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5,167자)
사십 초
선발전 라이벌과 룸메이트가 되었습니다 · 진해솔
2월 22일 월요일, 3차 선발전. 길창호는 코칭박스에 들어갈 수 없어서 관중석 2층 기둥 뒤에 서 있었다. 기둥에 몸을 반쯤 숨기고 세인이 볼 때마다 코를 긁었다. 코를 한 번 긁으면 들어가라, 두 번 긁으면 기다려라. 어젯밤 412호에 와서 정한 신호였다.
“코치님 저러다 코 헐겠다.” 다예가 몸을 풀며 말했다.
“아까 세 번 긁었어. 세 번은 뭐였지?”
“안 정했어. 진짜 가려운 거 아냐?”
세인은 8강에서 오세미를 15대 9로 이겼다. 무릎은 버텼다. 보호대를 평소보다 한 칸 더 조였고, 오세미가 들어올 때 앞발을 크게 내딛지 않고 반 걸음씩 끊어 받았다. 심판은 처음 보는 중년 여자 심판이었다. 동시타가 두 번 나왔고 한 번씩 갈렸다. 다예도 8강을 이겼다.
준결승 상대는 차도희였다. 시작하기 전 차도희가 피스트 가운데에서 세인에게 다가와 작게 말했다.
“2차 때 마지막 점.”
“네.”
“저도 세인 선수가 먼저였다고 생각해요.” 차도희가 마스크를 썼다. 철망 너머로 목소리만 나왔다. “그래도 이번엔 봐주지 않을 거예요. 그게 맞는 것 같아서요.”
“봐주면 화낼 거예요.”
“알아요.”
*
6대 5, 세인이 앞서 있었다. 차도희가 한 발 물러섰고 세인은 그 빈 거리를 지우려고 앞발을 크게 내디뎠다.
오른발 뒤꿈치가 피스트에 닿았다. 체중이 무릎 위로 실렸다. 그 순간 차도희가 물러서던 몸을 멈추고 옆으로 틀었다. 세인의 칼끝이 허공을 갔고, 세인의 몸은 칼을 따라 앞으로 쏠렸다. 무릎이 안쪽으로 접혔다.
소리가 났다. 세인의 귀에만 들린 소리였다. 젖은 나뭇가지를 무릎 안에서 꺾은 것 같은 소리.
일 초가 지났다. 세인은 아직 서 있었다. 서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피스트 고무판이 얼굴 쪽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삼 초. 세인의 왼 어깨가 바닥에 닿았다. 마스크가 고무판을 긁으며 철망 안으로 고무 냄새가 훅 들어왔다. 칼이 손에서 빠져 피스트 밖으로 미끄러졌다. 칼 끄는 소리가 길게 났다.
오 초. 무릎에서 열이 올라왔다. 아프다는 말이 생각나기 전에 뜨거웠다. 무릎 안쪽에 쇳물을 부은 것 같았다. 세인은 숨을 쉬려고 했는데 숨이 마스크 안에서 막혔다.
팔 초. 차도희가 자기 마스크를 벗어 던졌다. 마스크가 바닥에 떨어져 굴렀다. 차도희가 심판석을 향해 소리쳤다.
“의료진이요! 의료진 불러 주세요!”
차도희의 목소리가 그렇게 큰 줄 아무도 몰랐다.
십이 초. 누군가 세인의 마스크를 벗겼다. 체육관의 찬 공기가 땀에 젖은 얼굴에 닿았다. 천장의 조명이 너무 밝아서 세인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차도희의 얼굴이 위에 있었다. 하얗게 질려 있었다.
“움직이지 마세요. 다리 펴지 마세요.”
십팔 초. 관중석 쪽에서 무언가가 넘어지는 소리가 났다. 세인이 고개를 돌리자 펜스를 넘어오는 사람이 보였다. 다예였다. 선수 대기석과 피스트 사이의 낮은 펜스를, 왼발을 쓰지 않고 오른발로만 짚고 넘었다. 넘다가 펜스 다리에 정강이를 부딪쳤는데 멈추지 않았다.
이십오 초. 다예가 세인 옆에 무릎을 꿇었다. 손을 뻗어 세인의 무릎에 대려다가 대지 않았다. 손이 허공에서 떨렸다. 세인은 그 손을 보았다. 아침마다 세인의 수건을 주워 위 칸으로 던져 주던 손이었다.
“괜찮아.” 세인이 말했다. 목소리가 이상하게 높았다.
“안 괜찮아. 소리 났잖아. 나 들었어.”
“너 다음 경기.”
“알아.”
삼십이 초. 의료진 둘이 들것을 들고 뛰어왔다. 그 뒤로 길창호가 계단을 뛰어 내려오는 게 보였다. 코를 긁던 손으로 난간을 붙잡고 있었다. 2층 본부석에서 장혜련이 일어나는 것도 보였다. 장혜련은 일어나서 내려오지 않았다. 태블릿을 든 채 서 있었다.
사십 초. 의료진이 세인의 다리 밑에 손을 넣었다. 세인은 다예의 소매를 잡았다. 잡고 끌어당겨 다예의 귀가 자기 입 가까이 오게 했다.
“가서 이겨.”
다예가 세인을 보았다. 무언가 말하려고 했다. 세인은 소매를 놓지 않았다.
“같이 가면 둘 다 0점이야. 그 사람이 그거 바라. 가서 이겨. 나 병원 가는 동안.”
들것이 들렸다. 세인의 손에서 다예의 소매가 빠져나갔다.
*
그 뒤의 시간은 빨랐다. 구급차 천장의 흰 등, 사이렌 소리 사이로 들리는 구급대원의 말투, 청주의 대학병원 응급실 커튼, 차가운 젤을 바르던 초음파, 다음 날 아침의 자기공명영상 촬영기. 원통 안에 누워 있는 이십 분 동안 기계가 망치질을 하는 소리를 냈다. 세인은 그 소리를 세다가 세는 걸 그만두었다.
판독은 오후에 나왔다. 정형외과 의사는 화면에 무릎 단면을 띄워 놓고 볼펜으로 짚었다.
“안쪽 인대가 부분적으로 찢어졌어요. 끊어진 건 아니고요. 다행이에요.” 의사가 볼펜을 옮겼다. “그리고 여기 예전에 연골 꿰맨 자리. 그건 멀쩡해요. 수술 잘하셨네.”
“언제 칼 잡을 수 있어요?”
“보조기 차고 두 주. 그다음 재활 두 주. 4주요. 운이 좋으면.”
최종전은 3월 24일이었다. 오늘이 2월 23일이었다. 세인은 손가락으로 날짜를 셌다. 4주 하고 하루가 남았다. 운이 좋아야 하루가 남았다.
길창호가 진료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세인을 보자 아무 말도 안 하고 휠체어 손잡이를 잡았다. 복도를 밀고 가다가 자판기 앞에서 멈췄다. 식혜 두 캔을 뽑아 하나를 세인 무릎 위 보조기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세인의 휴대폰을 가리켰다.
“어제 결과 봤나?”
“아뇨. 못 봤어요.”
“다예가 이겼다. 결승에서 차도희를 15대 12로.” 길창호가 식혜 캔을 땄다. “차도희는 니 기권승으로 결승 올라왔는데, 결승 내내 칼이 안 나가더라. 니 넘어진 게 지 탓인 줄 아는 갑다.”
세인은 식혜를 따지 않고 쥐었다. 캔이 손바닥을 차갑게 적셨다. 3차 1위 서다예, 2위 차도희, 문세인은 준결승 기권. 세 번의 점수를 더하면 셋이 거의 붙어 있었다. 남은 것은 최종전 하나였다.
“코치님, 저 코 긁는 거 세 번은 뭐였어요?”
길창호가 세인을 내려다보았다. 눈이 벌겠다.
“가려웠다.”
*
장혜련은 그날 저녁에 병원에 왔다. 복도 끝 창가 의자에 세인이 혼자 앉아 있을 때였다. 장혜련은 꽃을 들고 오지 않았다. 회색 코트를 입고 태블릿을 들고 왔다. 세인 옆 의자에 앉지 않고 서서 말했다.
“많이 아프죠.”
“괜찮아요.”
“의료진 보고 받았어요. 안쪽 인대 부분 파열. 4주.” 장혜련이 태블릿을 보았다. “그리고 예전 연골 봉합 자국이 영상에 나왔다고요. 이 영상은 협회 의무 기록에 들어가요. 이번엔 누가 뺄 수가 없어요. 병원이 바로 보내거든요.”
세인은 무릎 위 보조기의 벨크로를 손가락으로 만졌다. 장혜련이 서랍 속 종이 한 장으로 쥐고 있던 것이 이제 모두가 볼 수 있는 기록이 되었다. 무릎이 무너진 날, 그 종이도 같이 쓸모가 없어졌다. 쓸모가 없어진 대신 진짜가 되었다.
“최종전은 기권하세요.” 장혜련이 말했다. 목소리가 부드러웠다. “스무 살이에요. 다음 시즌이 있어요. 무리해서 나왔다가 무릎이 아주 나가면 그때는 다음 시즌도 없어요. 저는 선수 생명을 생각해서 하는 말이에요. 기권서는 제가 대신 받아 드릴게요.”
“위원님.”
“네.”
“제가 기권하면 최종전에 서다예랑 차도희만 남죠.” 세인은 장혜련을 올려다보았다. “서다예 발목은 위원님이 아시고요.”
장혜련의 얼굴이 아주 조금 굳었다. 1월에 선발위원실에서 세인이 차도희 이야기를 꺼냈을 때와 같은 굳음이었다. 세인은 이제 그 얼굴을 알았다.
“기권 안 해요. 4주 하고 하루 남았어요.”
“하루요?” 장혜련이 웃었다.
“하루요.”
장혜련은 태블릿을 껐다. 꺼진 화면에 복도 형광등이 비쳤다. 장혜련이 돌아서며 말했다.
“최종전 전에 메디컬 확인은 다시 할 거예요. 그것도 알아 두세요.”
*
그 뒤 열흘은 느렸다. 세인은 목발을 짚고 선수촌으로 돌아왔다. 412호 앞에 섰을 때 다예가 문을 열었고, 들어서자마자 아래 칸 침대 머리맡에 종이 한 장이 테이프로 붙어 있는 게 보였다. 다예의 글씨였다. 「아래 칸 임시 양도. 무릎 나으면 돌려받음. 이자 없음.」
“이자 없어?” 세인이 물었다.
“병문안 기간이라 특별 금리야.” 다예가 세인의 목발을 받아 벽에 세웠다. “대신 위 칸 내가 쓰니까 아침에 내 머리 박는 소리 들어도 웃지 마.”
다예는 그날 밤 정말로 천장에 머리를 박았다. 퉁 소리가 나자 세인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웃었다. 웃다가 무릎이 울려서 웃음을 멈췄다. 다예가 위에서 “웃었지” 하고 말했다.
열흘 동안 세인은 보조기를 찬 채 펜싱장 옆 의자에 앉아 다른 선수들 훈련을 보았다. 식당까지 목발로 가면 칠 분이 걸렸다. 염정자는 세인의 쟁반을 대신 들어 자리까지 갖다주었고, 계란말이를 놓을 때 세는 손가락을 일부러 세인에게 보여 주었다. 하나, 둘. 그러고는 다예의 접시에서 하나를 집어 세인 접시에 옮겼다. 다예가 항의하자 염정자가 말했다. “아픈 사람이 먼저여. 나으면 도로 받어.”
길창호는 이틀에 한 번 식혜를 들고 왔다. 세인과 다예가 서울에서 돌아오던 날 사 준 네 번째 방향제를 차에 걸었다고, 소나무 냄새가 제일 세서 나머지가 다 졌다고 말했다.
닷새째 되는 날 저녁에는 차도희가 412호 문을 두드렸다. 손에 귤 한 봉지를 들고 있었다. 마트 비닐봉지에 담긴, 크기가 제각각인 귤이었다. 차도희는 방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문턱에 선 채 봉지를 내밀었다.
“그날 제가 옆으로 안 틀었으면.”
“틀어야죠. 안 틀면 제 칼에 맞잖아요.” 세인이 봉지를 받았다. 귤 하나가 봉지 밖으로 굴러 떨어졌고 다예가 위 칸에서 손을 뻗어 받으려다 못 받았다. “그거 펜싱이에요. 도희 선수 잘못 아니에요.”
차도희가 바닥에 떨어진 귤을 주워 세인 손에 쥐여 주었다. 그러고는 한참 망설이다가 말했다. “위원님한테 그만하시라고 말씀드렸어요. 1인실도 빼 달라고 했고요. 안 들어 주셨어요.”
문이 닫힌 뒤 세인은 그 귤을 깠다. 껍질이 얇아서 손톱 밑으로 즙이 배었다. 시었다. 선발위원실 탁자 위의 반듯한 귤보다 훨씬 시었다.
다예는 그 열흘 동안 이상하게 일찍 잤다. 아홉 시 반이면 불을 껐다. 세인이 왜 그렇게 일찍 자냐고 물으면 다예는 위 칸 공기가 얇아서 그렇다고 했다.
열하루째 밤, 세인은 누가 어깨를 흔드는 바람에 깼다. 방이 캄캄했다. 휴대폰 화면을 켜자 새벽 세 시 사 분이었다. 다예가 침대 옆에 쭈그려 앉아 있었다. 트레이닝복을 다 입고, 운동화 끈까지 맨 채였다. 다예의 입김이 세인의 뺨에 닿았다. 다예는 방금 바깥 공기를 묻히고 들어온 참이었다.
“일어나.” 다예가 속삭였다. “재활실 문 열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