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5,488자)

서문교

사십 년 만의 동창회 · 석담율

화요일 다섯 시 이십팔 분⁠, 마지막 학생이 하논을 끝까지 쳤다⁠. 선옥은 메트로놈을 껐다⁠. 똑딱거리던 소리가 멈추자 연습실이 갑자기 넓어졌다⁠. 학생이 가방을 메고 나가며 물었다⁠.

“⁠원장님⁠, 오늘 어디 가세요⁠? 귀걸이 바꾸셨어요⁠.⁠”

“⁠안 바꿨어⁠. 늘 하던 거야⁠.⁠”

“⁠아침엔 작은 거였는데요⁠.⁠”

학생이 나간 뒤 선옥은 거울을 보았다⁠. 진주가 아침보다 한 치수 컸다⁠. 언제 바꿨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점심 먹고 화장실에 갔을 때였을까⁠. 선옥은 기억을 더듬다 그만두었다⁠. 선옥은 귀걸이를 다시 작은 것으로 바꾸려고 손을 올렸다가 내렸다⁠.

휴대전화가 울렸다⁠. 갑분이었다⁠. 음성 메시지였다⁠. 갑분은 토론회 이후 처음으로 선옥에게 직접 보냈다⁠.

“⁠선옥아⁠. 갈 거지⁠? 가⁠. 이번엔 내가 안 막아⁠. 막을 사람도 없어⁠. 너희 엄마는 요양원이고 나는 이삿짐 싸⁠. 가⁠. 그리고 가서 반장한테 말해⁠. 나 사무장 그만 안 둔다고⁠.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야⁠. 끊어⁠.⁠”

메시지는 거기서 끝났다⁠. 선옥은 두 번 들었다⁠. 두 번째 들을 때 갑분의 목소리 뒤에서 테이프 뜯는 소리를 들었다⁠. 쫙⁠, 쫙⁠. 상자를 하나 봉할 때마다 갑분은 한 마디씩 했던 모양이었다⁠.

*

택시 기사는 예순쯤 되어 보였다⁠. 서문교 가자는 말에 백미러로 선옥을 보았다⁠.

“⁠혹시 동창회 선거 나온 그 원장님 아니세요⁠?⁠”

“⁠어떻게 아세요⁠?⁠”

“⁠우리 집사람이 무심여고예요⁠. 저녁마다 그 토론회 다시 보기를 틀어 놔요⁠. 세 번 봤어요⁠. 나도 옆에서 세 번 봤고⁠.⁠” 기사가 웃었다⁠. “⁠우리 집사람은 원장님 편이에요⁠. 나는 반장 편이고⁠. 집에서도 선거해요⁠. 밥상에서⁠.⁠”

“⁠누가 이기고 있어요⁠?⁠”

“⁠집사람이요⁠. 반찬을 쥐고 있으니까⁠.⁠”

신호에 걸려 택시가 멈췄다⁠. 기사가 백미러로 다시 선옥을 보았다⁠.

“⁠근데 원장님⁠, 리조트 들어서면 땅값 오른다던데요⁠. 원장님 땅도 오르잖아요⁠. 집사람이 그건 좀 아깝다고 하더라고요⁠. 원장님이 이기면 원장님 땅값이 떨어지는 거 아니냐고⁠.⁠”

“⁠오르면 뭐 해요⁠. 그 자리에 길이 나는데요⁠.⁠”

“⁠길 나면 좋죠⁠.⁠”

“⁠길 나면 정미소가 없어져요⁠.⁠” 선옥이 창밖을 보았다⁠. “⁠우리 아버지가 쌀 찧던 소리가 나던 자리예요⁠.⁠”

기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신호가 바뀌었다⁠. 기사가 출발하며 중얼거렸다⁠. “⁠우리 아버지는 대장간 했는데⁠. 그 자리 지금 편의점이에요⁠.⁠”

택시가 무심천 둑길을 따라 달렸다⁠. 장미가 창밖으로 붉게 흘렀다⁠. 선옥은 핸드백 끈을 쥐었다⁠. 안에 봉투가 있었다⁠. 서문교 앞에서 택시가 멈추자 기사가 요금을 받으며 말했다⁠.

“⁠원장님⁠, 반장 편 들어서 미안해요⁠. 근데 집사람한테는 원장님 이기라고 했다고 해 주세요⁠.⁠”

*

다리 아래는 그늘이 깊었다⁠. 콘크리트 교각 사이로 무심천이 흘렀다⁠. 물소리가 다리 바닥에 부딪혀 두 번 울렸다⁠. 한 번은 물에서⁠, 한 번은 머리 위 콘크리트에서⁠. 위로는 차가 지날 때마다 이음매가 덜컥 소리를 냈다⁠.

상렬은 징검돌 하나에 앉아 있었다⁠. 감색 정장도 회색 니트도 아니었다⁠. 흰 셔츠 소매를 걷고⁠, 무릎 위에 비닐봉지를 올려놓고 있었다⁠. 선옥의 발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었다⁠. 시계를 보지 않았다⁠.

“⁠여섯 시 이 분이야⁠.⁠”

“⁠택시 기사님이 반장 편이라 늦게 왔어⁠.⁠”

상렬이 웃었다⁠. 일어나려다 무릎이 딱 소리를 냈다⁠. 상렬은 일어나기를 포기하고 옆 징검돌을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선옥은 핸드백을 가슴에 안고 징검돌에 앉았다⁠. 돌이 오후 햇볕을 머금고 있다가 엉덩이 밑으로 따뜻함을 올려 보냈다⁠.

“⁠그거 뭐야⁠?⁠”

상렬이 비닐봉지를 내밀었다⁠. 머리 고무줄이었다⁠. 노란 것만 한 봉지였다⁠. 쉰 개짜리였다⁠.

“⁠생활용품점에서 샀어⁠. 노란색만 따로 파는 게 없어서⁠, 여러 색 섞인 걸 열 봉지 사서 노란 것만 골랐어⁠. 나머지는 경비 아저씨 손녀 줬어⁠.⁠”

“⁠나 단발이야⁠. 묶을 머리가 없어⁠.⁠”

“⁠알아⁠. 그래도⁠.⁠”

선옥은 봉지를 받았다⁠. 노란 고무줄 쉰 개가 비닐 안에서 사각거렸다⁠. 마흔두 해 전 고무줄 하나는 삭아서 갈라졌고⁠, 새 고무줄 쉰 개는 탱탱했다⁠. 선옥은 하나를 꺼내 손목에 끼웠다⁠. 고무가 손목을 가볍게 조였다⁠.

“⁠그해 6월 15일에⁠, 왔었어⁠?⁠”

“⁠왔지⁠.⁠” 상렬이 물을 보았다⁠. “⁠첫 월급 받고 밤 버스로 내려왔어⁠. 공사판 함바집에서 한 달 일한 돈⁠. 봉투째 안주머니에 넣고⁠. 다섯 시부터 여기 앉아 있었어⁠. 바로 이 돌에⁠.⁠”

“⁠그래서⁠?⁠”

“⁠일곱 시쯤⁠, 둑 위로 니가 지나갔어⁠.⁠” 상렬이 고개를 들어 둑을 가리켰다⁠. 다리 그늘 밖으로 장미 덤불이 보였다⁠. “⁠하얀 블라우스⁠. 옆에 양복 입은 남자⁠. 남자가 장미 하나를 가리키면서 뭐라고 하니까 니가 고개를 저었어⁠. 둘이 웃었고⁠. 삼백 미터쯤이었어⁠. 여기서는 소리가 안 들렸어⁠. 너는 나를 못 봤고⁠.⁠”

선옥은 숨을 멈췄다⁠. 물소리가 다리 바닥에서 두 번 울렸다⁠.

“⁠그 남자가 정묵 씨야⁠. 그 장미는 덩굴장미였는데⁠, 정묵 씨는 계속 찔레라고 했어⁠. 나는 덩굴장미라고 했고⁠.⁠” 선옥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엄마가 다방에서 윤씨네 아들 만나 보라고 했어⁠. 날짜도 엄마가 정했어⁠. 6월 15일이었어⁠. 나는 날짜를 몰랐어⁠. 편지가 없었으니까⁠.⁠”

상렬이 선옥을 보았다⁠. 오래 보았다⁠.

“⁠너희 엄마가 날짜를 정했다고⁠?⁠”

“⁠엄마가 갑분이한테 편지 주지 말라고 빌었어⁠. 그리고 나를 윤씨네로 보냈어⁠. 정미소 빚 정리하려고⁠. 혼사만 맺으면 빚은 없던 걸로 하겠다고⁠, 윤 사장이⁠.⁠” 선옥은 핸드백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정묵 씨는 다 알고 왔대⁠. 알고도 평생 나한테 말 안 했대⁠.⁠”

상렬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위로 트럭이 지나갔다⁠. 이음매가 덜컥 울렸다⁠. 상렬의 얼굴이 처음으로 반음 아래로 내려앉았다⁠. 웃음도 주름도 없는 얼굴이었다⁠.

“⁠나는 낯을 만들러 서울 갔는데⁠.⁠” 상렬이 말했다⁠. “⁠너는 빚을 갚고 있었구나⁠. 니 아버지 빚⁠, 그리고 우리 아버지가 보증 선 빚⁠. 니 혼사가 우리 아버지 논값까지 갚았네⁠.⁠”

“⁠그런 계산 하지 마⁠.⁠”

“⁠계산이 아니라⁠.⁠” 상렬이 말을 멈췄다⁠.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손바닥에 굳은살이 있었다⁠. 회사 대표 손에 공사판 굳은살이 아직 남아 있었다⁠. “⁠미안해⁠. 그날 둑 위로 올라갔어야 했어⁠. 삼백 미터⁠. 뛰면 일 분이었어⁠.⁠”

선옥은 대답 대신 손을 뻗었다⁠. 상렬의 손바닥 굳은살을 엄지로 눌렀다⁠. 단단했다⁠. 상렬이 숨을 들이켰다⁠. 박하 냄새가 났다⁠. 버스에서 내밀던 사탕 냄새였다⁠.

“⁠무릎 꿇지 마⁠.⁠” 선옥이 말했다⁠. “⁠못 일어나⁠.⁠”

상렬이 웃었다⁠. 웃음이 다 나오기 전에 선옥이 먼저 다가갔다⁠. 입술이 닿았다⁠. 상렬의 입술은 마른 편이었고⁠, 박하 맛이 났다⁠. 선옥의 손이 상렬의 셔츠 소매를 쥐었다⁠. 소매 천이 땀에 조금 젖어 있었다⁠. 물소리가 둘을 감쌌다⁠. 다리 위로 차가 지나가고⁠, 이음매가 덜컥 울리고⁠, 다시 조용해졌다⁠. 상렬의 손이 선옥의 귀 뒤로 넘어갔다⁠. 아침마다 두 번 빗어 넘기는 자리였다⁠. 손끝이 진주 귀걸이에 닿았다가 비켜 갔다⁠.

떨어졌을 때 둘 다 숨이 찼다⁠. 예순 넘은 숨이었다⁠. 선옥은 상렬의 이마에 이마를 댄 채 웃었다⁠.

“⁠숨차⁠.⁠”

“⁠나도⁠. 문장대보다 숨차⁠.⁠”

“⁠문장대는 막걸리라도 줬지⁠.⁠”

둘은 징검돌 위에서 한참 웃었다⁠. 웃음이 다리 바닥에 부딪혀 두 번씩 울렸다⁠.

웃음이 잦아들자 선옥이 물을 보며 말했다⁠.

“⁠정묵 씨는 끝까지 찔레라고 했어⁠. 결혼하고 삼십오 년 동안 해마다 유월이면 둑길에 와서 저건 찔레라고⁠. 나는 해마다 덩굴장미라고 하고⁠. 마지막 해에는 병원에서 휠체어 타고 왔는데⁠, 그때도 찔레라고 하더라⁠.⁠”

“⁠고집이 세셨네⁠.⁠”

“⁠아니⁠, 알았어⁠. 덩굴장미인 거⁠.⁠” 선옥은 손목의 고무줄을 돌렸다⁠. “⁠내가 덩굴장미라고 할 때마다 웃었어⁠. 내가 맞히는 걸 듣고 싶어서 일부러 틀린 거야⁠. 삼십오 년 동안⁠. 그런 사람이었어⁠. 아는 걸 모르는 척하고⁠, 모르는 척하는 동안 옆에 있는 사람⁠.⁠”

상렬은 대답하지 않았다⁠. 선옥의 말을 끝까지 듣고⁠, 물소리를 조금 더 듣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좋은 분이었네⁠.⁠”

“⁠좋은 사람이었어⁠. 그래서 지금 화가 나⁠. 알았으면 말을 하지⁠.⁠” 선옥이 웃었다⁠. 웃음 끝이 떨렸다⁠. “⁠죽은 사람한테 화를 내는 건 예순한 살에 처음 해 봐⁠.⁠”

“⁠나한테 내⁠. 살아 있는 사람이 받는 게 낫지⁠.⁠”

“⁠너한테는 따로 낼 거야⁠. 니 몫은 니 몫대로 있어⁠.⁠”

*

상렬의 휴대전화가 셔츠 주머니에서 떨었다⁠. 평평한 진동이었다⁠. 선옥은 받으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상렬이 화면을 보고 받았다⁠.

“⁠어⁠, 의건아⁠.⁠”

통화는 짧았다⁠. 상렬은 “⁠알았다⁠.⁠” “⁠목요일⁠.⁠” “⁠싱가포르도⁠?⁠” 세 마디만 했다⁠. 끊고 나서 휴대전화를 징검돌 위에 엎어 놓았다⁠.

“⁠목요일에 이사회야⁠. 서울 본사에서⁠. 싱가포르 투자사도 화상으로 들어온대⁠.⁠” 상렬이 물을 보았다⁠. “⁠의건이 새 계획을 올린대⁠. 동창회가 십억을 안 받으면 쉼터는 빼고⁠, 정미소 땅은 시에 구역 지정을 신청해서 받아 내겠대⁠. 몇 년이 걸려도⁠.⁠”

“⁠받아 낸다는 게 뭔데⁠?⁠”

“⁠팔지 않아도 가져가는 방법이 있어⁠. 오래 걸리고⁠, 싸움이 길어지고⁠, 그동안 마을 사람들 계약금은 묶이고⁠.⁠” 상렬이 선옥을 돌아보았다⁠. “⁠선옥아⁠, 니 땅 쉼터 부지로 내놓을 수 있냐⁠? 쉼터 허가가 먼저 나면 회사가 건드리기 어려워져⁠. 쉼터는 내 돈으로 지을게⁠. 회사 말고 내 돈으로⁠.⁠”

선옥은 손목의 고무줄을 만졌다⁠. 탱탱한 고무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럼 장학금은⁠?⁠”

“⁠선거는 계속해⁠. 기금은 니가 이기면 장학금으로 가⁠. 땅만⁠.⁠”

“⁠땅만⁠.⁠” 선옥이 따라 했다⁠. 목소리가 반음 내려갔다⁠. “⁠마흔두 해 전에 우리 아버지 정미소가 다방에서 남자들 도장 사이로 넘어갔어⁠. 너희 아버지 논도⁠. 나는 창밖 정류장에 앉아 있었고⁠. 오늘은 다리 밑에서 니가 내 땅을 쉼터에 내놓으래⁠. 좋은 일에⁠. 좋은 일이라 더 싫어⁠.⁠”

“⁠니가 정하라는 거야⁠. 내가 정하는 게 아니라⁠.⁠”

“⁠그럼 재촉하지 마⁠.⁠” 선옥이 일어났다⁠. 징검돌이 흔들리지 않았다⁠. “⁠나 아직 안 정했어⁠. 장학금도 땅도 니 쉼터도⁠. 우리 엄마는 나보고 선거 지래⁠. 우리 딸은 땅 팔래⁠. 갑분이는 사무장 그만 안 둔대⁠. 다들 나한테 하나씩 정해 줘⁠. 이번에는 내가 정할 거야⁠. 내 귀로 다 듣고⁠.⁠”

상렬도 일어났다⁠. 이번에는 무릎이 소리를 내지 않았다⁠. 상렬이 놀란 얼굴로 무릎을 내려다보았다⁠. 선옥이 웃음을 참았다⁠.

“⁠그럼 나도 하나 정할게⁠.⁠” 상렬이 엎어 둔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목요일 이사회에서 의건이 안에 반대할 거야⁠. 쉼터 빼는 것도⁠, 니 땅 받아 내는 것도⁠.⁠”

“⁠니 아들이야⁠.⁠”

“⁠알아⁠. 그래서 내가 하는 거야⁠.⁠”

“⁠지면⁠?⁠”

“⁠대표 자리 내놓아야겠지⁠. 싱가포르 사람들이 의건이 편이니까⁠.⁠” 상렬이 셔츠 소매를 내렸다⁠. 단추를 채우는 손이 느렸다⁠. “⁠회사 걸고 반대할 거야⁠.⁠”

“⁠회사 걸면 니 쉼터 돈은⁠?⁠”

“⁠그것도 걸고⁠.⁠”

선옥은 상렬을 보았다⁠. 다리 그늘 밖으로 해가 기울어 둑의 장미가 붉게 탔다⁠. 마흔두 해 전 둑 위를 하얀 블라우스가 지나가던 시각이었다⁠. 선옥은 손목의 노란 고무줄을 빼서 상렬의 손목에 끼웠다⁠. 남자 손목에는 고무줄이 꽉 끼었다⁠. 상렬이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목요일에 그거 차고 들어가⁠.⁠” 선옥이 말했다⁠. “⁠수요일 거니까 하루 늦은 거지만⁠.⁠”

상렬은 대답하지 않고 고무줄을 손가락으로 한 번 튕겼다⁠. 탁⁠. 작은 소리가 다리 밑에서 두 번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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