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5,451자)

음성 메시지

사십 년 만의 동창회 · 석담율

월요일 아침 아홉 시⁠, 피아노 학원에는 아이들이 오기 전의 냄새가 있었다⁠. 건반을 닦은 알코올 냄새와 어제 오후의 연필 냄새였다⁠. 선옥은 연습실 세 칸 가운데 가장 안쪽 방에 앉아 휴대전화를 보면대에 세웠다⁠. 단톡방에 쌓인 음성 메시지가 쉰 개를 넘었다⁠. 일요일 하루 동안 선옥이 기금 찬조금을 낸 동창들에게 하나하나 물은 대답이었다⁠.

첫 번째를 눌렀다⁠. 기름 튀는 소리가 먼저 들렸다⁠.

“⁠선옥아⁠, 나 지금 전 부치거든⁠. 장학금⁠! 아니다⁠, 쉼터가 낫나⁠? 우리 엄마가 요양원에⁠… 아이고 탔네⁠, 탔어⁠. 이따 다시 보낼게⁠.⁠”

메시지가 끊겼다⁠. 선옥은 오른손으로 낮은 도를 한 번 눌렀다가 왼손으로 높은 도를 눌렀다⁠. 장학금은 낮은 도⁠, 쉼터는 높은 도였다⁠. 종이에 쓰는 것보다 귀가 덜 헷갈렸다⁠. 전 부치는 동창은 둘 다 눌렀다⁠.

다음 메시지에서는 아이가 울었다⁠. 할머니 목소리가 아이 울음 위로 올라왔다⁠. “⁠장학금이여⁠. 우리 손주가 내년에 고등학교 가⁠. 아⁠, 너 말고⁠, 너는 아직 기저귀여⁠.⁠” 낮은 도⁠. 그다음은 텔레비전 정치 채널 소리 위로 남고 동창 목소리가 들렸다⁠. “⁠반장이 하자면 해야지⁠. 반장이 우리 아버지 장례 때 서울서 내려왔어⁠.⁠” 높은 도⁠. 그다음은 사십 초 내내 부스럭거리는 소리뿐이었다⁠. 주머니에서 혼자 눌린 메시지였다⁠. 선옥은 사십 초를 끝까지 들었다⁠. 마지막에 아주 작게 “⁠우리 영감은 장학금 하래⁠.⁠”가 들렸다⁠. 낮은 도⁠.

문이 열리고 갑분이 김밥 봉지를 흔들며 들어왔다⁠.

“⁠아침 안 먹었지⁠? 너는 선거 나가면 밥을 안 먹어⁠. 삼학년 때도 그랬어⁠.⁠”

“⁠그건 다이어트였어⁠.⁠”

“⁠예순하나에 다이어트는 혈압약이야⁠.⁠” 갑분이 김밥을 은박지째 펼쳤다⁠. 단무지 냄새가 연습실에 퍼졌다⁠. “⁠몇 대 몇이야⁠?⁠”

“⁠낮은 도 마흔하나⁠, 높은 도 서른여덟⁠.⁠”

“⁠그게 무슨 소리야⁠. 피아노로 개표해⁠?⁠”

선옥은 웃었다⁠. 갑분의 휴대전화가 탁자 위에서 떨었다⁠. 갑분은 화면을 힐끗 보고 뒤집어 놓았다⁠. 김밥을 집는 손에 반지 자국이 아직 하얬다⁠.

“⁠어제 영감이 밥을 혼자 해 먹었어⁠. 결혼하고 처음이야⁠. 밥솥에 물을 얼마나 넣었는지 죽이 됐더라⁠.⁠”

“⁠아저씨 어디 아파⁠?⁠”

“⁠아니⁠. 연습하는 거래⁠.⁠” 갑분이 김밥을 우물거리며 다음 말을 삼켰다⁠. “⁠뭐⁠, 나중에⁠.⁠”

나중에가 두 번째였다⁠. 선옥은 더 묻지 않았다⁠. 갑분은 숨기고 싶을 때 먹는 속도가 빨라졌다⁠. 오늘은 김밥 한 줄이 금방 사라졌다⁠.

*

점심때 단톡방에 사진이 올라왔다⁠. 시내 한정식집 긴 상 위로 갈비가 줄지어 놓였고⁠, 남고 동창 스무 명 남짓이 건배하는 사진이었다⁠. 상렬은 사진 가장자리에서 집게를 들고 갈비를 굽고 있었다⁠. 「⁠반장님 덕분에 잘 먹었습니다⁠」 「⁠고향 쉼터 파이팅⁠」 아래로 고기 이모티콘이 이어졌다⁠.

여고 동창 하나가 바로 받았다⁠. 「⁠갈비는 쉼터 예산인가요 장학금 예산인가요⁠?⁠」

웃음 이모티콘과 화난 이모티콘이 섞여 올라왔다⁠. 누군가 지역 신문 기사 주소를 올렸다⁠. 「⁠탁산건설⁠, 청주 동부권 투자 검토⁠… 싱가포르 자금 유치설⁠」 제목만 있고 내용은 짧았다⁠. 남고 동창 하나가 「⁠우리 반장 출세했네⁠」라고 달았고⁠, 다른 동창이 「⁠출세한 사람이 왜 동창회 돈을 달래⁠?⁠」라고 달았다⁠. 단톡방이 십 분쯤 시끄럽다가 누군가 「⁠좋은 오후 되세요⁠」 장미꽃 사진을 올리자 조용해졌다⁠. 꽃 사진은 싸움을 끝내는 방망이 노릇을 했다⁠.

선옥은 기사를 끝까지 읽었다⁠. 투자 검토 지역이 어디인지는 없었다⁠. 동부권이라는 말만 세 번 나왔다⁠. 느릅실은 청주의 동쪽 끝이었다⁠.

선옥은 기사 주소를 갑분에게 보냈다⁠. 답은 음성으로 왔다⁠. 갑분 목소리 뒤로 세탁기 탈수 소리가 덜컹거렸다⁠. “⁠동부권이 뭐 우리 동네냐⁠? 동부권이 얼마나 넓은데⁠. 신경 꺼⁠, 원장님⁠.⁠” 탈수가 끝나는 삐 소리와 함께 메시지도 끝났다⁠. 평소의 갑분은 기사 하나에 음성 메시지를 세 개는 보냈다⁠. 오늘은 하나였고⁠, 원장님이라는 말이 붙어 있었다⁠. 갑분은 선옥에게 서운할 때만 원장님이라고 불렀다⁠.

*

화요일 오후⁠, 선옥은 시내 요양원 삼 층 휴게실에서 어머니 한봉녀를 찾았다⁠. 찾을 것도 없었다⁠. 화투 패 내리치는 소리가 복도 끝까지 났다⁠. 탁⁠, 탁⁠, 짝⁠. 마지막 짝 소리가 제일 컸고⁠, 제일 큰 소리는 늘 어머니 손에서 났다⁠.

“⁠고도리⁠! 사탕 내놔유⁠.⁠”

여든일곱 살 한봉녀는 휠체어에 앉아 화투판을 쓸어 담았다⁠. 판돈은 박하사탕이었다⁠. 맞은편 할머니 둘이 사탕을 한 알씩 밀어 놓으며 투덜거렸다⁠. 어머니는 딸을 보고도 사탕부터 세었다⁠.

“⁠왔냐⁠. 상렬이 왔다며⁠?⁠”

선옥은 들고 온 참외 봉지를 내려놓다 멈췄다⁠.

“⁠엄마가 그걸 어떻게 알아⁠?⁠”

“⁠저 집 딸이 니 동창이여⁠.⁠” 어머니가 턱으로 맞은편 할머니를 가리켰다⁠. “⁠어제 밤에 단톡방 소리를 다 읽어 줬어⁠. 돋보기 쓰고⁠. 니가 열한 시 오십팔 분에 나왔다며⁠. 마감 이 분 전에⁠. 너는 어릴 때도 숙제를 이 분 전에 했어⁠.⁠”

맞은편 할머니가 사탕을 까며 고개를 끄덕였다⁠. 요양원 휴게실에서는 단톡방이 딸들보다 빨랐다⁠.

“⁠상렬이가 느릅실에 쉼터 짓는다며⁠.⁠” 어머니가 화투 패를 섞었다⁠. 손이 느려도 패는 한 장도 흘리지 않았다⁠. “⁠지어야지⁠. 나 거기 갈란다⁠.⁠”

“⁠엄마⁠, 여기가 어때서⁠.⁠”

“⁠여기 좋지⁠. 밥 주지⁠, 씻겨 주지⁠, 화투 쳐 주지⁠.⁠” 어머니가 패를 탁 내리쳤다⁠. “⁠근데 창문 열면 아파트여⁠. 느릅실은 창문 열면 개울이여⁠. 나는 개울 소리 들으면서 죽을 거여⁠.⁠”

“⁠죽는다는 소리 좀 하지 마⁠.⁠”

“⁠그럼 사는 소리 하냐⁠? 여든일곱에⁠?⁠” 어머니가 딸을 올려다보았다⁠. 눈이 맑았다⁠. “⁠니가 장학금 한다며⁠. 장학금이 나를 개울가에 데려다주냐⁠?⁠”

“⁠엄마는 내 편 안 해⁠?⁠”

“⁠나는 개울 편이여⁠.⁠” 어머니는 패를 나누다 손을 멈추었다⁠. 목소리가 낮아졌다⁠. “⁠근데 상렬이하고는 말 섞지 마라⁠. 쉼터는 짓고⁠, 말은 섞지 말고⁠.⁠”

“⁠그게 무슨 소리야⁠. 쉼터 짓는 사람이 상렬인데⁠?⁠”

어머니는 대답 대신 화투 패를 딸 앞에 한 장 던졌다⁠. 비 광이었다⁠. 우산을 쓴 사람이 그려진 패였다⁠.

“⁠한 판 쳐⁠. 지면 참외 깎고⁠.⁠”

선옥은 내리 두 판을 졌고 참외를 세 개 깎았다⁠. 어머니는 끝까지 상렬 이야기를 다시 꺼내지 않았다⁠. 선옥이 일어날 때 어머니가 딸의 손등을 두 번 두드렸다⁠. 화투 칠 때와 같은 박자였다⁠.

*

수요일 저녁 일곱 시⁠, 무심여고 동창 합창단은 학원 지하 연습실에서 모였다⁠. 단원은 열여덟 명⁠, 평균 나이 예순하나였다⁠. 선옥은 지휘봉 대신 연필을 들었다⁠. 다음 달 정기총회 첫머리에 부를 「⁠고향의 봄⁠」이었다⁠.

“⁠알토⁠, 둘째 마디에서 숨 쉬지 마세요⁠. 거기서 쉬면 고향이 두 번 끊겨요⁠.⁠”

“⁠숨을 안 쉬면 내가 끊겨⁠.⁠”

알토 맨 끝자리 동창이 말했고⁠, 연습실이 웃음으로 흔들렸다⁠. 선옥도 웃었다⁠. 웃음이 잦아들 무렵 계단에서 발소리가 났다⁠. 구둣발이었고⁠, 두 칸씩 내려오다 마지막에 한 칸으로 바뀌었다⁠. 무릎을 아끼는 걸음이었다⁠.

상렬이 문간에 나타났다⁠. 한 손에 떡 상자⁠, 다른 손에 두꺼운 견본 책자를 들고 있었다⁠. 감색 정장 대신 회색 니트를 입었는데⁠, 니트가 상렬을 열 살쯤 젊게 보이게 했다⁠. 소프라노 셋이 동시에 머리를 매만졌다⁠.

“⁠연습하시는데 죄송합니다⁠.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상렬이 떡 상자를 피아노 옆 탁자에 내려놓았다⁠. “⁠합창단 단복이 십 년 됐다고 들었습니다⁠. 총회 때 새 단복 입고 서시면 좋겠어서요⁠. 색은 여러분이 고르시고요⁠.⁠”

견본 책자가 펼쳐졌다⁠. 남색⁠, 자주색⁠, 연보라⁠. 단원들이 의자에서 엉덩이를 들었다⁠.

“⁠연보라 예쁘다⁠.⁠”

“⁠연보라는 얼굴이 떠⁠. 우리 나이엔 자주가 낫지⁠.⁠”

“⁠자주는 장례식 같어⁠.⁠”

“⁠그건 검정이지⁠!⁠”

선옥이 연필로 보면대를 두 번 두드렸다⁠. 탁⁠, 탁⁠. 연습실이 조용해졌다⁠.

“⁠단복은 받지 않습니다⁠. 떡은 감사히 먹겠습니다⁠. 떡값은 제가 드릴게요⁠.⁠”

“⁠선옥아⁠, 단복은 그냥 단복인데⁠.⁠” 소프라노 하나가 말했다⁠.

“⁠그냥 단복이면 총회 전에 왜 와⁠? 총회 끝나고 와도 되잖아⁠.⁠” 선옥은 상렬을 보았다⁠. “⁠합창단은 표로 안 삽니다⁠, 탁 후보님⁠.⁠”

상렬은 견본 책자를 덮었다⁠. 웃음은 그대로였는데 눈가 주름이 얕아졌다⁠.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어⁠?⁠”

*

계단참은 소리가 울렸다⁠. 위로는 학원 현관⁠, 아래로는 연습실 문이었다⁠. 문틈으로 단원들이 숨죽인 소리가 새어 나왔다⁠. 숨죽인 소리는 숨 쉬는 소리보다 컸다⁠.

“⁠메시지 봤지⁠? 답이 없더라⁠.⁠”

“⁠답할 이유가 없었어⁠.⁠”

“⁠있지⁠.⁠” 상렬이 계단 난간을 잡았다⁠. 손등에 검버섯이 두 개 있었다⁠. “⁠나 그날 정류장 갔었어⁠.⁠”

선옥은 난간에서 손을 떼었다⁠. 계단참 형광등이 지지직거렸다⁠.

“⁠졸업식 끝나고 네 시쯤⁠. 길 건너 다방 이 층 창가에 앉았어⁠. 너 정류장 의자에 앉아 있는 거 봤어⁠. 꽃다발 들고⁠. 버스 세 대가 지나가는데 하나도 안 탔지⁠.⁠”

“⁠봤으면⁠.⁠” 선옥의 목소리가 반음 내려갔다⁠. “⁠봤으면 왜 안 건너왔어⁠?⁠”

“⁠다방에 니 아버지가 계셨어⁠.⁠”

선옥은 숨을 멈췄다⁠. 아버지는 졸업식 날 밤 아홉 시가 넘어 우산을 들고 정류장에 왔다⁠. 비도 안 오는 날이었다⁠. 아무 말 없이 선옥의 꽃다발을 받아 들고 막차에 함께 탔다⁠. 선옥은 마흔두 해 동안 아버지가 딸을 데리러 늦게 온 것으로 알았다⁠.

“⁠우리 아버지가 거기 왜⁠?⁠”

“⁠나를 기다리고 계셨어⁠.⁠”

“⁠무슨 말을 했는데⁠?⁠”

상렬이 대답하지 않았다⁠. 연습실 문 너머에서 누가 기침을 참다 터뜨렸다⁠. 상렬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직⁠.⁠”

“⁠또 아직이야⁠? 사십이 년이 아직이었어⁠.⁠”

“⁠선거 끝나면⁠.⁠”

“⁠너 지금 이걸로 표 모으는 거야⁠? 하나씩 꺼내서 나 궁금하게 만들고⁠?⁠”

“⁠표 모으려면 단복을 팔았지⁠.⁠” 상렬이 계단을 한 칸 올라갔다⁠. 무릎이 딱 소리를 냈다⁠. 상렬이 얼굴을 찡그리고 웃었다⁠. “⁠무릎은 정년이 없대⁠. 의사가 그러더라⁠. 은퇴를 못 한대⁠.⁠”

선옥은 웃지 않으려다 웃었다⁠. 웃음이 나온 것이 분해서 입술을 깨물었다⁠.

“⁠떡값 보낼게⁠. 계좌 불러⁠.⁠”

“⁠떡값 받으면 선관위원장이 호루라기 분다⁠.⁠”

상렬이 현관문을 밀고 나갔다⁠. 바깥 바람이 계단을 타고 내려와 선옥의 단발을 흔들었다⁠.

*

연습은 아홉 시에 끝났다⁠. 단원들은 떡을 나눠 들고 계단을 올라가며 단복 색깔 이야기를 끝내지 못했다⁠. 연보라파와 자주파가 현관에서 다시 붙었다⁠. 선옥은 피아노 뚜껑을 닫다가 피아노 위에 놓인 휴대전화를 보았다⁠. 갑분의 것이었다⁠. 갑분은 연습 중간에 들어와 맨 뒷줄에서 입만 벙긋거리다 떡을 들고 먼저 나갔다⁠.

화면이 켜졌다⁠. 잠금 화면 위로 메시지 미리보기가 떴다⁠. 보려고 본 것이 아니었다⁠. 글자가 컸다⁠. 갑분은 돋보기 없이 보려고 글자 크기를 가장 크게 해 두었다⁠.

「⁠갑분 씨⁠, 쉼터 사무장 자리 생각해 보셨어요⁠? 월급은 지난번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 탁상렬⁠」

계단에서 급한 발소리가 내려왔다⁠. 갑분이 숨을 몰아쉬며 문간에 나타났다⁠.

“⁠내 전화⁠! 거기 있지⁠?⁠”

선옥은 휴대전화를 들어 건넸다⁠. 화면은 아직 켜져 있었다⁠. 갑분이 화면을 보고⁠, 선옥을 보았다⁠. 갑분의 입이 웃는 모양을 만들다가 멈췄다⁠.

“⁠지난번이 언제야⁠?⁠”

갑분은 대답하지 않았다⁠. 휴대전화를 가슴에 대고 서 있었다⁠. 계단 위 현관에서 단원들이 아직 단복 색깔로 싸우는 소리가 내려왔다⁠. “⁠연보라⁠!⁠” “⁠자주⁠!⁠”

2화는 어땠나요?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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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류청산2026.11.01· 2화

    단톡방 음성 메시지가 쉰 개 넘게 쌓인 거 보고 저희 동창회 생각나서 식은땀 났어요.

    • 석담율작가2026.11.01

      동창회 단톡방은 일요일에 제일 시끄러워요. 선옥 씨는 피아노 학원 보면대에 휴대전화를 세워 놓고 하나씩 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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