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5,350자)

문장대

사십 년 만의 동창회 · 석담율

토요일 새벽 여섯 시 이십 분⁠, 청주 체육관 앞 주차장에 관광버스 한 대가 시동을 걸어 둔 채 서 있었다⁠. 디젤 엔진이 낮게 떨었고⁠, 배기구에서 나온 김이 새벽 공기에 하얗게 풀렸다⁠. 버스 앞문 곁에서 호루라기가 울렸다⁠.

“⁠무심 산악회 오월 정기 산행⁠! 속리산 문장대⁠! 출석 부릅니다⁠!⁠”

모기팔은 오늘도 형광 연두였다⁠. 연회장에서 입었던 등산복이 아니라 같은 색 새 등산복이었다⁠. 동창들은 모기팔이 형광 연두를 세 벌 가지고 있다는 데 사탕 한 봉지씩을 걸었다가⁠, 네 벌이라는 말에 다들 졌다⁠. 모기팔은 산에서 길 잃은 사람이 자기를 보고 찾아온 적이 두 번 있다고 자랑했다⁠.

선옥이 버스에 오르자 앞자리부터 뒷자리까지 눈이 따라왔다⁠. 선옥은 갑분부터 찾았다⁠. 갑분은 뒤에서 세 번째 줄 창가에 있었고⁠, 옆자리에는 이미 다른 동창이 앉아 있었다⁠. 갑분은 선옥과 눈이 마주치자 손을 흔들고⁠, 바로 창밖을 보았다⁠.

빈자리는 가운데 한 줄뿐이었다⁠. 창가에 상렬이 앉아 있었다⁠.

“⁠후보끼리 나란히 앉아유⁠. 그래야 공정하쥬⁠.⁠” 모기팔이 호루라기를 입에 문 채 말했다⁠. 버스 안에서 휘파람이 터졌다⁠. 선옥은 등산 가방을 무릎에 올리고 앉았다⁠. 가방이 벽 노릇을 했다⁠.

버스가 출발하자 운전석 위 스피커에서 트로트가 흘러나왔다⁠. 모기팔이 마이크를 잡고 공지를 했다⁠. 버스 안 춤 금지⁠, 정상주는 한 잔씩⁠, 하산 후 막걸리는 회비에서 나가니 많이 드시라는 것이었다⁠. 공지를 마친 모기팔은 다음 곡 전주가 나오자 통로에서 어깨를 들썩였다⁠. 누군가 “⁠춤 금지라며⁠!⁠”라고 소리쳤고⁠, 모기팔은 “⁠이건 체조여⁠!⁠”라고 받았다⁠.

트로트가 끝나자 라디오 뉴스가 짧게 끼어들었다⁠. 「⁠이혼한 배우자의 국민연금을 나눠 받는 분할연금 수급자가 해마다 늘고 있습니다⁠.⁠」 아나운서 목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다음 곡이 덮었다⁠. 선옥은 뒤에서 세 번째 줄을 돌아보았다⁠. 갑분이 창에 이마를 대고 있었다⁠.

상렬이 박하사탕 하나를 내밀었다⁠. 선옥은 받지 않았다⁠.

“⁠사탕 하나에 표 하나 아니야⁠. 멀미약이야⁠.⁠”

“⁠갑분이한테도 사탕 줬어⁠?⁠”

상렬은 사탕을 자기 입에 넣었다⁠. 사탕이 이에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갑분 씨가 일하고 싶대⁠. 사람이 일하고 싶다는데 자리가 있으면 주는 거지⁠.⁠”

“⁠무슨 일인데⁠?⁠”

“⁠쉼터 사무장⁠. 사람 뽑고⁠, 식단 짜고⁠, 보호자들 전화 받고⁠. 갑분 씨가 잘해⁠. 여고 때 매점 줄 세우던 사람이잖아⁠.⁠”

“⁠쉼터는 아직 없잖아⁠.⁠”

“⁠그러니까 선거를 이겨야지⁠.⁠” 상렬이 창밖을 보았다⁠. 미원 쪽 산자락에 아카시아가 하얗게 피어 있었다⁠. “⁠갑분 씨한테 물어봐⁠. 나한테 묻지 말고⁠.⁠”

선옥은 대답하지 않았다⁠. 버스가 고개를 넘느라 기어를 낮췄다⁠. 엔진 소리가 한 단 굵어졌다⁠. 선옥의 몸이 가방째 상렬에게 기울었다가 돌아왔다⁠. 상렬이 손잡이를 잡으며 웃었다⁠.

“⁠육 시 사십 분 버스가 이 소리였어⁠. 미원 고개 넘을 때⁠.⁠”

“⁠느릅실 버스는 고개 안 넘어⁠.⁠”

“⁠우리 버스 말고 시내 들어가는 버스⁠. 너는 앞에서 두 번째 창가⁠, 나는 바로 뒷자리⁠. 삼 년 동안 니 뒤통수만 봤다⁠. 니 머리 묶은 고무줄이 월요일은 빨간색⁠, 금요일은 까만색이었어⁠.⁠”

“⁠거짓말⁠.⁠”

“⁠수요일은 노란색⁠.⁠” 상렬이 창에 머리를 기댔다⁠. “⁠고무줄이 끊어진 날이 있었어⁠. 이학년 가을에⁠. 니가 머리를 손으로 잡고 내릴 때까지 그러고 있었지⁠. 내가 고무줄 하나 주려고 주머니에 손 넣었다가 못 꺼냈어⁠.⁠”

선옥은 고무줄이 끊어진 아침을 기억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갑분이 머리핀을 빌려주었다⁠. 상렬의 주머니 속에 고무줄이 있었다는 것은 처음 들었다⁠. 선옥은 들은 티를 내지 않으려고 등산 가방 지퍼를 열었다 닫았다⁠. 지퍼 소리가 생각보다 컸다⁠.

*

법주사 입구에서 세심정까지는 평평한 길이었다⁠. 개울이 길을 따라 흘렀다⁠. 물소리가 바위에 부딪쳐 높아졌다가 소에 들어가 낮아졌다⁠. 선옥은 일정한 걸음으로 걸었다⁠. 무릎은 오른쪽이 조금 시큰했지만 걸음은 줄이지 않았다⁠. 학원 계단을 하루 스무 번 오르내리는 다리였다⁠.

갑분은 일행 맨 뒤에 처져 있었다⁠. 선옥은 일부러 걸음을 늦췄다⁠. 세심정 조금 못 미쳐 둘이 나란히 되었다⁠. 앞서가던 동창들의 스틱 소리가 멀어졌다⁠. 탁⁠, 탁⁠, 탁⁠. 개울 소리만 남았다⁠.

“⁠사무장 한다며⁠.⁠”

갑분이 스틱을 바위에 찍었다⁠. 스틱 끝 고무가 벗겨져 쇠가 바위를 긁었다⁠.

“⁠아직 안 한다고 했어⁠.⁠”

“⁠지난번은 언제였는데⁠?⁠”

“⁠동창회 전주⁠. 반장이 전화했어⁠. 내가 먼저 물어봤어⁠. 쉼터 생기면 일할 자리 있냐고⁠.⁠” 갑분이 숨을 몰아쉬었다⁠. 오르막도 아닌데 숨이 찼다⁠. “⁠선옥아⁠, 나 이혼해⁠.⁠”

선옥은 걸음을 멈췄다⁠. 갑분은 멈추지 않았다⁠. 선옥이 두 걸음 늦게 따라붙었다⁠.

“⁠조정 기일이 다음 달이야⁠. 서른여덟 해 살았는데 도장 찍는 데 십 분이래⁠. 웃기지⁠?⁠”

“⁠아저씨가 뭘 했어⁠?⁠”

“⁠아무것도 안 했어⁠. 서른여덟 해 동안 아무것도⁠.⁠” 갑분이 웃었다⁠. 웃음이 길어지다 뚝 끊겼다⁠. “⁠밥 차리면 먹고⁠, 안 차리면 기다렸어⁠. 손주 보라면 내가 봤고⁠, 시어머니 아프면 내가 업었어⁠. 영감은 낚시 갔어⁠. 작년에 내가 무릎 수술 하는데 영감이 병원에 와서 그러더라⁠. 저녁은 어떻게 하냐고⁠.⁠”

개울물이 바위 사이로 쏟아지는 소리가 커졌다⁠. 선옥은 할 말을 찾았다⁠. 찾은 말이 없었다⁠.

“⁠집 팔아서 반 나누고⁠, 영감 국민연금은 혼인 기간만큼 반 나눠 받는대⁠. 분할연금이라고⁠. 다 해 봐야 한 달에 칠십만 원이야⁠. 칠십만 원으로 예순하나가 몇 년을 살아⁠?⁠” 갑분이 선옥을 보았다⁠. “⁠너는 정묵 씨 연금 있잖아⁠. 학원도 있고⁠.⁠”

“⁠그거랑 이거랑 무슨 상관이야⁠?⁠”

“⁠상관있지⁠. 너는 장학금 하자고 해도 되는 사람이야⁠. 나는 아니야⁠. 나는 월급이 필요해⁠.⁠” 갑분의 목소리가 떨렸다⁠. “⁠반장 쉼터 생기면 내가 사무장이야⁠. 예순하나에 사무장⁠. 명함도 나와⁠.⁠”

“⁠왜 나한테 먼저 말 안 했어⁠?⁠”

“⁠너는 남편이 좋은 사람이었잖아⁠.⁠” 갑분이 스틱을 다시 찍었다⁠. 이번에는 바위를 비켜 흙에 박혔다⁠. “⁠좋은 남편 보낸 사람한테 나쁜 남편 버린다는 소리를 어떻게 해⁠.⁠”

*

문장대 꼭대기는 바람이 셌다⁠. 철 계단을 올라 바위 위에 서자 사방이 트였다⁠. 산줄기가 겹겹이 푸르게 물러났고⁠, 맨 끝 줄은 하늘색과 구분이 안 됐다⁠. 동창들이 바위 위에 둥글게 모여 사진을 찍었다⁠. 다들 휴대전화를 팔 길이만큼 뻗었고⁠, 그래도 모자라 셀카봉이 두 개 올라왔다⁠.

모기팔이 배낭에서 막걸리 두 병을 꺼냈다⁠. 종이컵이 돌았다⁠.

“⁠정상주는 한 잔씩⁠! 한 잔 반은 반칙이유⁠!⁠”

상렬이 종이컵을 들고 바위 가운데로 걸어 나갔다⁠. 바람이 상렬의 반백 머리를 눕혔다⁠.

“⁠여기서 보면 느릅실이 안 보입니다⁠. 저 산 넘어 또 산 넘어야 있어요⁠. 그런데 우리 어머니들한테는 느릅실밖에 안 보입니다⁠. 요양원 창가에 앉아서도요⁠.⁠” 상렬이 컵을 조금 들었다⁠. “⁠쉼터에 사무장도 우리 동창이 맡을 겁니다⁠. 고향 사람이 고향 어른을 모셔야지요⁠.⁠”

박수가 바람에 흩어졌다⁠. 흩어진 박수 사이로 갑분이 앞으로 나왔다⁠. 막걸리 컵을 두 손으로 들고 있었다⁠. 컵 속 막걸리가 바람에 출렁였다⁠.

“⁠제가 할게요⁠. 사무장⁠.⁠” 갑분의 목소리가 바위 위에서 쩌렁 울렸다⁠. 큰 목소리였다⁠. 여고 때 매점 줄을 세우던 목소리였다⁠. “⁠그리고 선거 사무장도 제가 할게요⁠. 탁상렬 후보 선거 사무장⁠, 염갑분입니다⁠.⁠”

바위 위가 한순간 조용해졌다⁠. 바람 소리만 났다⁠. 누군가 먼저 손뼉을 쳤고⁠, 손뼉이 번졌다⁠. 여고 동창 몇이 선옥을 돌아보았다⁠. 선옥은 종이컵을 들고 있었다⁠. 막걸리가 손가락에 넘쳐 끈적였다⁠.

단톡방은 산 아래보다 빨랐다⁠. 바위 위에서 찍은 사진이 올라갔고⁠, 「⁠갑분 언니 반장 캠프로⁠!⁠」라는 글에 놀란 이모티콘이 줄줄이 달렸다⁠. 지난주에 누가 만들어 둔 투표 기능의 숫자가 움직였다⁠. 장학금이 앞서던 막대가 몇 분 사이에 쉼터 막대에 따라잡혔다⁠. 여고 동창 이름이 장학금에서 빠져 쉼터로 옮겨 가는 것이 화면에 그대로 보였다⁠. 갑분과 같은 반이던 동창들이었다⁠.

상렬이 휴대전화를 확인했다⁠. 선옥은 상렬의 어깨 너머로 큰 글자를 보았다⁠. 상렬도 글자를 크게 해 두는 나이였다⁠. 「⁠아버지⁠, 싱가포르 실사 다음 주 화요일입니다⁠. 동창회 건 그 전에 정리하세요⁠. — 의건⁠」

상렬이 화면을 껐다⁠. 선옥과 눈이 마주쳤다⁠.

“⁠아들이야⁠.⁠”

“⁠동창회 건이 뭐야⁠? 정리할 건이야⁠?⁠”

“⁠회사 말투야⁠. 신경 쓰지 마⁠.⁠”

*

하산길은 무릎이 먼저 알았다⁠. 내려갈 때 무릎은 올라갈 때보다 두 배로 투덜거렸다⁠. 동창들은 스틱 두 개에 몸을 반씩 맡기고 계단을 내려갔다⁠. 누가 “⁠무릎이 내 말을 안 들어⁠!⁠”라고 하자 다른 누가 “⁠남편보다 낫네⁠. 남편은 아예 안 들어⁠.⁠”라고 받았다⁠. 산길에 웃음이 퍼졌다⁠. 갑분은 남편 이야기에 웃지 않았다⁠.

세심정 평상에서 일행이 쉬었다⁠. 모기팔이 오이를 나눠 주었다⁠. 갑분은 남고 동창들 사이에 앉아 오이를 씹었다⁠. 선옥은 평상 끝에 앉았고⁠, 상렬이 반대편 끝에 앉았다⁠. 평상 하나에 두 후보가 양 끝을 차지하자⁠, 가운데 앉은 동창들이 슬금슬금 일어났다⁠. 평상이 비었다⁠. 모기팔이 오이 봉지를 든 채 멀리서 소리쳤다⁠. “⁠평상에서 토론회 하지 마유⁠! 토론회는 따로 날 잡아서 혀유⁠! 동영상으로 찍어야 혀⁠!⁠” 남고 동창 하나가 벌써 휴대전화를 들고 있었다⁠. 동창회 동영상 채널을 혼자 운영하는 동창이었고⁠, 구독자는 여든일곱 명이었다⁠. 선옥과 상렬이 동시에 휴대전화를 보았다⁠. 채널 주인은 휴대전화를 슬그머니 내렸다⁠.

“⁠반반 하자⁠.⁠” 상렬이 먼저 말했다⁠. “⁠기금 일억은 쉼터⁠, 일억은 장학금⁠. 총회 가서 싸울 것 없이⁠.⁠”

“⁠반으로 자르면 둘 다 못 해⁠. 쉼터를 일억으로 지어⁠? 장학금을 반으로 줄여⁠?⁠”

“⁠모자라는 건 내가 채운다니까⁠.⁠”

“⁠너는 반으로 나누는 걸 잘하더라⁠.⁠” 선옥의 목소리가 반음 내려갔다⁠. “⁠사십이 년 전에도 너 혼자 서울 갔지⁠. 나는 정류장 반쪽에 두고⁠.⁠”

상렬이 오이를 내려놓았다⁠. 개울 소리가 평상 밑으로 흘렀다⁠.

“⁠선옥아⁠, 쉼터 지을 땅 어딘지 알아⁠?⁠”

“⁠느릅실이겠지⁠.⁠”

“⁠개울 건너 다리 어귀⁠. 니 정미소 터 바로 옆이야⁠. 담 하나 사이야⁠.⁠”

선옥은 손에 든 오이를 쥐었다⁠. 오이 껍질이 손바닥에 차가웠다⁠. 정미소 터는 남편 정묵이 십여 년 전에 선옥 이름으로 돌려놓은 땅이었다⁠. 선옥은 등기 서류만 받았지 정미소 창고 문을 열어 본 적이 없었다⁠.

“⁠그게 뭐⁠.⁠”

“⁠총회 가면 그 말 나올 거야⁠. 서선옥이 장학금 하자는 거⁠, 정미소 땅 때문이라고⁠. 쉼터 들어서면 땅값이 어떻게 된다고⁠. 나는 그런 말 안 해⁠. 근데 누가 할 거야⁠.⁠”

“⁠누가⁠?⁠”

상렬은 대답하지 않았다⁠. 모기팔이 호루라기를 불었다⁠. 출발이었다⁠. 동창들이 스틱을 챙기는 소리가 평상 둘레에서 짤그랑거렸다⁠. 선옥은 오이를 끝까지 씹어 삼키고 일어났다⁠.

“⁠내일 느릅실 갈 거야⁠. 첫차로⁠. 니가 짓겠다는 땅⁠, 내 눈으로 볼 거야⁠.⁠”

“⁠첫차는 여섯 시 사십 분이야⁠.⁠”

“⁠알아⁠.⁠” 선옥은 스틱 끈을 손목에 감았다⁠. “⁠너보다 내가 그 버스를 하루 더 탔어⁠. 졸업식 날⁠.⁠”

3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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