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5,310자)

이사회

사십 년 만의 동창회 · 석담율

목요일 아침 아홉 시⁠, 성수동 탁산건설 본사 로비 벽에는 사진 한 장이 있었다⁠. 흙먼지 속에 노란 굴착기 한 대가 서 있고⁠, 굴착기 바가지 옆에서 서른 살의 탁상렬이 안전모를 쓰고 웃는 사진이었다⁠. 「⁠1995년⁠, 첫 현장⁠」 직원들은 로비를 지나며 사진을 보지 않았다⁠. 매일 보는 사진은 벽지와 같았다⁠.

상렬은 사진 앞에서 잠깐 멈췄다⁠. 사진 속 굴착기는 할부로 산 중고였다⁠. 할부가 끝나기 전에 엔진이 두 번 멈췄고⁠, 두 번 다 상렬이 직접 고쳤다⁠. 손바닥 굳은살은 중고 굴착기 엔진에서 생긴 것이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상렬은 왼손 손목을 보았다⁠. 노란 고무줄이 셔츠 소매 밑으로 살짝 보였다⁠. 고무줄이 손목을 조여 손등에 핏줄이 도드라졌다⁠. 십사 층에 도착할 때까지 상렬은 고무줄을 한 번도 만지지 않았다⁠.

*

이사회 회의실은 유리 벽이었다⁠. 긴 탁자 끝에 대형 모니터가 있었고⁠, 모니터 속에 싱가포르 자산운용사의 담당 임원이 앉아 있었다⁠. 금발에 회색 정장이었다⁠. 느릅실 개울에 구두 한 짝을 바친 사람이었다⁠. 통역사가 모니터 옆에 앉아 노트북을 열었다⁠.

탁자에는 이사 일곱 명이 둘러앉았다⁠. 상렬⁠, 의건⁠, 재무 담당 상무⁠, 싱가포르 투자사가 추천한 사외이사 둘⁠, 그리고 상렬과 삼십 년을 함께한 사외이사 둘⁠. 그중 하나는 서울 공사판 시절부터 함께한 친구였고⁠, 보청기를 끼고 있었다⁠. 회의가 시작되자 보청기가 삐익 하고 울었다⁠. 친구는 귀를 만지며 “⁠또 이러네⁠. 손주가 사 준 건데⁠.⁠” 하고 중얼거렸다⁠. 회의실 안에서 웃은 사람은 상렬 하나였다⁠.

의건이 일어나 화면을 넘겼다⁠. 「⁠느릅실 시니어 복합 휴양단지 — 수정안⁠」

“⁠두 가지가 바뀝니다⁠. 첫째⁠, 주민 상생 쉼터는 계획에서 뺍니다⁠. 동창회 동의가 불확실해졌고⁠, 쉼터 스무 자리는 운영 적자가 확실합니다⁠. 상생은 마을 발전 기금 일억으로 대신합니다⁠. 둘째⁠, 진입로 부지는 소유주가 매각에 응하지 않을 경우 시에 개발 구역 지정을 신청해 확보합니다⁠. 시 심의는 7월 5일입니다⁠.⁠”

통역사가 영어로 옮겼다⁠. 모니터 속 금발 임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Clear⁠. Thank you⁠, Vice President⁠.⁠”

상렬은 손을 들지 않고 말했다⁠.

“⁠쉼터 빼는 거 반대한다⁠. 남의 땅 받아 내는 것도 반대한다⁠.⁠”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에어컨 소리만 났다⁠. 의건이 화면 리모컨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이유를 말씀해 주십시오⁠, 대표님⁠.⁠”

“⁠쉼터는 그 동네 어른들이 고향에서 늙게 하려고 넣은 거다⁠. 그게 빠지면 우리가 그 골짜기에 짓는 건 서울 사람들 별장이다⁠. 그리고 그 땅 주인은 팔기 싫다고 했다⁠. 싫다는 땅을 받아 내서 길을 내면⁠, 그 길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매일 남의 집 마당을 밟고 들어가는 거야⁠.⁠”

“⁠대표님⁠.⁠” 의건의 목소리가 평평했다⁠. 평평한 목소리 밑으로 무언가 눌려 있었다⁠. “⁠이 사업에 들어간 대출 만기가 내년 봄입니다⁠. 사업이 서면 갚고⁠, 안 서면 못 갚습니다⁠. 못 갚으면 회사가 넘어갑니다⁠. 직원 삼백 명이 거리에 나앉습니다⁠. 쉼터 스무 자리와 직원 삼백 명입니다⁠.⁠”

“⁠둘 다 지킬 수 있어⁠. 쉼터 운영비는 내가 낸다고 했잖아⁠.⁠”

“⁠그 말씀이 투자자를 불안하게 합니다⁠.⁠” 의건이 모니터를 가리켰다⁠. 금발 임원이 통역을 듣고 있었다⁠. “⁠대표가 회사 사업에 개인 돈을 붓겠다는 건⁠, 사업을 감정으로 하신다는 뜻입니다⁠. 투자자는 감정에 돈을 안 넣습니다⁠.⁠”

“⁠감정 없이 지은 집에 누가 살아⁠?⁠”

“⁠돈 내는 사람이 삽니다⁠.⁠”

보청기가 다시 삐익 울었다⁠. 친구가 보청기를 빼서 탁자에 놓았다⁠. 아무도 웃지 않았다⁠.

의건이 아버지를 보았다⁠. 회의실에서 처음으로 아버지를 정면으로 보았다⁠.

“⁠아버지는 평생 그 동네만 보셨습니다⁠. 회사를 세운 것도 그 동네 땅을 다시 사려고 세우셨죠⁠. 저 다섯 살 때 사진에 아버지가 없습니다⁠. 열 살 때도요⁠. 어머니가 집을 나가던 날 아버지는 느릅실 땅 매물 보러 가 계셨습니다⁠. 어머니가 그러셨어요⁠. 그 동네에 두고 온 게 있는 사람이라고⁠.⁠” 의건이 안경을 벗었다⁠. 렌즈를 셔츠 자락에 닦았다⁠. 손이 조금 떨렸다⁠. “⁠이제 그 동네를 회사가 갖습니다⁠. 아버지가 원하시던 대로요⁠. 다만 아버지 방식이 아니라 회사 방식으로요⁠.⁠”

상렬은 아들의 손을 보았다⁠. 렌즈를 닦는 손이 떨렸다⁠. 다섯 살 때도 열 살 때도 상렬이 보지 못한 손이었다⁠. 상렬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말이 회의실 안에 없었다⁠.

“⁠표결하겠습니다⁠.⁠” 재무 담당 상무가 말했다⁠. 목소리가 작았다⁠.

수정안 찬성⁠. 의건⁠, 투자사 추천 사외이사 둘⁠, 재무 담당 상무⁠. 넷이었다⁠. 반대⁠. 상렬과 공사판 친구⁠. 남은 사외이사 하나는 기권했다⁠. 상렬과 삼십 년을 함께한 사람이었다⁠. 기권하면서 상렬을 보지 않았다⁠.

“⁠이어서 대표이사 변경 안건입니다⁠.⁠” 상무가 서류를 넘겼다⁠. 종이 넘기는 소리가 회의실에서 가장 큰 소리였다⁠. “⁠싱가포르 투자사 요청입니다⁠. 수정안과 다른 의견을 가진 대표 체제로는 투자 집행이 어렵다는⁠…⁠”

“⁠알아⁠. 읽지 마⁠.⁠”

상렬이 말했다⁠. 표결은 같은 숫자로 끝났다⁠. 넷⁠, 둘⁠, 기권 하나⁠. 사십 분이었다⁠. 서른두 해 전 굴착기 한 대로 시작한 회사의 대표 자리가 사십 분 만에 아들에게 넘어갔다⁠.

상렬은 일어나서 탁자 위의 명패를 들었다⁠. 「⁠대표이사 탁상렬⁠」 명패를 의건 앞에 내려놓았다⁠. 소리가 나지 않게 천천히 내려놓았다⁠.

“⁠쉼터는 내 돈으로 짓는다⁠. 회사 이름 안 붙이고⁠.⁠”

“⁠아버지 개인 돈은 아버지 마음입니다⁠.⁠”

“⁠그 땅 주인한테는 받아 내지 마라⁠. 부탁이다⁠.⁠”

의건은 대답하지 않았다⁠. 모니터 속 금발 임원이 통역을 기다리다 엄지를 들었다⁠. 상렬은 회의실 문을 열고 나갔다⁠. 공사판 친구가 보청기를 다시 끼우며 따라 나왔다⁠. 복도에서 친구가 말했다⁠. “⁠상렬아⁠, 이제 너 백수다⁠. 등산 가자⁠. 우리 산악회는 회비가 싸⁠.⁠”

상렬은 대표실에 들러 짐을 쌌다⁠. 쌀 짐이 많지 않았다⁠. 서랍에서 나온 것은 돋보기 세 개⁠, 위장약⁠, 손톱깎이⁠, 그리고 느릅실 지적도 한 장이었다⁠. 지적도에는 개울 건너 논 다섯 마지기에 연필로 동그라미가 쳐져 있었다⁠. 연필 자국이 여러 번 덧그어져 종이가 반들거렸다⁠.

문이 열렸다⁠. 의건이었다⁠. 노크를 하지 않았다⁠. 아들은 문간에 서서 아버지가 지적도를 접는 것을 보았다⁠.

“⁠어머니가 아버지 소식 물으시면 뭐라고 할까요⁠?⁠”

“⁠묻겠냐⁠.⁠”

“⁠물으세요⁠. 한 달에 한 번은⁠.⁠” 의건이 안경을 고쳐 썼다⁠. “⁠오늘 일은 제가 말씀드릴게요⁠. 아버지가 그 동네로 가셨다고⁠. 이번에는 아주⁠.⁠”

상렬은 지적도를 가방에 넣었다⁠. 지퍼를 닫는 소리가 길었다⁠.

“⁠너희 어머니한테 미안하다고 전해라⁠. 늦었지만⁠.⁠”

의건은 대답하지 않았다⁠. 문을 닫지 않고 몸을 돌렸다⁠. 복도를 걸어가는 아들의 구두 소리가 평평했다⁠. 한 번도 빨라지지 않았고⁠, 한 번도 늦어지지 않았다⁠. 상렬은 아들의 발소리가 엘리베이터 앞에서 멈출 때까지 들었다⁠.

*

같은 날 오후 세 시⁠, 선옥의 학원 현관문이 거칠게 열렸다⁠. 레슨 중이던 아이가 건반에서 손을 뗐다⁠. 갑분이 숨을 몰아쉬며 들어왔다⁠. 손에 휴대전화를 들고 있었다⁠.

“⁠봤어⁠? 이거 봤어⁠?⁠”

화면에 단톡방이 떠 있었다⁠. 누가 기사 하나를 올렸다⁠. 「⁠탁산건설⁠, 느릅실 사업 계획 수정⁠… 주민 쉼터 제외⁠」 기사 아래로 「⁠쉼터 빠졌대⁠」 「⁠그럼 반장 공약은⁠?⁠」 「⁠반장 회사에서 쫓겨났대⁠」 「⁠진짜⁠?⁠」 「⁠아들이 대표 됐대⁠」가 줄줄이 달려 있었다⁠.

선옥은 아이에게 연습실에서 기다리라고 하고 문을 닫았다⁠. 대기실 소파에 갑분이 주저앉았다⁠. 소파 스프링이 끽 소리를 냈다⁠.

“⁠쉼터가 없어졌어⁠. 사무장도 없어졌고⁠.⁠” 갑분이 말했다⁠. 목소리가 크지 않았다⁠. 큰 목소리가 다 빠져나간 목소리였다⁠. “⁠나 내일 법원 가⁠. 도장 찍으러⁠. 찍고 나오면 칠십만 원이야⁠. 사무장 월급 믿고 찍기로 한 도장이야⁠.⁠”

“⁠갑분아⁠.⁠”

“⁠너 때문이야⁠.⁠” 갑분이 선옥을 보았다⁠. 눈이 붉었다⁠. “⁠니가 토론회에서 리조트 다 까발려서⁠. 동창들이 반장 의심하고⁠, 회사는 동창회 필요 없다 하고⁠, 반장은 쫓겨나고⁠. 쉼터는 날아가고⁠.⁠”

“⁠다 까발린 건 회사가 숨겨서야⁠. 나는 말한 거고⁠.⁠”

“⁠말한 거랑 까발린 거랑 듣는 사람한테는 같아⁠.⁠” 갑분이 소파 팔걸이를 쥐었다⁠. “⁠너는 맨날 이겨도 잃는 게 없지⁠. 남편 연금 있고⁠, 학원 있고⁠, 땅 있고⁠. 이번에도 니가 이기겠지⁠. 이기고 나서 나 보고 미안하다고 하겠지⁠.⁠”

“⁠나도 잃었어⁠. 사십이 년⁠.⁠”

“⁠그건 내가 잃게 했지⁠.⁠” 갑분이 바로 받았다⁠. 말이 칼처럼 빨랐다⁠. “⁠알아⁠. 내가 잃게 했어⁠. 그래서 이번엔 내가 안 잃으려고 했어⁠. 예순하나에 처음으로 내 거 하나 가지려고 했어⁠. 그것도 니가 가져갔어⁠.⁠”

선옥은 할 말이 없었다⁠. 연습실 문 너머에서 아이가 기다리다 지쳤는지 바이엘 한 줄을 혼자 쳤다⁠. 틀린 음이 하나 있었다⁠. 선옥은 처음으로 틀린 음을 듣고도 고치러 가지 않았다⁠.

갑분이 가방에서 작은 종이 상자를 꺼냈다⁠. 명함 상자였다⁠. 뚜껑을 열고 명함 한 장을 꺼내 피아노 위에 올려놓았다⁠. 「⁠느릅실 주민 쉼터 사무장 염갑분⁠」

“⁠오백 장 찍었어⁠. 지난주에⁠. 반장이 미리 찍으라고 해서⁠.⁠” 갑분이 웃으려다 말았다⁠. “⁠사백구십구 장 남았어⁠. 한 장은 영감 줬어⁠. 보라고⁠. 서른여덟 해 만에 나도 명함 있다고⁠.⁠”

갑분은 명함 상자를 가방에 도로 넣고 일어났다⁠. 피아노 위의 한 장은 두고 갔다⁠. 현관문이 닫혔다⁠. 선옥은 명함을 집어 들었다⁠. 종이가 두꺼웠다⁠. 이름 석 자가 금박으로 찍혀 있었다⁠. 갑분은 금박을 넣느라 돈을 더 냈을 것이었다⁠.

*

밤 열 시 사십 분⁠, 휴대전화가 울렸다⁠. 상렬이었다⁠. 선옥이 받자 안내 방송 소리가 먼저 들렸다⁠. 「⁠대전행 마지막 버스가 곧 출발합니다⁠.⁠」 청주 시외버스 터미널이었다⁠.

“⁠어디야⁠?⁠”

“⁠청주⁠. 방금 내렸어⁠.⁠” 상렬의 숨이 조금 찼다⁠. 여행 가방 바퀴 굴러가는 소리가 들렸다⁠. 바퀴 하나가 덜그럭거렸다⁠. “⁠서울 집은 내놨어⁠. 짐은 이거 하나야⁠. 회사에서 들고 나온 건 사진 한 장이고⁠. 로비에 있던 거⁠. 굴착기⁠.⁠”

“⁠로비 사진을 떼 왔어⁠?⁠”

“⁠내 사진이잖아⁠. 의건이가 떼라고 하기 전에 내가 뗐어⁠.⁠” 상렬이 웃었다⁠. 웃음 끝이 올라가지 않았다⁠. “⁠선옥아⁠, 나 이제 건설 회사 사장 아니다⁠. 그냥 예순두 살이야⁠. 선거는 계속 나간다⁠. 쉼터는 내 돈 남은 걸로 짓는다⁠. 집 판 돈⁠, 주식 판 돈⁠. 니 땅 아니어도 어디든⁠.⁠”

“⁠오늘 어디서 자⁠?⁠”

“⁠모기팔이 사랑방 내준대⁠. 지금 데리러 온대⁠. 형광 연두로⁠.⁠” 상렬이 잠깐 말을 멈췄다⁠. 안내 방송이 끝났다⁠. 터미널이 조용해졌다⁠. 상렬의 숨소리가 들렸다⁠. “⁠고무줄 끊어졌어⁠.⁠”

“⁠언제⁠?⁠”

“⁠표결 끝나고 주먹 쥐었더니⁠. 회의실에서 툭 하고⁠.⁠” 상렬이 다시 웃었다⁠. 이번에는 끝이 조금 올라갔다⁠. “⁠수요일 거라 하루 늦어서 그런가 봐⁠.⁠”

선옥은 피아노 위의 명함을 보았다⁠. 금박 이름이 거실 등불에 반짝였다⁠. 수화기 너머에서 형광 연두가 보이는지⁠, 멀리서 호루라기 소리가 울렸다⁠.

11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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