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5,382자)

편지

사십 년 만의 동창회 · 석담율

돋보기가 없었다⁠.

토요일 밤 열 시⁠, 선옥은 살림집 거실을 세 바퀴 돌았다⁠. 피아노 위⁠, 식탁 위⁠, 소파 틈⁠, 재킷 주머니⁠. 학원 연습실 세 칸을 다 열어 보고⁠, 현관 신발장 위까지 보았다⁠. 누런 봉투는 식탁 한가운데 놓여 있었다⁠. 갑분의 가방에서 나와 선옥의 손으로 건너온 봉투는⁠, 오는 내내 한 번도 내려놓지 않아서 모서리가 손땀에 눅눅했다⁠.

네 바퀴째에 거실 창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았다⁠. 은회색 단발 위에 돋보기가 얹혀 있었다⁠. 토론회 때 총무를 보고 웃었던 자리 그대로였다⁠. 선옥은 소리 내어 웃었다⁠. 웃음이 거실 벽에 부딪혀 돌아왔다⁠. 혼자 사는 집에서는 웃음도 메아리가 졌다⁠.

연필 깎는 칼로 봉투 윗변을 갈랐다⁠. 마흔두 해 묵은 풀이 바스락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안에 접힌 편지지가 한 장 있었다⁠. 줄 쳐진 공책 종이를 뜯어 낸 것이었고⁠, 뜯은 쪽 가장자리가 톱니처럼 들쭉날쭉했다⁠. 편지지를 펴자 무언가 식탁 위로 떨어졌다⁠. 작고 노란 것이 식탁 유리 위에서 한 번 튀었다⁠.

머리 고무줄이었다⁠. 노란색이었다⁠. 고무가 삭아서 손끝으로 잡자 바스러질 듯 갈라졌다⁠.

선옥은 고무줄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편지를 읽었다⁠. 볼펜 글씨가 기차 시간에 쫓긴 듯 오른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선옥아⁠. 오늘 다방에서 우리 아버지 논 넘기는 도장을 찍었다⁠. 니 아버지 잘못 아니다⁠. 쌀값 잘못이다⁠. 너는 아무것도 몰라도 된다⁠.⁠」

「⁠니 아버지가 나한테 니 앞에 다시 나타나지 말라고 하셨다⁠. 맞는 말씀이다⁠. 논 없는 집 아들이 무슨 낯으로 니 앞에 서겠냐⁠. 그래서 나 오늘 밤 기차로 서울 간다⁠. 돈 벌어서 낯을 만들어 올게⁠.⁠」

「⁠6월 15일 저녁 여섯 시⁠, 무심천 서문교 아래에서 기다릴게⁠. 니가 오면 그때 다 말할게⁠. 니가 안 오면 니 뜻으로 알게⁠.⁠」

「⁠이학년 가을에 주려던 거⁠. 수요일이라 노란색⁠. 상렬⁠.⁠」

선옥은 편지를 두 번 읽었다⁠. 두 번째는 소리 내어 읽었다⁠. 열아홉 살 남자아이의 문장이 예순한 살 여자 목소리로 거실에 울렸다⁠. 「⁠낯을 만들어 올게⁠」에서 목이 멨다⁠. 선옥은 목이 멘 채로 끝까지 읽었다⁠. 반음씩 내려가는 목소리를 바로잡지 않았다⁠.

피아노 위에서 정묵이 웃고 있었다⁠. 선옥은 사진을 보지 않으려다 보았다⁠. 정묵은 1985년 6월 15일 저녁에 선옥과 무심천 둑길을 걸었다⁠. 선옥은 6월 15일이라는 날짜에 아무 뜻도 두지 않았다⁠. 어머니가 시내 다방에서 윤씨 집 아들을 만나 보라고 했고⁠, 선옥은 엄마 체면을 봐서 나갔다⁠. 다방에서 나와 둑길을 걸었다⁠. 장미가 피어 있었다⁠. 정묵은 장미 이름을 하나도 몰라서 계속 틀렸다⁠.

선옥은 노란 고무줄을 편지지 사이에 다시 끼우고⁠, 편지를 봉투에 넣었다⁠. 봉투를 피아노 뚜껑 위에 올려놓으려다⁠, 정묵의 사진 옆이라 그만두었다⁠. 식탁 위에 두었다⁠. 토요일 밤 선옥은 식탁 의자에서 잤다⁠. 침대에 누우면 봉투가 혼자 있을 것 같아서였다⁠.

*

일요일 오후⁠, 갑분의 아파트 현관은 상자로 막혀 있었다⁠. 이삿짐 상자가 거실 천장까지 쌓였고⁠, 상자마다 매직으로 「⁠영감⁠」 「⁠나⁠」가 갈려 쓰여 있었다⁠. 「⁠영감⁠」 상자가 훨씬 많았다⁠. 거실 벽에는 낚싯대가 줄지어 기대어 있었다⁠. 선옥은 세다가 서른에서 그만두었다⁠.

“⁠쉰두 개야⁠.⁠” 갑분이 말했다⁠. 눈이 부어 있었다⁠. “⁠서른여덟 해 동안 낚싯대가 쉰두 개 늘었어⁠. 나는 하나도 안 늘었고⁠.⁠”

안방에서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 내 릴 어딨어⁠? 파란 거⁠.⁠”

“⁠여보 아니라니까⁠! 다음 달부터 여보 아니야⁠!⁠” 갑분이 소리치고 선옥을 보았다⁠. “⁠파란 릴은 내가 버렸어⁠. 몰래⁠.⁠”

선옥은 웃지 않았다⁠. 갑분도 웃지 않았다⁠. 둘은 상자 사이에 겨우 남은 식탁에 마주 앉았다⁠. 식탁 위에 찻잔 대신 테이프 커터가 있었다⁠.

“⁠언제부터 가지고 있었어⁠?⁠”

“⁠졸업식 날 밤 열 시부터⁠.⁠” 갑분이 테이프 커터를 만지작거렸다⁠. 톱니에 손가락을 대었다 뗐다⁠. “⁠반장이 기차 타기 전에 우리 집에 왔어⁠. 대문 앞에서 이거 선옥이 주라고⁠. 니네 집은 니 아버지 때문에 못 간다고⁠. 나는 받았지⁠. 내일 아침 버스에서 주려고⁠.⁠”

“⁠근데⁠?⁠”

“⁠열한 시에 너희 엄마가 왔어⁠.⁠” 갑분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갑분 목소리가 작아지는 것을 선옥은 처음 들었다⁠. “⁠사과 바구니를 들고⁠. 윤씨네 과수원 사과였어⁠. 우리 엄마랑 마당에서 한참 얘기하더니 나를 불렀어⁠. 갑분아⁠, 반장이 뭐 맡겼지⁠. 내가 어떻게 아시냐고 물으니까⁠, 반장 아버지가 다방에서 그러더래⁠. 우리 아들이 편지를 썼다고⁠.⁠”

“⁠우리 엄마가 뭐랬어⁠?⁠”

“⁠빌었어⁠.⁠” 갑분이 테이프 커터를 놓았다⁠. “⁠마당 흙바닥에 무릎 꿇고⁠. 선옥이는 윤씨네로 가야 한다고⁠. 그래야 정미소 빚이 없어진다고⁠. 그 편지 주면 우리 딸 기차 탄다고⁠. 우리 딸 기차 타면 니 아버지 정미소가 아니라 우리 집이 넘어간다고⁠. 열아홉 살한테 어른이 무릎을 꿇었어⁠. 나는 무서웠어⁠.⁠”

선옥은 식탁 모서리를 쥐었다⁠. 상자에서 종이 냄새가 났다⁠.

“⁠육 월이 지나고⁠, 나는 그냥 가지고 있었어⁠. 태우려고 성냥을 세 번 켰어⁠. 세 번 다 손가락만 데었어⁠.⁠” 갑분이 오른손 검지를 들어 보였다⁠. 아무 자국도 없었다⁠. 마흔두 해 전 일이었다⁠. “⁠그다음 해 가을에 너 약혼했지⁠. 그때는 늦었다고 생각했어⁠. 니가 정묵 씨랑 웃는 거 보니까 더 늦었다고 생각했고⁠.⁠”

“⁠늦은 건 니가 정할 일이 아니야⁠.⁠” 선옥의 목소리가 반음 내려갔다⁠. 이번에는 바로 올라오지 않았다⁠. “⁠내 결혼식 날 니가 축가 불렀어⁠. 「⁠우리 결혼했어요⁠」 음 다 틀리고⁠.⁠”

“⁠그날 이 편지 가방에 있었어⁠.⁠” 갑분이 울기 시작했다⁠. 소리 없이 울다가 소리가 났다⁠. “⁠축가 부르는 동안 가방이 무거웠어⁠. 진짜야⁠. 가방이 무거웠어⁠.⁠”

안방에서 남자 목소리가 또 들렸다⁠. “⁠여보⁠, 파란 릴⁠!⁠”

“⁠버렸어⁠! 내가 버렸어⁠! 서른여덟 해 만에 처음 버렸어⁠!⁠”

갑분이 울면서 소리쳤다⁠. 안방이 조용해졌다⁠. 선옥은 일어났다⁠. 의자가 상자에 부딪혀 상자 하나가 기울었다⁠. 「⁠영감⁠」 상자였다⁠. 선옥은 상자를 바로 세우지 않았다⁠.

“⁠왜 이제 줬어⁠?⁠”

“⁠반장이 탕비실에서 편지 얘기를 꺼냈잖아⁠. 문밖에서 들었어⁠. 이제 안 꺼내면 나는 평생 그 가방을 메고 다녀야 해⁠.⁠” 갑분이 눈을 닦았다⁠. “⁠그리고 선옥아⁠, 나 반장 사무장 그대로 할 거야⁠. 이거랑 그건 다른 일이야⁠. 나는 월급이 필요해⁠.⁠”

선옥은 현관으로 갔다⁠. 신발을 신다가 돌아보았다⁠. 갑분은 낚싯대 쉰두 개 앞에 앉아 있었다⁠.

“⁠너는 그게 다른 일이야⁠?⁠”

갑분은 대답하지 않았다⁠. 선옥은 문을 닫았다⁠. 복도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문 너머로 갑분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몰랐다⁠. “⁠파란 릴은 베란다에 있어⁠.⁠”

*

월요일 오후⁠, 요양원 삼 층 휴게실의 화투판은 평소처럼 시끄러웠다⁠. 텔레비전에서는 「⁠정부⁠, 민간 실버타운 규제 완화 검토⁠」라는 자막이 흘렀고⁠, 할머니들은 자막보다 비 광의 행방에 관심이 많았다⁠.

선옥은 어머니 휠체어 앞에 쪼그려 앉았다⁠. 손에 봉투를 들고 있었다⁠. 한봉녀는 봉투를 보고 패를 내려놓았다⁠. 할머니 둘이 눈치를 보며 사탕을 챙겨 자리를 떴다⁠.

“⁠엄마가 갑분이한테 무릎 꿇었어⁠?⁠”

한봉녀는 대답하지 않고 딸의 손에서 봉투를 가져갔다⁠. 겉봉의 「⁠선옥이에게⁠」를 엄지로 문질렀다⁠. 돋보기 없이도 읽었다⁠. 글자가 컸다⁠.

“⁠이게 아직 있었네⁠. 갑분이가 태운다더니⁠.⁠”

“⁠엄마가 나를 윤씨 집에 팔았어⁠?⁠”

“⁠팔았다⁠.⁠” 한봉녀가 봉투를 무릎에 올려놓았다⁠. 목소리가 걸걸하고 낮았다⁠. “⁠그래서 너 굶었냐⁠? 정묵이가 너한테 손 한 번 올렸냐⁠? 정묵이가 니 피아노 학원 차려 줬냐 안 차려 줬냐⁠?⁠”

“⁠그게 무슨 상관이야⁠. 나한테 물어봤어야지⁠.⁠”

“⁠물어봤으면 니가 뭐랬겠냐⁠. 상렬이 따라간다고 했겠지⁠. 기차 타고⁠. 그럼 우리 집은⁠?⁠” 한봉녀가 휠체어 팔걸이를 손바닥으로 쳤다⁠. 화투 칠 때와 같은 소리였다⁠. “⁠정미소 넘어가고⁠, 상렬이네 논 넘어가고⁠, 그래도 빚이 남았어⁠. 남은 빚이 우리 집이었어⁠. 니 아버지가 그 겨울에 정미소 창고에서 밤마다 뭘 했는지 아냐⁠? 들보 쳐다봤어⁠. 나는 그거 지켜보느라 겨울 내내 잠을 못 잤다⁠.⁠”

선옥은 어머니 손을 보았다⁠. 화투 패를 쥐던 손이 휠체어 팔걸이를 붙잡고 떨었다⁠.

“⁠윤 사장이 그러더라⁠. 우리 아들이 정미소 딸을 오래 봤다고⁠. 혼사만 맺으면 빚은 집안일이니 없던 걸로 하겠다고⁠. 니 아버지가 그 말 듣고 다방에서 울었어⁠. 상렬이 아버지는 도장 찍고 나가고⁠, 니 아버지는 울고⁠, 상렬이는 창밖에 너 보고⁠.⁠” 한봉녀가 숨을 골랐다⁠. “⁠내가 정했다⁠. 니 아버지는 못 정했어⁠. 그래서 내가 정했어⁠. 내가 갑분이네 마당에서 무릎 꿇었다⁠.⁠”

“⁠정묵 씨는⁠? 정묵 씨도 알았어⁠?⁠”

한봉녀가 딸을 오래 보았다⁠. 휴게실 텔레비전에서 광고가 흘렀다⁠. 할머니들이 화투판으로 돌아오려다 멈칫하고 다시 물러났다⁠.

“⁠정묵이는 알았다⁠. 결혼 전에 다 알고 왔다⁠. 지 아버지가 빚을 걸고 혼사 맺는 걸 알고⁠, 와서 나한테 그러더라⁠. 어머님⁠, 빚은 없던 걸로 해도 선옥 씨는 선옥 씨가 정하게 해 주세요⁠. 내가 그랬지⁠. 그 애는 지가 정하면 기차 탄다⁠. 정묵이가 아무 말도 안 하더라⁠. 그러고 평생 너한테도 아무 말 안 했다⁠. 그게 정묵이여⁠.⁠”

선옥은 쪼그려 앉은 다리가 저렸다⁠. 일어나지 않았다⁠. 저린 다리로 버티는 동안 머릿속에서 정묵의 꼬리표 글씨가 떠올랐다⁠. 자로 잰 듯한 「⁠정미소⁠」 십여 년 전 등기 서류를 내밀며 정묵이 했던 말도 떠올랐다⁠. 당신 아버지 땅이니 당신 이름으로 해⁠. 그때는 다정한 말로 들었다⁠. 지금은 다른 말로 들렸다⁠. 마흔두 해 동안 한 음으로 들리던 말이 두 음으로 갈라졌다⁠.

“⁠엄마⁠, 왜 이제 와서 다 말해⁠?⁠”

“⁠니가 물었으니까⁠.⁠” 한봉녀가 봉투를 딸에게 돌려주었다⁠. “⁠그리고 나도 이제 정할 게 하나 남았다⁠.⁠”

“⁠뭘⁠?⁠”

“⁠나 느릅실 간다⁠. 상렬이 쉼터 생기면 거기서 죽을 거다⁠. 개울 소리 들으면서⁠.⁠” 한봉녀가 화투 패를 한 장 집어 딸 앞에 놓았다⁠. 비 광이었다⁠. 우산 쓴 사람⁠. “⁠그러니까 니가 선거 져라⁠.⁠”

선옥은 비 광을 보았다⁠. 우산 쓴 사람이 비를 맞고 있었다⁠. 마흔두 해 전 졸업식 날 밤⁠, 비도 안 오는데 우산을 들고 정류장에 왔던 아버지가 떠올랐다⁠. 우산은 비 때문이 아니었다⁠. 우는 얼굴을 가리려고 든 우산이었다⁠.

“⁠엄마는 마흔두 해 전에도 정했고⁠, 지금도 정해⁠?⁠”

“⁠그럼 누가 정하냐⁠. 니 아버지는 없고⁠, 정묵이도 없는데⁠.⁠” 한봉녀가 다른 할머니들을 손짓해 불렀다⁠. 화투판이 다시 펴졌다⁠. “⁠한 판 치자⁠. 니가 이기면 내가 생각해 보마⁠.⁠”

선옥은 화투를 쳤다⁠. 첫 판은 졌다⁠. 두 번째 판에서 선옥은 어머니가 패를 섞을 때 비 광을 무릎 밑에 밀어 넣는 소리를 들었다⁠. 화투 패가 담요에 스치는 소리는 아주 작았다⁠. 선옥은 담요를 들추고 비 광을 꺼내 판에 올려놓았다⁠. 맞은편 할머니들이 손뼉을 쳤다⁠.

“⁠봉녀 언니 걸렸다⁠!⁠”

“⁠사십 년 동안 처음이여⁠!⁠”

한봉녀는 딸을 노려보다가 웃었다⁠. 이가 다 보이게 웃었다⁠. 박하사탕 판돈이 처음으로 선옥 앞에 쌓였다⁠.

“⁠생각해 봤다⁠.⁠” 한봉녀가 사탕 한 알을 딸 쪽으로 밀었다⁠. “⁠그래도 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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