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5,316자)

일곱 층

복직했더니 내 자리에 연하 본부장 · 여시결

2월 15일 월요일 오후 두 시⁠, 석계환의 운용사 회의실은 박하 냄새가 났다⁠. 긴 탁자 끝에 운용역 열두 명이 앉았고⁠, 석계환은 빨간 넥타이를 매고 가운데에 앉았다⁠. 소정과 승겸은 화면 양옆에 하나씩 자리를 잡았다⁠. 반대로 보는 두 사람이 한 화면을 나눠 쓰는 모양이 탁자 너머에서도 우스웠는지⁠, 운용역 몇이 입꼬리를 올렸다⁠.

승겸이 화장품의 봄을 말했고⁠, 소정이 1⁠.5가구의 장바구니를 말했다⁠. 둘은 화면 가운데에서 한 번씩 서로를 반박했다⁠. 반박할 때마다 석계환이 박하사탕을 하나씩 먹었다⁠. 마지막 장은 솔미의 매장 숫자였다⁠. 비 오는 날의 파란 표시를 소정이 짚자⁠, 맨 끝 자리의 젊은 운용역이 처음으로 볼펜을 들었다⁠.

“⁠비 오는 날 매장 숫자를 따로 본 건 누구야⁠?⁠”

석계환이 물었다⁠. 소정은 표지를 가리켰다⁠.

“⁠세 번째 이름이요⁠. 구솔미 팀장입니다⁠.⁠”

석계환은 표지를 한참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사탕 봉지가 비어 있었다⁠.

회의가 끝나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볼펜을 들었던 젊은 운용역이 따라 나왔다⁠. 명함을 내밀면서 승겸과 소정을 번갈아 보았다⁠.

“⁠실례지만⁠, 두 분 사이가 원래 이렇게 안 좋으세요⁠?⁠”

“⁠아주 좋습니다⁠.⁠”

승겸이 정중하게 대답했다⁠.

“⁠반대로 볼 만큼요⁠.⁠”

운용역은 승겸의 대답을 받아 적을까 말까 망설이다 볼펜을 주머니에 넣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소정이 거울 벽을 보며 물었다⁠.

“⁠언제부터 좋았는데요⁠?⁠”

“⁠성수 매장 계산대부터입니다⁠. 커플 할인⁠.⁠”

“⁠그건 반값이라 좋았던 거잖아요⁠.⁠”

“⁠경비 청구는 안 했습니다⁠.⁠”

소정은 고개를 돌렸다⁠. 거울 속 승겸은 층수 숫자만 보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28층 라운지 화면에 고객 조회 순위가 떴다⁠. 「⁠이번 주 리포트 조회 1위 — 2027 소비재⁠」 운용사 네 곳이 같은 보고서를 따로 청했다⁠. 막내들이 화면 앞에 모였다가 소정을 보고 흩어졌고⁠, 흩어지면서 몇이 엄지를 들었다⁠. 해옥은 측정기를 들여다보더니 처음으로 웃으며 숫자를 말하지 않았다⁠.

솔미는 자기 자리에서 표지를 출력해 책상 칸막이에 붙였다⁠. 붙이고 나서 한참 세 번째 이름을 보았다⁠. 소정이 지나가자 솔미는 고개를 들지 않고 말했다⁠.

“⁠고마운 건 아니에요⁠.⁠”

“⁠알아⁠.⁠”

“⁠그냥 제 거라서 붙인 거예요⁠.⁠”

“⁠알아⁠, 구 팀장⁠.⁠”

솔미의 어깨가 조금 내려갔다⁠. 소정은 내려간 어깨를 보고 지나갔다⁠.

*

오후 세 시⁠, 부사장실 비서의 전화가 왔다⁠. 두 분 같이 올라오시라고 했다⁠. 35층 엘리베이터 홀에서 유리문이 두 사람을 막았다⁠. 소정이 사원증을 대자 문이 짧게 울었다⁠. 「⁠출입 권한이 없습니다⁠」 승겸이 사원증을 대자 문이 열렸다⁠. 본부장 권한이었다⁠.

“⁠저는 여기서 기다릴까요⁠?⁠”

“⁠같이 부르셨습니다⁠.⁠”

승겸이 문을 손으로 잡고 기다렸다⁠. 소정은 열린 문을 지나며 남색 줄을 한 번 쥐었다⁠. 팀장 줄로도 열리지 않는 문이었다⁠.

부사장실은 넓고 따뜻했다⁠. 창가에 소나무 분재가 다섯 개⁠, 크기 순서대로 놓여 있었다⁠. 편인곤은 그중 가장 작은 분재 앞에 허리를 굽히고 가위질을 하고 있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본 손바닥만 한 소나무였다⁠.

“⁠앉아⁠. 금방 끝나⁠. 얘가 요즘 말을 안 들어⁠.⁠”

인곤은 가지 하나를 자르고 나서야 몸을 폈다⁠. 쉰여덟이라고 들었는데 등이 꼿꼿했다⁠. 탁자에 태블릿 하나가 놓여 있었다⁠.

“⁠2027 소비재⁠. 조회 일 등⁠. 좋아⁠. 좋은 건 좋다고 해야지⁠. 그래서 보여 줄 게 있어⁠.⁠”

인곤이 태블릿을 켰다⁠. 화면 맨 위에 회사 로고가 떴다⁠. 「⁠브레인포지 — 인공지능 리서치 리포트⁠」 인공지능 리포트를 만들어 증권사에 파는 회사라고⁠, 인곤이 짧게 덧붙였다⁠. 인곤이 화면에 「⁠모아린화장품⁠」을 치자 글자가 빗물처럼 내려오기 시작했다⁠. 매출⁠, 영업이익⁠, 대리점⁠, 해외⁠. 표가 그려지고 그래프가 그려졌다⁠. 인곤은 손목시계를 보았다⁠.

“⁠삼 분⁠.⁠”

화면에 열두 쪽짜리 보고서가 완성되어 있었다⁠. 소정은 태블릿을 끌어당겨 넘겨 보았다⁠. 문장은 매끄러웠다⁠. 표는 깨끗했다⁠. 각주는 하나도 없었다⁠.

“⁠자네들이 일주일 걸려 쓰는 걸 삼 분에 써⁠. 사람 하나 연봉이면 이걸 한 해 내내 돌려⁠. 리서치센터가 한 해 사십억을 까먹는 건 알지⁠? 미국 큰 은행들도 다 이렇게 가⁠. 우리만 안 가면 우리만 늦어⁠.⁠”

“⁠각주가 없네요⁠.⁠”

“⁠그러니까 부른 거야⁠.⁠”

인곤이 소정을 보았다⁠. 엘리베이터에서 분재를 보던 눈과 같은 눈이었다⁠.

“⁠이건 아직 각주를 못 봐⁠. 처남 각주 같은 거⁠. 그래서 가르쳐야 돼⁠. 자네 보고서 열세 해치⁠, 그리고 자네 노트⁠. 그거 브레인포지에 넣으면 이게 각주를 읽기 시작해⁠.⁠”

“⁠제 노트를요⁠.⁠”

“⁠회사 일 하면서 쓴 거니까 회사 자산이지⁠. 법무팀 의견도 그래⁠.⁠”

소정은 태블릿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화면이 꺼지지 않고 매끄러운 문장을 계속 비추고 있었다⁠.

“⁠휴직 중에 쓴 노트예요⁠. 애 재우고 밤에요⁠.⁠”

“⁠그럼 더 고맙지⁠. 휴직 중에도 회사 일을 했으니⁠.⁠”

인곤은 웃었다⁠. 웃음에 날이 없었다⁠. 날이 없어서 더 무서웠다⁠.

“⁠부사장님⁠, 제 노트는 제 눈이에요⁠. 눈은 못 드려요⁠.⁠”

“⁠눈은 늙어⁠, 표 팀장⁠. 나도 돋보기 쓰고 자네도 곧 써⁠. 이건 안 늙어⁠.⁠”

인곤이 태블릿을 집어 분재 옆에 세워 두었다⁠. 분재와 인공지능이 나란히 놓였다⁠. 인곤은 승겸을 돌아보았다⁠.

“⁠진 본부장은 알지⁠? 우리 약속⁠.⁠”

승겸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무릎 위에서 손을 맞잡았다⁠. 소정은 승겸의 손을 보지 않으려고 했는데 보았다⁠. 손가락 마디가 하얬다⁠.

*

엘리베이터 홀에서 소정은 단추를 누르지 않고 비상계단 문을 밀었다⁠. 승겸이 따라 나왔다⁠.

“⁠엘리베이터 타시죠⁠. 일곱 층입니다⁠.⁠”

“⁠엘리베이터에서 윗사람 만나면 하루가 길어져요⁠. 제가 솔미한테 가르친 거예요⁠.⁠”

35층에서 34층까지는 화가 나서 빨리 내려갔다⁠. 33층에서 숨이 찼고⁠, 32층 계단참에서 소정은 난간을 붙잡고 멈췄다⁠. 무릎이 시큰했다⁠. 승겸이 두 칸 위에서 멈췄다⁠.

“⁠괜찮으십니까⁠?⁠”

“⁠영포티 무릎이에요⁠. 신경 쓰지 마세요⁠.⁠”

“⁠영포티는 계단을 일곱 층씩 내려가지 않습니다⁠.⁠”

“⁠올드포티는요⁠?⁠”

“⁠올드포티는 엘리베이터를 탑니다⁠.⁠”

소정은 웃지 않으려다 웃었다⁠. 웃고 나서 고개를 들었다⁠.

“⁠약속이 뭐예요⁠?⁠”

승겸이 한 칸 내려왔다⁠. 계단참의 형광등이 안경알 위에서 하얗게 번졌다⁠.

“⁠아직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아직은요⁠.⁠”

“⁠아직은요⁠.⁠”

“⁠본부장님은 저를 의심한다면서요⁠. 그럼 지금 본인 의심해 보세요⁠. 제가 그 약속 들으면 어떤 얼굴을 할지⁠.⁠”

승겸이 마지막 한 칸을 내려왔다⁠. 둘 사이에 계단 난간 하나만 남았다⁠. 난간은 차가웠고 소정의 손바닥이 난간 위에 있었다⁠. 승겸의 손이 소정의 손등을 덮었다⁠. 손이 뜨거웠다⁠. 일곱 층을 걸은 사람은 소정인데 숨은 승겸이 더 가빴다⁠.

“⁠지금 제일 의심하는 건⁠, 이거입니다⁠.⁠”

승겸이 고개를 숙였다⁠. 안경이 먼저 소정의 이마에 닿았다⁠. 차가운 테가 닿고 나서 뜨거운 입술이 닿았다⁠. 소정은 눈을 감지 않았다⁠. 감기 전에 승겸의 안경알이 두 사람의 숨으로 뿌옇게 흐려지는 것을 보았다⁠. 소정이 손을 뻗어 안경을 벗겨 냈다⁠. 안경다리가 손가락 사이에서 따뜻했다⁠. 승겸의 입술이 소정의 입술 위에서 한 번 멈췄다가⁠, 멈춘 것을 후회하듯 더 깊이 내려왔다⁠. 소정의 등이 계단참 벽에 닿았다⁠. 콘크리트 벽은 차가웠고 앞은 뜨거웠다⁠. 31층 어디선가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계단을 타고 올라왔다⁠. 둘 다 숨을 멈췄고⁠, 아무도 올라오지 않았다⁠.

소정이 먼저 이마를 뗐다⁠.

“⁠이거 제 자리 돌려주는 거랑은 상관없는 거죠⁠?⁠”

“⁠상관없습니다⁠.⁠”

“⁠확실해요⁠?⁠”

“⁠그것도 의심하고 있습니다⁠.⁠”

소정은 안경을 승겸의 손에 쥐여 주었다⁠. 승겸은 안경을 쓰지 않고 한참 손에 들고 있었다⁠.

*

28층 비상구 문을 여는데 안에서 누가 먼저 문을 당겼다⁠. 두찬이었다⁠. 손에 기저귀 가방처럼 생긴 노트북 가방을 들고 있었다⁠.

“⁠어⁠, 팀장님⁠. 본부장님⁠. 계단으로 오셨어요⁠? 35층에서⁠?⁠”

“⁠운동이요⁠.⁠”

두 사람이 동시에 말했다⁠. 두찬은 둘을 번갈아 보더니 아무것도 묻지 않고 두 사람의 등을 차례로 두 번씩 토닥였다⁠.

“⁠고생하셨어요⁠. 계단 일곱 층이면 쌍둥이 둘 안고 오르는 거랑 비슷해요⁠.⁠”

승겸은 등을 토닥임 받은 채 안경을 썼다⁠. 귀 끝이 성수 매장에서처럼 빨갰다⁠.

센터장실 문이 열려 있었다⁠. 해옥이 소정을 손짓으로 불렀다⁠. 책상 위의 견과류 봉지가 뜯기지도 않은 채였다⁠.

“⁠35층 다녀왔다며⁠. 브레인포지 봤지⁠?⁠”

“⁠삼 분이요⁠.⁠”

“⁠나는 12월에 봤어⁠. 그때는 이 분 오십 초였다⁠.⁠”

해옥은 측정기를 들여다보지 않았다⁠. 숫자를 보지 않는 해옥을 소정은 처음 보았다⁠.

“⁠그때 나는 안심했어⁠. 각주가 하나도 없어서⁠. 저건 우리 일을 못 한다⁠, 그렇게 생각했지⁠. 근데 오늘 위에서 전화가 왔어⁠. 각주를 가르치겠다고⁠. 누구 노트로 가르칠 건지도 말하더라⁠.⁠”

“⁠거절했어요⁠.⁠”

“⁠알아⁠. 그래서 내일 아침에 너 혼자 부를 거야⁠. 거절한 사람은 혼자 부르는 게 그 양반 방식이야⁠.⁠”

해옥은 봉지를 뜯어 호두 두 알을 꺼내 소정의 손바닥에 올렸다⁠.

“⁠먹어⁠. 머리에 좋대⁠. 나는 맛없어서 못 먹겠다⁠.⁠”

소정은 호두를 쥐고 센터장실을 나왔다⁠. 손바닥 안에서 호두 두 알이 서로 부딪쳐 딱딱 소리를 냈다⁠.

*

밤 아홉 시⁠, 라윤은 식탁에서 받아쓰기 숙제를 했다⁠. 학교에서 쓰는 받아쓰기 앱이 라윤의 글씨를 사진으로 찍어 채점했다⁠. 「⁠인식할 수 없는 글자가 있습니다⁠」 라윤이 연필을 내려놓고 투덜거렸다⁠.

“⁠인공지능은 내 글씨 못 읽어⁠. 그래서 결국 선생님이 읽어⁠.⁠”

“⁠선생님은 읽어⁠?⁠”

“⁠응⁠. 선생님은 내가 ‘⁠ㄹ⁠’을 꼬불꼬불 쓰는 거 알아⁠.⁠”

소정은 라윤의 공책을 보았다⁠. ‘⁠ㄹ⁠’이 꼬불꼬불했다⁠. 소정이 각주를 읽는 것과 같은 눈으로⁠, 담임 선생님은 라윤의 ‘⁠ㄹ⁠’을 읽었다⁠.

“⁠엄마 글씨도 인공지능이 못 읽어⁠?⁠”

“⁠엄마 글씨는 오른쪽으로 눕는대⁠.⁠”

“⁠누가 그래⁠?⁠”

“⁠엄마 회사 안경 아저씨가⁠.⁠”

라윤이 연필 끝을 입에 물고 소정을 올려다보았다⁠.

“⁠그 아저씨는 엄마 글씨를 읽어⁠?⁠”

“⁠일 년 동안 읽었대⁠.⁠”

“⁠그럼 선생님이네⁠.⁠”

라윤은 혼자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받아쓰기로 돌아갔다⁠. 다음 낱말은 ‘⁠선생님⁠’이었고⁠, 라윤은 받침 ‘⁠ㅁ⁠’을 일부러 크고 반듯하게 썼다⁠. 소정은 식탁 끝에 놓인 노트 파일을 보았다⁠. 오른쪽으로 누운 글씨들이 파일 등 사이로 비죽 나와 있었다⁠.

라윤을 재우고 나서 휴대전화가 울렸다⁠. 저장되지 않은 번호였다⁠.

「⁠내일 아침 여덟 시⁠, 부사장실로 오십시오⁠. 혼자 오십시오⁠. 출입 권한은 열어 두겠습니다⁠. — 경영지원 부사장실⁠」

소정은 문자를 두 번 읽었다⁠. 혼자⁠, 라는 낱말에서 눈이 멈췄다⁠. 입술에는 아직 계단참의 온기가 남아 있었고⁠, 손바닥에는 난간의 냉기가 남아 있었다⁠. 소정은 승겸에게 메시지를 쓰다가 지웠다⁠. 지운 자리에 아무것도 쓰지 않고⁠, 알람을 여섯 시로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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