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5,349자)

재검토

복직했더니 내 자리에 연하 본부장 · 여시결

아침 일곱 시 오십 분⁠, 35층 유리문은 소정의 사원증에 처음으로 열렸다⁠. 열리는 소리가 어제 「⁠권한 없음⁠」의 울음과 똑같아서 소정은 잠깐 문 앞에 멈췄다⁠. 문은 열린 채 기다려 주지 않았다⁠. 소정은 닫히기 직전에 몸을 밀어 넣었다⁠.

부사장실에서는 커피 냄새가 났다⁠. 편인곤은 분재 앞이 아니라 창가의 작은 탁자에서 주전자를 들고 있었다⁠. 깔때기 모양 거름망에 가는 물줄기를 원을 그리며 붓는 손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물줄기가 원두에 닿을 때마다 갈색 거품이 부풀었다가 가라앉았다⁠.

“⁠앉아⁠. 이거 내리는 데 사 분 걸려⁠. 브레인포지보다 일 분 느리지⁠.⁠”

인곤은 잔 두 개에 커피를 나눠 따르고 하나를 소정 앞에 놓았다⁠. 잔 받침까지 데워져 있었다⁠.

“⁠어제는 진 본부장이 옆에 있어서 말을 다 못 했어⁠. 자네한테만 할 말이 있어⁠.⁠”

“⁠말씀하세요⁠.⁠”

“⁠소비재팀 돌려주지⁠.⁠”

소정은 잔을 들다 멈췄다⁠. 커피 표면이 흔들렸다⁠.

“⁠3월 개편 때 소비재팀장은 표소정⁠. 구솔미는 특별분석팀으로 옮기고⁠. 팀원 넷도 자네가 고르고⁠. 대신 노트를 브레인포지에 넣어⁠. 열세 해 보고서도⁠.⁠”

“⁠솔미를 기둥 옆으로 보내고 제가 창가로 가는 거네요⁠.⁠”

“⁠자리는 하나야⁠. 누가 앉든 하나야⁠. 자네가 앉아야 할 자리를 구솔미가 일 년 데우고 있었던 거고⁠.⁠”

인곤은 자기 잔을 들어 향을 맡았다⁠. 마시지 않고 내려놓았다⁠.

“⁠특별분석팀은 3월에 없어지는 팀이에요⁠. 부사장님이 만드신 거죠⁠?⁠”

“⁠진 본부장이 만들었지⁠. 나는 서명만 했어⁠.⁠”

“⁠솔미를 거기로 보내면⁠, 3월에 솔미가 없어지는 거고요⁠.⁠”

“⁠구솔미는 젊어⁠. 서른셋이면 어디든 가⁠.⁠”

소정은 잔을 내려놓았다⁠. 받침과 잔이 부딪치는 소리가 생각보다 크게 났다⁠.

“⁠거절할게요⁠.⁠”

인곤은 놀라지 않았다⁠. 분재의 가지를 볼 때처럼 소정을 오래 보았다⁠. 그러고는 책상 서랍에서 서류철 하나를 꺼내 소정 앞에 밀었다⁠.

“⁠그럼 이걸 봐⁠. 거절한 사람은 알고 거절해야 공정하지⁠.⁠”

표지에 「⁠3월 조직 개편안 — 리서치센터(⁠이사회 보고용⁠)⁠」이 찍혀 있었다⁠. 소정은 습관대로 본문을 건너뛰고 맨 뒤부터 펼쳤다⁠. 맨 뒤 장에 비고가 있었다⁠.

「⁠리서치센터 인원 41명 → 21명⁠. 감축분은 브레인포지 인공지능 리포트 계약(⁠5년⁠)으로 대체⁠」 「⁠전략리서치본부 실적이 3월 이사회 전까지 전년 대비 두 배에 이를 경우⁠, 감축 인원을 16명으로 줄임⁠」 「⁠휴직 복귀자 보직 — 복귀 시 재검토(⁠전략리서치본부 신설 조건⁠)⁠」

마지막 줄 아래에 동의 서명이 있었다⁠. 「⁠2026⁠. 3⁠. 2⁠. 전략리서치본부장 진승겸⁠」 획이 반듯했다⁠. 펜을 길이 순서로 눕혀 두는 사람의 글씨였다⁠. ‘⁠겸⁠’의 받침 ‘⁠ㅁ⁠’을 네모반듯하게 닫는 것까지 소정은 알아보았다⁠. 일 년 동안 포스트잇에서 매일 본 글씨였다⁠.

2026년 3월 2일⁠. 소정이 휴직한 지 두 달째 되던 날이었다⁠. 소정이 면접에서 이 사람을 뽑자고 말한 지는 석 달째 되던 날이었다⁠.

“⁠진 본부장은 똑똑해⁠. 넷을 내주고 스물을 지키겠다고 했어⁠. 휴직자 자리는 비어 있으니까 빼도 아무도 안 운다고⁠. 나도 그 말이 맞다고 봤고⁠.⁠”

인곤은 커피를 마저 마셨다⁠.

“⁠35층 계단에도 카메라가 있어⁠, 표 팀장⁠. 거기 보안팀은 내 밑이야⁠. 젊은 사람들 사이 일은 내 알 바 아니지만⁠, 무엇을 누구한테 걸고 있는지는 알고 거는 게 좋겠지⁠.⁠”

소정은 서류철을 덮었다⁠. 덮는 손이 떨리지 않게 손바닥 전체로 눌렀다⁠.

“⁠이거⁠, 가져가도 돼요⁠?⁠”

“⁠사본이야⁠. 가져가⁠. 진 본부장한테 물어봐⁠.⁠”

인곤은 일어나 분재 쪽으로 걸어갔다⁠. 소정이 문고리를 잡았을 때 인곤이 등 뒤에서 말했다⁠. 분재에게 하는 말인지 소정에게 하는 말인지 알 수 없는 목소리였다⁠.

“⁠가지는 아깝다고 다 두면 나무가 죽어⁠.⁠”

*

일곱 시 이십 분 아침 회의에 소정은 오 분 늦게 들어갔다⁠. 승겸이 화면 옆에서 운용사 네 곳의 반응을 말하고 있었다⁠. 소정은 맨 뒷자리에 앉아 승겸의 오른손만 보았다⁠. 리모컨을 쥔 손가락⁠, 펜을 쥐는 손가락⁠, 「⁠2026⁠. 3⁠. 2⁠.⁠」를 쓴 손가락이었다⁠.

승겸이 말을 멈추고 소정을 보았다⁠. 안경알에 화면 빛이 하얗게 떠서 눈이 보이지 않았다⁠.

“⁠표 팀장님⁠, 덧붙이실 거 있습니까⁠?⁠”

“⁠없어요⁠. 다 들었어요⁠.⁠”

회의가 끝나고 기둥 앞으로 돌아오자 두찬이 책상 위에 비닐봉지 하나를 밀어 놓았다⁠. 손바닥만 한 쌀과자들이 들어 있었다⁠. 아기들이 이가 나기 전에 녹여 먹는 과자였다⁠.

“⁠떡뻥이에요⁠. 쌍둥이 거 훔쳐 왔어요⁠. 스트레스 받을 땐 이게 최고예요⁠. 씹을 필요도 없어요⁠.⁠”

“⁠두찬 씨⁠, 저 스트레스 받는 거 티 나요⁠?⁠”

“⁠팀장님 펜 뚜껑을 이로 물고 계세요⁠. 그거 쌍둥이가 이 날 때 하는 거예요⁠.⁠”

소정은 펜 뚜껑을 입에서 뺐다⁠. 이빨 자국이 세 개 나 있었다⁠. 떡뻥 하나를 입에 넣자 혀 위에서 사르르 녹았다⁠. 아무 맛도 없는데 이상하게 단맛이 났다⁠. 두찬은 모니터에 기사 하나를 띄워 두고 있었다⁠. 「⁠육아휴직 뒤 불이익 진정⁠, 지난해 역대 최다⁠」 소정이 기사를 보자 두찬이 얼른 창을 내렸다⁠.

“⁠그냥 본 거예요⁠. 그냥⁠.⁠”

*

점심시간⁠, 소정은 소비재팀 자리로 갔다⁠. 솔미는 혼자 남아 컵라면에 물을 붓고 있었다⁠. 소정이 개편안 사본의 마지막 장을 펼쳐 솔미 앞에 놓았다⁠. 솔미는 젓가락을 든 채 서명을 보았다⁠. 놀라는 얼굴이 아니었다⁠.

“⁠알았어⁠?⁠”

솔미가 컵라면 뚜껑 위에 젓가락을 걸쳐 놓았다⁠.

“⁠본부 만들 때 조건이 있다는 건 다들 알았어요⁠. 선배 자리 재검토도요⁠. 작년 봄 회식 때 센터장님이 한 번 흘리셨어요⁠. 다들 들었어요⁠.⁠”

“⁠다들⁠.⁠”

“⁠선배만 몰랐어요⁠. 휴직 중이었으니까요⁠.⁠”

컵라면에서 김이 올라왔다⁠. 소정은 솔미가 일 년 동안 혼자 먹었을 점심을 생각했다⁠. 소비재팀 다섯 명이 같이 먹던 점심이 언제부터 컵라면 하나가 되었는지 소정은 몰랐다⁠.

“⁠나한테 말해 줄 수 있었잖아⁠. 일 년 동안 한 번은⁠.⁠”

“⁠말하면 선배가 휴직 중에 돌아왔을 거예요⁠. 그럼 라윤이는요⁠?⁠”

솔미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흔들렸다⁠. 소정은 대답하지 못했다⁠. 솔미는 다시 젓가락을 들었다⁠.

“⁠아무튼요⁠. 저는 몰랐던 걸로 해 주세요⁠. 그게 서로 편해요⁠.⁠”

컵라면 면발이 불어 가는 소리가 작게 났다⁠. 소정은 사본을 접어 들고 몸을 돌렸다⁠. 몸을 돌리면서 솔미의 책상 칸막이에 붙은 보고서 표지를 보았다⁠. 세 번째 이름 위에 누군가 손톱으로 꾹 누른 자국이 있었다⁠.

오후 네 시⁠, 소정은 센터장실 문을 닫고 들어갔다⁠. 해옥은 측정기에 휴대전화를 대려다 소정의 얼굴을 보고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작년 봄 회식 때 흘리셨다면서요⁠. 제 자리 재검토⁠.⁠”

“⁠솔미가 그러디⁠?⁠”

“⁠다들 들었대요⁠.⁠”

해옥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등받이가 삐걱 울었다⁠.

“⁠흘린 게 아니라 일부러 말했어⁠. 다들 알아 두라고⁠. 네가 돌아왔을 때 아무도 모른 척하지 말라고⁠. 근데 다들 모른 척하더라⁠. 사람이 그래⁠.⁠”

“⁠특별분석팀은요⁠? 그것도 아셨어요⁠?⁠”

“⁠그건 내가 승겸이한테 하자고 한 거야⁠.⁠”

소정은 할 말을 잃었다⁠. 해옥이 견과류 봉지를 열지 않고 손으로 굴렸다⁠.

“⁠네가 내기에서 이기면 승겸이는 약속을 지켜야 하고⁠, 위에서는 네 자리를 3월에 지우겠다고 하고⁠. 그 사이에 팀장 줄이라도 걸고 있게 하려고⁠. 3월까지는 팀장이잖아⁠. 팀장을 지우는 건 평직원 지우는 것보다 위에서도 한 번 더 생각해⁠. 구명조끼였어⁠. 구멍 난 거라도⁠.⁠”

“⁠구멍 난 걸 입혀 놓고 아무 말도 안 하셨어요⁠.⁠”

“⁠말하면 너 그 자리에서 사표 쓸 사람이잖아⁠. 열세 해를 봤는데 그걸 몰라⁠?⁠”

해옥은 측정기를 들여다보았다⁠. 숫자를 말하지 않았다⁠. 소정은 문고리를 잡고 한참 서 있다가 나갔다⁠. 복도에서 복합기가 누군가의 출력물을 뱉고 있었다⁠. 종이가 다 나올 때까지 소정은 걸음을 떼지 못했다⁠.

*

밤 열 시⁠, 사무실에는 유리방의 불만 남았다⁠. 두찬은 아홉 시에 쌍둥이 목욕 시간이라며 나갔다⁠. 나가기 전에 떡뻥 봉지를 소정의 서랍에 넣어 두었다⁠.

소정은 유리문을 두드리지 않고 열었다⁠. 승겸은 책상 앞에 앉아 있었고⁠, 소정을 보고 일어나지 않았다⁠. 일어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는 것을 말했다⁠.

소정은 개편안 사본을 책상에 펼쳤다⁠. 서명이 있는 장이었다⁠. 승겸의 펜들 위로 종이가 덮였다⁠.

“⁠제 서명입니다⁠.⁠”

승겸이 먼저 말했다⁠.

“⁠알아요⁠. ‘⁠ㅁ⁠’을 네모로 닫잖아요⁠.⁠”

승겸이 고개를 들었다⁠. 안경 너머 눈이 붉었다⁠. 어제처럼 피곤해서가 아니었다⁠.

“⁠왜 이렇게 서둘렀는지⁠, 이제 말해 줄 수 있어요⁠?⁠”

“⁠3월 24일 이사회입니다⁠. 그때까지 본부 실적이 두 배가 안 되면 센터에서 스물이 나갑니다⁠. 두 배가 되면 열여섯이 나갑니다⁠. 넷을 덜 내보내려고 일 년을 뛰었습니다⁠. 넷을 먼저 내주고요⁠.⁠”

“⁠그 넷 중 하나가 저인 거⁠, 알고 서명했어요⁠?⁠”

“⁠알고 했습니다⁠. 표 팀장님이 저를 뽑은 분이라는 것도 알고 했습니다⁠.⁠”

“⁠왜요⁠?⁠”

“⁠서명 안 했으면 본부가 없었습니다⁠. 본부가 없으면 작년 여름에 센터가 반이 됐습니다⁠. 구솔미 씨도⁠, 막내들도⁠, 센터장님도요⁠. 제가 할 수 있는 계산은 그것뿐이었습니다⁠.⁠”

승겸의 목소리는 끝까지 정중했다⁠. 정중해서 소정은 숨이 막혔다⁠. 소정은 펜 하나를 집어 서명 옆에 대 보았다⁠. 펜이 서명보다 길었다⁠.

“⁠계단은요⁠? 계단은 무슨 계산이었어요⁠?⁠”

“⁠계산이 아니었습니다⁠.⁠”

“⁠확실해요⁠? 어제는 의심한다면서요⁠.⁠”

“⁠이제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게 제일 무섭습니다⁠.⁠”

승겸이 일어났다⁠. 책상을 돌아 소정 앞으로 한 걸음 나왔다⁠. 소정이 한 걸음 물러났다⁠. 유리벽이 등에 닿았다⁠. 어제 계단참의 콘크리트보다 차가웠다⁠.

“⁠가까이 오지 마세요⁠.⁠”

“⁠표 팀장님⁠.⁠”

“⁠지금 가까이 오면 제 계산이 틀려요⁠. 계산 틀리는 거 제일 싫어하는 거 아시잖아요⁠.⁠”

승겸은 멈췄다⁠. 멈춘 자리에서 손을 내리지도 올리지도 못하고 있었다⁠. 둘 사이의 거리는 계단참 난간 하나만큼이었다⁠. 어제는 난간 하나가 가까웠다⁠. 오늘은 같은 난간 하나가 35층에서 28층까지만큼 멀었다⁠. 소정은 등 뒤 유리벽에 손바닥을 붙였다⁠. 유리 너머 기둥 앞에서 꺼진 복합기가 식어 가고 있었다⁠.

소정은 목에 걸린 남색 줄을 벗었다⁠. 줄이 머리카락에 엉켜 한 번에 빠지지 않았다⁠. 귀 뒤로 넘긴 머리가 앞으로 쏟아졌다⁠. 소정은 줄을 승겸의 책상에 내려놓았다⁠. 줄이 길이 순서로 누운 펜들 위에 떨어져 펜 두 자루를 굴렸다⁠.

“⁠이 직함⁠, 넷을 지우려고 만든 상자잖아요⁠. 안 받을게요⁠.⁠”

“⁠표 팀장님⁠.⁠”

“⁠표 수석이요⁠. 상자 없는 수석⁠.⁠”

소정은 사본을 접어 코트 주머니에 넣었다⁠. 유리문을 밀다가 멈추고 돌아보았다⁠.

“⁠본부장님 숫자⁠, 제가 처음부터 다시 계산할게요⁠. 두 배가 어디서 왔는지⁠. 열여섯이 왜 열여섯인지⁠. 넷이 왜 넷부터인지⁠.⁠”

유리문이 닫혔다⁠. 소정은 기둥 앞까지 걸어가 서랍에서 떡뻥 봉지를 꺼냈다⁠. 유리벽 너머에서 승겸이 남색 줄을 집어 들었다⁠. 줄을 펜 옆에 길이 순서대로 놓으려다 끝내 놓지 못하고⁠, 손에 감은 채 오래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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