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5,575자)

측량 깃발

사십 년 만의 동창회 · 석담율

버스 기사는 말뚝을 보고 앞문을 닫을 뻔했다⁠.

“⁠아주머니⁠, 그 창은 뭐유⁠?⁠”

“⁠측량 말뚝이에요⁠. 주인한테 돌려주러 가요⁠.⁠”

“⁠창 들고 타시믄 다른 손님이 무서워혀유⁠.⁠”

“⁠제가 무서워 보여요⁠?⁠”

기사는 선옥의 연분홍 등산 조끼와 은회색 단발을 번갈아 보더니 문을 열어 주었다⁠. 말뚝은 통로 바닥에 눕혔다⁠. 개울집 할머니는 첫차로 이미 시내에 나갔고⁠, 오후 버스에는 선옥과 말뚝과 졸고 있는 학생 하나뿐이었다⁠. 학생은 내릴 때까지 말뚝을 깨지 않으려고 발을 들고 있었다⁠.

탁산건설 현장 사무소는 느릅실 어귀에서 국도로 나가는 삼거리에 있었다⁠. 하얀 컨테이너 두 개를 위아래로 포갠 건물이었다⁠. 철계단을 오를 때마다 쇠가 울렸다⁠. 텅⁠, 텅⁠, 텅⁠. 문에는 「⁠느릅실 시니어 리조트(⁠가칭⁠) 현장 사무소⁠」라는 간판이 붙어 있었다⁠. 선옥은 처음 보는 이름이었다⁠.

문을 열자 에어컨 바람이 얼굴을 덮었다⁠. 사무소 가운데 큰 탁자 위에 하얀 모형이 놓여 있었다⁠. 골짜기였다⁠. 느릅실 골짜기가 석고로 깎여 있었고⁠, 개울은 파란 아크릴로⁠, 산은 초록 솜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골짜기 안쪽에 하얀 건물 스무 채가 층층이 앉아 있었고⁠, 건물 사이로 산책길이 구불구불 이어졌다⁠. 분교 터 자리에는 유리 지붕을 얹은 건물이 있었다⁠. 이름표에 「⁠웰니스 센터⁠」라고 쓰여 있었다⁠.

골짜기 입구⁠, 다리 바로 앞에 작은 단층 건물이 하나 따로 놓여 있었다⁠. 「⁠주민 상생 쉼터⁠」 쉼터 옆으로 넓은 길이 동그랗게 돌아 나가는 회전 교차로가 있었다⁠. 선옥은 모형 앞에 허리를 굽혔다⁠. 회전 교차로가 깔린 자리는 정미소 터였다⁠.

“⁠어머님⁠, 오셨군요⁠.⁠”

목소리가 낮고 평평했다⁠. 서른 중반의 남자가 안쪽 책상에서 일어났다⁠. 무테 안경⁠, 하늘색 셔츠⁠, 소매를 두 번 접은 팔⁠. 상렬을 닮은 데가 하나도 없는데⁠, 몸을 돌리는 각도가 상렬과 같았다⁠.

“⁠탁산건설 부사장 탁의건입니다⁠. 아버지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무슨 말씀이요⁠?⁠”

“⁠기금 다툼 상대라고요⁠.⁠” 의건이 웃었다⁠. 웃음이 짧고 정확했다⁠. “⁠말뚝은 저희가 실례했습니다⁠. 측량 업체가 경계를 잘못 짚었습니다⁠. 사과드립니다⁠. 다시 꽂을 때는 미리 연락드리겠습니다⁠.⁠”

“⁠다시 꽂아요⁠?⁠”

“⁠경계 측량은 해야 합니다⁠. 어머님 땅이 골짜기 입구라서요⁠.⁠” 의건이 모형의 회전 교차로를 손끝으로 가리켰다⁠. “⁠여기가 입구입니다⁠. 지금 길로는 공사 차량도⁠, 나중에 입주하실 분들 차도 못 들어갑니다⁠. 다리를 넓히고 이 자리를 돌려 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어머님 땅이 필요합니다⁠. 시세보다 넉넉히 드리겠습니다⁠.⁠”

“⁠쉼터 짓는다면서요⁠. 동창회 기금으로⁠.⁠”

“⁠쉼터도 짓습니다⁠. 여기요⁠.⁠” 의건의 손끝이 작은 단층 건물로 옮겨 갔다⁠. “⁠시 개발 심의에서는 지역과 함께하는 시설이 있는지⁠, 주민이 동의했는지를 봅니다⁠. 동창회가 기금을 넣어 주시면 지역이 함께한다는 뜻이 됩니다⁠. 심사위원들이 그런 걸 좋아합니다⁠.⁠”

선옥은 모형에서 허리를 폈다⁠. 에어컨 바람이 목덜미를 식혔다⁠.

“⁠그럼 동창회 돈은 회사 허가증이네요⁠.⁠”

의건은 부인하지 않았다⁠. 안경을 고쳐 썼다⁠.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쉼터가 걱정입니다⁠. 스무 자리 쉼터는 돈이 안 됩니다⁠. 해마다 적자가 납니다⁠. 아버지는 그걸 개인 돈으로 메우겠다고 하십니다⁠. 회사 대표가 개인 돈으로 회사 사업의 적자를 메우겠다고 하시면⁠, 투자자들은 대표가 감정으로 움직인다고 봅니다⁠.⁠” 의건의 목소리가 한 음도 오르내리지 않았다⁠. “⁠내일 싱가포르에서 실사단이 옵니다⁠. 이 사업에 회사 직원 삼백 명 일 년 치 일이 걸려 있습니다⁠.⁠”

“⁠삼백 명 일 년 치하고 느릅실 할머니 스무 명 남은 평생하고⁠, 어느 게 더 무거워요⁠?⁠”

“⁠둘 다 무겁습니다⁠. 그래서 둘 다 하려고 합니다⁠. 어머님 땅만 있으면요⁠.⁠”

철계단이 울렸다⁠. 텅⁠, 텅⁠. 두 칸씩 오르다 마지막에 한 칸이었다⁠. 문이 열리고 상렬이 들어왔다⁠. 상렬은 모형 앞의 선옥을 보고⁠, 바닥에 눕힌 말뚝을 보고⁠, 아들을 보았다⁠.

“⁠어떻게 된 거야⁠?⁠”

“⁠측량 업체 실수입니다⁠. 사과드렸습니다⁠.⁠” 의건이 대답했다⁠. 아버지에게 하는 말이 선옥에게 하는 말보다 반음 더 평평했다⁠. 선옥은 아들 목소리의 평평함에서 오래 눌러 둔 소리를 들었다⁠. 아이들이 레슨 시간에 화를 참을 때 건반을 누르는 소리였다⁠.

상렬이 선옥에게 다가왔다⁠.

“⁠쉼터는 진짜야⁠. 회사 일은 회사 일이고⁠.⁠”

“⁠회사 일에 동창회 돈 넣는 게 회장 공약이야⁠?⁠”

“⁠쉼터는 내가 지어⁠. 회사가 안 지어도 내가 지어⁠.⁠”

“⁠그럼 왜 연회장에서 이 모형 얘기는 안 했어⁠?⁠” 선옥이 모형을 가리켰다⁠. 하얀 건물 스무 채가 형광등 아래 반짝였다⁠. “⁠골짜기를 다 덮는다는 얘기⁠. 정미소 자리에 길 낸다는 얘기⁠. 우리 엄마 같은 할머니들이 이 건물 스무 채에 들어갈 수 있는지도⁠.⁠”

상렬이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의건이 대신 말했다⁠.

“⁠입주 자격은 따로 정해집니다⁠.⁠”

“⁠얼마요⁠?⁠”

의건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는 것이 대답이었다⁠. 선옥은 말뚝을 집어 들었다⁠.

“⁠이건 가져갈게요⁠. 다음에 우리 땅에 꽂히면 또 뽑아서 들고 올 거예요⁠. 버스 기사님이 무서워하셔도⁠.⁠”

*

화요일 오후⁠, 선옥의 휴대전화로 음성 메시지가 하나 왔다⁠. 개울집 할머니였다⁠. 며느리가 녹음 버튼 누르는 법을 가르쳐 준 지 사흘째라고 했다⁠.

“⁠정미소 딸⁠, 나여⁠. 오늘 동네에 까만 차가 세 대 들어왔어⁠. 양복 입은 사람들이 내려서 개울을 들여다보는디⁠, 하나는 노란 머리여⁠. 영어를 혀⁠. 이장이 앞에서 손짓 발짓 하고⁠. 근데 노란 머리 양반이 개울 돌 밟다가 구두가 빠졌어⁠. 한 짝이 떠내려가서 이장이 바지 걷고 쫓아갔어⁠. 형광 연두가 개울 따라 뛰는디 볼 만했어⁠. 그 양반들 뭐 하는 사람이여⁠? 쉼터 짓는 사람들이여⁠?⁠”

할머니 목소리 뒤로 개울 소리가 쏟아졌다⁠. 할머니는 개울가에서 녹음한 모양이었다⁠. 선옥은 메시지를 두 번 들었다⁠. 실사단이었다⁠. 의건이 말한 싱가포르 사람들이 구두 한 짝을 느릅실 개울에 바치고 갔다⁠. 선옥은 답장을 녹음했다⁠. 처음으로 보내는 음성 메시지였다⁠. 「⁠할머니⁠, 그 사람들은 쉼터보다 큰 걸 지으려는 사람들이에요⁠. 도장 찍으라는 사람 오면 저한테 먼저 전화 주세요⁠.⁠」 보내고 나서 들어 보니 목소리가 학원 상담할 때처럼 또박또박했다⁠. 선옥은 녹음한 자기 목소리가 낯설어 한 번 더 듣지 않았다⁠.

*

수요일⁠, 가족 단톡방 「⁠우리 집(⁠4⁠)⁠」이 아침부터 바빴다⁠.

나빈이 사진 한 장을 올렸다⁠. 동창회 단톡방에서 누가 찍어 올린 문장대 사진이었는데⁠, 이모 하나가 친절하게 나빈에게 전달해 준 모양이었다⁠. 바위 위에서 상렬이 종이컵을 들고 있었고⁠, 프레임 가장자리에서 선옥이 상렬을 보고 있었다⁠. 나빈은 선옥의 얼굴에 빨간 동그라미를 쳤다⁠.

「⁠원장님 이 아저씨 누구야⁠. 엄마 눈빛 뭐야⁠. 해명 바람⁠.⁠」

사위가 실수로 하트 이모티콘을 눌렀다⁠. 바로 「⁠삭제된 메시지입니다⁠」로 바뀌었다⁠. 나빈이 썼다⁠. 「⁠여보 지금 하트 눌렀지⁠. 다 봤어⁠.⁠」

선옥은 레슨과 레슨 사이에 답을 쳤다⁠. 「⁠선거 상대 후보⁠. 엄마 눈빛은 노안⁠.⁠」

「⁠노안이면 안경 쓰고 째려봐야지 왜 맨눈으로 봐⁠.⁠」

「⁠너는 니 남편 하트나 봐라⁠.⁠」

사위가 엄지를 올렸다가 또 지웠다⁠. 손자가 엄마 휴대전화로 공룡 이모티콘을 열두 개 보냈다⁠. 단톡방이 공룡으로 덮였다⁠. 선옥은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다음 아이의 체르니를 펼쳤다⁠. 웃음이 손가락에 남아서 첫 마디가 조금 빨랐다⁠.

*

선거는 단톡방에서 한 칸씩 움직였다⁠.

목요일 아침⁠, 갑분의 음성 메시지가 올라왔다⁠. 갑분 목소리는 녹음해도 컸다⁠. “⁠탁상렬 후보 캠프 선거 사무장 염갑분입니다⁠! 다음 주 토요일⁠, 동창 여러분 무료 건강검진 버스가 체육관 앞에 옵니다⁠! 위내시경⁠, 대장내시경⁠, 골밀도 다 됩니다⁠! 수면 내시경도 됩니다⁠! 수면 하실 분은 보호자 데리고 오세요⁠! 보호자 없으면 제가 보호자 해 드립니다⁠!⁠”

단톡방이 들썩였다⁠. 「⁠대장은 싫다⁠」 「⁠수면이면 할 만하지⁠」 「⁠갑분이가 보호자면 깨어나서 더 놀라⁠」 「⁠신청합니다⁠」 「⁠저도요⁠」 신청이 서른을 넘었다⁠. 건강검진 신청자 이름 옆에 쉼터 지지 이모티콘이 하나씩 따라붙었다⁠.

선옥은 목요일 저녁⁠, 휴대전화로 받은 동영상 하나를 단톡방에 올렸다⁠. 화면 속 여자는 서른넷⁠, 간호복 차림이었다⁠. 병원 휴게실 같은 곳에서 휴대전화를 세워 두고 찍었는지 화면이 조금 기울어 있었다⁠.

“⁠무심여고 졸업생입니다⁠. 고등학교 이 학년 때 동창회 장학금 오십만 원을 받았어요⁠. 그 돈으로 문제집 사고⁠, 학원 한 달 다니고⁠, 나머지는 엄마 약값에 썼어요⁠. 지금 대학병원 간호사예요⁠. 선배님들 고맙습니다⁠. 저도 이제 회비 낼게요⁠.⁠”

간호사가 고개를 숙였다⁠. 뒤에서 호출 벨이 울렸고⁠, 간호사가 “⁠아⁠, 가 봐야 돼요⁠.⁠”라며 황급히 손을 뻗어 녹화를 껐다⁠. 동영상은 거기서 끝났다⁠.

단톡방이 잠깐 조용했다가⁠, 박수 이모티콘이 하나씩 올라왔다⁠. 여고 동창 몇이 「⁠울었다⁠」라고 달았다⁠. 남고 동창 하나가 「⁠멋진 후배⁠」라고 달았고⁠, 다른 남고 동창이 「⁠간호사면 쉼터에서도 일하면 되겠네⁠」라고 달았다⁠. 웃음 이모티콘이 이어졌다⁠. 건강검진 신청은 서른넷에서 멈췄다⁠.

*

목요일 밤 열한 시⁠, 선옥은 학원 위층 살림집 거실에서 내일 레슨 악보를 정리하고 있었다⁠. 휴대전화가 한 번 울렸다⁠. 단톡방이었다⁠. 모기팔이 음성 메시지를 올렸다⁠. 사십칠 초짜리였다⁠.

모기팔은 밤에 음성 메시지를 잘 올렸다⁠. 대개 노래방이거나 막걸리 집이었다⁠. 선옥은 무심코 눌렀다⁠.

처음 십 초는 부스럭거리는 소리였다⁠. 천이 마이크를 문지르는 소리⁠, 열쇠 꾸러미가 짤랑이는 소리⁠. 주머니 속이었다⁠. 그다음 차 문 닫히는 소리가 났고⁠, 사람 목소리가 들어왔다⁠. 멀고 작았다⁠. 선옥은 볼륨을 끝까지 올리고 휴대전화를 귀에 바짝 댔다⁠.

“⁠…도장은 반 넘게 받았습니다⁠. 과수원 집하고 개울집은 아직이고요⁠.⁠” 낮고 평평한 서울말이었다⁠.

“⁠개울집은 내가 이번 주에 받을게유⁠. 그 할머니는 떡 두 말이믄 돼유⁠.⁠” 모기팔이었다⁠.

“⁠정미소 땅이 문제입니다⁠.⁠”

“⁠그건 내가 어쩔 수가 없슈⁠. 선옥이는 고집이⁠…⁠”

“⁠그분이 동창회장 되시면 기금도 끝나고 동의 자료도 약해집니다⁠. 선거는 이장님이 선관위원장이시니까⁠…⁠”

“⁠나는 공정하게 혀유⁠. 호루라기 걸고⁠.⁠”

웃음소리가 나고⁠, 다시 부스럭거렸다⁠. 의건의 목소리가 한 번 더 들렸는데⁠, 마지막 낱말만 또렷했다⁠. “⁠…수수료는 다음 주에⁠.⁠” 거기서 끝났다⁠.

선옥은 두 번 더 들었다⁠. 세 번째에는 눈을 감고 들었다⁠. 개울집 할머니의 이름이 떡 두 말과 나란히 나왔다⁠. 버스에서 쑥떡을 반으로 갈라 주던 손이 떠올랐다⁠.

휴대전화가 다시 울렸다⁠. 단톡방 화면에서 모기팔의 음성 메시지 자리가 바뀌어 있었다⁠. 「⁠삭제된 메시지입니다⁠」 사십칠 초가 지나고 육 분 만이었다⁠. 아래로 글이 줄줄이 올라왔다⁠. 「⁠방금 그거 뭐예요⁠?⁠」 「⁠못 들었는데⁠」 「⁠나 들었어⁠」 「⁠도장이 뭐래⁠?⁠」 「⁠모기 대장 목소리 아녀⁠?⁠」

선옥은 휴대전화를 내려놓지 않았다⁠. 선옥의 휴대전화에는 사십칠 초가 아직 남아 있었다⁠. 지우기 전에 받은 음성은 받은 사람 전화에 남았다⁠. 갑분이 몇 해 전에 가르쳐 준 것이었다⁠. 지워 봐야 소용없다고⁠, 남편 욕을 했다가 지운 적이 있다고⁠.

선옥은 거실 업라이트 피아노 뚜껑을 열고 가운데 라를 눌렀다⁠. 제 음이었다⁠. 정미소의 내려앉은 라와 반음이 달랐다⁠. 선옥은 건반에서 손을 떼고 단톡방 입력 칸에 한 줄을 쳤다⁠.

「⁠모기팔 위원장님⁠, 내일 아침 느릅실 마을회관에서 뵙겠습니다⁠. 녹음은 제가 가지고 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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