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5,338자)

공동 이름

복직했더니 내 자리에 연하 본부장 · 여시결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 직전에 손 하나가 문틈으로 들어왔다⁠. 손에는 작은 화분이 들려 있었다⁠. 손바닥만 한 소나무 분재였다⁠. 화분을 든 남자가 엘리베이터에 오르며 분재에게 먼저 말했다⁠.

“⁠흔들리지 마라⁠. 금방 간다⁠.⁠”

쉰 후반의 남자는 회색 머리를 짧게 깎았고⁠, 코트 깃에 회사 배지를 달았다⁠. 35층 단추가 눌렸다⁠. 소정은 28층 단추 옆으로 비켜 붙었다⁠. 남자가 소정의 남색 줄과 사원증을 내려다보았다⁠.

“⁠리서치센터⁠?⁠”

“⁠네⁠.⁠”

“⁠요즘 리서치가 비싸지⁠. 비싼 건 좋은 건데⁠, 좋은 게 다 남는 건 아니야⁠.⁠”

남자는 다시 분재를 보았다⁠. 28층에서 문이 열렸다⁠. 소정이 내리는데 남자가 분재에게 하는 말이 등 뒤로 따라왔다⁠.

“⁠너도 가지 하나 칠 때 됐다⁠.⁠”

문이 닫혔다⁠. 소정은 사원증 화면 속 얼굴을 떠올렸다⁠. 사내 게시판의 임원 소개 사진에서 본 얼굴이었다⁠. 경영지원 부사장 편인곤⁠.

*

“⁠팀장님⁠, 이거 보세요⁠.⁠”

기둥 앞에서 두찬이 모니터를 소정 쪽으로 돌렸다⁠. 두찬은 앉은 채 의자를 앞뒤로 흔들고 있었다⁠. 쌍둥이를 재우던 박자라고 했다⁠. 흔들면서 생각해야 머리가 돈다고 했다⁠. 모니터에는 승겸 본부가 고객에게 낸 보고서의 조회 기록이 운용사 이름별로 떠 있었다⁠. 고객 화면에 공개되는 기록이라 두찬이 하나하나 옮겨 적은 것이었다⁠.

“⁠조회가 많이 는 운용사가 여섯 곳이에요⁠. 근데 여섯 곳 다 표 팀장님 옛 고객이에요⁠. 석계환 운용역 회사까지⁠.⁠”

“⁠그래서요⁠?⁠”

“⁠그래서 본부 숫자 두 배 중에 절반 넘게가 팀장님 이름 보고 들어온 사람들일 수도 있어요⁠. 수수료 자료가 있으면 확실한데⁠, 그건 본부장님만 봐요⁠.⁠”

“⁠일 년 동안 제 이름은 보고서 어디에도 없었는데요⁠.⁠”

“⁠각주 세 번째요⁠. 「⁠소비재팀 내부 자료⁠」 운용사 분들은 그게 팀장님인 거 알아요⁠.⁠”

두찬은 의자를 흔들며 콧노래를 불렀다⁠. 자장가였다⁠. 소정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석계환 운용역이었다⁠. 영상통화였다⁠.

“⁠표 수석⁠, 아니지⁠, 표 팀장⁠. 진 본부장도 옆에 있어⁠?⁠”

“⁠유리방에 있어요⁠.⁠”

“⁠불러⁠. 둘한테 같이 할 말이 있어⁠.⁠”

*

유리방 화면에 석계환의 빨간 넥타이가 떴다⁠. 오늘은 수요일이었다⁠. 넥타이 빛깔은 콜 내용만큼이나 이례적이었다⁠.

“⁠2월 15일에 우리 펀드 한 해 전략 회의가 있어⁠. 소비재 큰 그림을 하나 받고 싶은데⁠, 둘이 같이 써⁠.⁠”

승겸과 소정이 동시에 화면에서 고개를 돌려 서로를 보았다⁠.

“⁠반대로 보는 사람 둘이 쓴 보고서가 제일 믿을 만하거든⁠. 하나가 쓰면 확신이고⁠, 둘이 쓰면 검산이야⁠. 둘이 끝까지 안 맞으면 안 맞는 대로 써 와⁠.⁠”

“⁠소비재는 지금 구솔미 팀장이 맡고 있습니다⁠.⁠”

승겸이 정중하게 말했다⁠. 석계환이 박하사탕 봉지를 뜯었다⁠.

“⁠구 팀장 좋지⁠. 근데 나는 각주랑 제조번호가 싸우는 걸 보고 싶어⁠. 사탕 세 개짜리로⁠.⁠”

화면이 꺼지자마자 유리문이 열렸다⁠. 솔미였다⁠. 유리방은 방음이 안 되는 방이었다⁠.

“⁠본부장님⁠, 소비재는 제 팀 일이에요⁠.⁠”

“⁠알고 있습니다⁠.⁠”

“⁠제 팀이 빠지고 선배랑 본부장님이 쓰면⁠, 고객들은 소비재팀을 뭐로 봐요⁠?⁠”

“⁠구 팀장 팀 자료는 전부 씁니다⁠. 출처도 밝힙니다⁠.⁠”

솔미가 소정을 보았다⁠. 소정은 솔미의 눈에서 일 년 전 자기 눈을 보았다⁠. 각주 세 번째에 이름 없이 들어간 사람의 눈이었다⁠.

“⁠솔미야⁠. 네 팀 숫자⁠, 표지에 넣자⁠.⁠”

“⁠선배가 넣어 주는 거 싫어요⁠.⁠”

솔미는 문을 세게 닫지 않았다⁠. 세게 닫지 않으려고 손잡이를 끝까지 잡고 있다가 놓았다⁠. 그게 더 크게 들렸다⁠.

*

토요일 아침⁠, 엄마가 독감으로 드러누웠다⁠. 열이 39도까지 올랐다고 했다⁠. 소정은 라윤의 손을 잡고 텅 빈 28층에 들어갔다⁠. 라윤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코를 킁킁거렸다⁠.

“⁠엄마 회사 냄새 난다⁠. 종이 냄새⁠.⁠”

“⁠가만히 숙제하고 있을 수 있지⁠?⁠”

“⁠응⁠. 근데 저 아저씨는 누구야⁠?⁠”

유리방에 승겸이 있었다⁠. 주말이라 정장 대신 짙은 남색 니트를 입었지만 안경은 그대로였다⁠. 승겸은 라윤을 보고 일어나다 멈칫했다⁠. 아이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의 자세였다⁠. 라윤이 소정의 손을 놓고 유리방 앞까지 걸어갔다⁠.

“⁠아저씨가 엄마 자리 가져간 사람이에요⁠?⁠”

소정이 라윤을 부르기 전에 승겸이 대답했다⁠. 무릎을 굽혀 라윤과 눈높이를 맞추고⁠, 안경을 한 번 밀어 올렸다⁠.

“⁠네⁠. 제가 가져갔습니다⁠.⁠”

“⁠돌려줘요⁠.⁠”

“⁠그게⁠, 어려운데요⁠.⁠”

라윤은 잠깐 생각했다⁠.

“⁠어려우면 반만 돌려줘요⁠. 나도 키즈카페에서 아기들이랑 과자 반 나눠 먹었어요⁠.⁠”

승겸은 대답하지 못했다⁠. 소정도 대답하지 못했다⁠. 라윤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유리방 화이트보드로 가서 보드 마커를 집었다⁠. 승겸이 고개를 끄덕여 허락했다⁠. 라윤은 창가에 단발머리 사람 하나를 그리고⁠, 기둥 옆에 안경 쓴 사람 하나를 그렸다⁠. 그리고 둘 사이에 줄을 하나 긋고 「⁠반⁠」이라고 썼다⁠. 받침이 거꾸로 붙어 있었다⁠.

오후 세 시⁠, 라윤은 의자 두 개를 붙여 놓고 소정의 트렌치코트를 덮고 잠들었다⁠. 승겸이 유리방에서 나와 라윤 머리 위의 형광등 줄 스위치를 껐다⁠. 끄고 나서 블라인드를 반쯤 내렸다⁠. 겨울 햇빛이 라윤의 발끝까지만 들어왔다⁠.

“⁠동생 있어요⁠?⁠”

“⁠없어요⁠. 과자 나눈 아기들은 키즈카페에서 만난 쌍둥이예요⁠. 두찬 씨네⁠.⁠”

“⁠곽 선임님 쌍둥이를 만났습니까⁠?⁠”

“⁠볼풀에서요⁠. 공을 바닥에 굴리는 법을 가르쳐 줬대요⁠.⁠”

승겸이 웃음을 참느라 입술을 눌렀다⁠. 화이트보드의 「⁠반⁠」 글씨를 지우지 않고 남겨 두었다⁠.

저녁에 마포 집에 들르자 엄마는 이마에 물수건을 얹고 누워 있었다⁠. 열 때문에 목소리가 갈라졌는데도 말은 줄지 않았다⁠. 라윤이 할머니 귀에 대고 뭔가 속삭이자 엄마가 물수건을 들추고 소정을 보았다⁠.

“⁠안경 총각이 라윤이 재웠다며⁠? 불도 꺼 주고⁠?⁠”

“⁠엄마⁠, 열 있어⁠. 누워⁠.⁠”

“⁠열은 있어도 귀는 있다⁠. 서른넷이라고⁠? 너보다 일곱 살 어리네⁠. 요즘은 그런 것도 흉 아니라더라⁠. 테레비에서 그러더라⁠.⁠”

“⁠엄마⁠, 그 사람 내 자리 가져간 사람이야⁠.⁠”

“⁠가져간 사람이 애 재우는 거 봤어⁠? 나는 칠십 평생 못 봤다⁠.⁠”

엄마는 다시 물수건을 덮었다⁠. 덮은 물수건 밑에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라윤은 할머니 이마의 물수건을 뒤집어 차가운 면이 닿게 해 주었다⁠. 소정은 부엌에서 죽을 데웠다⁠. 냄비 바닥이 눌어붙는 소리를 들으며 소정은 블라인드를 반쯤 내리던 승겸의 손을 떠올렸다⁠. 손가락이 길었고⁠, 끈을 당기는 속도가 조심스러웠다⁠. 죽이 넘쳤다⁠.

*

일요일부터 목요일까지 두 사람은 밤마다 창가 회의실에서 싸웠다⁠. 화이트보드 하나를 반으로 나눠 왼쪽에는 승겸이⁠, 오른쪽에는 소정이 썼다⁠. 승겸은 화장품의 봄을 썼다⁠. 재고를 털고 나면 해외 신상이 돈다⁠. 소정은 혼자 살면서도 가족처럼 묶여 사는 1⁠.5가구의 장바구니를 썼다⁠. 작은 용량⁠, 자주 사는 식품⁠, 기분을 바꾸려고 사는 물건들⁠. 둘의 글씨가 화이트보드 가운데에서 부딪쳤다⁠.

“⁠표 팀장님 그림은 예쁜데 숫자가 작습니다⁠.⁠”

“⁠본부장님 그림은 숫자가 큰데 사람이 없어요⁠.⁠”

“⁠사람은 숫자로 잡힙니다⁠.⁠”

“⁠숫자는 사람이 만들어요⁠. 스티커 세 겹 붙인 사람이요⁠.⁠”

화요일 밤 열한 시에는 두찬이 떡볶이 두 그릇을 들고 회의실 문을 열었다⁠. 귀가 시간이 지난 두찬은 아내와 영상통화를 켜 둔 채였다⁠. 휴대전화 화면 속에서 쌍둥이 둘이 동시에 울고 있었다⁠.

“⁠두찬 씨⁠, 집에 가요⁠.⁠”

“⁠가요⁠, 가요⁠. 이것만 놓고요⁠. 여보⁠, 이분들이 그 두 분이야⁠. 반대로 보는 두 분⁠.⁠”

화면 속 두찬의 아내가 쌍둥이 하나를 안은 채 고개를 숙였다⁠. 승겸이 얼떨결에 화면에 대고 허리를 굽혔다⁠. 두찬은 떡볶이를 화이트보드 가운데⁠, 두 사람의 글씨가 부딪친 자리 밑에 내려놓고 나갔다⁠. 나가면서 승겸의 등을 두 번 토닥였다⁠. 승겸은 굳은 채 토닥임을 받았다⁠.

수요일 새벽 한 시에는 소정의 메일함에 파일 하나가 들어왔다⁠. 「⁠소비재팀_2026_매장데이터⁠」 일 년 동안 소비재팀이 서울과 경기의 매장 쉰 곳을 돌며 모은 숫자였다⁠. 보낸 사람은 구솔미였고⁠, 본문은 두 줄이었다⁠.

「⁠표지에 소비재팀 말고 제 이름으로 넣어 주세요⁠. 선배가 넣어 주는 거 말고⁠, 제가 쓴 거라서요⁠.⁠」

소정은 파일을 열었다⁠. 매장마다 날짜와 시각과 날씨까지 적혀 있었다⁠. 비 오는 날 매장 숫자에는 따로 파란 표시가 붙어 있었다⁠. 소정이 신입 솔미에게 가르친 적 없는 표시였다⁠. 솔미가 혼자 만든 버릇이었다⁠. 소정은 승겸에게 메일을 넘기며 한 줄을 붙였다⁠. 「⁠표지에 이름 하나 더⁠.⁠」

목요일 밤 열두 시 사십 분⁠, 창밖에 눈이 내렸다⁠. 여의도의 빌딩 불빛이 눈발 사이로 흐려졌다⁠. 승겸이 안경을 벗어 탁자에 내려놓았다⁠. 안경 없는 얼굴을 소정은 처음 보았다⁠. 눈 밑이 생각보다 어렸다⁠.

“⁠면접 때 물어보신 거 기억하십니까⁠?⁠”

소정의 손에서 보드 마커가 멈췄다⁠.

“⁠숫자가 틀렸을 때 제일 먼저 누구를 의심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저는 저를 의심한다고 했고요⁠. 다른 면접관들은 제 경력을 물었는데⁠, 표 팀장님만 그걸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이 사람 뽑자고 하셨다고⁠, 나중에 센터장님께 들었습니다⁠.⁠”

“⁠알고 계셨어요⁠?⁠”

“⁠처음부터요⁠. 그래서 노트를 매일 읽었습니다⁠. 저를 뽑은 사람이 무엇을 보는지 알고 싶어서⁠.⁠”

“⁠그런데 제 자리에 앉으셨네요⁠.⁠”

“⁠앉았습니다⁠.⁠”

승겸은 피하지 않았다⁠. 소정은 탁자 위의 안경을 보았다⁠. 가는 검은 테가 형광등 빛을 가늘게 되쏘았다⁠. 소정의 목소리가 생각보다 낮게 나왔다⁠.

“⁠저를 의심한다는 사람은 처음이었어요⁠. 거짓말인 줄 알았어요⁠.⁠”

“⁠거짓말 아니었습니다⁠. 지금도 의심합니다⁠. 제가 틀렸을까 봐⁠.⁠”

승겸이 한 걸음 다가왔다⁠. 화이트보드 가운데에서 부딪친 두 사람의 글씨 앞이었다⁠. 소정은 물러서지 않았다⁠. 승겸의 숨에서 식은 커피 냄새가 났다⁠. 눈발이 창에 부딪혀 녹는 소리가 들릴 만큼 회의실이 조용했다⁠. 승겸의 손가락이 소정의 귀 뒤로 넘긴 머리카락 끝에 닿을 듯 말 듯 멈췄다⁠.

「⁠청소를 시작합니다⁠.⁠」

회의실 문 아래로 청소 로봇이 밀고 들어왔다⁠. 로봇은 의자 다리에 한 번⁠, 승겸의 구두에 한 번 부딪치고 나서 방향을 틀었다⁠. 「⁠장애물이 있습니다⁠. 다른 길로 가겠습니다⁠.⁠」

소정이 먼저 웃음을 터뜨렸다⁠. 승겸은 안경을 집어 쓰고⁠, 쓰고 나서도 한참 로봇을 노려보았다⁠. 로봇은 화이트보드 밑을 지나 유유히 복도로 나갔다⁠.

승겸이 노트북을 끌어당겨 표지 파일을 열었다⁠. 「⁠2027 소비재 — 화장품의 봄과 1⁠.5가구의 장바구니⁠」 제목 아래에 저자 이름을 치는 손가락이 잠깐 멈췄다가 움직였다⁠.

「⁠표소정 · 진승겸 · 구솔미⁠」

“⁠가나다순이면 구 팀장이 제일 먼저고⁠, 제가 그다음인데요⁠.⁠”

승겸이 말했다⁠. 소정이 화면을 보았다⁠. ‘⁠구⁠’가 ‘⁠진⁠’보다⁠, ‘⁠진⁠’이 ‘⁠표⁠’보다 앞이었다⁠.

“⁠그런데 왜 제가 먼저예요⁠?⁠”

“⁠가나다순이 아니어서요⁠.⁠”

승겸은 저장 단추를 눌렀다⁠. 화면 구석에서 파일 이름이 바뀌었다⁠. 창밖의 눈발이 굵어졌다⁠.

5화는 어땠나요?

댓글 0

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