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5,398자)

이십팔억

사십 년 만의 동창회 · 석담율

월요일 아침⁠, 단톡방에 상렬의 음성 메시지가 올라왔다⁠. 상렬이 음성 메시지를 보낸 것은 처음이었다⁠. 녹음 버튼을 누르고 말을 시작하기까지 사 초가 비었다⁠. 빈 사 초 동안 수탉이 두 번 울었다⁠.

“⁠아⁠, 아⁠. 탁상렬입니다⁠. 이거 녹음되는 거 맞나⁠. 모기팔⁠, 이거 맞아⁠? 맞대요⁠. 저 지금 느릅실 이장님 댁 사랑방에 있습니다⁠. 회사 일은 기사로 보셨을 겁니다⁠. 선거는 계속 나갑니다⁠. 쉼터는 제 돈으로 짓습니다⁠. 이번 주에 떡 돌리러 집집이 가겠습니다⁠. 떡값은 제 돈입니다⁠. 기금 아닙니다⁠. 아⁠, 모기팔 코 고는 소리 들어가겠네⁠. 끊겠습니다⁠.⁠”

메시지 끝에 정말로 코 고는 소리가 들어 있었다⁠. 길고 낮고⁠, 끝이 호루라기처럼 휘었다⁠. 단톡방이 웃음 이모티콘으로 덮였다⁠. 「⁠반장이 이장 집에 얹혀산대⁠」 「⁠회사 사장이 사랑방으로⁠」 「⁠멋있는 건지 짠한 건지⁠」 「⁠코 고는 거 모기 대장이지⁠?⁠」 「⁠모기 대장 코는 명창이여⁠」 갑분은 아무것도 올리지 않았다⁠. 갑분은 금요일에 법원에 다녀왔고⁠, 다녀온 뒤로 단톡방에서 조용했다⁠.

선옥은 음성 메시지를 한 번 더 들었다⁠. 상렬의 목소리가 처음보다 반음 낮았다⁠. 낮아진 목소리가 더 편하게 들렸다⁠.

*

월요일 오후 두 시⁠, 학원 현관에 의건이 서 있었다⁠. 하늘색 셔츠⁠, 무테 안경⁠, 손에는 얇은 서류 가방 하나⁠. 대표가 되었다고 옷이 바뀌지는 않았다⁠.

“⁠레슨 시간이 아닌 걸 확인하고 왔습니다⁠.⁠”

“⁠학원 시간표를 어떻게 알아요⁠?⁠”

“⁠현관에 붙어 있었습니다⁠.⁠”

선옥은 의건을 대기실 소파에 앉혔다⁠. 갑분이 주저앉았던 소파였다⁠. 스프링이 끽 소리를 냈다⁠. 의건은 소리에 놀라지 않고 서류 가방을 무릎에 올렸다⁠. 피아노 위의 금박 명함을 보았다⁠. 「⁠느릅실 주민 쉼터 사무장 염갑분⁠」 의건은 명함에서 눈을 떼고 서류를 꺼냈다⁠.

“⁠두 가지를 말씀드리러 왔습니다⁠. 정미소 부지를 이십팔억에 사고 싶습니다⁠. 감정가의 세 배입니다⁠. 그리고 동창회 장학회에 십억을 기부하겠습니다⁠. 이번에는 선거와 상관없이요⁠. 어머님이 회장이 되셔도⁠, 아버지가 되셔도 냅니다⁠. 조건은 매각 하나입니다⁠.⁠”

선옥은 서류를 받지 않았다⁠. 의건이 서류를 탁자에 내려놓았다⁠.

“⁠아버지를 쫓아내고 그 돈을 나한테 들고 왔어요⁠?⁠”

“⁠아버지는 회사를 감정으로 하셨습니다⁠. 저는 계산으로 합니다⁠. 계산해 보니 어머님 땅 하나에 걸린 게 너무 많습니다⁠.⁠” 의건이 손가락을 하나씩 접지 않고 말했다⁠. 다 외운 숫자였다⁠. “⁠직원 삼백 명⁠. 마을 마흔 집이 받을 계약금⁠. 리조트 육백 세대⁠. 그리고 장학금 십억이면 한 해 스무 명씩 오십 년입니다⁠. 어머님이 원하시는 거 다 됩니다⁠.⁠”

“⁠우리 엄마 같은 할머니들은요⁠? 쉼터 뺐잖아요⁠.⁠”

“⁠마을 발전 기금 일억을 냅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쉼터를 따로 지으신다니⁠, 그건 아버지 몫입니다⁠.⁠”

“⁠땅 안 팔면⁠?⁠”

“⁠시에 구역 지정을 신청합니다⁠. 오래 걸립니다⁠. 몇 년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동안 마을 분들 계약은 묶입니다⁠. 할머님들 계약금도요⁠.⁠” 의건의 목소리가 한 음도 흔들리지 않았다⁠. “⁠협박으로 들리시면 죄송합니다⁠. 사실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사실은 협박처럼 들리게 말하는 재주가 있네요⁠.⁠”

의건이 처음으로 웃었다⁠. 웃음이 짧았는데⁠, 끝이 살짝 올라갔다⁠. 상렬의 웃음이었다⁠. 선옥은 웃음 끝을 들었다⁠. 의건 자신은 모르는 웃음이었다⁠.

“⁠어머님⁠.⁠” 의건이 일어났다⁠. “⁠아버지는 평생 그 땅을 보셨습니다⁠. 저는 아버지가 보는 그 땅을 평생 봤고요⁠. 저도 이제 그 동네를 끝내고 싶습니다⁠. 어떻게든⁠. 목요일까지 답 주시면 됩니다⁠. 총회 전에 계약이 돼야 시 심의에 낼 수 있어서요⁠.⁠”

의건이 나간 뒤 선옥은 탁자 위의 서류를 오래 보았다⁠. 이십팔억이라는 숫자가 한글로 쓰여 있었다⁠. 「⁠금 이십팔억 원정⁠」 피아노 위의 명함과 탁자 위의 서류 사이에 선옥이 앉아 있었다⁠.

*

화요일 낮⁠, 선옥은 조율사를 데리고 느릅실 정미소에 갔다⁠. 삼십 년 동안 학원 피아노를 맡아 온 조율사였다⁠. 일흔이 넘었고⁠, 귀에 손을 대지 않고도 맥놀이를 들었다⁠. 조율사는 정미소 사무실 피아노 뚜껑을 열고 건반을 몇 개 눌러 보더니 혀를 찼다⁠.

“⁠반음 가까이 내려갔네요⁠. 마흔 해는 묵었죠⁠?⁠”

“⁠마흔두 해요⁠.⁠”

“⁠줄은 멀쩡해요⁠. 녹도 덜 슬었고⁠. 사무실이 건조했나 봐요⁠. 쌀겨가 습기를 먹었나⁠.⁠” 조율사가 조율 해머를 핀에 끼웠다⁠. “⁠근데 한 번에는 못 올려요⁠. 오늘 반의반⁠, 다음 달에 반의반⁠, 그다음 달에 나머지⁠. 세 번은 와야 돼요⁠.⁠”

“⁠한 번에 올리면요⁠?⁠”

“⁠줄이 끊어지죠⁠. 오래 내려가 있던 줄은 갑자기 당기면 못 버텨요⁠.⁠” 조율사가 해머를 돌렸다⁠. 핀이 끼익 소리를 냈다⁠. 라가 조금 올라갔다⁠. “⁠사람도 그렇잖아요⁠. 오래 참은 사람은 천천히 풀어야지⁠.⁠”

선옥은 피아노 옆 철제 의자에 앉아 조율사가 한 줄씩 당기는 소리를 들었다⁠. 한 시간 동안 피아노 소리가 반의반만큼 올라왔다⁠. 내려앉은 소리와 제 소리 사이 어딘가였다⁠. 조율사가 가방을 챙기며 물었다⁠.

“⁠다음 달에 또 올까요⁠? 여기 땅 판다는 소문 있던데⁠.⁠”

선옥은 대답하지 못했다⁠. 조율사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명함을 피아노 위에 올려놓고 갔다⁠.

*

화요일 밤⁠, 나빈의 전화가 왔다⁠. 영상 통화가 아니라 음성이었다⁠. 나빈은 울고 싶을 때 영상을 끄는 딸이었다⁠.

“⁠엄마⁠, 집주인이 이번 주까지 대답 달래⁠. 안 올려 주면 다른 사람 들인대⁠.⁠” 나빈의 목소리가 떨렸다⁠. 뒤에서 아이 둘이 싸우는 소리가 났다⁠. 하나가 공룡을 뺏었고⁠, 다른 하나가 울었다⁠. “⁠이십팔억이라며⁠. 회사에서 이모들한테 다 소문났어⁠. 엄마⁠, 나 일억 오천만⁠. 빌려줘⁠. 이자 줄게⁠. 진짜로⁠.⁠”

“⁠이자는 무슨⁠.⁠”

“⁠그럼 빌려줄 거야⁠?⁠”

선옥은 대답하지 않았다⁠. 수화기 너머에서 공룡 싸움이 끝났다⁠. 둘 다 울었다⁠.

“⁠엄마⁠, 아빠라면 어떻게 했을 것 같아⁠?⁠”

“⁠아빠는 아무 말 안 했을 거야⁠.⁠” 선옥이 말했다⁠. 말하고 나니 사실이라는 것을 이제는 알았다⁠. “⁠아무 말 안 하고⁠, 엄마가 정하는 걸 옆에서 봤겠지⁠.⁠”

“⁠그럼 엄마가 정해⁠. 빨리⁠.⁠”

*

수요일 오후⁠, 느릅실 마을회관 앞에 모기팔의 일 톤 트럭이 서 있었다⁠. 짐칸에 떡 상자가 쌓였고⁠, 상렬이 짐칸 끝에 걸터앉아 떡을 나눴다⁠. 흰 셔츠 소매를 걷었고⁠, 셔츠 등판에 땀자국이 지도처럼 번져 있었다⁠. 할머니들이 줄을 지었다⁠. 떡을 받고 나서도 할머니들은 가지 않았다⁠. 회사 사장이 사랑방에 얹혀산다는 것이 느릅실에서는 사건이었다⁠.

“⁠반장⁠, 반찬은 있어⁠? 이장 집 냉장고에 김치밖에 없을 텐디⁠.⁠”

“⁠김치에 라면 먹어요⁠.⁠”

“⁠그럼 못써⁠. 저녁에 우리 집 와⁠. 고등어 지져 놨어⁠.⁠”

“⁠우리 집도 와⁠. 우리 집은 갈치여⁠.⁠”

“⁠갈치는 비싼디 어디서 났어⁠?⁠”

“⁠딸이 보냈어⁠. 사장님 오시면 드리라고⁠. 사장 아닌 줄은 모르고⁠.⁠”

웃음이 마을회관 마당에 퍼졌다⁠. 선옥은 버스에서 내려 마당의 웃음을 들었다⁠. 상렬이 떡을 든 채 고개를 돌렸다⁠. 할머니들이 일제히 선옥을 보았다⁠. 웃음이 멎었다⁠.

개울집 할머니가 먼저 다가왔다⁠. 떡 봉지를 든 손으로 선옥의 팔을 잡았다⁠.

“⁠정미소 딸⁠, 팔어⁠.⁠”

선옥은 할머니를 보았다⁠. 쑥떡을 반으로 갈라 주던 손이었다⁠.

“⁠쉼터 빠졌다며⁠. 그럼 내 자리는 없는 거여⁠. 근데 계약금은 있어⁠. 니가 안 팔믄 그것도 몇 년 묶인대⁠. 나 몇 년 못 기다려⁠. 계약금 받아서 청주 요양원 보증금 내야 혀⁠. 니 엄마 있는 데로 갈 거여⁠. 화투나 같이 치게⁠.⁠”

다른 할머니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도장을 찍은 집 할머니들이었다⁠. 과수원집 아저씨는 마당 끝에서 팔짱을 끼고 있었다⁠. 아직 도장을 안 찍은 사람이었다⁠. 아저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상렬이 짐칸에서 내려왔다⁠. 무릎이 딱 소리를 냈다⁠. 할머니 하나가 “⁠아이고⁠, 무릎⁠.⁠” 했다⁠. 상렬은 웃지 않았다⁠.

“⁠팔 거야⁠?⁠”

“⁠생각 중이야⁠.⁠” 선옥이 상렬을 마주 보았다⁠. 마당 한가운데였다⁠. 할머니들이 반 발짝씩 물러났다⁠. “⁠장학금 십억⁠, 땅값 이십팔억⁠. 니 쉼터는 스무 자리고⁠, 리조트는 육백 자리야⁠. 계산하면 답이 나와⁠.⁠”

“⁠육백 자리 중에 느릅실 사람 몇 명 들어가는지 물어봤어⁠?⁠”

“⁠니 회사였잖아⁠. 니가 알겠지⁠.⁠”

“⁠모른다⁠. 진짜로⁠. 의건이가 쉼터 빼고 나서 입주 자격을 다시 짰어⁠. 나는 이사회에서 쫓겨나서 못 봤어⁠.⁠” 상렬이 떡 상자를 내려놓았다⁠. “⁠근데 서울 은퇴자용이야⁠. 처음부터⁠. 느릅실 할머니들이 들어갈 돈이었으면 내가 쉼터를 따로 넣을 필요가 없었겠지⁠.⁠”

“⁠그럼 너는 처음부터 알고 쉼터를 미끼로 넣었어⁠?⁠”

“⁠미끼 아니야⁠. 내 몫이었어⁠. 회사 몫 옆에 내 몫⁠.⁠” 상렬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처음 듣는 높이였다⁠. “⁠이제 내 몫은 회사 밖에 있어⁠. 니가 팔면 나는 개울 건너 우리 아버지 논이라도 사서 쉼터 짓는다⁠. 리조트 담장 옆에⁠. 매일 리조트 버스가 쉼터 앞을 지나가겠지⁠. 정미소 자리로 난 길로⁠.⁠”

“⁠그게 내 탓이야⁠?⁠”

“⁠니 땅이니까⁠.⁠”

“⁠니 아들이 받아 내겠대⁠. 안 팔면⁠. 몇 년이 걸려도⁠. 그동안 이 할머니들 계약금 묶이고⁠.⁠” 선옥이 개울집 할머니를 가리켰다⁠. 할머니가 떡 봉지를 가슴에 안았다⁠. “⁠니가 회사에 있을 때 막았어야지⁠. 니가 넣은 계획이야⁠.⁠”

상렬이 입을 다물었다⁠. 마당이 조용해졌다⁠. 개울 소리가 마당까지 올라왔다⁠. 모기팔이 트럭 운전석에서 내려 호루라기를 입에 물었다가⁠, 불지 않고 도로 뺐다⁠. 불 자리가 아니었다⁠.

“⁠선옥아⁠.⁠” 상렬이 말했다⁠. 목소리가 다시 낮아졌다⁠. “⁠팔면 니 손으로 니 아버지 정미소를 회사에 넘기는 거야⁠. 다방에서처럼⁠.⁠”

“⁠다방에서는 내가 몰랐어⁠.⁠” 선옥의 목소리가 반음 내려갔다⁠. “⁠이번에는 알고 하는 거야⁠. 그게 달라⁠.⁠”

선옥은 버스 정류장으로 걸었다⁠. 뒤에서 상렬이 따라오지 않았다⁠. 할머니들의 신발 끄는 소리가 마당에서 흩어졌다⁠.

*

목요일 오후 네 시⁠, 학원 대기실 탁자 위에 가계약서가 놓였다⁠. 의건이 보낸 변호사는 서른 남짓의 여자였다⁠. 말이 빨랐고⁠, 인주 뚜껑을 여는 손이 더 빨랐다⁠.

“⁠가계약금은 삼천만 원입니다⁠. 본계약은 총회 다음 날⁠, 7월 4일입니다⁠. 가계약을 해제하시면 받으신 금액의 두 배를 돌려주셔야 합니다⁠. 여기⁠, 여기⁠, 그리고 여기 도장 찍으시면 됩니다⁠.⁠”

선옥은 도장을 꺼냈다⁠. 정묵이 학원을 열 때 새겨 준 도장이었다⁠. 상아 빛 플라스틱이었고⁠, 이름이 전서체로 새겨져 있었다⁠. 정묵은 도장을 건네며 전서체가 제일 위조하기 어렵다고 했다⁠. 도장 쓸 일이 생길 때마다 선옥은 정묵의 말을 떠올렸다⁠.

인주에 도장을 눌렀다⁠. 붉은 인주가 도장 바닥에 고르게 묻었다⁠. 첫 번째 칸에 찍었다⁠. 두 번째 칸에 찍었다⁠. 세 번째 칸 앞에서 선옥은 손을 멈췄다⁠. 연습실에서 아이가 틀린 음을 냈다⁠. 선옥은 고치러 가지 않았다⁠. 세 번째 칸에 찍었다⁠.

변호사가 서류를 가방에 넣고 일어났다⁠. 현관문이 닫혔다⁠. 대기실이 조용해졌다⁠.

휴대전화가 울렸다⁠. 띵동⁠. 은행 알림이었다⁠. 「⁠입금 30⁠,000⁠,000원 — 탁산건설(⁠주⁠)⁠」 단톡방 알림음과 같은 소리였다⁠. 선옥은 화면을 보다가 피아노 위의 금박 명함을 보았다⁠. 명함 위에 해가 들어 금박이 반짝였다⁠. 선옥은 명함을 뒤집어 놓았다⁠. 뒷면은 하얬다⁠.

12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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