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5,371자)

정미소

사십 년 만의 동창회 · 석담율

일요일 새벽 여섯 시 삼십오 분⁠, 육거리 시장 앞 정류장에는 장바구니가 사람보다 먼저 줄을 지었다⁠. 바퀴 달린 장바구니 다섯 개가 보도블록 위에 나란히 놓여 있었고⁠, 주인들은 정류장 의자에 앉아 김이 나는 종이컵 커피를 불었다⁠. 선옥은 장바구니 줄 끝에 등산화를 신은 발을 붙였다⁠.

버스는 정각에 들어왔다⁠. 번호판 숫자는 바뀌었지만 엔진 소리는 같았다⁠. 출발할 때 한 번 컥 하고 기침을 하고⁠, 기어를 올릴 때마다 차체가 끙 소리를 냈다⁠. 선옥은 앞에서 두 번째 창가에 앉았다⁠. 앉고 나서야 자리를 고른 것을 알았다⁠. 뒷자리는 비어 있었다⁠.

“⁠정미소 딸 아녀⁠?⁠”

통로 건너편 할머니가 장바구니를 끌어당기며 물었다⁠. 선옥은 할머니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기억나지 않았다⁠.

“⁠나 개울집이여⁠. 니 엄마랑 방앗간 줄 서서 싸우던 개울집⁠.⁠” 할머니가 손뼉을 쳤다⁠. “⁠봉녀 언니는 잘 있냐⁠? 화투는 아직 치고⁠?⁠”

“⁠어제도 사탕 열두 개 땄어요⁠.⁠”

“⁠아이고⁠, 요양원 가서도 따는구먼⁠. 우리 동네에서도 다 땄어⁠. 동네 사탕이 다 봉녀 언니 주머니로 갔어⁠.⁠” 개울집 할머니가 목소리를 낮췄다⁠. “⁠근데 니가 동창회 회장 나왔다며⁠? 상렬이랑 붙었다며⁠?⁠”

“⁠그걸 어떻게 아세요⁠?⁠”

“⁠우리 며느리 단톡방에 있어⁠. 며느리가 시내 사는 동창 동생이여⁠.⁠” 할머니가 눈을 가늘게 떴다⁠. “⁠상렬이가 쉼터 짓는다는디⁠, 니는 왜 반대여⁠? 우리 늙은이들 갈 데 생기는 거여⁠.⁠”

버스가 무심천을 건넜다⁠. 창밖으로 둑길의 장미가 붉게 지나갔다⁠. 선옥은 할머니에게 장학금 이야기를 하려다 그만두었다⁠. 장바구니 손잡이를 쥔 할머니 손이 다 갈라져 있었다⁠.

“⁠반대 안 해요⁠. 기금으로 하지 말자는 거예요⁠.⁠”

“⁠돈이 돈이지⁠, 기금 돈이 따로 있냐⁠?⁠”

할머니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장바구니에서 떡을 꺼내 반을 잘라 건넸다⁠. 쑥떡이었다⁠. 선옥은 받아서 먹었다⁠. 버스 안에서 먹는 떡은 마흔두 해 전에도 쑥떡이었다⁠.

가방 속 휴대전화가 떨었다⁠. 나빈이었다⁠. 「⁠원장님 일요일 아침에 느릅실 가신다고 갑분 이모가 단톡방에 썼던데⁠? 땅 보러 가⁠? 팔 거야⁠? 팔면 나한테 먼저 말해⁠.⁠」 선옥은 딸에게 「⁠쑥떡 먹으러 감⁠」이라고 답하고 전화를 가방 깊이 넣었다⁠. 갑분이 선옥의 일정을 상렬 캠프 단톡방에 올린 모양이었다⁠. 선거 사무장 노릇을 벌써 하고 있었다⁠.

*

느릅실 정류장은 다리 바로 앞이었다⁠. 양철 지붕을 얹은 대기실은 녹이 슬어 붉었고⁠, 의자 다리 하나는 벽돌로 괴어 있었다⁠. 버스가 떠나자 개울 소리가 남았다⁠. 물이 다리 기둥에 부딪치며 갈라지는 소리였다⁠. 오월 물은 맑고 얕아서 소리가 높았다⁠.

다리 건너 어귀에 정미소가 있었다⁠. 지붕은 양철⁠, 벽은 블록⁠, 문은 쇠로 된 미닫이였다⁠. 블록 벽에 붉은 페인트로 쓴 「⁠서씨 정미소⁠」의 글자가 반쯤 남아 있었다⁠. 서와 씨는 남았고 정미소는 비에 씻겨 정 자 받침만 남았다⁠. 문 앞에는 명아주가 무릎까지 자랐다⁠.

선옥은 정미소를 바로 열지 않고 마을회관 먼저 들렀다⁠. 이장에게 인사부터 하는 것이 동네 순서였다⁠.

마을회관 미닫이문을 열자 텔레비전 소리와 화투 소리가 한꺼번에 쏟아졌다⁠. 텔레비전에서는 일요일 아침 시사 프로그램이 「⁠지방 소멸 대책⁠, 이번엔 다를까⁠」라는 자막을 띄우고 있었고⁠, 할머니 넷은 자막을 등지고 화투를 쳤다⁠. 아랫목에는 할아버지 둘이 장기판을 사이에 두고 졸았다⁠.

“⁠선옥이 왔네⁠!⁠”

모기팔이 부엌에서 국자를 든 채 나왔다⁠. 일요일 아침에도 형광 연두였다⁠. 모기팔은 이장을 맡은 뒤로 일요일마다 마을회관 아침을 끓였다⁠. 할머니들이 혼자 밥 먹지 않게 하는 이장의 규칙이었다⁠.

“⁠이장님이 국도 끓여요⁠?⁠”

“⁠된장국은 내가 동네 일등이여⁠. 앉어⁠, 앉어⁠. 한 그릇 혀⁠.⁠”

된장국은 짰다⁠. 할머니들은 짜다고 하면서 다 비웠다⁠. 선옥이 국그릇을 내려놓자 할머니들이 화투를 접고 둘러앉았다⁠. 질문이 사방에서 날아왔다⁠.

“⁠니가 상렬이랑 붙었다며⁠?⁠”

“⁠상렬이가 장가를 두 번 갔다며⁠?⁠”

“⁠한 번 가고 한 번 나왔대⁠.⁠”

“⁠그럼 지금은 혼자여⁠?⁠”

“⁠혼자믄 뭐 어쩔 거여⁠, 우리 나이에⁠.⁠”

“⁠우리 나이에 뭐 어때서⁠. 저 집 개울 건너 영감은 여든에 재혼했어⁠.⁠”

웃음이 마을회관 천장까지 올라갔다⁠. 선옥은 국을 한 숟가락 더 떴다⁠. 짠맛이 웃음을 눌러 주었다⁠.

“⁠근데 쉼터는 왜 반대여⁠?⁠” 개울집 할머니와 같은 말을 다른 할머니가 했다⁠. “⁠청주 요양원 가믄 죽어서야 와⁠. 상여 타고 와⁠. 살아서 오는 길은 쉼터밖에 없어⁠.⁠”

“⁠쉼터가 생기믄 우리 여기 그냥 있어도 된대⁠. 밥도 해 주고 씻겨도 주고⁠.⁠”

모기팔이 국자를 내려놓고 끼어들었다⁠.

“⁠반장이 길도 넓혀 준대유⁠. 버스도 하루 두 번에서 다섯 번으로 늘린대고⁠. 공사하믄 동네 젊은 사람 일자리도 생기고⁠.⁠”

“⁠젊은 사람이 어딨어요⁠, 이 동네에⁠.⁠”

“⁠나지⁠. 예순둘이믄 여기선 청년이여⁠.⁠”

할머니들이 다시 웃었다⁠. 선옥은 웃지 않았다⁠. 모기팔의 말에서 한 낱말이 귀를 붙잡았다⁠.

“⁠길을 넓혀요⁠? 어디로요⁠?⁠”

“⁠다리 앞으로⁠. 지금 길은 차 두 대가 못 비켜 가잖여⁠.⁠”

“⁠다리 앞이면 정미소 앞이잖아요⁠. 우리 땅이요⁠.⁠”

모기팔의 눈이 문가로 갔다⁠. 문가 신발장 위에 누런 서류 봉투가 놓여 있었다⁠. 봉투가 두툼했다⁠. 모기팔이 일어나 봉투를 집어 등 뒤로 돌렸다⁠. 국자를 들 때보다 빨랐다⁠.

“⁠그건 회사가 알아서 하겄지⁠. 나는 동네 사람 의견만 모으는 거여⁠.⁠”

“⁠의견을 봉투에 모아요⁠?⁠”

“⁠이장 일이 원래 다 봉투여⁠. 비료 신청도 봉투⁠, 경로당 지원도 봉투⁠.⁠” 모기팔이 웃었다⁠. 웃음이 반음 높았다⁠. “⁠선옥아⁠, 너는 시내 살잖여⁠. 여기 사는 사람 마음도 좀 봐 줘⁠. 니 땅이 저기 있다고 니가 여기 사는 건 아니잖여⁠.⁠”

선옥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할머니들이 화투 패를 다시 집었다⁠. 텔레비전에서는 패널 하나가 지방에 민간 자본이 들어와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화투 패 내리치는 소리가 패널의 말을 덮었다⁠.

“⁠저도 여기서 컸어요⁠, 이장님⁠. 이장님 저희 정미소에서 쌀 찧던 날 기억나요⁠? 이장님 어머니가 쌀 한 가마니 맡기고 반 가마니만 찾아갔다고 우리 아버지 멱살 잡으셨어요⁠.⁠”

“⁠그건 우리 어머니가 착각하신 거여⁠.⁠”

“⁠알아요⁠. 다음 날 반 가마니 들고 사과하러 오셨거든요⁠. 저희 아버지가 그 반 가마니로 떡 해서 동네에 돌렸어요⁠.⁠” 선옥이 일어났다⁠. “⁠제 땅에 무슨 일이 생기면⁠, 저도 오늘처럼 반 가마니 들고 와서 따질게요⁠.⁠”

*

정미소 열쇠는 남편 정묵의 책상 서랍에 있었다⁠. 열쇠 꾸러미에 노란 종이 꼬리표가 달려 있었고⁠, 꼬리표에는 정묵의 반듯한 글씨로 「⁠정미소⁠」라고만 쓰여 있었다⁠. 선옥은 열쇠를 자물쇠에 꽂으며 정묵의 글씨를 엄지로 문질렀다⁠. 수학 선생은 꼬리표 글씨도 자로 잰 듯했다⁠.

자물쇠는 쉽게 돌지 않았다⁠. 세 번 만에 철컥 하고 열렸다⁠. 쇠 미닫이를 밀자 녹슨 바퀴가 레일을 긁으며 길게 울었다⁠. 끼이이익⁠. 음이 계속 올라가다 마지막에 꺾였다⁠. 선옥은 소리가 다 끝날 때까지 문고리를 놓지 않았다⁠.

안은 어두웠다⁠. 지붕 틈으로 들어온 햇빛이 먼지 속에 기둥처럼 꽂혀 있었다⁠. 냄새가 먼저 왔다⁠. 쌀겨 냄새였다⁠. 마흔두 해가 지났는데 벽과 바닥 틈에 밴 겨 냄새가 아직 남아 있었다⁠. 방아 기계는 덮개를 쓴 채 가운데 있었고⁠, 바퀴와 바퀴를 잇던 넓은 가죽 벨트는 끊어져 바닥에 뱀처럼 늘어져 있었다⁠. 아버지는 이 벨트가 돌아가는 소리로 쌀이 몇 번 찧였는지 알았다⁠. 선옥은 벨트 소리로 아버지 기분을 알았다⁠.

사무실은 안쪽 구석이었다⁠. 유리문에 「⁠사무실⁠」 글씨가 남아 있었다⁠. 문을 열자 책상 하나⁠, 철제 의자 하나⁠, 벽에 붙은 달력⁠, 그리고 구석에 비닐을 덮어씌운 키 큰 덩어리가 있었다⁠.

선옥은 비닐을 걷었다⁠. 먼지가 확 일었다⁠. 재채기를 두 번 했다⁠. 업라이트 피아노였다⁠. 고등학교 입학 선물로 아버지가 정미소 사무실에 들여놓은 중고 피아노였다⁠. 집이 좁아서 사무실에 두었고⁠, 선옥은 방아 소리를 반주 삼아 삼 년을 쳤다⁠. 정미소가 넘어가던 겨울⁠, 집은 옮겼고 피아노는 못 옮겼다⁠.

뚜껑을 열었다⁠. 건반 몇 개가 누렇게 들떠 있었다⁠. 선옥은 가운데 라를 눌렀다⁠.

소리가 낮았다⁠. 반음 가까이 내려앉아 있었다⁠. 마흔두 해 동안 줄이 조금씩 풀린 소리였다⁠. 선옥은 같은 건반을 다시 눌렀다⁠. 이번에는 소리가 조금 더 오래 남았다⁠. 내려앉은 라는 이상하게 듣기 싫지 않았다⁠. 사람 목소리가 나이 들어 낮아진 것과 비슷했다⁠.

벽의 달력이 눈에 들어왔다⁠. 「⁠1985년 2월⁠」 정미소 이름이 찍힌 달력이었다⁠. 아버지가 넘기지 않은 마지막 장이었다⁠. 칸마다 볼펜 글씨가 있었다⁠. 쌀 몇 가마⁠, 누구네 외상⁠, 기계 수리⁠. 졸업식 날짜 칸에는 빨간 볼펜으로 동그라미가 쳐져 있었고⁠, 동그라미 안에 아버지 글씨가 눌러 쓰여 있었다⁠.

「⁠윤 사장 오후 네 시 다방⁠」

선옥은 달력에 손을 대지 않았다⁠. 손을 대면 종이가 바스러질 것 같아서였다⁠. 윤 사장은 느릅실 큰 과수원 집 주인이었다⁠. 정미소에 돈을 빌려준 사람이었다⁠. 그리고 두 해 뒤 선옥의 시아버지가 된 사람이었다⁠.

오후 네 시⁠, 다방⁠. 상렬이 다방 이 층 창가에 앉아 선옥을 보았다는 시각이었다⁠.

*

밖으로 나오자 햇빛이 눈을 찔렀다⁠. 선옥은 눈을 찡그리고 정미소 담을 따라 걸었다⁠. 담 너머 빈 땅에 명아주와 쑥이 엉켜 있었다⁠. 개울 쪽으로 내려가는 비탈에서 무언가 바람에 펄럭이는 소리가 났다⁠. 비닐 소리였다⁠. 짧고 날카롭게 파닥였다⁠.

깃발이었다⁠. 빨갛고 하얀 줄무늬 비닐을 묶은 나무 말뚝이었다⁠. 정미소 담 모서리에 하나⁠, 담 아래 비탈에 하나⁠, 개울가에 하나⁠. 선옥은 고개를 들었다⁠. 개울을 따라 골짜기 안쪽으로 깃발이 줄지어 박혀 있었다⁠. 논둑에도⁠, 과수원 울타리에도⁠, 분교 터 앞에도⁠. 바람이 불 때마다 수십 개의 깃발이 한꺼번에 파닥였다⁠. 골짜기 전체가 숨을 몰아쉬는 소리 같았다⁠.

담 모서리 말뚝에는 코팅한 종이가 철사로 묶여 있었다⁠. 「⁠탁산건설 측량 — 손대지 마시오⁠」

선옥은 말뚝을 두 손으로 잡았다⁠. 흙이 단단했다⁠. 한 번 흔들고⁠, 두 번 흔들고⁠, 세 번째에 뽑혔다⁠. 흙덩이가 등산화 위로 떨어졌다⁠.

“⁠그거 뽑으믄 안 되유⁠!⁠”

모기팔이 다리를 건너 뛰어왔다⁠. 형광 연두가 개울 위에서 출렁였다⁠. 숨을 헐떡이며 선옥 앞에 멈췄다⁠.

“⁠측량 깃발은 뽑으믄 회사에서 다시 와야 혀⁠. 돈 들어⁠.⁠”

“⁠내 땅에 꽂힌 걸 내가 뽑는데 누가 안 된대요⁠?⁠”

“⁠그건 니 땅 경계 보려고 꽂은 거여⁠. 니 땅 안에 꽂은 거 아녀⁠.⁠”

“⁠이장님⁠.⁠” 선옥이 말뚝을 들어 담 모서리를 가리켰다⁠. 말뚝 끝에서 흙이 떨어졌다⁠. “⁠담 안쪽이에요⁠. 우리 아버지가 쌓은 담이요⁠. 그리고 쉼터 땅이 여기 옆이라면서⁠, 깃발은 왜 저 골짜기 끝까지 꽂혀 있어요⁠? 쉼터가 골짜기만 해요⁠?⁠”

모기팔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 대신 호루라기를 만지작거렸다⁠. 불 데가 없는 호루라기였다⁠. 바람이 다시 불었다⁠. 골짜기의 깃발이 일제히 파닥였다⁠. 선옥은 뽑은 말뚝을 어깨에 메고 정류장으로 걸었다⁠. 다음 버스는 한 시간 뒤였다⁠. 기다릴 생각이었다⁠. 말뚝을 들고 탁산건설 사무소까지 갈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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