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5,550자)

합창

사십 년 만의 동창회 · 석담율

금요일 아침⁠, 단톡방은 선옥보다 먼저 알았다⁠.

「⁠서선옥 후보 정미소 땅 판대요⁠」라는 글이 일곱 시 반에 올라왔다⁠. 누가 올렸는지는 금방 묻혔다⁠. 나빈이 서울 이모들에게 한 말이 청주 이모들에게 건너왔고⁠, 청주 이모들 가운데 단톡방에 있는 사람이 둘이었다⁠. 글 아래로 반응이 갈렸다⁠.

「⁠그럼 십억 장학금 확정⁠!⁠」 「⁠선옥 언니 결단 멋져요⁠」 「⁠결국 땅 팔 거면서 토론회는 왜⁠」 「⁠쉼터는 어떡해⁠」 「⁠쉼터는 반장 돈으로 짓는다며⁠」 「⁠반장 돈 남았나⁠?⁠」 「⁠리조트 생기면 땅값 오르니 우리 집도 팔아야지⁠」 「⁠느릅실에 집도 없으면서⁠」

선옥은 아침을 먹다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단톡방에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 대신 거실 피아노 위의 갑분 명함을 뒤집었다⁠. 하얀 뒷면이 위로 와 있었다⁠. 다시 앞면으로 뒤집었다⁠. 금박 이름이 아침 햇빛에 반짝였다⁠.

*

토요일 아침 아홉 시⁠, 학원 현관문을 연 사람은 갑분이었다⁠. 노크도 초인종도 없었다⁠. 손에는 누런 서류 봉투와 보온병이 있었다⁠. 선옥은 봉투를 보고 한 걸음 물러났다⁠. 갑분의 가방에서 누런 봉투가 나오면 무엇이든 무거웠다⁠.

“⁠이건 편지 아니야⁠. 겁먹지 마⁠.⁠”

갑분이 대기실 소파에 앉았다⁠. 스프링이 끽 소리를 냈다⁠. 갑분은 소리에 대고 “⁠너도 늙었구나⁠.⁠” 하고 말했다⁠. 그러고는 보온병 뚜껑을 열었다⁠. 대추차 냄새가 났다⁠.

“⁠나 도장 찍었어⁠. 금요일에⁠. 십 분 걸린다더니 칠 분 걸렸어⁠. 판사님이 빨리 끝내 주셨어⁠. 영감은 나와서 파란 릴 어딨냐고 또 물었어⁠. 베란다라고 했어⁠.⁠” 갑분이 대추차를 따랐다⁠. 손이 떨리지 않았다⁠. 갑분이 웃었다⁠. 웃음이 길었다⁠. 예전처럼 길었다⁠. “⁠속이 시원해⁠. 칠십만 원이지만 내 칠십만 원이야⁠.⁠”

“⁠잘했어⁠.⁠”

“⁠잘한 건지는 모르겠고⁠. 시원한 건 맞아⁠.⁠” 갑분이 봉투를 탁자에 올려놓았다⁠. “⁠이거 봐⁠. 오월에 반장이 사무장 자리 얘기하면서 회사 사업 설명회에 나를 데려갔어⁠. 사무장이면 알아야 된다고⁠. 그때 받은 거야⁠.⁠”

봉투 안에는 얇은 책자가 있었다⁠. 「⁠느릅실 시니어 리조트 — 투자 설명 자료⁠」 겉장에 하얀 건물 스무 채가 있었다⁠. 갑분이 책자를 넘겨 한 장을 펼쳤다⁠. 표가 있었다⁠. 「⁠입주 조건 — 분양형⁠. 보증금 사억에서 구억 원⁠. 월 생활비 삼백만 원부터⁠.⁠」

“⁠사억이야⁠. 느릅실 할머니 중에 사억 있는 사람 있어⁠? 우리 엄마 땅 다 팔아도 일억이야⁠.⁠” 갑분이 다음 장을 넘겼다⁠. 골짜기 지도였다⁠. 다리 어귀에 빨간 동그라미가 있었다⁠. 「⁠진입로 확보 필수 — 대안 없음⁠」 동그라미 옆에 손글씨 메모가 있었다⁠. 볼펜으로 급하게 쓴 글씨였다⁠. 「⁠신규 교량 시 사업성 미달⁠」

“⁠이건 누구 글씨야⁠?⁠”

“⁠의건이 글씨⁠. 설명회 끝나고 의건이가 자기 책자를 탁자에 두고 나갔어⁠. 내가 챙겼어⁠. 사무장이면 챙겨야 될 것 같아서⁠.⁠” 갑분이 빨간 동그라미를 손가락으로 눌렀다⁠. “⁠니 땅 없으면 다리를 새로 놔야 돼⁠. 다리 새로 놓으면 돈이 안 맞아⁠. 의건이 회의에서 그랬어⁠. 그 땅 없으면 리조트는 없다고⁠.⁠”

선옥은 빨간 동그라미를 보았다⁠. 정미소 자리였다⁠. 아버지가 쌀을 찧던 자리⁠, 선옥이 방아 소리를 반주 삼아 피아노를 치던 자리였다⁠.

“⁠그리고 하나 더⁠.⁠” 갑분이 책자 맨 뒤를 펼쳤다⁠. 계약서 견본이었다⁠. 갑분이 한 줄을 짚었다⁠. 「⁠매수인 사유로 계약이 해제될 경우⁠, 매도인은 받은 계약금을 반환하지 아니한다⁠.⁠」

“⁠할머니들 계약금은 벌써 받았어⁠. 개울집 할머니도⁠. 회사가 리조트를 접으면 그 돈은 안 돌려줘도 돼⁠. 땅도 그대로고⁠. 의건이가 묶인다고 한 건 잔금이야⁠. 계약금 말고⁠.⁠”

선옥은 책자에서 눈을 들었다⁠. 갑분이 선옥을 보고 있었다⁠. 눈이 맑았다⁠.

“⁠왜 이걸 나한테 가져왔어⁠? 너 반장 사무장이잖아⁠.⁠”

“⁠사무장은 할 거야⁠. 반장 쉼터 사무장⁠. 반장이 어디에 짓든⁠.⁠” 갑분이 대추차를 마셨다⁠. “⁠근데 표는 너 찍을 거야⁠. 그리고 총회 때 말할 거야⁠. 편지 얘기⁠. 내가 숨긴 거⁠. 다 말할 거야⁠. 이 책자 얘기도⁠.⁠”

“⁠그럼 너 동창들한테⁠…⁠”

“⁠욕먹겠지⁠. 사십이 년 숨긴 거 욕먹고⁠, 회사 서류 챙긴 거 욕먹고⁠.⁠” 갑분이 웃었다⁠. “⁠괜찮아⁠. 이혼하고 나니까 욕은 하나도 안 무서워⁠. 영감 잔소리보다 덜 시끄러워⁠.⁠”

*

일요일 오후⁠, 요양원 삼 층 휴게실에서 한봉녀는 화투를 치지 않았다⁠. 휠체어에 앉아 창밖을 보고 있었다⁠. 창밖에는 아파트가 있었다⁠. 선옥이 다가가자 어머니가 고개를 돌리지 않고 말했다⁠.

“⁠땅 판다며⁠.⁠”

“⁠가계약만 했어⁠.⁠”

“⁠가계약이 계약이지⁠. 니 아버지도 가계약부터 했어⁠. 윤 사장한테⁠.⁠” 한봉녀가 고개를 돌렸다⁠. 눈이 붉었다⁠. “⁠팔지 마라⁠.⁠”

“⁠엄마는 나보고 선거 지라며⁠. 쉼터 생기면 거기서 죽는다며⁠. 쉼터는 이제 회사 계획에 없어⁠.⁠”

“⁠선거는 니 맘대로 혀⁠. 땅은 팔지 마⁠.⁠” 한봉녀가 휠체어 팔걸이를 쥐었다⁠. “⁠그 땅에서 니가 피아노 쳤어⁠. 니 아버지가 들보 쳐다보던 데여⁠. 내가 갑분이네 마당에서 무릎 꿇게 만든 땅이고⁠. 그 땅이 길이 되믄⁠, 나는 죽어서 갈 데가 없어⁠.⁠”

선옥은 어머니 앞에 쪼그려 앉았다⁠. 다리가 저리기 시작했다⁠.

“⁠엄마⁠, 아빠 땅이 왜 내 이름으로 왔는지 알아⁠? 정묵 씨가 왜 돌려놓았는지⁠.⁠”

한봉녀가 딸을 오래 보았다⁠. 휴게실 텔레비전에서 일요일 노래자랑이 나오고 있었다⁠. 할머니들이 박수를 쳤다⁠.

“⁠정묵이가 등기 옮기던 날 나한테 왔었다⁠. 혼자⁠. 과일 바구니 들고⁠.⁠” 한봉녀가 말했다⁠. “⁠장모님⁠, 이제 이 땅은 선옥 씨가 정하게 하려고요⁠. 그러더라⁠. 내가 물었지⁠. 팔면 어쩔 거냐고⁠. 정묵이가 그러더라⁠. 팔면 판 대로⁠, 두면 둔 대로⁠. 선옥 씨가 정했으면 됐다고⁠.⁠”

선옥은 숨을 멈췄다⁠. 노래자랑 반주가 휴게실을 울렸다⁠.

“⁠정묵이는 마흔두 해 전에 내가 너 대신 정한 걸 갚으려고 그랬어⁠. 나는 그거 알고 고맙다고도 안 했다⁠.⁠” 한봉녀가 딸의 손등을 두 번 두드렸다⁠. 화투 칠 때와 같은 박자였다⁠. “⁠그러니까 니가 정해⁠. 근데 내 말도 하나 들어⁠. 팔지 마라⁠.⁠”

“⁠엄마⁠, 그게 내가 정하는 거야⁠?⁠”

“⁠내가 하는 말은 말이고⁠, 정하는 건 니가 혀⁠.⁠” 한봉녀가 다시 창밖을 보았다⁠. “⁠나는 평생 정하기만 했어⁠. 이번엔 말만 할란다⁠.⁠”

*

월요일 오전 열 시⁠, 선옥은 탁산건설 현장 사무소 철계단을 올랐다⁠. 텅⁠, 텅⁠, 텅⁠. 손에는 은행에서 뽑은 거래 확인증이 있었다⁠. 육천만 원이 이체되었다는 종이였다⁠. 정묵의 사망 보험금 가운데 남겨 둔 돈이었다⁠. 나빈이 결혼할 때도 손대지 않은 돈이었다⁠.

의건은 모형 앞에 서 있었다⁠. 하얀 건물 스무 채를 내려다보고 있다가 선옥을 보았다⁠. 놀라지 않았다⁠.

“⁠오실 줄 알았습니다⁠.⁠”

“⁠가계약 해제해요⁠. 두 배 보냈어요⁠.⁠” 선옥이 확인증을 모형 옆에 내려놓았다⁠. 회전 교차로 바로 옆이었다⁠. “⁠육천만 원이요⁠.⁠”

의건은 확인증을 보지 않았다⁠. 안경을 벗어 셔츠 자락에 닦았다⁠. 손이 떨리지 않았다⁠.

“⁠장학금 십억도 같이 사라집니다⁠. 마을 분들 잔금도요⁠. 그리고 저는 구역 지정을 신청합니다⁠. 시 심의는 다음 주 월요일입니다⁠.⁠”

“⁠알아요⁠. 계약금은 마을 분들이 그대로 가지시고요⁠.⁠”

의건이 안경을 다시 썼다⁠. 처음으로 표정이 움직였다⁠. 입꼬리가 아래로 당겨졌다⁠.

“⁠누가 그 자료를 드렸습니까⁠?⁠”

“⁠사무장이요⁠.⁠” 선옥이 모형을 보았다⁠. 정미소 자리의 회전 교차로가 형광등 아래 하얬다⁠. “⁠대표님⁠, 하나만 물어볼게요⁠. 이 건물 스무 채에 느릅실 사람이 몇 명 들어가요⁠?⁠”

의건은 대답하지 않았다⁠. 오래 대답하지 않았다⁠. 에어컨이 덜컹거리며 멈췄다가 다시 돌았다⁠.

“⁠없습니다⁠.⁠” 의건이 말했다⁠.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아버지 쉼터만 있었죠⁠.⁠”

“⁠그럼 마을 발전 기금 일억은 마을에 길 내 주는 대가네요⁠. 마을 사람 하나도 안 들어가는 집으로 가는 길⁠.⁠”

“⁠그 길로 일하러 들어가실 분은 많을 겁니다⁠. 요양보호사⁠, 조리사⁠, 경비⁠. 그것도 마을 일입니다⁠.⁠” 의건의 목소리가 다시 평평해졌다⁠. “⁠어머님은 지금 마을 사람 마흔 집이 받을 잔금과 장학생 이백 명과 우리 직원 삼백 명을 땅 하나로 막으시는 겁니다⁠. 아버지가 시키셨습니까⁠?⁠”

“⁠아니요⁠.⁠” 선옥이 철계단을 향해 몸을 돌렸다가⁠, 문간에서 멈췄다⁠. “⁠조율사가 시켰어요⁠. 오래 내려가 있던 줄은 한 번에 당기면 끊어진대요⁠. 이 골짜기도 그래요⁠. 한 번에 당기지 마세요⁠.⁠”

선옥은 철계단을 내려갔다⁠. 텅⁠, 텅⁠, 텅⁠. 아래에서 올려다보니 의건이 컨테이너 창가에 서 있었다⁠. 모형 앞이 아니었다⁠. 창밖의 진짜 골짜기를 보고 있었다⁠.

버스 정류장에서 선옥은 나빈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다섯 번 가고 나서야 나빈이 받았다⁠. 회의실에서 나온 듯 목소리가 낮았다⁠.

“⁠엄마⁠, 계약했다며⁠. 고마워⁠. 진짜로⁠.⁠”

“⁠깼어⁠. 방금⁠.⁠”

수화기 너머가 조용해졌다⁠. 복도를 지나가는 사람들 발소리만 들렸다⁠.

“⁠깼다고⁠? 왜⁠?⁠”

“⁠팔면 안 되는 땅이었어⁠. 할아버지 땅이고⁠, 아빠가 엄마한테 정하라고 준 땅이야⁠. 엄마가 정했어⁠.⁠” 선옥은 정류장 의자 끝을 손으로 쥐었다⁠. “⁠보증금은 엄마가 다른 걸로 알아볼게⁠. 학원 보증금이든 뭐든⁠.⁠”

“⁠엄마 학원 빼면 엄마는 뭐 해⁠?⁠”

“⁠그건 그때 정할게⁠.⁠”

“⁠엄마는 맨날 엄마가 정해⁠.⁠” 나빈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할머니도 그랬다며⁠. 할머니가 엄마 대신 정했다며⁠. 엄마는 지금 나 대신 정하는 거야⁠. 알아⁠?⁠”

선옥은 대답하지 못했다⁠. 버스가 들어왔다⁠. 문이 열렸다⁠. 선옥은 타지 않았다⁠.

“⁠나 당분간 엄마 안 봐⁠.⁠” 나빈이 말했다⁠. “⁠애들은 보내 줄게⁠. 애들은 할머니 좋아하니까⁠.⁠”

전화가 끊겼다⁠. 버스가 문을 닫고 떠났다⁠. 엔진 소리가 멀어졌다⁠. 선옥은 다음 버스가 올 때까지 정류장 의자에 앉아 있었다⁠. 사십 분이었다⁠.

*

화요일 저녁 일곱 시⁠, 합창단 연습실은 두 자리가 비어 있었다⁠. 소프라노 하나와 알토 하나가 단톡방에 「⁠이번 총회 합창은 빠지겠습니다⁠」라고 남겼다⁠. 둘 다 장학금 십억을 기다리던 동창이었다⁠. 열여덟이던 합창단이 열여섯이 되었다⁠. 의자 두 개를 치우자 대열에 빈틈이 생겼다⁠. 선옥은 빈틈을 메우지 않았다⁠.

“⁠알토⁠, 둘째 마디에서 숨 쉬지 마세요⁠.⁠”

“⁠이제 둘이 빠져서 숨 쉴 사람도 없어⁠.⁠”

알토 맨 끝자리가 말했다⁠. 웃음이 났는데 반만 났다⁠. 선옥은 연필로 보면대를 두 번 두드렸다⁠. 탁⁠, 탁⁠. 피아노 반주가 시작되었다⁠. 「⁠고향의 봄⁠」 첫 마디가 지하 연습실을 채웠다⁠. 열여섯 목소리가 섞였다⁠. 빈자리 두 개만큼 소리가 얇았다⁠. 얇은 데로 각자의 목소리가 하나씩 들렸다⁠. 선옥은 처음으로 단원들의 목소리를 하나씩 따로 들었다⁠.

둘째 줄을 부르는 중에 휴대전화가 울렸다⁠. 하나가 아니었다⁠. 의자 밑⁠, 가방 속⁠, 주머니에서 열여섯 대가 한꺼번에 울렸다⁠. 띵동⁠, 띵동⁠, 띵동⁠. 노랫소리 위로 알림음이 화음 없이 쌓였다⁠. 단원들이 노래를 멈췄다⁠. 반주만 혼자 한 마디를 더 갔다⁠.

단톡방이었다⁠. 이번에는 대외협력팀이 아니었다⁠. 「⁠탁의건⁠」이라는 이름이 들어와 글을 올렸다⁠.

「⁠탁산건설 대표 탁의건입니다⁠. 서선옥 후보께서 정미소 부지 가계약을 해제하셨습니다⁠. 이에 따라 동창회 장학회 기부 십억 원은 없던 일이 되었습니다⁠. 동창 여러분께 죄송합니다⁠. 회사의 뜻은 끝까지 지역과 함께하는 것이었습니다⁠.⁠」

연습실이 조용해졌다⁠. 열여섯 명이 휴대전화 화면을 보고⁠, 선옥을 보았다⁠. 알토 맨 끝자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선옥아⁠, 진짜야⁠?⁠”

선옥은 피아노 의자에서 일어났다⁠. 반주 악보가 보면대에서 미끄러져 바닥에 떨어졌다⁠. 줍지 않았다⁠.

“⁠진짜야⁠. 내가 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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