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5,414자)

총회

사십 년 만의 동창회 · 석담율

현수막은 그대로였다⁠. 「⁠무심여고·무심고 졸업 40주년 합동 동창회⁠」 다른 것이 하나 있었다⁠. 숫자 4 옆 하얀 테이프 자국 위에 누가 매직으로 「⁠+2⁠」를 써서 붙여 놓았다⁠. 글씨가 삐뚤었다⁠. 형광 연두색 매직이었다⁠.

“⁠내가 썼어유⁠. 사십이 년은 사십이 년이지⁠.⁠” 모기팔이 연회장 입구에서 말했다⁠. “⁠현수막 새로 뽑는 돈은 기금에서 안 나가유⁠. 매직은 내 거여⁠.⁠”

칠월 초의 연회장은 덥지 않았다⁠. 에어컨이 세게 돌았다⁠. 큰 창 밖에서 매미가 울었다⁠. 오월에 꽃잎을 떨구던 이팝나무는 초록 잎만 무성했다⁠. 둥근 탁자 대신 의자가 줄지어 놓였다⁠. 맨 앞에 투표함이 있었다⁠. 투명 아크릴 상자였다⁠. 상자 안이 비어서 연회장 천장 조명이 그대로 비쳤다⁠.

선옥은 입구 문턱에서 걸음을 멈췄다⁠. 오월에 마이크 하울링을 듣던 자리였다⁠. 오늘은 마이크가 울지 않았다⁠. 총무가 미리 볼륨을 낮춰 두었다⁠. 선옥은 이름표를 확인했다⁠. 「⁠3학년 2반 서선옥⁠」 오늘은 갑분이 달아 주었다⁠. 기울지 않았다⁠. 갑분이 일부러 똑바로 달았다⁠.

“⁠처음으로 똑바로 달았다⁠. 사십이 년 만에⁠.⁠” 갑분이 말했다⁠.

“⁠삐뚤게 달아⁠. 그게 너야⁠.⁠”

갑분이 웃으며 핀을 빼서 다시 꽂았다⁠. 15도쯤 기울었다⁠. 둘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연회장 안을 둘러보았다⁠. 회원 삼백사십 명 가운데 삼백삼십팔 명이 왔다⁠. 못 온 둘은 입원 중이었다⁠. 맨 앞줄 끝자리에 의건이 앉아 있었다⁠. 하늘색 셔츠였다⁠. 의자 등받이에 「⁠참관인⁠」이라는 종이가 붙어 있었다⁠. 맨 뒷줄에는 나빈이 앉아 있었다⁠. 팔짱을 끼고⁠, 선옥과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돌렸다⁠. 안 본다더니 서울에서 첫차를 타고 내려온 모양이었다⁠. 무릎 위에 서울 빵집 쇼핑백이 있었다⁠.

총무가 단상에 올라 호루라기를 물었다⁠. 연회장이 숨을 죽였다⁠. 다들 쉭 소리를 기다렸다⁠.

삐이익⁠.

호루라기가 제대로 울렸다⁠. 연회장이 박수로 터졌다⁠. 총무가 얼굴이 빨개져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사흘 연습했습니다⁠. 배에 힘 주라고 해서 배를 만들었습니다⁠.⁠”

*

합창단이 먼저 올라왔다⁠. 단복은 십 년 된 남색이었다⁠. 빠진 둘 가운데 소프라노 하나가 맨 끝에 서 있었다⁠. 아침에 단톡방에 「⁠그냥 노래는 할게⁠. 표는 내 맘대로 찍고⁠」라고 남기고 왔다⁠. 열일곱이었다⁠. 선옥은 지휘를 하지 않고 피아노 앞에 앉았다⁠. 지휘는 알토 맨 끝자리가 맡았다⁠. 선거 후보가 지휘봉을 들면 반칙이라고 총무가 정했다⁠.

「⁠고향의 봄⁠」 첫 마디가 연회장을 채웠다⁠. 알토는 둘째 마디에서 숨을 쉬지 않았다⁠. 처음이었다⁠. 선옥은 반주를 하며 웃었다⁠. 노래가 끝나자 맨 앞줄 할머니 하나가 손수건을 꺼냈다⁠. 느릅실 개울집 할머니였다⁠. 회원이 아닌데 모기팔이 트럭에 태워 왔다⁠. 마을 사람들 몇이 뒤쪽 벽을 따라 서 있었다⁠. 투표권은 없고 귀만 있었다⁠.

*

후보 연설은 상렬이 먼저였다⁠. 상렬은 연설대에 두 손을 얹고 오월처럼 연회장을 둘러보았다⁠. 정장이 아니었다⁠. 흰 셔츠에 회색 바지였다⁠. 손목에 노란 고무줄이 있었다⁠. 새것이었다⁠. 쉰 개짜리 봉지에서 하나 꺼낸 것이었다⁠.

“⁠오월에 이 자리에서 말씀드리지 않은 게 있습니다⁠. 오늘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상렬은 말했다⁠. 아버지가 정미소 빚에 보증을 섰다가 개울 건너 논을 잃은 일⁠. 졸업식 날 다방 이 층 창가⁠. 기차 타기 전에 맡긴 편지⁠. 6월 15일 서문교 아래⁠. 서울에서 일군 회사가 느릅실 골짜기에 리조트를 지으려 한 일⁠, 쉼터를 리조트 입구에 붙여 동창회 기금을 동의의 증거로 쓰려 한 일⁠. 숫자는 말하지 않았다⁠. 사람과 장소만 말했다⁠.

“⁠저는 고향에 어머니들 늙을 집을 짓고 싶었습니다⁠. 진심이었습니다⁠. 그런데 진심을 회사 사업 안에 넣었습니다⁠. 진심이 회사 계획서 한 줄이 됐습니다⁠. 제 잘못입니다⁠.⁠” 상렬이 고개를 숙였다⁠. 오래 숙였다⁠. “⁠쉼터는 이제 회사 밖에 있습니다⁠. 회사는 제 손을 떠났습니다⁠. 기금 이억을 주시면⁠, 제 남은 돈과 합쳐 느릅실에 쉼터를 짓겠습니다⁠. 이번에는 아무 계획서에도 안 넣겠습니다⁠.⁠”

박수가 나왔다⁠. 오월보다 작았다⁠. 대신 오래갔다⁠.

이어서 찬조 연설이었다⁠. 갑분이 연설대에 섰다⁠. 원고가 없었다⁠. 손에 누런 서류 봉투가 있었다⁠. 갑분이 마이크를 잡자 마이크가 삐익 울었다⁠. 총무가 낮춰 둔 볼륨으로도 갑분 목소리는 컸다⁠.

“⁠탁상렬 후보 선거 사무장 염갑분입니다⁠. 근데 오늘은 반장 얘기 말고 제 얘기 할게요⁠.⁠” 갑분이 숨을 들이켰다⁠. “⁠졸업식 날 밤에 반장이 맡긴 편지⁠, 제가 사십이 년 동안 안 줬어요⁠. 선옥이한테⁠. 선옥이 엄마가 우리 집 마당에서 무릎 꿇고 빌어서요⁠. 열아홉 살이라 무서웠고⁠, 그다음엔 늦어서 무서웠고⁠, 그다음엔 그냥 무서웠어요⁠. 지난달에 줬어요⁠. 봉투도 안 뜯고⁠.⁠”

연회장이 웅성거렸다⁠. 누가 “⁠세상에⁠.⁠” 했고⁠, 누가 “⁠사십이 년을⁠?⁠” 했다⁠. 맨 뒷줄에서 나빈이 팔짱을 풀었다⁠.

“⁠그리고 이거요⁠.⁠” 갑분이 봉투에서 책자를 꺼내 들어 보였다⁠. 「⁠느릅실 시니어 리조트 — 투자 설명 자료⁠」 “⁠리조트 입주 보증금이 사억에서 구억이에요⁠. 느릅실 할머니는 한 분도 못 들어가요⁠. 그리고 선옥이 땅이 없으면 리조트로 들어가는 길이 없어요⁠. 여기 써 있어요⁠. 대안 없음⁠.⁠”

갑분은 책자를 연설대에 내려놓고 내려왔다⁠. 후보석을 지나며 선옥의 어깨를 한 번 짚었다⁠. 손바닥이 뜨거웠다⁠. 갑분이 귓속말을 했다⁠. 목소리를 낮췄는데도 컸다⁠. “⁠다리 떨려⁠. 사십이 년 치 다 떨려⁠.⁠” 선옥은 갑분의 손등을 두 번 두드렸다⁠. 어머니가 화투 칠 때 하던 박자였다⁠.

맨 뒷줄에서 나빈이 휴대전화를 들어 무언가를 쳤다⁠. 선옥의 가방 속에서 진동이 울렸다⁠. 가족 단톡방이었다⁠. 「⁠엄마 할머니가 그랬어⁠? 진짜로⁠?⁠」 선옥은 답하지 않았다⁠. 답은 총회 끝나고 얼굴 보고 할 생각이었다⁠.

맨 앞줄에서 의건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손을 들었다⁠.

*

“⁠참관인 발언을 요청합니다⁠.⁠”

총무가 호루라기를 만지작거리며 망설였다⁠. 회원이 아닌 사람이었다⁠. 선옥이 연단 아래에서 말했다⁠.

“⁠들어 보죠⁠. 삼 분 드리세요⁠.⁠”

의건이 일어났다⁠. 연단에 오르지 않고 맨 앞줄 앞⁠, 선옥이 앉은 후보석 바로 앞에 섰다⁠. 둘 사이가 두 걸음이었다⁠. 의건은 연회장이 아니라 선옥을 보고 말했다⁠. 마이크는 총무가 들고 따라왔다⁠.

“⁠갑분 씨가 보여 주신 자료는 맞습니다⁠. 숨길 생각 없습니다⁠.⁠” 의건의 목소리가 평평했다⁠. 연회장 끝까지 평평하게 갔다⁠. “⁠다만 동창 여러분이 아셔야 할 것도 있습니다⁠. 서 후보님이 가계약을 깨셔서 동창회 장학금 십억이 사라졌습니다⁠. 해마다 스무 명씩 오십 년을 줄 수 있는 돈입니다⁠. 느릅실 마흔 집이 받을 잔금도 묶였습니다⁠. 할머님들이 요양원 보증금으로 쓰실 돈입니다⁠. 그리고 우리 회사 직원 삼백 명의 일자리가 흔들립니다⁠.⁠”

연회장이 조용해졌다⁠. 맨 앞줄 개울집 할머니가 손수건을 무릎에 내려놓았다⁠.

“⁠서 후보님은 땅 하나로 이걸 다 막으셨습니다⁠. 이유가 있으시겠죠⁠. 아버님의 정미소⁠, 돌아가신 남편분의 뜻⁠. 다 존중합니다⁠.⁠” 의건이 선옥을 똑바로 보았다⁠. “⁠그런데 오늘 뽑으실 회장은⁠, 그 대가를 누가 치르는지 아는 분이어야 합니다⁠. 서 후보님은 아십니까⁠?⁠”

선옥은 일어났다⁠. 두 걸음 사이가 한 걸음이 되었다⁠. 의건보다 머리 하나가 작았다⁠. 선옥은 고개를 들었다⁠.

“⁠압니다⁠.⁠”

선옥의 목소리가 높았다⁠. 채롬이 말대로 높게 냈다⁠.

“⁠장학금 십억은 제가 날렸어요⁠. 맞아요⁠. 제가 깼어요⁠. 마을 잔금도 제가 묶었어요⁠. 계약금은 할머니들이 그대로 가지시지만⁠, 잔금은 못 받으세요⁠. 그것도 제가 한 거예요⁠.⁠” 선옥은 의건을 보다가⁠, 연회장을 보았다⁠. 맨 뒷줄의 나빈과 눈이 마주쳤다⁠. 이번에는 나빈이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리고 대가는 제가 먼저 치렀어요⁠. 남편이 남긴 돈 육천만 원⁠. 딸한테 빌려주려던 돈이에요⁠. 우리 딸은 지금 저를 안 본대요⁠. 오늘은 보러 왔네요⁠.⁠”

연회장에서 웃음이 났다⁠. 작은 웃음이었다⁠. 나빈이 얼굴을 손으로 가렸다⁠.

“⁠앞으로도 치를 거예요⁠. 장학금은 기금 이억으로 다시 시작해요⁠. 다섯 명에서 시작해요⁠. 십억이 아니라 이억이에요⁠. 그 차이는 제가 평생 동창 여러분한테 갚을게요⁠. 회비 내라고 졸라서⁠.⁠” 선옥이 의건을 다시 보았다⁠. “⁠대표님은 아세요⁠? 대표님 회사 리조트가 서면⁠, 그 대가를 누가 치르는지⁠?⁠”

의건은 대답하지 않았다⁠. 삼 분이 지났다⁠. 총무가 호루라기를 입에 물었다가⁠, 불지 않았다⁠. 의건이 자리에 앉았다⁠.

*

개표는 오후 네 시에 시작했다⁠. 총무가 투명 상자를 열고 투표지를 한 장씩 꺼냈다⁠. 돋보기를 쓰고⁠, 이름을 읽고⁠, 화이트보드에 바를 정 자를 그었다⁠. 연회장 삼백삼십팔 명이 총무의 입만 보았다⁠. 매미 소리가 창을 뚫고 들어왔다⁠.

“⁠서선옥⁠. 탁상렬⁠. 탁상렬⁠. 서선옥⁠. 서선옥⁠. 장학⁠… 아⁠, 서선옥⁠.⁠”

연회장이 웃었다⁠. 누가 이름 대신 「⁠장학금⁠」이라고 쓴 모양이었다⁠. 총무가 선관위원들과 머리를 맞댔다가 유효표로 쳤다⁠. 이어서 「⁠쉼터⁠」라고 쓴 표가 나왔다⁠. 그것도 유효표로 쳤다⁠. 「⁠둘 다⁠」라고 쓴 표는 무효였다⁠. 무효표를 든 총무의 손이 떨렸다⁠. 「⁠반장 사랑해⁠」라고 쓴 표도 나왔다⁠. 무효였다⁠. 연회장이 뒤집어졌다⁠.

바를 정 자가 화이트보드를 메워 갔다⁠. 두 줄이 거의 같은 길이로 자랐다⁠. 한 줄이 앞서면 다른 줄이 따라잡았다⁠. 선옥은 숫자를 세지 않았다⁠. 총무의 목소리 높낮이만 들었다⁠. 「⁠서선옥⁠」을 읽을 때와 「⁠탁상렬⁠」을 읽을 때 총무의 목소리는 한 음도 다르지 않았다⁠. 총무는 공정했다⁠.

마지막 표였다⁠. 총무가 펼쳐 보고 잠깐 멈췄다⁠. 돋보기를 고쳐 썼다⁠.

“⁠서선옥⁠.⁠”

총무가 화이트보드 앞에서 바를 정 자를 세었다⁠. 두 번 세었다⁠. 마이크를 잡았다⁠.

“⁠총 투표 삼백삼십팔 표⁠. 무효 두 표⁠. 서선옥 후보 백칠십일 표⁠. 탁상렬 후보 백육십칠 표⁠.⁠”

연회장이 한순간 비었다⁠. 소리가 다 빠져나갔다⁠. 그다음 박수가 쏟아졌다⁠. 함성도 섞였다⁠. 「⁠장학금⁠!⁠」 「⁠선옥아⁠!⁠」 「⁠반장 수고했어⁠!⁠」 갑분이 의자 위로 올라가려다 무릎 때문에 못 올라가고 의자를 붙잡고 소리를 질렀다⁠. 모기팔이 형광 연두 팔을 휘둘렀다⁠. 개울집 할머니는 손뼉을 치지 않고 손수건을 접었다⁠.

“⁠네 표⁠.⁠” 총무가 덧붙였다⁠. “⁠네 표 차입니다⁠. 재검표 하실 분⁠?⁠”

상렬이 손을 들지 않았다⁠. 후보석에서 일어나 선옥에게 걸어왔다⁠. 연회장의 눈이 따라왔다⁠. 상렬이 손을 내밀었다⁠. 노란 고무줄이 손목에서 셔츠 소매 밖으로 나와 있었다⁠.

“⁠축하한다⁠, 회장님⁠.⁠”

선옥은 손을 잡았다⁠. 굳은살이 손바닥에 닿았다⁠. 상렬의 손이 따뜻했다⁠. 연회장의 박수가 두 사람 위로 한 번 더 쏟아졌다⁠.

박수 사이로 의자 끄는 소리가 났다⁠. 맨 앞줄 끝자리였다⁠. 의건이 일어나 있었다⁠. 마이크 없이 말했다⁠. 박수가 잦아들 만큼 낮고 평평한 목소리였다⁠.

“⁠회장님⁠, 축하드립니다⁠. 동창회 결정은 존중합니다⁠.⁠” 의건이 안경을 고쳐 썼다⁠. “⁠그런데 시 심의는 월요일입니다⁠. 회사는 정미소 부지 구역 지정 신청을 그대로 냅니다⁠. 몇 년이 걸려도요⁠. 땅은 동창회 선거로 정해지지 않습니다⁠.⁠”

연회장이 다시 조용해졌다⁠. 매미 소리가 창을 두드렸다⁠. 선옥은 상렬의 손을 놓지 않은 채 의건을 보았다⁠. 상렬의 손이 선옥의 손 안에서 한 번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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