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5,068자)
동시에 켜진 불
선발전 라이벌과 룸메이트가 되었습니다 · 진해솔
서다예는 문세인이 사다리를 오를 때 늘 왼발부터 올린다는 것을 입촌 사흘째에 알았다.
누구나 쓰는 발이 있다. 오른손잡이 펜싱 선수는 대개 오른발을 앞에 두고 싸우니, 사다리도 오른발부터 오르는 게 몸에 붙는다. 그런데 세인은 사다리 첫 칸에 꼭 왼발을 먼저 올렸다. 오른 무릎은 펴진 채로 따라 올라갔다. 잘 때는 수건을 돌돌 말아 오른 무릎 밑에 넣었고, 아침이면 그 수건이 이불 밖으로 떨어져 아래 칸 다예의 얼굴 근처에 와 있었다. 다예는 사흘 동안 그 수건을 세 번 주워 위 칸으로 던져 주었다.
그러니까 다예도 알았다. 세인이 다예의 발목을 아는 만큼 다예도 세인의 무릎을 알았다. 다만 그걸 들고 선발위원실에 들어가지 않았을 뿐이었다.
자판기 앞 일 뒤로 다예는 세인과 말을 섞지 않았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었다. 말을 꺼내려고 하면 선발위원실 문패가 먼저 떠올랐다. 둘은 아침마다 말없이 식당에 갔고, 말없이 계란말이 두 개씩을 받았다. 염정자가 사흘째 되는 날 집게를 든 채로 둘을 번갈아 보았다.
“오늘은 장사 안 혀?”
“휴업이에요.” 다예가 말했다.
“폐업 아니고?” 염정자가 계란말이를 하나 더 얹어 주려다가 도로 집어 갔다. “싸웠으면 빨리 풀어. 남긴 반찬 보면 다 알어. 둘이 요새 김치를 안 먹어.”
*
1월 마지막 주 월요일, 1차 선발전은 선수촌 펜싱장에서 열렸다. 일곱 명이 열다섯 점짜리 토너먼트를 치렀고, 순위대로 선발 점수가 매겨졌다. 첫 판을 기다리는 동안 다예의 휴대폰에 청주시청 감독의 문자가 왔다.
「다예야 오늘 잘하고. 시의회 예산 심의 3월이다. 대표 한 명 있으면 팀 못 없앤다. 부담 갖지 말고.」
부담 갖지 말라는 말 앞에 부담을 세 줄 적어 보내는 사람이었다. 다예는 답장으로 엄지 하나를 보냈다. 청주시청 여자 펜싱팀은 선수 넷이었다. 그중 다예가 제일 어렸고, 다예가 대표가 못 되면 나머지 셋의 직장이 3월에 없어졌다.
8강은 쉽게 이겼다. 준결승에서 다예가 만난 사람은 차도희였다. 피스트 옆 심판석에 앉는 사람을 보고 다예는 마스크 끈을 조이던 손을 멈췄다. 임창도 심판이었다. 협회 심판 가운데 장혜련과 같은 실업팀 출신이라는 소문이 있는 사람이었고, 오늘 대진표의 심판 배정은 선발위원회가 했다.
다예는 관중석을 올려다보았다. 2층 난간에 장혜련이 있었다. 그 옆 의자에 도운건설 점퍼를 입은 남자 둘이 앉아 있었다.
임창도가 준비 구령을 불렀다. 목소리가 쓸데없이 컸다.
차도희는 빨랐다. 긴 팔 끝의 칼이 다예가 움직이기 전부터 먼저 자리를 잡고 있었다. 다예는 그걸 알았다. 그래서 들어가지 않고 기다렸다. 차도희가 먼저 나오면 막고 되받는다. 막고 되받는 것은 다예가 제일 잘하는 일이었다. 첫 네 점 가운데 세 점을 그렇게 땄다.
5대 4에서 첫 번째가 왔다. 다예와 차도희가 동시에 나갔고 칼이 동시에 닿았다. 빨간 불과 초록 불이 함께 켜졌다. 사브르에서 양쪽 불이 다 켜지면 심판이 누가 먼저 공격을 시작했는지 정해 한쪽에만 점수를 준다. 이 종목에서는 그걸 우선권이라 불렀다. 다예는 자기가 먼저 팔을 뻗었다고 생각했다. 팔을 뻗는 순간 차도희의 앞발은 아직 바닥에 붙어 있었다.
임창도가 손을 들었다. 차도희 쪽이었다.
“공격, 왼쪽. 5대 5.”
다예는 마스크 안에서 숨을 한 번 길게 내쉬었다. 한 번은 있을 수 있었다. 사브르의 동시타는 십 분의 일 초 안에서 갈리고, 심판의 눈은 기계가 아니었다.
9대 9에서 두 번째가 왔다. 이번에는 다예가 확실히 먼저였다. 차도희가 한 발 물러서다가 반격으로 바꾼 것이었고, 물러서는 순간 차도희는 공격을 내려놓았다. 그래도 임창도의 손은 차도희 쪽으로 올라갔다. 다예는 마스크를 벗었다.
“영상 판독 요청합니다.”
선수는 한 경기에 영상 판독을 정해진 횟수만큼 요청할 수 있다. 판독은 피스트 옆 모니터 앞에 앉은 영상 심판이 했다. 영상 심판은 화면을 두 번 돌려 보고 고개를 저었다. 판정 유지. 다예는 그 영상 심판의 얼굴도 알았다. 오늘 아침 장혜련과 같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사람이었다.
관중석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 사이로 낯익은 목소리가 하나 섞였다.
“그게 왜 저쪽이야?”
세인이었다. 다음 준결승을 기다리며 몸을 풀던 세인이 피스트 옆에서 칼을 든 채 서 있었다. 길창호가 세인의 팔을 잡아 끌어 앉혔다. 다예는 세인 쪽을 보지 않고 마스크를 다시 썼다. 철망 너머로 세인이 보이면 안 될 것 같았다.
13대 12에서 세 번째가 왔다. 다예가 앞서 있었다. 이번에도 동시였고, 이번에도 차도희였다. 13대 13. 그다음 두 점은 판정이 필요 없었다. 다예의 왼발이 두 번 늦었다. 세 번째 동시타 뒤로 발목 안쪽이 타는 것처럼 뜨거웠다. 15대 13.
악수할 때 차도희의 손이 차가웠다. 차도희가 다예의 눈을 보지 않고 말했다.
“죄송해요.”
“버릇이라며.”
“네. 근데.” 차도희가 말을 끝내지 못하고 손을 놓았다. 그리고 2층 난간 쪽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다예는 그 눈길을 보았다. 이기고 나서 기쁜 사람이 위를 보는 눈길이 아니었다.
결승은 세인과 차도희였다. 심판이 바뀌었다. 다예는 수건을 머리에 뒤집어쓴 채 관중석 맨 끝에 앉아 그 경기를 보았다. 세인은 차도희에게 정면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아래로, 손목 밑으로 파고들었다. 차도희가 손목을 내릴 때마다 오른쪽 어깨가 굳는 것이 보였다. 세인은 15대 11로 이겼다. 동시타는 한 번 나왔고, 세인에게 갔다.
1차 순위는 문세인, 차도희, 서다예 순이었다.
*
밤 열한 시, 412호. 다예는 발목에 얼음을 대지 않았다. 대신 테이프를 다 뜯고 맨발로 침대 끝에 앉아 있었다. 세인이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다예가 고개를 들었다.
“앉아.”
세인이 책상 의자를 끌어왔다. 둘 사이가 무릎 하나 거리였다. 라디에이터가 딱 소리를 냈다. 다예는 그 소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말했다.
“그 방에서 뭐래?”
“그 방.”
“선발위원실. 나 자판기 앞에 있었잖아. 너 나오는 거 봤고.” 다예는 목소리가 떨리지 않게 천천히 말했다. “오늘 내 경기에 임창도 들어왔어. 우선권 세 번이 다 저쪽이었고. 그리고 장 위원님이 일주일 내내 나한테 의무실 가라고 문자를 보냈어. 쥐 난 것도 기록 남기라고. 내가 바보야? 문세인 선수가 내 발목 갖다 줬으면 말해. 화 안 낼게. 나라도 그랬을 수 있으니까.”
마지막 말은 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데 나왔다. 세인의 얼굴이 굳었다.
“너라도 그랬을 수 있어?”
“모르지. 대표 자리잖아.”
세인이 일어났다. 다예는 세인이 위 칸으로 올라가 버릴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세인은 사다리가 아니라 책상 서랍을 열었다. 맨 아래 서랍에서 검은 천 뭉치를 꺼냈다. 무릎 보호대였다. 세인이 그걸 다예 무릎 위에 던졌다. 보호대는 오래 써서 벨크로 부분이 보풀처럼 일어나 있었다.
“달라고 했어. 네 발목.” 세인이 다시 의자에 앉았다. “언제부터 아픈지, 밤에 뭐 하는지, 테이프 몇 겹 감는지. 사실만 말하면 판단은 자기가 한대.”
“그래서?”
“없다고 했어. 위 칸이라 아래 잘 안 보인다고.”
다예는 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았다. 참는 동안 세인이 잠옷 바지를 무릎 위까지 걷어 올렸다. 오른 무릎 안쪽과 바깥쪽에 작은 흉터가 둘 있었다. 하얗게 아문, 손톱만 한 자국이었다.
“그랬더니 이걸 꺼내더라. 고2 때 수술 기록. 연골 꿰맨 거. 대표팀 의무 기록엔 없어. 길 코치님이 뺐거든. 장 위원이 그것까지 알아.” 세인이 바지를 내렸다. “네 발목 주면 이 종이를 잊어 준대. 안 주면 기억한대.”
다예는 무릎 위의 보호대를 내려다보았다. 보호대 안쪽에 유성펜으로 이름이 적혀 있었다. 문세인. 글씨가 지금보다 어렸다. 고등학생 글씨였다.
“너 이거 왜 보여 줘?”
“네가 바보냐고 물어서.” 세인이 말했다. “바보 아니라고 말하려면 이거밖에 없었어.”
다예는 한동안 말을 못 했다. 세인은 이길 방법을 찾으면 끝까지 파는 사람이었다. 다예의 발목을 찾아냈고 그걸로 평가전을 이겼다. 그런 사람이 그 방에서 다예의 발목을 내려놓고 대신 자기 무릎을 잡혔다. 다예는 그게 어떤 계산으로도 맞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계산이 안 맞는 일을 하는 세인을 다예는 처음 보았다.
“바보는 너다.” 다예가 보호대를 세인에게 돌려주었다. “그거 그냥 주지. 내 발목 어차피 다 아는 건데.”
“그게 네 거니까.”
세인이 보호대를 받아 서랍에 넣었다. 서랍 닫히는 소리가 좁은 방에서 크게 울렸다. 다예는 맨발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장판이 미지근했다.
“오늘 우선권 세 번.” 다예가 말했다. “내가 혼자 이의 신청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진 선수가 우는소리 하는 거야. 근데 1등 한 사람이 같이 하면?”
세인이 다예를 보았다. 다예는 세인이 뭐라고 할지 기다렸다. 세인이 이길 방법을 찾을 때 짓는 얼굴, 눈썹 끝이 조금 내려가는 그 얼굴이 되었다.
“오늘 건 증거가 없어. 판독 영상은 협회 거잖아.”
“그럼 다음에 증거를 만들자.” 다예가 휴대폰을 들어 보였다. “다음 선발전, 내 경기 아닐 때는 내가 관중석에서 네 경기 찍을게. 슬로로. 내 휴대폰 일 초에 240장 찍혀.”
“네 경기는 누가 찍어?”
“네가 찍든가. 위 칸 선수.” 다예가 웃었다. 일주일 만에 웃었다. 웃고 나니 볼이 아팠다.
세인도 웃었다. 소리 없이 입꼬리만 올라갔는데, 그게 다예가 본 세인의 웃음 가운데 제일 컸다.
다예는 일어나 이불을 걷었다. 그리고 아래 칸을 손바닥으로 두 번 두드렸다.
“오늘은 그냥 여기서 자. 계란말이 안 받을게.”
세인이 아래 칸을 보았다. 오래 보았다. 그러고는 사다리 첫 칸에 왼발을 올렸다.
“싫어. 이겨서 가져갈 거야.”
“너 무릎.”
“위 칸 매트리스 얇아서 무릎엔 오히려 좋대.” 세인이 위 칸으로 올라갔다. 침대가 삐걱거렸다. “누가 그러던데. 아까 지어냈어.”
다예는 불을 끄고 누웠다. 위 칸 매트리스 밑판이 세인이 돌아누울 때마다 조금씩 내려앉았다. 그 밑판까지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였다. 다예는 손을 뻗지 않았다. 대신 오늘 경기의 세 번째 동시타를 다시 떠올렸다. 이번에는 혼자 떠올리는 게 아니었다.
“문세인.”
“왜?”
“수건 떨어뜨리지 마. 무릎 밑에 넣는 거.”
위 칸이 한참 조용하다가, 수건을 고쳐 끼우는 소리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