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5,356자)

토론회

사십 년 만의 동창회 · 석담율

토요일 오전 열한 시⁠, 학원 맨 안쪽 연습실에서 일곱 살 채롬이가 바이엘을 덮었다⁠. 채롬이는 토요일마다 오는 마지막 학생이었다⁠. 레슨이 끝나면 선옥에게 사탕 하나를 받아 가는 것이 규칙이었는데⁠, 오늘은 사탕을 받고도 일어나지 않았다⁠.

“⁠원장님⁠, 아까 혼자 무슨 말 했어요⁠? 문 밖에서 들었어요⁠. 어머니들⁠, 개울⁠, 장학금⁠.⁠”

“⁠연습했어⁠. 오늘 어른들 앞에서 말해야 돼⁠.⁠”

“⁠한 번 더 해 보세요⁠. 제가 들어 줄게요⁠.⁠”

선옥은 웃으며 피아노 의자에서 일어났다⁠. 채롬이가 보면대 앞에 팔짱을 끼고 앉았다⁠. 선옥은 오늘 토론회 첫마디를 처음부터 말했다⁠. 음대⁠, 정미소 난로⁠, 등록금 고지서⁠. 다 말하자 채롬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원장님⁠, 너무 길어요⁠. 저는 고지서가 뭔지 모르겠어요⁠.⁠”

“⁠돈 내라는 종이야⁠.⁠”

“⁠그럼 돈 내라는 종이를 불에 넣었다고 하면 되잖아요⁠.⁠” 채롬이가 사탕 껍질을 깠다⁠. “⁠그리고 원장님은 화나면 목소리가 낮아져요⁠. 아까 장학금 할 때 낮아졌어요⁠. 화난 거 아니면 높게 하세요⁠. 엄마가 그러는데 선거는 웃는 사람이 이긴대요⁠.⁠”

“⁠너희 엄마가 선거를 알아⁠?⁠”

“⁠아파트 동대표 떨어졌어요⁠. 안 웃어서⁠.⁠”

선옥은 웃음을 터뜨렸다⁠. 채롬이는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르고 따라 웃었다⁠. 선옥은 채롬이를 현관까지 배웅하고⁠, 연습실로 돌아와 원고 첫 문장에 볼펜으로 줄을 그었다⁠. 등록금 고지서⁠. 줄 위에 썼다⁠. 돈 내라는 종이⁠. 다시 지웠다⁠. 등록금 고지서는 등록금 고지서였다⁠. 다만 목소리는 높게 하기로 했다⁠. 아파트 동대표 선거에서 떨어진 채롬이 엄마의 교훈이었다⁠. 선옥은 거울 앞에서 한 번 웃어 보았다⁠. 웃는 얼굴이 어색해서 진주 귀걸이만 바로잡았다⁠.

*

토요일 오후 두 시⁠, 동창회 사무실은 상가 이 층 치과와 보험 대리점 사이에 있었다⁠. 문에 붙은 「⁠무심 합동 동창회⁠」 아크릴 간판은 한쪽 나사가 빠져 15도쯤 기울어 있었다⁠. 선옥은 간판을 보고 갑분이 달아 준 이름표를 떠올렸다⁠. 오늘 이름표는 선옥이 직접 달았다⁠. 똑바로였다⁠.

사무실 안에는 낡은 상패가 진열장을 채우고 있었다⁠. 체육대회 준우승⁠, 체육대회 준우승⁠, 체육대회 삼위⁠. 우승은 없었다⁠. 진열장 앞에 접이식 의자 서른 개가 놓였고⁠, 서른 개가 다 찼다⁠. 늦게 온 사람들은 벽에 기대 서 있었다⁠. 에어컨이 덜컹거리며 돌았다⁠.

맨 앞에서 남고 동창 하나가 장비를 설치하고 있었다⁠. 동창회 동영상 채널 「⁠무심 동창 TV⁠」의 주인이었다⁠. 구독자는 여든일곱 명이었다⁠. 마이크 스탠드에 셀카봉을 청테이프로 감아 붙이고⁠, 셀카봉 끝에 휴대전화를 끼웠다⁠. 조명은 사무실 책상에서 가져온 스탠드 두 개였다⁠. 한 개는 불이 깜빡거렸다⁠.

“⁠생방송 들어갑니다⁠! 오⁠, 사⁠, 삼⁠…⁠”

채널 주인이 손가락을 접다가 둘에서 멈췄다⁠. 휴대전화 화면을 들여다보고 얼굴이 하얘졌다⁠.

“⁠벌써 들어갔네⁠. 언제부터 들어갔지⁠?⁠”

화면 옆 댓글 창에 글이 올라왔다⁠. 「⁠다 들려요⁠」 「⁠오사삼 귀여워⁠」 「⁠소리 작아요⁠」 사무실이 웃음으로 흔들렸다⁠. 선관위원장을 물려받은 총무가 모기팔의 호루라기를 입에 물고 불었다⁠. 쉭 하는 바람 소리만 났다⁠. 총무가 다시 불었다⁠. 쉭⁠. 모기팔이 벽에 기대 선 채 고개를 저었다⁠.

“⁠배에 힘을 줘야 혀⁠, 배에⁠.⁠”

“⁠배가 없어서 그래요⁠.⁠”

총무가 호루라기를 내려놓고 손뼉을 쳤다⁠. 토론회가 시작되었다⁠.

*

상렬과 선옥은 진열장 앞에 놓인 탁자 양 끝에 앉았다⁠. 상렬 뒤 의자에 갑분이 앉아 있었다⁠. 무릎 위에 보온병이 있었다⁠. 갑분은 선옥과 눈이 마주치자 보온병 뚜껑을 열었다 닫았다⁠. 대추차 냄새가 탁자까지 왔다⁠.

상렬이 먼저 말했다⁠. 연회장에서와 같은 이야기였는데⁠, 오늘은 숫자가 적었다⁠.

“⁠우리 어머니는 서울 요양병원에서 돌아가셨습니다⁠. 돌아가시기 한 달 전부터 매일 같은 말씀을 하셨어요⁠. 개울 소리가 안 들린다고⁠. 병실 창밖에 고속도로가 있었거든요⁠. 차 소리를 개울 소리로 알고 주무셨습니다⁠.⁠” 상렬이 탁자 위에 두 손을 얹었다⁠. “⁠느릅실 어머니들한테는 개울 소리를 들려 드리고 싶습니다⁠. 그게 제 공약 전부입니다⁠.⁠”

댓글이 올라왔다⁠. 「⁠울컥⁠」 「⁠반장님 멋져요⁠」 「⁠우리 엄마도⁠」 사무실 안에서 누가 코를 풀었다⁠.

선옥은 쪽지를 보지 않고 말했다⁠.

“⁠저는 고등학교 삼 학년 때 서울 음대에 붙었습니다⁠. 그해 겨울 집이 망해서 못 갔어요⁠. 등록금 고지서를 정미소 난로에 넣었습니다⁠. 잘 타더라고요⁠.⁠” 사무실이 조용해졌다⁠. 선옥은 일부러 목소리를 올렸다⁠. “⁠그래서 저는 해마다 오십만 원짜리 장학금이 얼마나 큰지 압니다⁠. 오십만 원이 등록금은 못 돼요⁠. 그런데 오십만 원 받은 아이는 내년에도 학교에 옵니다⁠. 누가 자기를 보고 있다는 걸 아니까요⁠.⁠”

댓글이 올라왔다⁠. 「⁠선옥 언니 귀걸이 예뻐요⁠」 「⁠귀걸이 말고 말을 들어⁠」 「⁠갑분 언니 보온병 뭐예요⁠」 「⁠대추차래요⁠」 「⁠대추차 공약은 없나⁠」

토론은 이어서 사십 분 동안 오갔다⁠. 상렬은 쉼터 운영비를 물으면 자기가 메운다고 했고⁠, 선옥은 장학생 수를 물으면 해마다 다섯 명에서 열 명으로 늘리겠다고 했다⁠. 질문은 대개 단톡방에서 왔고⁠, 총무가 휴대전화를 팔 길이만큼 뻗어 읽었다⁠. 돋보기는 머리 위에 있었다⁠. 누가 “⁠돋보기 머리에 있어요⁠!⁠”라고 외쳤고⁠, 총무는 돋보기를 내려쓰고 질문을 다시 읽었다⁠. 같은 질문이었다⁠.

세 시 십 분⁠, 단톡방에 새 글이 올라왔다⁠. 사무실 안의 휴대전화가 한꺼번에 울렸다⁠. 띵동⁠, 띵동⁠, 띵동⁠. 동시에 울린 알림음이 화음처럼 겹쳤다⁠. 선옥은 겹친 소리가 불협화음이라는 것을 먼저 들었다⁠.

처음 보는 계정이었다⁠. 이름은 「⁠느릅실사랑⁠」이었다⁠.

「⁠서선옥 후보는 느릅실 개발 부지 땅 주인입니다⁠. 장학금 핑계로 개발을 막고 땅값을 올리려는 것 아닙니까⁠? 이해충돌⁠! 후보 사퇴하세요⁠!⁠」

같은 글이 생방송 댓글 창에도 올라왔다⁠. 세 번 연달아였다⁠. 사무실 안이 웅성거렸다⁠. 의자가 삐걱거렸다⁠. 총무가 호루라기를 물었다⁠. 쉭⁠.

선옥은 댓글 창을 보았다⁠. 채널 주인의 휴대전화 화면 위쪽에 시청자 숫자가 떠 있었다⁠. 쉰둘이던 숫자가 아흔이 되고⁠, 백사십이 되었다⁠. 단톡방에서 글을 본 동창들이 생방송으로 몰려오고 있었다⁠.

“⁠맞습니다⁠.⁠”

선옥이 말했다⁠. 사무실이 조용해졌다⁠. 셀카봉 끝의 휴대전화가 선옥을 향했다⁠.

“⁠그 땅 제 거예요⁠. 느릅실 다리 어귀⁠, 우리 아버지 정미소 터입니다⁠. 남편이 십여 년 전에 제 이름으로 돌려놓았어요⁠.⁠” 선옥은 휴대전화 렌즈를 똑바로 보았다⁠. “⁠그리고 하나 더 말씀드릴게요⁠. 글 올리신 분이 안 쓰신 거요⁠.⁠”

선옥은 상렬을 보았다⁠. 상렬은 눈을 피하지 않았다⁠.

“⁠탁 후보님 회사가 느릅실 골짜기에 시니어 리조트를 짓습니다⁠. 하얀 건물 스무 채⁠, 분교 터에는 유리 지붕 건물⁠. 수도권 은퇴자들이 들어올 곳이에요⁠. 쉼터는 리조트 입구에 붙는 단층 건물이고⁠, 마을 사람 몫은 열 자리입니다⁠. 우리 동창회 기금이 쉼터에 들어가면⁠, 회사는 그걸 시 심의에 냅니다⁠. 지역 주민이 동의했다는 자료로요⁠. 제 땅은 리조트 진입로 자리고요⁠.⁠”

댓글 창이 멈췄다가 터졌다⁠. 「⁠진짜⁠?⁠」 「⁠리조트⁠?⁠」 「⁠반장님 해명해 주세요⁠」 「⁠그럼 쉼터는 미끼⁠?⁠」 「⁠선옥이 땅 얘기는 왜 안 했어⁠」 「⁠둘 다 말 안 했네⁠」 시청자 숫자가 삼백을 넘었다⁠. 구독자 여든일곱 명 채널에 삼백 명이 들어왔다⁠. 채널 주인이 휴대전화 화면을 들여다보며 입을 벌렸다⁠.

상렬이 마이크를 당겼다⁠.

“⁠맞습니다⁠. 회사 사업입니다⁠. 연회장에서 말씀 안 드린 건 제 잘못입니다⁠.⁠” 상렬의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다만 한 음 낮았다⁠. “⁠쉼터는 제가 지킵니다⁠. 회사 계획이 바뀌어도 쉼터는 짓습니다⁠. 그리고 「⁠느릅실사랑⁠」은 제가 아닙니다⁠. 저는 서선옥 후보를 이런 식으로 이기고 싶지 않습니다⁠.⁠”

“⁠그럼 누구예요⁠?⁠”

벽에 기대 선 동창 하나가 물었다⁠. 상렬은 대답하지 않았다⁠. 갑분이 보온병을 꽉 쥐었다⁠. 총무가 이번에는 손으로 탁자를 쳤다⁠.

“⁠토론회 마칩니다⁠! 투표는 총회 날⁠! 다들 진정하시고⁠, 대추차 드세요⁠!⁠”

채널 주인이 셀카봉을 뽑다가 청테이프에 손가락이 붙었다⁠. 생방송 마지막 화면은 채널 주인의 손가락과 청테이프였다⁠.

*

사람들이 계단으로 빠져나가는 동안 선옥은 사무실 안쪽 탕비실로 들어갔다⁠. 탕비실은 냉장고 하나와 싱크대 하나로 꽉 차는 방이었다⁠. 선옥은 수도를 틀었다⁠. 손이 떨려서 물소리로 덮고 싶었다⁠. 물이 스테인리스 싱크대를 두드렸다⁠.

문이 열리고 닫혔다⁠. 상렬이었다⁠. 탕비실 문에 등을 댔다⁠.

“⁠글은 내가 안 올렸어⁠.⁠”

“⁠알아⁠. 니 아들이 올렸겠지⁠. 정리하겠다더니 이렇게 정리하네⁠.⁠” 선옥은 수도를 잠갔다⁠. 물소리가 끊기자 냉장고 모터 소리가 커졌다⁠. “⁠아들 단속도 못 하면서 동창회를 단속하겠다고⁠?⁠”

“⁠의건이가 직접 했는지 아랫사람이 했는지 몰라⁠. 확인할게⁠.⁠”

“⁠확인하고⁠, 또 선거 끝나고 말해 줄 거야⁠?⁠”

상렬이 대답하지 않았다⁠. 냉장고 위 전자레인지 시계가 세 시 삼십일 분에서 삼십이 분으로 넘어갔다⁠.

“⁠너도 오늘 처음 말했잖아⁠. 리조트⁠. 니가 말해서 나는 오늘 표를 많이 잃었어⁠.⁠” 상렬이 웃었다⁠. 웃음이 짧았다⁠. “⁠잘했어⁠. 내가 했어야 했는데⁠.⁠”

“⁠칭찬하지 마⁠. 기분 나빠⁠.⁠”

“⁠알았어⁠. 칭찬 안 할게⁠.⁠” 상렬이 문에서 등을 뗐다⁠. “⁠선옥아⁠, 다방 이야기 나머지 반 말이야⁠.⁠”

선옥은 손을 행주에 닦다 멈췄다⁠.

“⁠나머지 반은 편지에 다 썼었어⁠. 그날 밤 기차 타기 전에⁠. 니 집에 직접 갈 수가 없었어⁠. 니 아버지가 다방에서 나한테 그러셨거든⁠. 우리 딸 앞에 다시 나타나지 말라고⁠. 그래서 편지를 썼어⁠. 기다려 달라고⁠, 돈 벌어서 오겠다고⁠, 유월에 어디서 만나자고⁠.⁠”

“⁠무슨 편지⁠?⁠”

상렬이 눈을 가늘게 떴다⁠. 선옥의 얼굴을 오래 보았다⁠. 레슨 시간에 아이가 음을 모를 때 선옥이 짓던 얼굴을⁠, 상렬이 짓고 있었다⁠.

“⁠편지⁠. 졸업식 날 밤에⁠.⁠”

“⁠나 편지 받은 적 없어⁠. 마흔두 해 동안 한 장도⁠.⁠”

냉장고 모터가 멈췄다⁠. 탕비실이 한순간 조용해졌다⁠. 조용해지자 문밖의 소리가 들렸다⁠. 누가 문 앞에 서 있었다⁠. 보온병 뚜껑이 플라스틱 몸통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딸깍⁠, 딸깍⁠. 손이 떨리는 소리였다⁠.

“⁠누구한테 맡겼어⁠?⁠”

선옥이 물었다⁠. 상렬은 대답 대신 탕비실 문을 열었다⁠.

갑분이 서 있었다⁠. 보온병을 두 손으로 안고 있었다⁠. 갑분의 얼굴이 빨갰다가 하얘졌다⁠. 입이 웃는 모양을 만들려다 실패했다⁠. 갑분은 웃지 못할 때 늘 먹었는데⁠, 손에 든 것이 보온병뿐이었다⁠.

“⁠갑분아⁠.⁠”

선옥이 불렀다⁠. 갑분은 대답하지 않고 보온병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어깨에 멘 가방을 열었다⁠. 지갑⁠, 휴대전화⁠, 혈압약⁠, 돋보기⁠, 사탕 봉지⁠. 갑분은 가방 안쪽 지퍼 주머니를 열었다⁠. 지퍼가 오래 걸리지 않고 한 번에 열렸다⁠. 자주 열어 본 지퍼였다⁠.

갑분이 꺼낸 것은 누런 봉투였다⁠. 모서리가 닳아 둥글었다⁠. 겉봉에 볼펜 글씨가 있었다⁠. 열아홉 살 남자아이의 글씨⁠, 힘을 너무 주어 종이가 눌린 글씨였다⁠.

「⁠선옥이에게⁠」

봉투 입구는 붙어 있었다⁠. 마흔두 해 동안 한 번도 뜯기지 않은 풀자국이 누렇게 굳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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