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5,184자)
240프레임
선발전 라이벌과 룸메이트가 되었습니다 · 진해솔
2월 둘째 주 화요일 아침 일곱 시, 선수촌 정문 앞에 협회 버스가 섰다. 밤새 눈이 와서 버스 바퀴 자국이 정문까지 두 줄로 파여 있었다. 2차 선발전은 선수촌이 아니라 청주의 한 실내체육관에서 열렸다. 협회가 지방 순회 대회를 겸해 잡은 일정이었다. 버스 안은 히터 냄새와 누군가 뜯은 육포 냄새로 가득했고, 길창호는 맨 앞자리에서 멀미약을 두 알 삼켰다.
“코치님 멀미하세요?” 세인이 물었다.
“버스만 타면 한다. 차는 괜찮은데 버스는 안 된다. 왜 그런지는 내도 모른다.” 길창호가 창문에 이마를 붙였다. “말 시키지 마라. 말하면 나온다.”
세인은 뒤로 가서 다예 옆자리에 앉았다. 둘이 나란히 앉는 것은 처음이었다. 버스 맨 뒷자리 창가에는 차도희가 혼자 앉아 이어폰을 꽂고 있었다. 도운건설 점퍼 지퍼를 턱까지 올려서 얼굴이 반쯤 묻혀 있었다.
다예가 휴대폰을 꺼내 세인에게 화면을 보여 주었다. 카메라 설정 화면이었다. 「슬로 모션 240fps」.
“일 초에 240장. 칼이 몸에 닿기 전에 누구 팔이 먼저 펴지는지 다 보여.” 다예가 말했다. “충전 다 했고, 보조 배터리도 있어. 저장 공간 비우느라 어젯밤에 고양이 사진 천 장 지웠어.”
“너 고양이 없잖아.”
“남의 고양이야. 인터넷에서 모은 거.” 다예가 비장한 얼굴로 휴대폰을 집어넣었다. “내 희생을 잊지 마.”
세인은 창밖을 보며 웃었다. 눈 덮인 논이 끝없이 하얗게 지나갔다. 버스가 고속도로에 오르자 다예가 목소리를 낮췄다.
“대진 봤어?”
“응.”
대진표는 어젯밤 협회 누리집에 올라왔다. 세인과 다예는 같은 쪽에 들어 있었다. 둘 다 이기면 준결승에서 만났다. 그 반대쪽 맨 위에 차도희가 있었다.
“그럼 내가 너한테 지면 결승 찍고, 네가 나한테 지면 네가 결승 찍어.” 다예가 말했다.
“지는 사람이 찍는다고?”
“이긴 사람은 칼 들고 있어야지.” 다예가 세인의 어깨를 툭 쳤다. “봐주지 마. 봐주면 영상 안 찍어 준다.”
*
청주 체육관 관중석 2층에 현수막이 하나 걸려 있었다. 흰 천에 빨간 글씨로 「서다예 우리 밥줄」. 그 밑에서 청주시청 여자 펜싱팀 선배 셋이 응원봉을 흔들었다. 다예가 그걸 보고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밥줄이 뭐야, 밥줄이.”
“틀린 말은 아니잖아.” 세인이 말했다.
“틀린 말이 아니라서 문제야.”
체육관은 선수촌 펜싱장보다 더 추웠다. 바닥 난방이 없어서 피스트 고무판이 발밑에서 딱딱했고, 몸을 풀 때마다 입김이 하얗게 나왔다. 세인은 오른 무릎에 보호대를 차고 그 위에 경기복 바지를 입었다. 다예가 옆에서 왼 발목에 테이프를 감았다. 여덟 바퀴였다. 세인은 세지 않으려고 했는데 세고 있었다.
둘 다 8강을 이겼다. 오후 한 시, 준결승. 심판은 젊은 여자 심판이었다. 세인은 피스트에 오르기 전 관중석을 올려다보았다. 장혜련이 본부석 맨 끝에 앉아 있었다. 1차 때 본 남색 점퍼 둘이 이번에도 그 곁을 지켰다.
젊은 심판이 구령을 붙이는 목소리가 체육관 천장에 부딪혀 두 번 울렸다.
세인은 들어가지 않았다. 그렇다고 밀지도 않았다. 서다예를 피스트 끝으로 몰면 왼발이 뒤로 빠지고, 빠지는 순간 반 박자가 비었다. 세인은 그 반 박자가 어디 있는지 정확히 알았다. 알면서 그 자리에 칼을 넣지 않았다. 피스트 가운데에서 붙었다. 정면으로, 손목과 손목으로.
다예가 처음 세 점 동안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기울였다. 마스크 너머로도 그 고개가 보였다. 8대 7 휴식 때 다예가 피스트 건너편에서 세인을 노려보았다. 봐주지 말라는 눈이었다.
세인은 봐주는 게 아니었다. 이렇게 이기고 싶었다. 작년 결승을 갚는 거라면, 작년에 진 그 자리에서 갚아야 했다. 발목이 아니라 칼로.
후반은 빨랐다. 동시타가 두 번 나왔고, 젊은 심판은 한 번은 다예, 한 번은 세인에게 주었다. 둘 다 세인이 보기에도 맞는 판정이었다. 14대 14. 체육관 안이 조용해졌다. 「서다예 우리 밥줄」 현수막 아래 응원봉도 멈췄다.
작년과 같은 숫자였다. 작년에 세인은 여기서 참지 못하고 들어갔다. 다예는 그걸 기다렸다.
세인은 기다렸다. 일 초, 이 초. 다예도 기다렸다. 둘의 칼끝이 허공에서 한 뼘 떨어져 떨렸다. 마스크 안에서 세인의 숨이 철망에 부딪혀 돌아왔다. 삼 초째에 다예의 오른 어깨가 아주 조금 내려갔다. 들어오려는 어깨였다. 세인은 그 어깨가 다 내려가기 전에 막을 자리에 칼을 놓았다. 다예의 칼이 세인의 칼에 걸렸고, 세인은 걸린 칼을 그대로 밀어 올리며 다예의 마스크를 베었다.
초록 불 하나. 15대 14.
세인은 마스크를 벗지 못했다. 철망 안에서 숨만 몰아쉬었다. 작년 3월부터 열한 달 동안 돌려 본 장면이 그 자리에서 뒤집혔다. 그런데 기쁘지 않았다. 아니, 기쁜데 그 기쁨이 어디에 놓여야 할지 몰랐다.
다예가 먼저 마스크를 벗었다. 땀에 젖은 얼굴로 걸어와 손을 내밀었다. 세인이 마스크를 벗고 그 손을 잡았다. 다예가 세인을 끌어당겨 귀에 대고 말했다.
“발목 안 노렸지.”
“응.”
“바보.” 다예가 손을 놓고 웃었다. 눈가가 조금 붉었다. “찍으러 간다.”
다예는 칼 가방도 정리하지 않고 관중석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왼발이 계단 위에서 한 번 휘청거렸다. 청주시청 선배들이 놀라서 다예를 붙잡았고, 다예는 붙잡힌 채로 휴대폰을 꺼내 난간에 팔꿈치를 고정했다.
*
결승은 오후 세 시였다. 심판석에 앉는 사람을 보고 세인은 칼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임창도였다. 세인은 관중석을 올려다보았다. 난간 위에 휴대폰 렌즈 하나가 세인 쪽을 향해 있었다.
차도희는 1차 때와 달랐다. 세인이 손목 밑으로 파고들 것을 알고 있었다. 칼을 낮게 들고 기다렸다. 어깨가 아프다는 말은 거짓말이 아닌 듯했다. 손목을 내릴 때마다 차도희의 입에서 짧은 신음이 났다. 그래도 차도희는 손목을 내렸다. 세인은 차도희가 이기려고 아픈 걸 참는 사람이라는 걸 그때 알았다. 판정 덕만 보는 사람이 아니었다.
동시타는 네 번 나왔다. 임창도는 세 번을 차도희에게 주었다. 세 번째에 세인은 영상 판독을 요청했고, 영상 심판은 화면을 한 번만 돌려 보고 판정 유지를 알렸다. 남은 판독 요청은 없었다.
14대 14.
세인은 기다리지 않았다. 기다리면 차도희의 긴 팔이 먼저 왔다. 세인은 먼저 팔을 폈다. 팔이 다 펴진 다음에 앞발이 나갔다. 사브르에서 공격은 팔이 펴지는 순간 시작된다. 세인의 칼이 차도희의 어깨에 닿았고 차도희의 칼이 세인의 마스크에 닿았다. 불 두 개가 동시에 켜졌다.
임창도는 오래 뜸을 들이지 않았다. 손이 올라갔다. 차도희 쪽이었다.
“공격, 오른쪽. 15대 14. 시합 끝.”
세인은 마스크를 벗었다. 귀에서 체육관 소리가 다 빠져나가고 자기 맥박만 들렸다. 차도희는 마스크를 벗지 않은 채 서 있었다. 한참 뒤에야 마스크를 벗었는데, 이긴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차도희가 악수를 하며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죄송하다는 말을 이번에는 하지 않았다.
관중석에서 다예가 내려오고 있었다. 계단을 두 칸씩 뛰었다. 휴대폰을 높이 들고 있었다.
*
본부석은 피스트 끝 긴 테이블이었다. 장혜련이 가운데 앉아 결과지에 서명을 하고 있었다. 세인이 테이블 앞에 섰다. 마스크를 옆구리에 끼고, 아직 칼도 내려놓지 않은 채였다.
“마지막 점, 다시 봐 주세요.”
“영상 판독 하셨잖아요. 판정 유지됐고요.” 장혜련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서명하던 펜이 멈추지 않았다.
“판독 영상이 정면 카메라 하나예요. 옆에서 찍은 게 있어요.”
다예가 세인 옆에 섰다. 숨이 차서 말 대신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화면 속에서 세인의 팔이 아주 천천히 펴졌다. 일 초가 십 초로 늘어난 영상이었다. 세인의 팔이 다 펴졌을 때 차도희의 팔은 아직 굽어 있었고, 차도희의 앞발은 바닥에 붙어 있었다. 그다음에야 차도희의 팔이 나왔다.
본부석 옆에 있던 다른 심판 둘이 고개를 빼고 화면을 보았다. 그중 한 사람이 작게 숨을 들이켰다.
장혜련이 펜을 내려놓았다. 화면을 끝까지 보았다. 그러고는 휴대폰을 손가락 하나로 밀어 다예 쪽으로 돌려주었다.
“관중 휴대폰 영상은 판정 근거가 될 수 없어요. 규정에 그렇게 되어 있어요.” 장혜련이 다예를 보았다. “서다예 선수, 관중석에서 촬영하셨네요. 경기 중인 선수를 무단으로요.”
“제 룸메이트예요. 허락받았어요.”
“그래요?” 장혜련이 웃었다. 1월 4일 엘리베이터 앞에서 지었던 그 웃음이었다. “판정에 불만이 있으면 공식 이의 제기 서식으로 내세요. 경기 끝나고 삼십 분 안에요. 협회 공정위원회가 볼 거예요. 그 영상도 같이 내시든가요.”
“낼게요.” 세인이 말했다.
“저도요.” 다예가 말했다.
장혜련이 둘을 번갈아 보았다. 그 눈길이 세인의 보호대 찬 무릎에 잠깐 내려갔다가 다예의 발목으로 옮겨 갔다. 세인은 그 눈길이 어디에 머무는지 다 보았다.
“선수 둘이 같이요?” 장혜련이 서식 두 장을 테이블 위에 놓았다. “룸메이트끼리 사이가 좋네요. 좋은 일이에요. 같이 내면 같이 책임지는 거고요.”
“책임질게요.” 세인이 서식을 집었다.
길창호가 본부석 쪽으로 달려왔다. 멀미약 기운이 덜 빠진 얼굴이었다. 길창호는 서식을 든 세인을 보고, 장혜련을 보고, 다시 세인을 보았다. 무슨 말을 하려다가 입을 막고 돌아섰다. 멀미 때문인지 다른 것 때문인지 세인은 알 수 없었다.
*
돌아오는 버스는 어두웠다. 다섯 시인데 해가 벌써 산 뒤로 넘어갔다. 길창호는 맨 앞에서 눈을 감고 있었고, 차도희는 맨 뒤에서 창밖만 보았다. 세인 옆에서 다예가 잠들었다. 고속도로에 오르고 십 분도 안 돼서 다예의 머리가 세인의 어깨로 넘어왔다.
세인은 어깨를 움직이지 않았다. 다예의 머리카락에서 체육관 먼지 냄새와 땀이 마른 냄새가 났다. 다예의 무릎 위에 휴대폰이 놓여 있었고, 화면에는 아직 영상이 멈춰 있었다. 세인의 팔이 다 펴지고 차도희의 팔이 아직 굽은 한 장면이었다.
다예가 잠결에 왼발을 끌어당겼다. 버스 바닥에 닿은 발목이 조금 뒤틀린 채였다. 세인은 몸을 숙여 다예의 운동화 끈을 풀고, 발을 자기 칼 가방 위에 올려 주었다. 발목이 똑바로 놓였다. 다예는 깨지 않았다.
한 시간 동안 세인은 어깨가 저렸다. 저린 어깨를 그대로 두었다.
진천 나들목을 지날 때 세인의 휴대폰이 울렸다. 맨 앞자리의 길창호였다. 같은 버스 안에서 전화를 걸었다. 세인이 받자 길창호의 목소리가 낮게 깔려 나왔다.
“니들 무슨 짓 했노? 협회에서 방금 연락 왔다. 다음 주 서울. 공정위원회.” 길창호가 숨을 한 번 들이켰다. “내도 오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