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5,396자)

넷

복직했더니 내 자리에 연하 본부장 · 여시결

종이는 반으로 찢어졌다⁠. 승겸의 손에는 「⁠경영지원부문 — 대외비⁠」라고 찍힌 위쪽이⁠, 소정의 손에는 이름 넷과 비고란이 적힌 아래쪽이 남았다⁠. 찢어지는 소리는 짧았는데 둘 다 한참 동안 손을 내리지 못했다⁠. 복합기가 다음 출력물을 기다리며 웅웅거렸다⁠.

“⁠다음 주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승겸은 위쪽 반을 접어 안주머니에 넣고 유리방으로 돌아갔다⁠. 다음 주는 오지 않았다⁠. 승겸은 다음 날부터 일주일 내내 아침 회의에 들어왔다가 회의가 끝나기 무섭게 외근을 나갔고⁠, 메신저 상태는 「⁠회의 중⁠」에서 바뀌지 않았다⁠.

소정은 찢어진 반쪽을 책상 유리 밑에 끼웠다⁠. 이름 넷이 유리 아래에서 소정을 올려다보았다⁠. 표소정⁠, 곽두찬⁠, 채권팀 차장⁠, 퀀트팀 연구원⁠.

채권팀 차장에게는 화요일 밤에 전화했다⁠. 출산휴가 중이라 5월에 돌아올 사람이었다⁠. 통화 너머로 신생아의 울음이 일 분 간격으로 끊겼다 이어졌다⁠.

“⁠표 팀장님⁠, 저 지금 세 시간째 못 잤어요⁠. 자리요⁠? 저는 돌아갈 자리가 있는 줄 알았는데요⁠.⁠”

“⁠있는 줄 알았던 건 저도 마찬가지예요⁠.⁠”

“⁠지금은 못 싸워요⁠. 얘가 백일은 돼야 사람이 될 것 같아요⁠. 죄송해요⁠.⁠”

차장은 사과하고 끊었다⁠. 사과할 사람이 아니었다⁠.

퀀트팀 연구원은 수요일에 메시지로 답했다⁠. 「⁠선배님⁠, 저 다음 달에 핀테크로 옮겨요⁠. 어차피 자리 없을 거 알았어요⁠. 선배님은 꼭 이기세요⁠.⁠」 메시지 끝에 응원하는 고양이 이모티콘이 달려 있었다⁠.

넷 가운데 둘이 빠졌다⁠. 소정은 유리 밑의 두 번째 이름을 손톱으로 두드렸다⁠. 곽두찬⁠, 반도체⁠. 2월 1일 복귀⁠.

*

토요일 오후⁠, 목동의 키즈카페는 귀가 먹먹할 만큼 시끄러웠다⁠. 볼풀에서 공이 튀고⁠, 미끄럼틀 끝에서 누군가 울고⁠, 스피커에서는 상어 가족 노래가 세 번째 돌았다⁠. 소정은 라윤의 손을 잡고 들어갔다⁠. 라윤은 여덟 살이라 키즈카페가 시시하다고 했지만⁠, 입구의 트램펄린을 보자마자 소정의 손을 놓았다⁠.

곽두찬은 볼풀 옆 낮은 의자에 무릎을 세우고 앉아 있었다⁠. 서른여덟 살⁠, 반도체를 열 해 넘게 본 연구원이었다⁠. 왼쪽 어깨에는 트림 수건이 걸쳐 있었고⁠, 양 무릎에는 두 살배기 쌍둥이가 한 명씩 매달려 있었다⁠. 소정을 보자 일어나려다 쌍둥이 둘의 무게에 다시 주저앉았다⁠.

“⁠표 팀장님⁠. 여기까지 오셨어요⁠?⁠”

“⁠두찬 씨 집이 여기라며요⁠.⁠”

“⁠집은 맞는데 저는 여기 살아요⁠. 일 년째요⁠.⁠”

쌍둥이 하나가 소정의 코트 단추를 잡아당겼다⁠. 두찬이 아이의 손가락을 하나씩 떼어 내며 말했다⁠.

“⁠얘가 첫째고⁠, 저기 공 먹으려는 게 둘째예요⁠. 아니⁠, 그거 먹는 거 아니야⁠. 퉤 해⁠.⁠”

두찬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화면을 본 두찬의 얼굴이 굳었다⁠. 「⁠장인어른 영상통화⁠」 두찬은 쌍둥이 둘을 소정의 무릎에 하나씩 내려놓고 휴대전화를 들고 벽 쪽으로 붙었다⁠. 화면 배경을 사무실 사진으로 바꾸는 손놀림이 빨랐다⁠.

“⁠아⁠, 아버님⁠. 네⁠, 지금 회사입니다⁠. 회의 중이라서요⁠. 네⁠, 반도체 요즘 좋습니다⁠.⁠”

등 뒤에서 상어 가족이 뚜루루뚜루 울렸다⁠. 소정의 무릎 위에서 둘째가 상어 가족을 따라 소리를 질렀다⁠. 두찬은 휴대전화 마이크를 손바닥으로 막고 소정을 돌아보며 입 모양으로 말했다⁠. 제발요⁠.

소정은 둘째를 안고 화장실 쪽으로 걸어갔다⁠. 화장실 문이 닫히기 전⁠, 두찬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아버님⁠. 이건 옆 팀 회식 동영상이요⁠.⁠”

통화를 끊은 두찬은 볼풀 옆에 다시 앉아 이마를 짚었다⁠.

“⁠아내 연봉이 저보다 많아요⁠. 그래서 제가 휴직했는데⁠, 장인어른은 아직 그런 거 이해 못 하세요⁠. 일 년째 재택근무라고 했어요⁠.⁠”

“⁠작년에 육아휴직 받은 남자가 육만칠천 명이래요⁠.⁠”

“⁠알아요⁠. 전체의 36⁠.5퍼센트⁠. 저도 그 기사 장인어른한테 보내 드렸어요⁠. 답장이 「⁠요즘 젊은 것들⁠」이었어요⁠.⁠”

소정은 웃었다⁠. 웃다가 가방에서 찢어진 반쪽을 꺼냈다⁠. 두찬은 트림 수건으로 손을 닦고 종이를 받았다⁠. 두 번째 줄에서 손이 멈췄다⁠.

“⁠보직 재검토요⁠?⁠”

“⁠2월 1일에 돌아가면 두찬 씨 책상이 없을 수도 있어요⁠.⁠”

“⁠저는요⁠, 팀장님⁠. 싸우고 싶지 않아요⁠. 한 번 찍히면 끝이에요⁠. 원래 책상으로만 돌아가면 돼요⁠. 연봉 그대로⁠, 반도체 그대로⁠.⁠”

“⁠원래 책상이 없어지면요⁠?⁠”

두찬이 대답하기 전에 공 하나가 날아와 두찬의 이마를 맞혔다⁠. 첫째가 볼풀 한가운데에서 손뼉을 쳤다⁠. 라윤이 볼풀로 뛰어들어 첫째를 안아 올렸다⁠.

“⁠아기야⁠, 사람 얼굴에 던지면 안 돼⁠. 이렇게 바닥에 굴려⁠.⁠”

첫째는 라윤을 따라 공을 굴렸다⁠. 라윤은 언니처럼 아기의 패딩 지퍼를 올려 주고 소정을 돌아보았다⁠.

“⁠엄마⁠, 엄마 회사 사람들은 다 아기가 있어⁠?⁠”

“⁠이 아저씨는 있어⁠.⁠”

“⁠그럼 아기 있는 사람만 자리가 없어져⁠?⁠”

키즈카페의 소음이 한순간 멀어졌다⁠. 두찬은 종이를 접어 소정에게 돌려주지 않고⁠, 자기 가슴 주머니에 넣었다⁠.

*

월요일 아침 회의가 끝나고 소정은 센터장실 문을 두드리지 않고 열었다⁠. 해옥은 창가에 서서 혈당 측정기에 휴대전화를 대고 있었다⁠. 책상에 견과류 봉지와 이사회 일정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소정은 찢어진 반쪽을 해옥의 책상에 내려놓았다⁠.

“⁠이거⁠, 아셨어요⁠?⁠”

해옥은 종이를 보지 않고 휴대전화 화면을 보았다⁠.

“⁠백팔십⁠. 문 열고 들어오는 소리만 듣고 올랐다⁠.⁠”

“⁠센터장님⁠.⁠”

“⁠알았어⁠. 앉아⁠.⁠”

해옥은 의자에 앉아 아몬드 하나를 입에 넣었다⁠. 오래 씹었다⁠.

“⁠3월 이사회에 개편안이 올라가⁠. 리서치센터 마흔한 명에서 스물을 내보내는 안이야⁠. 내보낸 자리는 인공지능 리포트 회사랑 계약해서 채우고⁠. 위에서는 센터가 한 해 사십억씩 까먹는다고 보고⁠, 틀린 말도 아니야⁠.⁠”

“⁠스물이요⁠?⁠”

“⁠승겸이가 본부 숫자를 두 배로 만들면 열여섯까지 줄일 수 있어⁠. 그게 작년 3월에 승겸이가 받은 조건이야⁠. 숫자를 내면 덜 자른다⁠.⁠”

“⁠그럼 넷은요⁠?⁠”

해옥은 아몬드를 하나 더 집었다가 도로 봉지에 넣었다⁠.

“⁠넷을 먼저 빼면 스물이 열여섯이 돼⁠. 휴직자 자리는 사람이 앉아 있지 않으니까⁠, 빼도 아무도 안 울어⁠. 그게 위의 계산이야⁠.⁠”

“⁠센터장님 계산은요⁠?⁠”

“⁠나는 마흔한 명을 다 지키고 싶어⁠. 근데 못 지켜⁠. 그러면 남은 사람이라도 지켜야지⁠. 소정아⁠, 나는 쉰넷이야⁠. 정년까지 여섯 해 남았어⁠. 여기서 내가 판 엎으면 나도 나가고 센터는 승겸이 혼자 남아⁠. 그러면 스물이 아니라 서른이야⁠.⁠”

소정은 해옥의 왼팔을 보았다⁠. 측정기 테두리의 의료용 테이프가 들떠 있었다⁠. 일 년 전에는 없던 물건이었다⁠.

“⁠센터장님이 저한테 처음 가르친 게 그거였어요⁠. 사람 숫자는 빼기로 하지 말라고⁠. 빼기로 시작하면 끝까지 빼기라고⁠.⁠”

“⁠그러니까 너한테 하는 말이야⁠.⁠”

해옥이 일정표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정기 이사회 — 3월 24일(⁠수⁠)⁠」

“⁠승겸이 숫자보다 큰 걸 가져와⁠. 이사회 전까지⁠. 센터가 사람으로 돈을 번다는 걸⁠, 위에서 못 반박할 숫자로⁠. 그럼 내가 들고 올라간다⁠. 그거 못 가져오면 나는 위에서 내려온 대로 간다⁠.⁠”

“⁠약속하신 거예요⁠.⁠”

“⁠약속했다⁠. 나가⁠. 혈당 이백 넘기 전에⁠.⁠”

*

목요일 밤 아홉 시⁠, 소정은 지하 3층 주차장의 기둥 뒤에서 승겸을 기다렸다⁠. 일주일 동안 외근으로 도망 다닌 사람도 차는 회사에 두고 다녔다⁠. 승겸의 차는 생각보다 낡은 회색 소형차였다⁠. 뒷유리에 「⁠초보운전⁠」 스티커를 떼다 만 자국이 남아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승겸이 걸어 나왔다⁠. 소정을 보고 걸음이 반 박자 늦어졌지만 돌아서지는 않았다⁠.

“⁠다음 주에 말씀하신다면서요⁠. 다음 주가 두 번 지났어요⁠.⁠”

“⁠아직 드릴 말씀이 정리가 안 됐습니다⁠.⁠”

“⁠제가 정리해 드릴게요⁠. 넷을 먼저 빼면 스물이 열여섯이 된다⁠. 그 계산⁠, 본부장님 거예요⁠?⁠”

승겸이 차 열쇠를 쥔 손을 내렸다⁠. 주차장 형광등이 안경알에 두 줄로 비쳤다⁠.

“⁠제 계산은 아닙니다⁠. 제가 받아들인 계산입니다⁠.⁠”

“⁠차이가 뭔데요⁠?⁠”

“⁠받아들인 사람은 다시 계산할 수 있습니다⁠. 숫자가 바뀌면요⁠.⁠”

“⁠그럼 다시 해 보세요⁠. 제가 숫자를 바꿔 올게요⁠.⁠”

승겸은 대답 대신 차 문을 열었다⁠. 운전석에 앉기 전에 소정을 한 번 보았다⁠. 화가 난 얼굴도⁠, 미안한 얼굴도 아니었다⁠. 아주 어려운 각주를 처음 읽는 얼굴이었다⁠.

“⁠표 팀장님 숫자가 틀리면⁠, 이번에는 제가 각주까지 읽겠습니다⁠.⁠”

차가 빠져나갔다⁠. 소정은 빈 주차 자리에 남은 바퀴 자국을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출구 쪽으로 돌아 나가는 회색 차의 앞유리 너머⁠, 계기판 위에 반으로 접힌 종이가 보였다⁠. 모서리가 찢겨 있었다⁠. 일주일 동안 안주머니에서 계기판까지밖에 못 간 종이였다⁠.

*

2월 1일 월요일 아침 여섯 시 오십오 분⁠, 곽두찬은 짙은 회색 정장을 입고 28층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넥타이는 반듯했다⁠. 왼쪽 어깨에 트림 수건이 걸쳐 있었다⁠. 소정이 다가가 수건을 걷어 주자 두찬은 수건을 내려다보고 얼굴이 빨개졌다⁠.

“⁠집에서 나올 때부터 있었나 봐요⁠. 지하철에서 다들 쳐다보더라고요⁠.⁠”

반도체팀 창가 자리에는 승겸 본부의 연구보조원이 앉아 있었다⁠. 모니터 옆에 연구보조원의 가족사진과 작은 선인장이 놓여 있었다⁠. 두찬이 일 년 전에 두고 간 머그잔은 탕비실 분실물 상자에 들어 있었다⁠. 인사팀 대리가 달려왔다⁠.

“⁠곽 선임님⁠, 자리가 아직 정해지지 않아서요⁠. 오늘은 회의실에서⁠…⁠…⁠.⁠”

“⁠회의실이요⁠?⁠”

두찬은 서류 상자를 안고 복도 가운데 서 있었다⁠. 상자 위에 쌍둥이 사진이 담긴 액자가 엎어져 있었다⁠. 유리문이 열리고 승겸이 나왔다⁠. 일주일 만에 소정과 눈이 마주쳤다⁠.

“⁠곽 선임님⁠, 반도체는 지금 본부 연구보조원이 맡고 있습니다⁠. 3월 개편 전까지는 임시로 회의실에서 일하시고⁠…⁠…⁠.⁠”

“⁠특별분석팀으로 와요⁠, 두찬 씨⁠.⁠”

소정이 승겸의 말을 끊었다⁠. 두찬이 소정을 보고⁠, 승겸을 보고⁠, 상자 위의 액자를 보았다⁠.

“⁠특별분석팀 정원은 한 명입니다⁠, 표 팀장님⁠.⁠”

“⁠정원표 보여 주세요⁠.⁠”

승겸은 대답하지 못했다⁠. 정원표는 3월에 나오는 예산과 함께 나오는 물건이었다⁠. 3월 전에는 어디에도 없는 숫자였다⁠.

“⁠3월 전까지는 정원이 없죠⁠. 없으니까 둘이어도 되죠⁠?⁠”

승겸은 안경을 벗어 손수건으로 닦았다⁠. 한참을 닦고 나서 다시 쓰고는 인사팀 대리에게 말했다⁠.

“⁠의자 하나 더 갖다 드리세요⁠. 기둥 앞으로⁠.⁠”

두찬은 상자를 소정의 책상 옆에 내려놓았다⁠. 대리가 의자를 끌고 왔다⁠. 기둥 앞에 의자 둘이 나란히 놓였다⁠. 복합기가 아침 첫 출력을 뱉으며 두 사람의 등에 더운 바람을 뿜었다⁠. 두찬이 의자에 앉자마자 버릇처럼 소정의 등을 두 번 토닥였다⁠.

“⁠아⁠, 죄송해요⁠. 손이 자꾸 이래요⁠.⁠”

“⁠괜찮아요⁠. 트림은 안 나와요⁠.⁠”

두찬이 웃었다⁠. 소정은 유리 밑의 종이를 보았다⁠. 두 번째 이름 위에 볼펜으로 동그라미를 쳤다⁠. 빨간 펜이 아니라 파란 펜이었다⁠.

휴대전화가 떨었다⁠. 해옥의 메시지였다⁠.

「⁠3월 24일⁠. 승겸이 숫자보다 큰 거⁠. 잊지 마⁠.⁠」

소정은 답을 쓰지 않고 휴대전화를 뒤집었다⁠. 그리고 두찬에게 노트 파일을 밀어 주었다⁠.

“⁠두찬 씨⁠, 승겸 본부 숫자 두 배의 출처부터 봐요⁠. 고객 한 곳씩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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