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5,557자)

여섯 시 사십 분

사십 년 만의 동창회 · 석담율

일요일 아침⁠, 나빈은 정미소 미닫이가 우는 소리에 귀를 막았다⁠.

“⁠엄마⁠, 이거 매번 이래⁠?⁠”

“⁠마흔두 해 동안 이랬어⁠. 할아버지가 문 열 때마다⁠.⁠”

“⁠할아버지는 귀가 안 아팠대⁠?⁠”

“⁠할아버지는 이 소리로 아침을 시작했어⁠. 이 소리가 나면 동네 사람들이 일어났대⁠.⁠”

나빈은 귀에서 손을 떼고 안을 둘러보았다⁠. 쌀겨 냄새에 코를 찡그렸다⁠. 방아 기계를 보고⁠, 바닥에 늘어진 벨트를 보고⁠, 지붕 틈으로 내려오는 햇빛 기둥을 보았다⁠. 서울에서 태어나 청주에서 자란 딸은 정미소 안에 처음 들어왔다⁠. 선옥은 딸을 데려오지 않았던 마흔 해 가까운 세월을 세다가 그만두었다⁠.

사무실 피아노는 조율사가 한 번 다녀간 뒤라 반의반만큼 올라와 있었다⁠. 나빈이 건반 하나를 눌렀다⁠. 도였다⁠. 이어서 손바닥으로 건반 여럿을 한꺼번에 눌렀다⁠. 쾅⁠. 내려앉은 화음이 사무실을 울렸다⁠.

“⁠애들이 이렇게 쳐⁠.⁠” 나빈이 말했다⁠. “⁠우리 큰애가⁠. 할머니 학원 피아노 이렇게 쳐서 혼났잖아⁠.⁠”

“⁠너도 그랬어⁠. 다섯 살 때⁠.⁠”

“⁠나는 기억 안 나⁠.⁠”

“⁠나는 기억나⁠.⁠” 선옥이 핸드백에서 누런 봉투를 꺼냈다⁠. 상렬의 편지 봉투가 아니었다⁠. 법무사 사무소 이름이 찍힌 봉투였다⁠. 정묵이 십여 년 전 정미소 등기를 선옥 이름으로 옮기고 받은 서류 봉투였다⁠. “⁠어제 총회 끝나고 아빠 서랍을 다시 열어 봤어⁠. 등기 서류 뒤에 이게 끼어 있더라⁠.⁠”

봉투에서 작은 종이가 나왔다⁠. 수첩을 뜯은 종이였다⁠. 정묵의 반듯한 글씨였다⁠. 자로 잰 듯했다⁠.

「⁠당신 아버지 땅은 당신이 정해요⁠. 팔든 두든⁠, 당신이 정한 대로가 맞아요⁠. 나는 옆에서 보겠습니다⁠. 2015년 봄⁠, 정묵⁠.⁠」

나빈은 종이를 두 손으로 받았다⁠. 오래 보았다⁠. 손톱이 짧은 손가락으로 「⁠옆에서 보겠습니다⁠」를 문질렀다⁠.

“⁠아빠는 다 알았어⁠? 할머니가 정한 거⁠. 갑분 이모 편지⁠.⁠”

“⁠결혼 전에 다 알고 왔대⁠. 할머니가 그러더라⁠.⁠”

“⁠그럼 아빠는 엄마를⁠…⁠” 나빈이 말을 멈췄다⁠.

“⁠사랑했어⁠. 알고도 왔고⁠, 알고도 평생 옆에 있었어⁠.⁠” 선옥이 피아노 뚜껑에 손을 얹었다⁠. 나무가 서늘했다⁠. “⁠장미를 해마다 찔레라고 우겼어⁠. 엄마가 덩굴장미라고 하는 걸 들으려고⁠. 그런 사람이었어⁠.⁠”

나빈이 울었다⁠. 소리 내어 울었다⁠. 서른여덟 살 딸이 다섯 살처럼 울었다⁠. 선옥은 딸의 등을 두 번 두드렸다⁠. 어머니가 하던 박자였다⁠. 나빈이 울다가 코를 풀었다⁠. 휴지가 없어서 정미소 달력 귀퉁이를 쳐다보았다⁠. 선옥이 손수건을 건넸다⁠. 상렬의 손수건이었다⁠. 다림질이 되어 있었다⁠.

“⁠이거 누구 거야⁠? 남자 손수건인데⁠.⁠”

“⁠세탁소 거⁠.⁠”

“⁠엄마⁠.⁠”

“⁠선거 상대 후보 거⁠.⁠” 선옥이 말했다⁠. “⁠돌려줄 거야⁠.⁠”

나빈이 울다가 웃었다⁠. 코가 막혀 웃음이 이상하게 나왔다⁠. 웃음이 사무실 양철 지붕에 부딪혔다⁠.

“⁠엄마⁠, 그래서 땅은 어떻게 할 거야⁠?⁠”

선옥은 창밖을 보았다⁠. 사무실 창으로 정미소 담과 다리와 개울이 보였다⁠. 담 모서리에 측량 깃발이 아직 하나 남아 파닥였다⁠.

“⁠쉼터 부지로 내놓을 거야⁠. 상렬이 쉼터⁠. 회사 말고⁠, 상렬이가 세우는 비영리 법인에⁠. 내일 아침 시청 가기 전에 법무사 만나⁠.⁠” 선옥은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근데 여기 사무실은 남겨⁠. 피아노도⁠. 엄마 학원 여기로 옮길 거야⁠. 수곡동 학원 빼고⁠.⁠”

“⁠학원을 빼⁠?⁠”

“⁠보증금 빼서 너 줄게⁠. 일억 오천은 안 되고⁠, 반은 될 거야⁠. 나머지는 네가 알아서 해⁠. 사위가 어떻게든 해 본다며⁠.⁠” 선옥이 웃었다⁠. “⁠여기서 동네 애들 가르칠 거야⁠. 장학금 받는 애들도 오라고 하고⁠. 쉼터 할머니들은 낮에 피아노 소리 듣고⁠. 개울 소리하고 같이⁠.⁠”

“⁠엄마⁠, 여기 애들 없다며⁠. 분교 닫았다며⁠.⁠”

“⁠버스가 다섯 번으로 늘면 와⁠.⁠” 선옥이 말했다⁠. “⁠안 늘면 내가 데리러 가고⁠.⁠”

나빈은 대답 대신 피아노 건반을 하나 눌렀다⁠. 라였다⁠. 반의반만큼 올라온 라가 아직 낮았다⁠. 나빈이 귀를 기울였다⁠.

“⁠애들 방학 때 여기 보낼게⁠. 할머니 학원으로⁠.⁠”

*

월요일 아침 여덟 시 오십 분⁠, 시청 민원실 대기 의자에 셋이 나란히 앉았다⁠. 선옥과 상렬과 법무사였다⁠. 번호표는 십칠 번이었다⁠. 화면에는 십이 번이 떠 있었다⁠. 딩동 소리가 날 때마다 상렬이 번호표를 다시 보았다⁠.

“⁠너 떨려⁠?⁠”

“⁠떨려⁠. 회사 이사회보다 떨려⁠.⁠” 상렬이 번호표를 접었다 폈다⁠. “⁠진짜 괜찮냐⁠. 니 땅이야⁠. 니 아버지 땅이고⁠.⁠”

“⁠니 쉼터에 내 땅 바치는 거 아니야⁠.⁠” 선옥이 말했다⁠. 목소리가 높지도 낮지도 않았다⁠. 제 음이었다⁠. “⁠우리 아버지 정미소가 이제 쌀 대신 사람을 받는 거야⁠. 그것뿐이야⁠. 조건은 어제 말했지⁠. 사무실하고 피아노는 내 거⁠.⁠”

“⁠이름은⁠?⁠”

“⁠무슨 이름⁠?⁠”

“⁠쉼터 이름⁠. 법인 서류에 넣어야 돼⁠.⁠” 상렬이 법무사를 보았다⁠. 법무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느릅실 쉼터로 하려다가⁠, 니가 정해⁠.⁠”

선옥은 창밖을 보았다⁠. 시청 마당에 무궁화가 피어 있었다⁠. 민원실 화면에서 딩동 소리가 났다⁠. 십삼 번이었다⁠.

“⁠정미소 쉼터⁠.⁠”

상렬이 웃었다⁠. 법무사가 서류 빈 곳에 연필로 적었다⁠. 십칠 번이 뜨자 셋이 동시에 일어났다⁠. 창구 직원이 서류를 받아 넘기며 서명란을 가리켰다⁠. 상렬이 셔츠 주머니를 뒤졌다⁠. 돋보기가 없었다⁠. 선옥이 가방에서 자기 돋보기를 꺼내 건넸다⁠. 상렬이 돋보기를 쓰고 서명했다⁠. 선옥이 돋보기를 돌려받아 쓰고 서명했다⁠. 창구 직원이 두 사람이 돋보기 하나를 주고받는 것을 보고 웃음을 참았다⁠. 서류에 접수 도장이 찍혔다⁠. 쾅⁠. 오전 아홉 시 사 분이었다⁠.

민원실을 나오며 상렬이 말했다⁠.

“⁠다방에서는 남자들이 도장 찍었는데⁠.⁠”

“⁠오늘은 내가 찍었어⁠. 너는 서명만 했고⁠.⁠” 선옥이 돋보기를 가방에 넣었다⁠. “⁠돋보기도 빌려 쓰고⁠.⁠”

*

월요일 오후 다섯 시⁠, 정미소 터에 검은 승용차 한 대가 멈췄다⁠. 의건이 혼자 내렸다⁠. 하늘색 셔츠가 땀에 젖어 있었다⁠. 시청에서 바로 온 차림이었다⁠.

상렬은 정미소 담 앞에서 모기팔과 함께 풀을 베고 있었다⁠. 예초기 소리가 멈췄다⁠. 사무실 창가에서 예초기가 멎는 소리를 들은 선옥이 문을 열고 나왔다⁠.

시 심의는 오후 두 시에 끝났다⁠. 정미소 터가 오전 아홉 시에 쉼터 법인 앞으로 기부 접수되었고⁠, 진입로를 확보하지 못한 개발 계획은 보류되었다⁠. 「⁠진입로 확보 계획 미비로 재심의⁠」 시청 홈페이지에 한 줄로 올라왔다⁠. 한 시간 뒤 싱가포르 투자사가 투자 철회를 알렸다는 소문이 단톡방에 돌았다⁠. 갑분이 기사 주소를 올렸고⁠, 모기팔이 호루라기 이모티콘을 열두 개 달았다⁠.

의건은 담 모서리로 걸어갔다⁠. 아직 남은 측량 깃발 앞에 섰다⁠. 「⁠탁산건설 측량 — 손대지 마시오⁠」 의건은 말뚝을 두 손으로 잡았다⁠. 흔들고⁠, 흔들고⁠, 세 번째에 뽑았다⁠. 흙덩이가 구두 위로 떨어졌다⁠. 의건은 털지 않았다⁠.

“⁠이건 회사가 거두는 게 맞습니다⁠.⁠” 의건이 말했다⁠. 아버지를 보지 않고 말했다⁠. “⁠골짜기에 백 개쯤 남았습니다⁠. 이번 주에 사람을 보내 다 뽑겠습니다⁠.⁠”

“⁠회사는⁠?⁠”

“⁠버팁니다⁠. 다른 현장 찾겠습니다⁠. 직원들 데리고요⁠. 몇은 내보내야 할 겁니다⁠.⁠” 의건이 말뚝을 옆구리에 끼웠다⁠. 평평한 목소리였다⁠. 처음으로 평평한 데가 조금 갈라졌다⁠. “⁠아버지 쉼터⁠, 오 년이면 문 닫습니다⁠. 스무 자리로는 운영비가 안 나옵니다⁠. 제가 장담합니다⁠.⁠”

“⁠그럼 오 년은 연다⁠.⁠”

의건이 아버지를 보았다⁠. 상렬의 셔츠에 풀물이 들어 있었다⁠. 손에 예초기 손잡이를 잡던 자국이 빨갰다⁠. 손목에 노란 고무줄이 있었다⁠.

“⁠오 년 뒤에 문 닫으면요⁠?⁠”

“⁠그때 니가 와서 열어라⁠. 계산 잘하는 놈이 열면 십 년은 가겠지⁠.⁠”

의건은 대답하지 않았다⁠. 말뚝을 차 트렁크에 넣었다⁠. 트렁크 닫는 소리가 개울 위로 퍼졌다⁠. 운전석 문을 열다가 멈췄다⁠.

“⁠어머니가 물으시면 아버지 고향 가셨다고 하겠습니다⁠. 아주⁠.⁠”

“⁠그래라⁠. 미안하다는 말도⁠.⁠”

“⁠그건 직접 하세요⁠.⁠” 의건이 차에 올랐다⁠. 창문을 내렸다⁠. 선옥을 보았다⁠. “⁠회장님⁠, 축하드립니다⁠. 정미소 부지는 좋은 땅입니다⁠. 계산해 보면 압니다⁠.⁠”

차가 다리를 건너 나갔다⁠. 엔진 소리가 멀어졌다⁠. 상렬은 차가 국도 삼거리에서 사라질 때까지 보았다⁠. 예초기를 다시 켜지 않았다⁠. 모기팔이 상렬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가⁠, 호루라기를 꺼내 짧게 불었다⁠. 삐⁠. 휴식이라는 뜻이었다⁠.

“⁠쉼터 차는 내가 몰게유⁠. 승합차⁠. 호루라기 불믄서⁠. 수수료 안 받고⁠.⁠”

“⁠차가 아직 없어⁠.⁠”

“⁠그럼 트럭으로 혀유⁠. 짐칸에 방석 깔고⁠.⁠”

선옥이 웃었다⁠. 상렬도 웃었다⁠. 웃음 끝이 조금 올라갔다⁠. 다리 위로 오후 버스가 들어왔다⁠. 갑분이 내렸다⁠. 보온병과 종이 상자를 들고 있었다⁠. 갑분은 정미소 담에 종이를 한 장 붙였다⁠. 매직으로 쓴 글씨였다⁠. 「⁠정미소 쉼터 — 짓는 중⁠. 문의는 사무장 염갑분⁠」 글씨가 15도쯤 기울어 있었다⁠. 갑분이 종이 상자에서 명함을 한 장씩 꺼내 상렬과 모기팔과 선옥에게 나눠 주었다⁠.

“⁠사백구십 장 남짓 남았어⁠. 아껴 써야 돼⁠.⁠”

“⁠명함을 어떻게 아껴 써⁠?⁠”

“⁠한 사람한테 두 번 안 줘⁠.⁠” 갑분이 선옥의 손에 한 장을 더 쥐여 주었다⁠. “⁠너는 두 장⁠. 하나는 니 엄마 갖다 드려⁠.⁠”

개울집 할머니가 다리 건너에서 손을 흔들었다⁠. 계약금은 그대로 할머니 통장에 있었고⁠, 땅도 그대로였다⁠. 할머니는 쉼터 첫 입소자로 이름을 올렸다⁠. 두 번째는 한봉녀였다⁠. 요양원 화투판에서 사탕 서른 개를 걸고 개울집 할머니와 순서를 다퉜다는데⁠, 졌다고 했다⁠. 처음 진 판이었다⁠. 지고도 웃었다고 했다⁠.

*

칠월 셋째 주 수요일 새벽 여섯 시 삼십오 분⁠, 육거리 시장 앞 정류장에 장바구니 다섯 개가 줄을 지었다⁠. 선옥은 장바구니 줄 끝에 섰다⁠. 가방에는 바이엘 두 권과 체르니 한 권⁠, 단톡방에 올릴 공지 초안이 있었다⁠. 「⁠제1회 무심 장학생 다섯 명을 뽑습니다⁠. 이번 해부터 장학생은 방학마다 느릅실 정미소 음악방에서 피아노를 배울 수 있습니다⁠. 버스비는 회장이 냅니다⁠.⁠」 초안 끝에 갑분이 음성 메시지로 덧붙여 달라고 한 줄이 있었다⁠. 「⁠사무장 명함 아직 사백구십 장 남짓 있습니다⁠. 필요하신 분⁠.⁠」

버스가 정각에 들어왔다⁠. 출발할 때 한 번 컥 기침을 하고⁠, 기어를 올릴 때마다 끙 소리를 냈다⁠. 선옥은 앞에서 두 번째 창가에 앉았다⁠. 옆자리에 가방을 올려놓았다⁠.

두 정거장 뒤⁠, 상렬이 탔다⁠. 시청에 쉼터 서류를 내러 나왔다가 시내 여관에서 자고 첫차를 탄 것이었다⁠. 흰 셔츠에 등산 가방이었다⁠. 상렬은 기사에게 인사하고⁠, 통로를 걸어와 선옥의 바로 뒷자리에 앉았다⁠. 마흔두 해 전과 같은 자리였다⁠.

선옥은 돌아보지 않았다⁠. 등 뒤에서 상렬이 숨을 고르는 소리가 들렸다⁠. 박하사탕 봉지를 뜯는 소리가 들렸다⁠. 버스가 무심천을 건넜다⁠. 둑길의 장미는 다 지고 잎만 남아 있었다⁠.

“⁠오늘 수요일이다⁠.⁠”

뒷자리에서 상렬이 말했다⁠. 끝이 살짝 올라갔다⁠.

선옥은 가방을 옆자리에서 들어 무릎에 올렸다⁠. 빈자리를 손바닥으로 한 번 두드렸다⁠. 화투 칠 때 어머니가 판을 두드리던 소리였다⁠.

등 뒤에서 무릎이 딱 소리를 냈다⁠. 상렬이 일어나 한 칸 앞으로 옮겨 앉았다⁠. 버스가 미원 쪽으로 꺾어지며 기어를 낮췄다⁠. 엔진 소리가 한 단 굵어졌다⁠. 둘의 어깨가 한 번 닿았다가 떨어졌다가 다시 닿았다⁠. 상렬이 박하사탕 하나를 내밀었다⁠. 선옥은 받았다⁠. 노란 고무줄이 상렬의 손목에서 창으로 들어온 첫 햇빛을 받았다⁠. 다리 어귀 정미소 지붕이 멀리서 반짝였고⁠, 버스는 개울 소리 쪽으로 사십 분을 더 달렸다⁠.

여기까지가 지금까지 나온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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