 내가 대신 갚은 거야?”

다예는 대답하지 못했다. 손에 쥔 종이가 땀에 젖어 눅눅해졌다.

“왜 말 안 했어?”

“네가 그 1점 때문에 칼을 잡는 것 같아서.” 다예가 말했다. “그게 없어지면 네가 뭘 잡을지 몰라서.”

위 칸에서 오래 아무 소리가 없었다. 라디에이터 쇠가 늘어나는 소리가 한 번 났다. 창밖이 조금씩 파래지고 있었다. 세인이 돌아눕는 소리가 났다. 벽 쪽이었다.

“아래 칸 돌려줄게. 이자 없이.”

다예는 접은 종이를 책상 서랍에 넣었다. 세인의 무릎 보호대가 들어 있던 맨 아래 서랍이었다. 서랍을 닫는 소리가 방 안에서 너무 크게 났다.

*

도운건설 후원 협약식은 3월 18일 오후 두 시, 선수촌 대강당에서 열렸다. 협회가 대표 후보 전원에게 단복을 입고 참석하라고 공지했다. 세인은 남색 단복 재킷을 입고 강당 셋째 줄에 앉았다. 다예는 다섯째 줄 반대편 끝에 앉았다. 오세미가 둘을 번갈아 보며 “담합 커플 깨졌냐?” 하고 중얼거렸다.

길창호는 세인 옆자리에 앉았다. 정장 단추가 배 앞에서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

“코치님, 단추.”

“말 시키지 마라. 숨 쉬면 튄다.” 길창호가 등받이에 몸을 붙였다. “튀면 니가 주워라.”

무대 위에는 도운건설 로고가 박힌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도운건설 박 이사가 먼저 연단에 섰다. 쉰 중반, 흰머리를 단정하게 넘긴 남자였고, 말을 할 때마다 손가락으로 연단을 두 번씩 두드렸다. 후원 금액이 화면에 떴다. 숫자가 커서 강당 안에서 낮은 탄성이 나왔다. 박 이사는 그 숫자 앞에서 한국 여자 사브르의 세계 정상을 말했고, 자기 회사 소속 차도희의 이름을 두 번 불렀다. 맨 앞줄에 앉은 차도희의 뒷목이 두 번 다 빨개졌다.

다음은 장혜련이었다. 장혜련은 회색 정장을 입고 태블릿 없이 연단에 섰다. 세인은 장혜련이 태블릿을 안 든 모습을 처음 보았다.

“4월 국제대회 출전 선수 선발 방식을 한 가지 보완합니다.” 장혜련이 말했다. “최종전 우승자라도 대회 직후 의무위원회의 메디컬 심사를 통과해야 출전이 확정됩니다. 해외 원정에서 선수가 다치면 선수에게도, 협회에도, 후원해 주시는 분들께도 손해니까요. 심사를 통과하지 못하면 선발위원회가 추천하는 선수가 출전합니다.”

강당이 술렁였다. 세인의 무릎 위에서 손이 저절로 주먹이 되었다. 의무위원회에는 이제 세인의 자기공명영상이 들어가 있었다. 예전에 꿰맨 연골, 새로 찢어진 인대. 그리고 다예의 발목은 1월부터 장혜련의 태블릿 안에 있었다. 둘 중 누가 이기든 장혜련은 그 사람을 심사에서 떨어뜨릴 수 있었다. 추천 선수가 누구인지는 박 이사가 방금 두 번 말했다.

길창호의 단추 하나가 튀었다. 단추가 세인의 구두 앞에 떨어져 굴렀다. 세인은 그걸 줍지 않았다.

*

행사가 끝나고 세인은 강당 뒤 복도로 갔다. 무대 뒤 대기실 문이 반쯤 열려 있었고, 안에서 장혜련과 박 이사가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세인이 문을 밀고 들어가자 박 이사가 잔을 내려놓았다.

“문세인 선수? 무릎 다쳤다던.”

“다 나았어요.” 세인이 장혜련 앞에 섰다. “위원님, 작년 선발전 결승 마지막 점. 임창도 심판이 서다예 선수한테 준 거. 저 그거 협회에 정식으로 문제 삼을 거예요. 영상 남아 있잖아요. 협회 판독 영상.”

박 이사가 장혜련을 보았다. 장혜련은 커피 잔을 두 손으로 감싼 채 세인을 올려다보았다. 놀란 기색이 없었다.

“서다예 선수가 말했나 보네요.”

“제가 들었어요. 재활실에서.”

“그래요.” 장혜련이 잔을 내려놓았다. “하세요. 그런데 그 전에 계산은 해 보세요. 작년 판정을 문제 삼으면 작년 우승이 흔들려요. 서다예 선수의 작년 선발 점수가 날아가고, 그러면 올해 최종전 시드도 날아가요. 청주시청은 시의회 예산 심의가 이달 말이죠. 대표 선수 없는 실업팀을 시가 계속 둘까요?”

세인은 숨을 들이켰다. 대기실 안이 너무 건조했다. 커피 냄새가 코 안을 긁었다.

“그리고 그 판정을 누가 내렸는지 따지면, 결국 임창도 심판 한 사람이 다 뒤집어써요. 저는 그 결승에 아무 말도 안 했어요. 심판은 심판이 봐요.” 장혜련이 웃었다. “문세인 선수가 갚고 싶은 1점 값은, 서다예 선수가 내요. 그래도 하실래요?”

세인은 대답하지 못했다. 장혜련의 말에는 틀린 곳이 없었다. 틀린 곳이 없어서 더 더러웠다.

그때 대기실 문이 다시 열렸다. 차도희였다. 남색 단복 위에 도운건설 점퍼를 걸치고 있었는데, 들어오면서 점퍼를 벗었다. 벗은 점퍼를 팔에 걸고 박 이사 앞에 섰다.

“이사님. 위원님.” 차도희의 목소리가 떨렸다. 떨리면서도 끝까지 나왔다. “저 추천으로는 안 가요. 최종전에서 지면 안 가요. 4월에 추천으로 나가면, 저는 거기서 한 경기도 제 칼로 못 해요.”

박 이사가 연단을 두드리던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 번 두드렸다.

“도희 씨, 계약서 조항 보셨죠? 대표 선발 시 성과급. 미선발 시 재계약 재검토.”

“봤어요.”

“그럼 됐어요. 오늘은 피곤해서 그런 걸로 할게요.” 박 이사가 일어나 코트를 집었다. 장혜련에게 고개를 까딱하고 나갔다. 차도희는 그 뒷모습을 보다가 세인을 돌아보았다. 눈이 빨갰다.

“죄송해요. 이건 버릇 아니에요.” 차도희가 말했다. “최종전에서 봬요. 그때는 진짜로요.”

차도희가 나가자 대기실에 장혜련과 세인만 남았다. 장혜련은 식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차도희 선수는 착해요. 착한 선수는 오래 못 가요.” 장혜련이 잔을 내려놓았다. “문세인 선수는 착하지 않아서 좋아요. 1월에 영리하다고 한 말, 진심이었어요. 영리하게 하세요.”

*

저녁 식당에서 세인은 길창호 맞은편에 앉았다. 길창호는 단복 재킷을 벗어 의자에 걸어 두었고, 단추가 떨어진 자리에 실밥 두 가닥이 삐죽 나와 있었다. 세인은 주머니에서 단추를 꺼내 식판 옆에 놓았다. 강당 바닥에서 결국 주워 왔다.

“주웠나.”

“코치님이 주우라면서요.”

길창호가 단추를 집어 셔츠 주머니에 넣었다. 그러고는 미역국을 한참 저었다. 숟가락이 그릇에 부딪치는 소리만 났다.

“다예한테 들었다.” 길창호가 말했다. “작년 거. 니가 아침에 위 칸 올라갔다꼬, 그거 걱정돼서 내한테 왔더라.”

“코치님은 알았어요?”

“의심은 했다. 임창도가 그날 손을 너무 빨리 들었다.” 길창호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억양이 낮게 가라앉았다. “세인아. 그거 터뜨리면 다예가 끝난다. 안 터뜨리면 니가 그거 평생 안고 간다. 둘 중에 하나 고르라 카는 게 장혜련이 판 함정이다. 니는 고르지 마라.”

“그럼 뭐 해요?”

“이겨라. 최종전에서 니 칼로. 그 사람이 손 쓸 데가 없게.” 길창호가 계란말이 하나를 세인 식판으로 옮겼다. 염정자가 멀리서 그걸 보고 집게를 들어 보였다. 허락하는 손짓이었다. “그라고 무릎은 내가 의무위원회에 직접 간다. 고2 때 기록 뺀 거, 내가 뺐다고 내 입으로 말한다. 그 종이로 더는 니 못 잡게.”

“코치님 징계 받아요.”

“받지 뭐. 방향제 네 개 걸고 출퇴근하는 놈이 징계 하나 못 받겠나.”

세인은 계란말이를 씹었다. 짰다. 염정자가 오늘따라 소금을 많이 넣은 것 같았다.

*

그날 밤 아홉 시, 세인은 펜싱장에 혼자 갔다. 불이 꺼진 피스트 여섯 개 가운데 맨 끝 하나에만 스위치를 올렸다. 형광등이 깜빡이다 켜지면서 피스트 위에 하얀 길이 생겼다. 길이 14미터. 1월 4일 밤에 서다예와 아래 칸을 걸고 다섯 점을 다퉜던 피스트였다.

세인은 무릎 보호대를 찼다. 보호대 안쪽에 적힌 고등학생 글씨가 손끝에 걸렸다. 마스크를 쓰고 칼을 들었다. 철망 안으로 숨이 고였다. 무릎이 꺾이고 거의 한 달 만이었다.

반 런지. 오른발을 반만 내딛었다. 무릎이 받았다. 한 번 더. 이번에는 사분의 삼. 무릎 안쪽이 시큰했지만 꺾이지 않았다. 세인은 숨을 고르고 칼끝을 허공의 한 점에 겨눈 채 끝까지 나갔다. 뒤꿈치가 고무판을 찍었고, 몸무게가 오른 무릎 하나에 다 얹혔다. 2월 22일에 꺾였던 그 각도였다.

무릎이 버텼다.

세인은 런지 자세 그대로 한참 있었다. 다리가 떨렸다. 마스크 안에서 눈이 뜨거워졌다. 세인은 그게 무릎 때문인지, 열한 달 동안 돌려 본 장면 때문인지, 오늘 장혜련의 말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는 채로 일어났다.

펜싱장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세인은 돌아보지 않고도 그 발소리를 알았다. 오른발이 먼저 오고 왼발이 조심스럽게 따라오는 걸음이었다.

다예가 피스트 끝에 섰다. 운동복 차림에 칼 가방을 메고 있었다. 왼 발목에 흰 테이프가 감겨 있었다. 여덟 바퀴였다.

둘은 피스트 양 끝에서 서로를 보았다. 14미터였다. 세인이 마스크를 들어 올렸다.

“다섯 점.” 세인이 말했다. “이기면 아래 칸.”

다예가 칼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지퍼 여는 소리가 펜싱장 천장까지 올라갔다. 대답이었다.

세인은 마스크를 내렸다. 철망 너머로 다예가 오른발 뒤꿈치를 바닥에 두 번 찍었다. 심판이 없었다. 세인이 직접 말했다.

“앙 가르드, 서다예.”

9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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