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5,492자)

현수막

사십 년 만의 동창회 · 석담율

마이크가 먼저 울었다⁠. 단상에서 총무가 손가락으로 마이크 머리를 톡톡 치자 스피커가 삐익 하고 길게 끌었고⁠, 서선옥은 연회장 입구 문턱에서 걸음을 멈췄다⁠. 시 플랫보다 조금 높은 소리였다⁠. 삼십 년 동안 아이들 건반 소리를 들어 온 귀는 반음 어긋난 소리를 그냥 흘려보내지 못했다⁠.

“⁠또 그런다⁠. 너 지금 음 맞추고 있지⁠?⁠”

염갑분이 떡 보자기를 고쳐 들며 옆구리를 찔렀다⁠. 보자기 매듭 사이로 시루떡 김이 올라왔다⁠. 갑분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이름표를 달아 주겠다며 기어이 핀을 꽂았고⁠, 선옥의 연분홍 재킷 가슴에 붙은 「⁠3학년 2반 서선옥⁠」은 왼쪽으로 15도쯤 기울어 있었다⁠. 선옥은 이름표를 바로 꽂으려다 그만두었다⁠. 갑분이 기울여 단 이름표는 여고 삼 년 내내 그랬다⁠.

입구 위로 현수막이 가로질렀다⁠. 「⁠무심여고·무심고 졸업 40주년 합동 동창회⁠」 재작년 봄에 뽑은 현수막이었다⁠. 동창회는 기금을 어디에 쓰느냐로 두 해를 다투다 행사를 미뤘고⁠, 총무는 아깝다며 현수막을 그대로 들고 왔다⁠. 누가 숫자 위에 「⁠42⁠」를 오려 붙였다가 테이프가 떨어졌는지⁠, 4 옆에 하얀 테이프 자국만 네모나게 남아 있었다⁠.

“⁠사십 년이라고 해 둬⁠. 새로 뽑으면 그것도 기금에서 나가⁠.⁠”

총무가 둘 곁을 지나가며 말했다⁠. 선옥은 웃음을 참느라 진주 귀걸이 한쪽을 만졌다⁠. 은회색 단발은 아침에 두 번 빗어 넘겼고⁠, 빗질 자국이 아직 귀 뒤에 살아 있었다⁠.

연회장 안은 둥근 탁자로 꽉 찼다⁠. 큰 창 너머로 오월 한낮의 햇빛이 쏟아졌고⁠, 창틀 아래 이팝나무가 흰 꽃잎을 한 줌씩 떨궜다⁠. 예순 넘은 사람들이 서로의 가슴께로 고개를 숙였다가⁠, 휴대전화를 팔 길이만큼 멀리 들어 사진을 찍었다⁠. 돋보기를 머리에 얹은 채 돋보기를 찾는 남자가 둘이었다⁠. 여고 동창 탁자에서 누가 “⁠어머⁠, 너 하나도 안 변했다⁠.⁠”라고 했고⁠, 듣던 사람이 “⁠변했어⁠. 안경 써⁠.⁠”라고 받았다⁠.

손가방 속에서 휴대전화가 연달아 떨었다⁠. 동창회 단톡방이었다⁠. 「⁠무심 합동 동창회(⁠312⁠)⁠」 위로 새 글이 쌓였다⁠. 「⁠속보⁠! 탁상렬 반장 지금 주차장이래요⁠」 아래 눈알이 튀어나온 이모티콘이 붙었고⁠, 밑으로 같은 이모티콘이 일곱 개 더 달렸다⁠. 가족 단톡방도 울렸다⁠. 서울에 사는 딸 나빈이었다⁠. 「⁠원장님⁠, 동창회 사진 올려 주세요⁠. 첫사랑 나오면 즉시 보고⁠.⁠」 사위가 엄지 세운 이모티콘을 붙였다⁠.

선옥은 「⁠첫사랑 없음⁠」이라고 쳤다가⁠, 사위가 붙인 엄지에 「⁠너도 즉시 퇴장⁠」이라고 덧붙였다⁠.

창가 탁자에서 웃음소리가 터졌다⁠. 낮게 시작해 끝이 살짝 올라가는 웃음이었다⁠. 선옥의 손가락이 화면 위에서 멈췄다⁠. 마흔두 해 동안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는데⁠, 귀가 먼저 이름을 댔다⁠.

남자는 창을 등지고 서 있었다⁠. 반백의 짧은 머리⁠, 짙은 감색 정장⁠. 손에 든 잔을 탁자에 내려놓고 입구를 향해 몸을 돌렸다⁠. 웃음이 아직 얼굴에 남아 있어서 눈가 주름이 깊었다⁠. 둘 사이로 이팝나무 꽃잎 몇 장이 창틈을 타고 들어와 카펫에 떨어졌다⁠.

탁상렬이었다⁠. 졸업식 날 꽃다발도 안 받고 서울로 가 버린 남고 반장이었다⁠.

*

“⁠자⁠, 자⁠, 조용⁠! 조용히들 혀유⁠!⁠”

호루라기 소리가 연회장을 갈랐다⁠. 무심고 산악회 대장이자 느릅실 이장인 모기팔이 형광 연두 등산복 차림으로 단상에 올라왔다⁠. 다들 정장인데 혼자 등산복이었다⁠. 정상에서 바로 내려왔다는 말이 돌았고⁠, 모기팔은 부인하지 않았다⁠. 동창들은 이름 석 자를 줄여 모기 대장이라고 불렀다⁠.

“⁠오늘 회장 선거 후보 등록 받습니다⁠. 선관위원장 모기팔이유⁠. 마감은 오늘 밤 열두 시⁠! 등록은 저한테 개인 톡⁠! 늦으면 안 받아유⁠!⁠”

모기팔이 호루라기를 한 번 더 불고 마이크를 넘겼다⁠. 마이크를 받은 사람은 상렬이었다⁠.

상렬은 연설대에 두 손을 얹고 잠깐 연회장을 둘러보았다⁠. 서두르지 않는 숨이었다⁠. 마이크가 다시 삐익 울었지만 상렬은 소리가 잦아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마흔두 해 만입니다⁠. 현수막 숫자는 총무님 사정이니까 넘어가겠습니다⁠.⁠”

탁자마다 웃음이 터졌다⁠. 총무가 손을 내저었다⁠.

“⁠저는 느릅실에서 시내까지 버스를 타고 다녔습니다⁠. 우리 중에 그 버스 탄 사람 많지요⁠. 그런데 그 동네에 이제 아이들이 없습니다⁠. 분교는 이십 년 전에 닫았고⁠, 남은 건 우리 어머니들입니다⁠. 어머니들은 청주 시내 요양원 창가에 앉아서 우암산만 보다 돌아가십니다⁠. 고향 가는 길이 사십 분인데 그 사십 분을 못 갑니다⁠.⁠”

연회장이 조용해졌다⁠. 누군가 코를 훌쩍였다⁠.

“⁠동창회 기금 이억을 느릅실 요양 쉼터에 넣겠습니다⁠. 모자라는 돈은 제가 채웁니다⁠. 우리 부모님들이 먼저 들어가시고⁠, 언젠가 우리도 거기서 늙읍시다⁠. 회장에 나가겠습니다⁠.⁠”

박수가 쏟아졌다⁠. 갑분이 떡 보자기를 무릎에 내려놓고 손뼉을 쳤다⁠. 손바닥이 빨개질 만큼 쳤다⁠. 선옥은 박수 소리를 들었다⁠. 남고 탁자 박수는 한꺼번에 터졌는데⁠, 여고 탁자 박수는 반 박자 늦게 들어왔다가 먼저 끝났다⁠. 어떤 탁자는 아예 들어오지 않았다⁠. 기금에 찬조금을 제일 많이 낸 동창들이 앉은 탁자였다⁠.

갑분은 손뼉을 그치고 왼손 약지를 엄지로 문질렀다⁠. 반지 자국이 하얗게 남아 있었고⁠, 반지는 없었다⁠. 선옥이 눈으로 묻자 갑분은 시루떡 보자기를 풀며 딴소리를 했다⁠.

“⁠반장 말 잘한다⁠. 옛날엔 조회 때 애국가도 틀렸는데⁠.⁠”

“⁠가사를 틀렸지⁠. 음은 맞았어⁠.⁠”

“⁠너는 그걸 아직도 기억하냐⁠?⁠”

옆자리 동창 하나가 끼어들었다⁠. 여고 합창단에서 알토를 맡는 친구였다⁠. “⁠선옥아⁠, 너 안 나가⁠? 우리 장학금은 누가 지켜⁠? 나 재작년에 찬조금 백만 원 냈어⁠. 손주 돌 반지 팔아서⁠.⁠” 맞은편 친구가 받았다⁠. “⁠돌 반지를 왜 팔아⁠. 애가 알면 어쩌려고⁠.⁠” “⁠애는 아직 말을 못 해⁠.⁠” 탁자에 웃음이 돌았는데⁠, 웃음 끝에 다들 선옥을 보았다⁠. 선옥은 대답 대신 시루떡을 한 조각 떼어 입에 넣었다⁠. 팥고물이 재킷에 떨어졌다⁠. 나빈에게서 또 메시지가 왔다⁠. 「⁠엄마 지금 떡 먹는 사진 누가 올렸어⁠. 고물 묻었어⁠. 재킷 털어⁠.⁠」 선옥은 서울에서 청주 연회장 사정을 아는 딸이 무서워 재킷부터 털었다⁠.

로비 텔레비전에서는 저녁 뉴스 예고가 돌았다⁠. 「⁠지방 요양 시설 대기 길어져⁠… 정부⁠, 민간 투자 확대 검토⁠」 화면 아래 글자가 흘러가는 동안 상렬은 단상에서 내려와 테라스로 나갔다⁠. 휴대전화를 귀에 댄 채였다⁠.

*

테라스 유리문은 반쯤 열려 있었다⁠. 선옥이 문가에 다가가자 상렬의 목소리가 들렸다⁠. 영어였다⁠. “⁠Next week⁠. Yes⁠, the village part is moving⁠.⁠” 싱가포르라는 낱말이 두 번 나왔고⁠, 펀드라는 낱말이 한 번 나왔다⁠. 상렬은 선옥을 보고 통화를 끊었다⁠.

“⁠서선옥⁠.⁠”

이름을 부르는 끝이 살짝 올라갔다⁠. 버스 맨 뒷자리에서 앞자리로 부르던 소리와 같았다⁠.

“⁠기금은 장학금 하라고 낸 돈이야⁠.⁠”

선옥은 인사를 건너뛰었다⁠. 상렬이 웃었다⁠. 눈가 주름이 다시 깊어졌다⁠.

“⁠사십 년 만에 첫마디가 그거야⁠?⁠”

“⁠사십이 년⁠. 현수막 보고 왔으면서⁠.⁠”

“⁠그래⁠, 사십이 년⁠.⁠” 상렬이 난간에 등을 기댔다⁠. “⁠기금 얘기는 들었어⁠. 장학금 주는 거 알아⁠. 한 해에 다섯 명⁠, 오십만 원씩⁠. 그 돈 받을 느릅실 애가 지금 몇 명인지 알아⁠?⁠”

“⁠느릅실 애만 애야⁠? 시내 애들도 있어⁠. 우리 학교 후배들⁠.⁠”

“⁠시내 애들은 시에서도 주고 교육청에서도 줘⁠. 느릅실 할머니들은 아무도 안 줘⁠.⁠”

말이 빨랐다⁠. 생각해 둔 말이었다⁠. 선옥은 상렬의 목소리에서 높낮이를 들었다⁠. 쉼터 이야기를 할 때는 한 음이 내려가 묵직했고⁠, 숫자를 말할 때는 다시 올라와 매끄러웠다⁠. 매끄러운 데가 많았다⁠.

“⁠그 돈⁠, 내가 삼십 년 동안 회비 낸 돈이야⁠. 찬조금 낸 사람들한테 물어봤어⁠? 절반이 장학금 하재⁠.⁠”

“⁠절반은 쉼터 하재지⁠.⁠”

“⁠그 절반이 이겼으면 재작년에 벌써 결정 났겠지⁠. 두 해를 싸웠어⁠. 너는 그동안 서울에 있었고⁠.⁠”

상렬이 대답하지 않았다⁠. 테라스 아래로 시내버스가 지나갔다⁠. 엔진 소리가 낮게 깔렸다가 멀어졌다⁠. 선옥은 엔진 소리에 묻혀 물었다⁠.

“⁠왜 갔어⁠?⁠”

상렬은 난간에서 등을 떼었다⁠. 한 걸음 다가왔다⁠. 정장에서 서늘한 향수 냄새가 났는데⁠, 향수 밑으로 담배 냄새가 아주 조금 섞여 있었다⁠. 끊었다가 오늘 한 대 피운 냄새였다⁠.

“⁠선거 끝나면 말할게⁠.⁠”

“⁠무슨 소리야⁠. 그게 선거랑 무슨 상관인데⁠?⁠”

“⁠상관있어⁠.⁠” 상렬이 유리문을 열었다⁠. “⁠끝나고 다 말할게⁠. 약속해⁠.⁠”

“⁠그럼 내가 끝내 줄게⁠.⁠”

상렬이 문고리를 잡은 채 돌아보았다⁠. 선옥은 이름표를 똑바로 고쳐 꽂았다⁠. 핀이 재킷 천을 뚫는 소리가 작게 났다⁠.

“⁠선거를 빨리 끝내 줄게⁠. 네가 지는 걸로⁠.⁠”

*

밤 열한 시 반⁠, 수곡동 피아노 학원 위층 살림집은 조용했다⁠. 냉장고만 웅웅거렸다⁠. 선옥은 거실의 낡은 업라이트 피아노 앞에 앉아 뚜껑을 열지 않은 채 휴대전화를 보았다⁠. 피아노 위에서 남편 윤정묵이 사진 속에서 웃고 있었다⁠. 세 해 전 봄에 찍은 사진이었고⁠, 정묵은 수학 선생답게 사진에서도 넥타이를 반듯하게 매고 있었다⁠.

단톡방에서 음성 메시지가 올라왔다⁠. 모기팔이었다⁠. 재생하자 트로트 반주가 먼저 흘러나왔고⁠, 탬버린이 박자를 놓쳤다⁠.

“⁠아아⁠, 선관위원장이유⁠. 현재 후보 한 명⁠! 탁상렬⁠! 마감 삼십 분 남았슈⁠! 등록 안 하면 그냥 단독으로 가유⁠! 아⁠, 형님 그 노래 내 거여⁠, 내 거⁠!⁠”

메시지가 끊겼다⁠. 노래방이었다⁠. 단톡방에 웃는 이모티콘이 줄줄이 달렸다⁠.

전화가 울렸다⁠. 갑분이었다⁠.

“⁠너 나오지⁠? 목소리 들으니까 나오겠네⁠.⁠”

“⁠아직 말도 안 했는데⁠?⁠”

“⁠숨소리가 나와⁠. 삼학년 때 반장 선거 나갈 때도 그 숨이었어⁠.⁠” 갑분이 잠깐 말을 끊었다⁠. 텔레비전 소리가 났고⁠, 다른 방에서 남자가 헛기침을 했다⁠. 갑분이 목소리를 낮췄다⁠. “⁠근데 너 나오면 나는 누구 찍냐⁠?⁠”

“⁠나 찍어야지⁠. 친구가 나오는데⁠.⁠”

“⁠떡은 반장이 샀어⁠. 연회장 떡 전부⁠. 내가 맞춘 거 반장이 계산했다고⁠.⁠”

“⁠떡 한 시루에 표 한 장이야⁠?⁠”

“⁠시루가 서른 개였어⁠.⁠” 갑분이 웃었다⁠. 웃음이 금방 끝났다⁠. “⁠선옥아⁠, 나 요새 좀 복잡해⁠. 나중에 말할게⁠.⁠”

전화가 끊긴 뒤에도 선옥은 화면을 한참 보았다⁠. 갑분의 웃음은 늘 길었다⁠. 오늘은 짧았다⁠.

열한 시 오십팔 분⁠, 선옥은 단톡방 입력 칸에 글을 쳤다⁠. 손가락이 한 번 오타를 냈고⁠, 지우고 다시 쳤다⁠.

「⁠기호 2번 서선옥⁠, 동창회장에 나갑니다⁠. 기금은 후배들 장학금으로 지키겠습니다⁠.⁠」

보내자마자 알림음이 연달아 울렸다⁠. 띵동⁠, 띵동⁠, 띵동⁠. 양철 지붕에 소나기 떨어지는 소리 같았다⁠. 「⁠언니 멋져요⁠」 「⁠장학금 찬성⁠」 「⁠둘 다 하면 안 되나유⁠」 「⁠선옥이가 나오네 ㅋㅋㅋ 반장 긴장해라⁠」 모기팔이 호루라기 이모티콘을 올리고 「⁠등록 완료⁠!⁠」라고 썼다⁠.

상렬의 글이 올라왔다⁠. 「⁠환영합니다⁠. 깨끗하게 붙읍시다⁠.⁠」 악수하는 손 이모티콘이 붙었다⁠.

선옥은 휴대전화를 피아노 위에 엎어 놓았다⁠. 다시 울렸다⁠. 이번에는 단톡방이 아니었다⁠. 처음 보는 번호로 온 개인 메시지였고⁠, 이름 칸에 「⁠탁상렬⁠」이 떠 있었다⁠.

「⁠졸업식 날⁠, 너 정류장에 몇 시까지 있었어⁠?⁠」

선옥은 사진 속 정묵의 넥타이를 한 번 보고⁠, 피아노 뚜껑 위에 두 손을 얹었다⁠. 나무가 서늘했다⁠. 막차는 밤 아홉 시 사십 분이었다⁠. 선옥은 마흔두 해 동안 막차 번호판을 잊은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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