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5,393자)

보증

사십 년 만의 동창회 · 석담율

금요일 아침 일곱 시⁠, 느릅실 마을회관에는 된장국 냄새가 없었다⁠. 모기팔은 국을 끓이지 않았다⁠. 부엌 가스레인지 앞에 형광 연두 등산복을 입은 채 서 있다가⁠, 미닫이문이 열리자 국자 없는 손을 어디 둘지 몰라 바지 옆선에 비볐다⁠.

할머니 넷과 할아버지 둘이 아랫목에 앉아 있었다⁠. 화투판은 펴지 않았다⁠. 텔레비전도 꺼져 있었다⁠. 마을회관이 이렇게 조용한 것은 장례 다음 날 말고는 없었다⁠.

선옥은 신발을 벗고 들어가 휴대전화를 방바닥 가운데에 놓았다⁠. 재생을 눌렀다⁠. 부스럭거리는 소리⁠, 열쇠 소리⁠, 차 문 소리⁠. 의건의 평평한 서울말과 모기팔의 말끝 유가 방 안에 퍼졌다⁠. “⁠그 할머니는 떡 두 말이믄 돼유⁠.⁠” 개울집 할머니가 무릎 위에 놓은 손을 움켜쥐었다⁠. 마지막 “⁠…수수료는 다음 주에⁠.⁠”가 끝나자 냉장고 모터 소리만 남았다⁠.

“⁠주머니가 혼자 눌렀슈⁠.⁠” 모기팔이 먼저 말했다⁠. “⁠전화기가 바지 주머니에서 혼자서 녹음을 하고 혼자서 보냈슈⁠. 나는 잠금도 할 줄 몰러⁠.⁠”

“⁠전화기가 혼자 한 건 녹음이고요⁠. 수수료는 이장님이 받으셨죠⁠?⁠”

모기팔의 귀가 붉어졌다⁠. 호루라기 줄을 손가락에 감았다 풀었다⁠.

“⁠받았어⁠. 동의서 한 장에 얼마씩⁠. 받았어⁠.⁠” 모기팔이 목소리를 높였다⁠. 높인 목소리가 갈라졌다⁠. “⁠근데 선옥아⁠, 이장 수당이 한 달에 얼마인지 알어⁠? 그걸로 기름값도 안 나와⁠. 회관 보일러 기름은 누가 넣는지 알어⁠? 나여⁠. 내 돈으로 넣어⁠. 겨울마다⁠.⁠”

“⁠그래서 떡 두 말이에요⁠?⁠”

“⁠그 말은 잘못했어⁠. 할머니 미안혀유⁠.⁠” 모기팔이 개울집 할머니에게 고개를 숙였다⁠. 할머니는 고개를 돌렸다⁠. 모기팔이 다시 선옥을 보았다⁠. “⁠근데 내가 왜 이러는지도 들어 봐⁠. 우리 아들 서울 갔어⁠. 손주는 여기 와 본 적이 없어⁠. 여름에 한 번 오라니까 모기 물린다고 안 와⁠. 모기팔 할아버지 동네에 모기가 많대⁠. 웃기지⁠?⁠”

아무도 웃지 않았다⁠.

“⁠버스는 하루 두 번이여⁠. 분교는 닫았고⁠, 가게도 닫았고⁠, 작년에 우리 동네에서 세 분이 돌아가셨는데 새로 온 사람은 한 명도 없어⁠. 이대로 십 년 가믄 이 회관에 나 혼자 남어⁠. 나 혼자 된장국 끓여서 나 혼자 먹어⁠.⁠” 모기팔이 방바닥을 손바닥으로 쳤다⁠. “⁠길이 나고 건물이 들어서믄 사람이 와⁠. 서울 부자들이라도 와⁠. 부자들도 늙으면 아퍼⁠. 아프면 요양보호사가 와야 혀⁠. 그 요양보호사가 우리 동네 사람이믄 좋잖여⁠. 니는 시내에서 피아노 치믄서 우리 동네 장학금 걱정을 하는디⁠, 나는 우리 동네 장례 걱정을 혀⁠.⁠”

선옥은 대답하지 못했다⁠. 모기팔의 말은 반음도 흔들리지 않았다⁠. 수수료 이야기를 할 때와 달랐다⁠. 저 말은 오래 혼자 연습한 말이었다⁠.

“⁠이장님 말씀은 알겠어요⁠.⁠” 선옥이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근데 이장님은 선관위원장이에요⁠. 선관위원장이 한 후보 회사한테 돈 받으면서 선거를 봐요⁠?⁠”

“⁠그럼 위원장 내놓을게⁠.⁠” 모기팔이 호루라기를 목에서 벗어 방바닥에 놓았다⁠. 호루라기가 데구루루 굴러 선옥 무릎 앞에서 멈췄다⁠. “⁠총무한테 넘겨⁠. 나는 이장만 할게⁠. 이장은 내가 안 하믄 할 사람이 없어⁠.⁠”

*

회관을 나오자 빗방울이 떨어졌다⁠. 처음에는 굵고 드문드문했다⁠. 아스팔트 위에 동전만 한 얼룩이 생겼다가 금세 이어 붙었다⁠. 선옥은 우산이 없었다⁠. 개울집 할머니가 대문 앞에서 비닐우산을 내밀었다⁠.

“⁠들어와⁠. 비 그칠 때까지⁠.⁠”

개울집 마루는 개울 소리가 가장 크게 들리는 자리였다⁠. 비가 개울물에 떨어지는 소리와 개울물이 바위를 넘는 소리가 겹쳐서⁠, 둘이 말을 하려면 목소리를 조금 높여야 했다⁠. 할머니가 미숫가루를 타 왔다⁠. 얼음이 없어서 미지근했다⁠.

“⁠할머니⁠, 도장 찍으셨어요⁠?⁠”

“⁠어제 찍었어⁠. 이장이 떡 두 말 들고 왔어⁠.⁠” 할머니가 웃었다⁠. 이가 몇 개 없었다⁠. “⁠떡 때문에 찍은 거 아녀⁠. 떡은 이장이 그냥 들고 온 거고⁠.⁠”

할머니가 장롱 서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탁산건설 로고가 찍힌 안내문이었다⁠. 「⁠주민 상생 쉼터 — 느릅실 주민 우선 입소 열 자리⁠」 아래에 할머니 이름이 볼펜으로 적혀 있었고⁠, 옆에 이장 도장과 회사 도장이 찍혀 있었다⁠.

“⁠열 자리 중에 하나가 내 자리여⁠. 동의서 찍는 집에 먼저 준대⁠.⁠” 할머니가 종이를 손바닥으로 펴 눌렀다⁠. “⁠나는 땅 판 거 아녀⁠. 내 자리를 산 거여⁠. 우리 영감 묻힌 산 보이는 자리⁠. 청주 요양원 가면 창문으로 아파트밖에 안 보인댜⁠. 니 엄마가 그러더라⁠.⁠”

선옥은 미숫가루 잔을 내려놓았다⁠. 할머니가 산 것은 땅값이 아니었다⁠. 창문이었다⁠. 창문 하나를 받으려고 도장을 찍은 할머니에게 선옥은 장학금 이야기를 꺼낼 수 없었다⁠.

“⁠할머니⁠, 쉼터 열 자리는 동창회 기금이 들어가야 생기는 거예요⁠. 제가 이기면 그 돈이 안 들어가요⁠.⁠”

“⁠그럼 니가 지믄 되겄네⁠.⁠”

할머니는 농담처럼 말했다⁠. 개울 소리가 농담을 덮었다⁠. 선옥은 비닐우산을 빌려 나왔다⁠. 과수원집에도 들렀다⁠. 과수원집 아저씨는 도장을 아직 안 찍었다고 했다⁠. 이유를 묻자 손가락을 펴서 숫자를 보여 주었다⁠. 회사가 부른 값보다 조금 더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장학금 이야기에는 고개를 끄덕였고⁠, 쉼터 이야기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도장 이야기에만 고개를 저었다⁠.

과수원집 처마 밑에서 휴대전화를 보니 단톡방이 또 불어 있었다⁠. 모기팔이 글을 올렸다⁠. 「⁠선관위원장 사퇴합니다⁠. 사정이 있어서유⁠. 후임은 총무님께⁠.⁠」 바로 아래 총무가 답했다⁠. 「⁠제가요⁠? 저 현수막도 제때 못 뽑는 사람인데요⁠?⁠」 웃음 이모티콘이 줄줄이 달렸고⁠, 누가 「⁠현수막은 40주년으로 영원히⁠」라고 썼다⁠. 어젯밤 음성 메시지를 들은 사람과 못 들은 사람이 단톡방에서 반씩 갈렸다⁠. 들은 사람은 들은 대로 옮겼고⁠, 못 들은 사람은 옮긴 말을 다시 옮겼다⁠. 다시 옮긴 말에서 떡 두 말은 떡 두 가마가 되어 있었다⁠.

*

빗줄기가 굵어졌다⁠. 비닐우산이 빗소리를 북처럼 울렸다⁠. 선옥은 정미소로 뛰었다⁠. 정미소 처마 밑에 누가 먼저 서 있었다⁠. 회색 니트가 어깨까지 젖은 남자였다⁠.

“⁠열쇠가 없어서⁠.⁠” 상렬이 말했다⁠. “⁠니가 오늘 마을회관 간다는 거 단톡방에서 봤어⁠. 이장한테 들으러 왔다가 비를 만났어⁠.⁠”

선옥은 열쇠를 꺼냈다⁠. 자물쇠는 이번에는 두 번 만에 열렸다⁠. 미닫이가 끼이익 울었다⁠. 상렬이 귀를 막는 시늉을 했다⁠.

“⁠이 소리⁠. 아직도 이러네⁠.⁠”

“⁠너도 알아⁠?⁠”

“⁠새벽마다 들었지⁠. 니 아버지가 문 여는 소리⁠. 이 소리 나면 우리 아버지가 일어났어⁠. 정미소 문 열었다고⁠, 우리도 논에 가자고⁠.⁠”

사무실은 양철 지붕 바로 아래였다⁠. 빗소리가 지붕을 두드려 방 안이 북 속 같았다⁠. 선옥은 젖은 재킷을 벗어 의자 등받이에 걸쳤다⁠. 상렬은 피아노 옆 철제 의자에 앉았다⁠. 둘이 앉자 사무실이 꽉 찼다⁠. 상렬의 젖은 니트에서 비 냄새와 섬유 유연제 냄새가 났다⁠. 선옥은 단발 끝에서 떨어지는 빗물을 손으로 훔쳤다⁠. 상렬이 손수건을 내밀었다⁠. 다림질한 손수건이었다⁠. 이혼한 남자가 손수건을 다려 다니는 것이 이상해서⁠, 선옥은 받아 들고 한참 보았다⁠.

“⁠세탁소에서 해 줘⁠.⁠” 상렬이 말했다⁠. “⁠혼자 사는 남자는 세탁소 사장님하고 제일 친해⁠.⁠”

선옥은 웃음을 참고 피아노 뚜껑을 열었다⁠. 가운데 라를 눌렀다⁠. 내려앉은 소리가 빗소리 밑으로 깔렸다⁠.

“⁠음이 낮네⁠.⁠”

“⁠반음 가까이⁠. 마흔두 해 동안 줄이 풀렸어⁠.⁠”

“⁠나도 그만큼 풀렸어⁠.⁠” 상렬이 건반 하나를 검지로 눌렀다⁠. 도였다⁠. 도⁠, 도⁠, 솔⁠, 솔⁠, 라⁠, 라⁠, 솔⁠. 학교종이었다⁠. 한 손가락으로 쳐서 소리가 뚝뚝 끊겼다⁠. “⁠이거 하나 배웠어⁠. 서울 가서⁠. 우리 아들 유치원 발표회 때⁠.⁠”

“⁠틀렸어⁠. 거기 솔 아니고 라야⁠.⁠”

“⁠라였어⁠?⁠”

“⁠사십이 년 걸려서 하나 배웠는데 그것도 틀렸어⁠.⁠”

상렬이 웃었다⁠. 웃음이 빗소리에 섞여 들렸다⁠. 웃음 끝이 살짝 올라갔다⁠. 선옥은 상렬의 웃음이 가까워서 의자를 반 뼘 뒤로 뺐다⁠. 반 뼘 뺀 자리에서도 상렬의 숨소리가 들렸다⁠.

선옥이 벽의 달력을 가리켰다⁠. 「⁠1985년 2월⁠」⁠, 졸업식 날 칸의 빨간 동그라미⁠. 「⁠윤 사장 오후 네 시 다방⁠」

“⁠너⁠, 그날 다방에 우리 아버지가 계셨다고 했지⁠. 윤 사장도 있었어⁠?⁠”

상렬이 달력을 보았다⁠. 오래 보았다⁠. 빗소리가 한 번 약해졌다가 다시 세졌다⁠.

“⁠있었어⁠. 우리 아버지도 있었고⁠.⁠”

“⁠너희 아버지가 왜⁠?⁠”

“⁠보증인이었으니까⁠.⁠” 상렬이 손을 무릎에 얹었다⁠. 손등의 검버섯이 형광등 아래 짙었다⁠. “⁠니 아버지가 기계 바꾸려고 윤 사장한테 돈을 빌렸어⁠. 우리 아버지가 보증을 섰고⁠. 그해 겨울 쌀값이 떨어지고 정미소가 넘어갔지⁠. 빚은 보증인한테 왔어⁠. 윤 사장이 정미소를 가져가고⁠, 모자라는 걸로 우리 아버지 논을 가져갔어⁠. 개울 건너 다섯 마지기⁠.⁠”

선옥은 숨을 쉬지 않았다⁠. 빗소리가 귀를 가득 채웠다⁠.

“⁠그날 다방은 우리 아버지 논 넘기는 도장 찍는 자리였어⁠. 나는 아버지 따라갔고⁠. 아버지가 도장 찍는 동안 창밖으로 니가 보였어⁠. 정류장 의자에 꽃다발 들고⁠.⁠”

“⁠나는 몰랐어⁠. 우리 아버지가 너희 집을⁠.⁠” 선옥의 목소리가 반음 내려갔다⁠. 내려간 목소리가 떨렸다⁠. “⁠아무도 말 안 했어⁠. 너희 집이 서울 간 건 너희 아버지가 서울에 일자리 구해서라고만⁠.⁠”

“⁠일자리는 맞아⁠. 공사판⁠. 우리 아버지 그날 밤 기차로 갔어⁠. 나도 따라갔고⁠.⁠” 상렬이 건반 뚜껑 가장자리를 손끝으로 쓸었다⁠. “⁠니 아버지 원망 안 해⁠. 쌀값이 떨어진 걸 누구 탓을 해⁠. 다만 그 집 딸 앞에 가서 나랑 같이 가자고 할 수는 없었어⁠. 논 넘기는 도장 찍고 나온 날에⁠.⁠”

“⁠그래서 날 떠났어⁠?⁠”

“⁠그건 반이야⁠.⁠”

“⁠또 반이야⁠?⁠” 선옥이 일어났다⁠. 의자 다리가 시멘트 바닥을 긁었다⁠. “⁠너는 다 반이야⁠. 기금도 반⁠, 말도 반⁠, 사십이 년 전 일도 반⁠. 나머지 반은 언제 줘⁠?⁠”

상렬도 일어났다⁠. 사무실이 좁아서 둘 사이가 한 뼘이었다⁠. 젖은 니트와 젖은 블라우스 사이로 빗소리가 들어왔다⁠. 상렬이 손을 들었다가⁠, 선옥의 어깨에 닿기 전에 피아노 뚜껑에 내려놓았다⁠.

“⁠나머지 반은 이 땅에 있어⁠.⁠” 상렬의 목소리가 한 음 낮아졌다⁠. 쉼터 이야기를 할 때의 높이였다⁠. “⁠선옥아⁠, 이 땅 나한테 팔아⁠. 회사 말고 나한테⁠. 쉼터는 여기 짓자⁠. 니 아버지 정미소 자리에⁠. 개울 건너 우리 아버지 논은 회사가 사도 내가 다시 살 거야⁠. 두 집이 잃은 땅에서 두 집 어머니들이 늙게 하자⁠.⁠”

주머니에서 상렬의 휴대전화가 떨었다⁠. 상렬은 꺼내지 않았다⁠. 떨림이 빗소리 아래에서 세 번⁠, 네 번 이어졌다⁠. 선옥은 소리만으로 알았다⁠. 평평하게⁠, 한 음도 오르내리지 않고 울리는 진동이었다⁠.

“⁠아들이네⁠. 받아⁠.⁠”

“⁠안 받아⁠.⁠”

“⁠받아⁠. 회사 말고 너한테 팔라며⁠. 너랑 회사가 다르다는 거⁠, 지금 보여 줘⁠.⁠”

상렬이 휴대전화를 꺼냈다⁠. 화면에 큰 글자가 떠 있었다⁠. 「⁠의건⁠」 진동은 다섯 번째에서 멎었다⁠. 이어서 메시지가 떴다⁠. 「⁠정미소 소유주 서선옥 씨⁠, 동창회 선거 상대 맞으시죠⁠. 이해충돌 문제는 토론회 전에 정리하겠습니다⁠.⁠」

상렬은 화면을 선옥에게 보여 주었다⁠. 숨기지 않았다⁠. 지붕 위로 비가 쏟아졌다⁠. 선옥은 화면 속 「⁠정리⁠」라는 낱말을 보았다⁠. 문장대에서 본 메시지에도 있던 낱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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